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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치적 프로파간다로서 뵤도인(平等院)의 회화적 재현

        김정희 ( Jung Hui Kim ) 미술사와 시각문화학회 2019 미술사와 시각문화 Vol.23 No.-

        이 글은 11세기의 불교사찰인 우지(宇治)의 뵤도인(平等院)이 이후 회화에서 중요한 시각적 모티프로 등장하게 된 배경을 다루었다. 뵤도인을 재현한 가장 이른 예로는 15세기 후반에 제작된 <우지가와 센멘즈(宇治川扇面圖)〉를 들 수 있다. 이 작품에서 뵤도인은 우지의 정경을 노래한 란파 케이시(蘭坡景茝, 1419-1501)의 시와 함께 핵심적인 화면 요소로 묘사되었다. 본 논문에서 필자는 뵤도인 이미지의 등장과 <우지가와 센멘즈>의 제작 배경을 코노에 마사이에(近衛政家, 1444-1505)라는 인물을 통해 설명하고자 하였다. 코노에 마사이에는 뵤도인을 세운 헤이안시대(平安時代, 874-1185) 후지와라 가문의 직계 자손으로, 뵤도인에 대한 그의 관심은 오닌의 난(應仁の亂, 1467-1477)을 피해 우지에 머무르는 동안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마사이에는 뵤도인에 대한 소유권을 재확인함으로써 후지와라 가문의 권력과 문화적 위상을 전유(專有)하고자 했는데, 그의 이러한 열망이 반영된 작품이 <우지가와 센멘즈>이다. 란파 케이시와 코노에 마사이에는 무로마치시대(室町時代, 1336-1573)의 지배 엘리트들 사이에서 빈번했던 시회(詩會)를 통해 친분을 유지했으며, 시회 등을 통한 두 사람의 교류는 <우지가와 센멘즈>의 제작 배경이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후지와라 가문의 정치·문화적인 권위의 표상으로서 뵤도인 이미지는 16세기에 카노 에이토쿠(狩野永德, 1543-1590)가 제작한 <라쿠가이 메이쇼 유라쿠즈(洛外名所遊樂圖)> 병풍에서도 발견된다. 현재 4폭 한 쌍으로 남아 있는 <라쿠가이 메이쇼 유라쿠즈>는 왼쪽의 4폭에 우지와 뵤도인의 풍경을, 오른쪽 4폭에 교토의 서쪽 외곽인 사가(嵯峨)와 텐류지(天龍寺)의 풍경을 담고 있다. 우지와 뵤도인의 재현이 16세기 일본 정치사에서 코노에 가문의 활약을 연상시킨다면, 텐류지를 건립한 인물이 아시카가 타카우지(足利尊氏, 1305-1358)라는 점에서 사가와 텐류지의 모습은 아시카가 막부(足利幕府, 1336-1573)와 연결된다. 카노 에이토쿠가 뵤도인과 텐류지의 이미지를 병치시킨 이유에 대해 이 논문에서 필자는 크게 두 가지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첫째, <라쿠가이 메이쇼 유라쿠즈> 병풍의 제작은 결혼을 통한 두 가문의 결합을 기념하고 축하하는 의미를 가진다. 둘째, 뵤도인과 텐류지의 평화로운 풍경은 두 가문의 영화로웠던 과거에 대한 코노에 사키히사(近衛前久, 1536-1612)의 향수를 반영한다. 코노에 가문의 수장으로서 혼란스러운 전국시대를 살았던 코노에 사키히사는 코노에 가문뿐만 아니라 아시카가 막부의 정치적 힘과 권위를 회복하고자 노력했던 인물이다. 사키히사의 주문으로 카노에이토쿠가 그의 저택을 장식했다는 기록 등으로 보아, 사키히사가 카노 에이토쿠에게 <라쿠가이 메이쇼 유라쿠즈> 병풍을 의뢰했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 This paper examines why Byo-do- in (平等院), an eleventh-century Buddhist temple located in Uji (宇治), made its appearance as an important visual motif in later paintings. The first pictorial representation of Byo-do- in emerges in the late fifteenth-century Uji River fan (Ujigawa senmen-zu, 宇治川扇面圖) with a poem written by Ranpa Keishi (蘭坡景茝, 1419-1501). The reason for this sudden appearance of Byo-do- in can be explained by the intention of Konoe Masaie (近衛政家, 1444-1505) to appropriate the authority of the Fujiwara family (藤原家), the former owner of the temple as well as the direct ancestor of the Konoe family (近衛家). Masaie’s awareness of the significance of Byodo- in seems to develop while staying in Uji during the O - nin War (應仁の亂, 1467-1477). It is highly possible that Ranpa Keishi and Konoe Masaie had known each other from the cultural events such as poetry gatherings, and in one of such occasions, Keishi might have complied with Masaie’s wishes by adding his poem praising Uji in combination with the depiction of Byo-do- in in the fan. Political significance may also have been attached to the representation of Byo-do- in in the sixteenth-century Pleasures in Famous Places around Kyo- to (Rakugai meisho yu- rakuzu, 洛外名所遊樂圖), a set of folding screens, produced by Kano Eitoku (狩野永德, 1543-1590). The left panels depict Byo- do- in against the peaceful scenery of Uji, southern suburb of Kyo- to, and the right panels display famous temples such as Tenryu- ji (天龍寺) and Rinsenji (臨川寺) in Saga, western part of the capital. This paper claims that the presence of Tenryu- ji and Saga in the right panels is connected to the Ashikaga shogunate (足利幕府, 1336-1573) while Byo-do- in and Uji are closely associated with the Konoe family. The juxtaposition of these two regions may celebrate the union of two families through marriage. It may also reflect the nostalgia of Konoe Sakihisa (近衛前久, 1536-1612), the likely patron of this painting, for the most prosperous past of the two families before Sengoku period (戰國時代, 1467-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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