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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텍스트에서 이미지로, 그리고 다시 이미지에서 텍스트로: 5-6세기 중국 불비상(佛碑像)에 나타난 시각적 구현 방식의 변화

          하정민 ( Jungmin Ha ) 미술사와 시각문화학회 2017 미술사와 시각문화 Vol.20 No.-

          중국의 ‘불비상(佛碑像)’은 곧게 세워진 판형(板形) 또는 방형(方形)의 석재에 불보살(佛菩薩)이나 석가모니 불전(佛傳) 및 본생담(本生譚)의 장면, 혹은 불교 관련 상징물의 이미지를 부조로 새긴 시각적 조형물을 의미한다. 이러한 불비상은 ‘불교조상비(佛敎造像碑)’라고도 불리며, 중국에서 약 5세기 후반부터 제작되기 시작하여 7세기 초까지 크게 유행하였다. 중국의 불비상은 잘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5세기 불교도들이 중국 전통적인 석비(石碑)의 형태에, 중국 외부에서 들어온 새로운 종교인 불교 이미지들을 결합시켜 제작한 조형물이다. 불비상에 차용된 중국의 전통적인 석비 형태는 불교가 전래되기 이전부터 존재했던 것으로, 한족(漢族) 문인들이 서한(西漢, 기원전 206년-기원후 9년)대부터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한대(漢代) 한족 문인들이 제작한 석비의 표면은 화면 가득 특정 인물이나 사적(事蹟)을 기념하거나, 유교적 사상 및 이상을 표현한 문자로 채워졌다. 이러한 중국의 전통적인 석비는 인도로부터 불교가 전해지면서 그 표면의 시각적 구현 방식이 완전히 변화하였다. 표면 가득 새겨진 한자 텍스트는 불교와 함께 인도에서 들어온 여러 불교 존상들과 상징물들의 이미지로 대체되었다. 한편 불교조상비가 활발히 제작되던 무렵인 6세기 중반에, 불비상의 비면을 가득 채우던 불교 조상이, 불교 관련 텍스트로 변화되는 움직임이 감지되는데 이점은 매우 주목할 만하다. 이러한 양상을 보여주는 예들은 산동성(山東省), 하남성(河南省), 하북성(河北省) 등의 일부 지역에서 발견되는데, 석비의 전면 가득 불교 경전에서 가져온 내용을 한자로 새겨 넣었으며, 불보살의 이미지는 없거나 매우 적은 비중으로 제한되었다. 본고에서는 이러한 텍스트 중심의 불교 조형물을 ‘불교 각경비(刻經碑)’ 혹은 ‘불비(佛碑),’ ‘불교 석비’로 지칭함으로써, ‘불비상’ 또는 ‘불교조상비’와 구별하고자 한다. 텍스트 중심의 불교 각경비는 중국의 전통적인, 특히 한대의 유교적 배경 하에서 제작된 석비와 시각적으로 매우 유사하다. 그러나 비면에 새겨진 글의 내용은 완전히 변화하여, 중국 외부에서 들어온 종교인 불교의 교리 및 사상이 담겼다. 본고는 중국의 전통적 석비의 형태를 차용하여 발전시킨 5-6세기의 불교조상비와 6세기 중엽에 나타난 불교 각경비에서 그 시각적 구현의 중심이 텍스트에서 이미지로, 그리고 다시 이미지에서 텍스트로 옮겨간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이러한 변화를 이끈 중요한 요인 중 하나로 중세 중국 사회에 존재했던 ‘중국적’인것과 ‘비중국적’인 것 사이의 비가시적인 경계를 들 수 있다. 먼저, 유교적 맥락에서 제작된 중국의 전통적인 텍스트 중심의 석비를 이미지 중심의 불교조상비로 변화시킨 것은 5세기 후반 북위(北魏)시대의 비한족 불교도들이었다. 이 변화는 당시 중국의 시각문화를 크게 바꾼, 인도에서 유입된 ‘비중국적’인 불교 조상들의 표현에 힘입은 바 크다. 그리고 이후 불교 이미지 중심의 불비상에서 불교 경전의 일부분을 새겨서 표현한 텍스트 중심의 불교 석비는 6세기 중엽에 일부 지역 한족 불교도들에 의해 제작되었다. 이러한 텍스트 중심의 불교 각경비는 시각적으로 한대의 전통적인 석비로 회귀하는 듯 보인다. 이들 6세기의 불교 각경비는 당시 불교미술의 주류는 아니었다. 현전하는 유물들을 살펴보면, 불보살의 이미지가 그 표현의 중심이 되는 불교조상비 혹은 불비상으로 여전히 활발히 제작되었으며, 텍스트 중심의 불교 석비는 일부 지역에서 적은 수로 제작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각경비들의 출현은 한족 불교도들에게 ‘중국적’인 것과 ‘비중국적’인것을 분별하는 사고가 존재했으며 문화적으로 ‘중국적’인 것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6세기 후반 산동성 추성(鄒城)시 철산(鐵山)에 새겨진 거대한 불교 각경비와 그 각경제기(刻經題記)는 발원자의 한족 혈통을 설명해 주고 있으며 그들의 전통에 대한 존경심과 해박한 지식을 드러내고 있어서 이러한 경향을 알려주는 매우 중요한 예이다. One likely recalls an upright stone tablet carved with Buddhist images and symbols when they think of a Chinese Buddhist stele. These figurative steles, called Buddhist zaoxiang bei, briefly flourished during the late fifth to the early seventh centuries. Previous studies have shown that these Buddhist steles served as vehicles for making votive images and propagating Buddhism and were incorporated into Buddhist rituals. As is well-known, Buddhists in China did not invent the stele form, but adopted it from the long tradition of use by the Han Chinese, which dated from the Western Han period (206 BCE-9 CE). From their inception, the main surfaces of these pre-Buddhist steles were used to show scripts, typically expressing Confucian ideals. When Buddhism crossed into China from India, it transformed the form and function of the Chinese stone steles. The earlier Confucian emphasis on inscribed texts was replaced with dominant and diverse images of Buddhist deities and elements transmitted from Indian Buddhist art. In the middle of the sixth century, however, traditional text-focused religious steles emerged in some parts of Shandong, Henan, and Hebei Provinces once again. These steles were inscribed with Buddhist sutra texts, with little to no inclusion of sculpted imagery. At first sight, the appearance of these Buddhist steles inscribed with a Buddhist sutra is similar to the Confucian steles from the Han dynasty. However, their contents are purely Buddhist. It is important to note, however, that the shift to text-based steles was not universal; some steles continued to emphasize carved images. This paper traces these countermovements of change in the Buddhist uses of the stele format and explores the impact of an invisible boundary that transformed the visual aspects of the Chinese stele in opposite directions. The key areas that will be examined are the protagonists of these movements and the factors that drove them to make these shifts. The first shift from traditional Confucian text-focused steles into image-focused ones was mainly driven by and for the Northern Wei Buddhists and was clearly due to the impact of Buddhism transforming Chinese visual culture during the period. The second and later shift, in which Buddhist sutra texts became more prominent than Buddhist images, was led by several local Han-Chinese Buddhists. The second shift cannot be viewed as part of mainstream Buddhist art or typical of Buddhist steles created during that time. Rather, these Buddhist text-based steles made up just a small portion of the entirety. Nonetheless, they reveal a significant invisible cultural boundary between the Han Chinese and the non-Han Chinese. The boundary that drove this second shift was in the minds of the donors. Intellectually and emotionally, the Han Chinese responded to the “Han-Chineseness” of the traditional type of Chinese stele and the “non-Han Chineseness” inherent in many aspects of Buddhist imagery. The giant virtual Buddhist stele at Mount Tie is a good indication that some medieval Han Chinese patrons of Buddhist steles inscribed with a Buddhist sutra were motivated by a desire to display their Han Chinese lineage and knowledge of Chinese traditions.

        • KCI등재

          의도된 오독(誤讀) - 일제강점기 낙랑문양(樂浪文樣)의 창출

          주경미 ( Kyeongmi Joo ) 미술사와 시각문화학회 2016 미술사와 시각문화 Vol.18 No.-

          이 논문은 일제강점기 일본의 조선 고적조사 사업과 근대 한일 시각문화와의 관계를 이해하기 위한 기초적 연구이다. 여기에서는 평양 인근에서 발굴된 낙랑시대 고분 출토 칠기 및 기타 유물의 연구가 식민주의적 관점에서 진행되면서, 근대 한국 공예 미술 발전에 기묘하게 왜곡된 영향을 주었음을 살펴보았다. 일제강점기의 식민지 경영 정책에 맞추어 교묘하게 변형되어 근대적으로 재창출된 한국근대의 시각문화는 지금까지도 현대 한국 사회와 문화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동경미술학교 출신의 일본 근대 미술가 오바 츠네키치와 롯가쿠 시스이는 조선총독부의 주관 아래에서 이루어진 평양의 낙랑 고분 발굴 및 낙랑칠기 연구에 힘쓰면서, 근대적 개념의 낙랑칠기와 낙랑문양을 재창안하였다. 그들이 만들어낸 아시아주의적 전통 공예 양식과 근대적 도안학은 식민지 조선의 역사적 증거물로서 오독된 낙랑 고분의 연구에 근거한 것이다. 식민사관을 가지고 있던 일본 근대 미술가들의 고대 시각문화 오독은 낙랑칠기를 식민지 조선의 전통 공예미술 양식으로 인식시켰다. 그들의 영향 아래에서 근대 한국 공예계는 근대적 의미의 낙랑칠기와 낙랑문양을 잊혀졌던 한국의 전통 미술 양식으로 또다시 오독하면서, 낙랑문양과 낙랑칠기 양식을 재생산하게 되었으며, 그 전통은 현대 공예계에도 남아 있다. 고대 시각문화 유산에 대한 근대적 오독과 그 결과물들에 대한 2차적 오독 과정을 통하여, 새로운 근대 한국의 전통으로 자리 잡게 된 낙랑칠기와 낙랑문양은 근대 일본인들의 식민주의적 역사관과 아시아주의적 가치관 아래에서 형성된 것이다. 이와 같이 근대 한일 문화예술계에서 반복되었던 전통 시각문화 오독의 역사는 앞으로 좀 더 정밀하고 객관적으로 검토되고 인식되어야할 중요한 과제이다. This is a study firstly on the archaeological investigation project of historical remains and sites in Korean during Japanese colonial period and secondly its influence on the modern visual cultures of Korea and Japan. In this paper, I researched that the excavation and preservation project of Nangnang period tombs near Pyongyang conducted by Japanese Colonial scholars with the sponsorship of the Japanese colonial government and that those researches and the distorted colonized view on them strongly affected the colonial modern development of Korean arts and crafts. Such distorted and arbitrarily selected modern visual cultures according to the Japanese colonial purpose deeply influenced to the comtemporary Korean traditional cultures. Oba Tsunekichi and Rokkaku Shisui were famous Japanese modern artists as well scholars on traditional Asian art theory in Modern Japan. Both studied and taught at Tokyo University of the arts. They joined the excavation and preservation projects on Nangnang period tombs of Japanese colonial government during the 1910s-1920s. Oba participated in drawing work of the excavated artifacts from Nangnang tombs for the excavation reports. Rokkaku repaired and studied the most of the lacquerwares from Nangnamg tombs. Their studies and researches on Nangnang lacquerwares and patterns recreated the new modern tradition of Asian lacquerwares and Pan-Asianic art styles. However, those modern Japanese artists did not understand the true cultural nature of the Nangnang tombs and misunderstood them as the legacy of the ancient Chinese colonist from Han dynasty. Their art historical study under their colonial view of Korean history and Pan-Asianism fabricated the archaeological objects as the modern Korean tradition of Nangnang patterns and lacquerwares in Korea and Japan. Under their influence, Korea modern craftsmen misunderstood those appropriated modern Nangnang patterns and lacquerwares as old forgotten Korean traditional art style and have unconsciously reproduced them for a long time until now. It is time to reinvestigate and uncover the distorted but the actual meaning of those modern colonial visual art and invented legacy for understanding the real background of our Korean contemporary culture and fu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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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0년대 이후 영국 “신미술사(New Art History)”의 방법론 : 클락(T. J. Clark)과 폴록(G. Pollock)의 미술사 담론의 형성과 영향

          전영백 미술사와 시각문화학회 2010 미술사와 시각문화 Vol.9 No.-

          방법론의 차원에서 "신" 미술사학의 혁신은 미술사의 역사에 큰 족적을 남겼고 그 이름은 이제 더 이상 낯선 용어가 아니다. 그러나 신미술사라는 명칭은 ‘새롭다’는 뜻 외에 내용적인 설명을 전달하지 못한다. 논문은 그 새로웠던 방법론을 당시 맥락에서 되새겨보고, 그것에 영향을 준 근본 사상이 구체적인 작품의 해설에 어떻게 작용하는가를 고찰하고자 한다. 따라서 이 글은 1975년부터 형성된 신미술사학의 문화적 배경과 그 담론적 토대를 고찰하는 연구라 할 수 있다. 구체적인 사례연구로 대표적 신미술사가인 클락(T.J.Clark)과 폴록(G. Pollock)의 방법론을 집중적으로 다룬다. 더불어, 90년대 이후 시각문화연구의 출현 또한 신미술사와의 연계성으로 제시한다. The name of "new art history" was turned up when Block and its seed-bed Middlesex Polytechnic held a conference in 1982 on "The New Art History?". Since the first public use of the discipline in England, it has gained many names such as "social history of art", "radical art history", "critical art history" and "post-structuralist art history". Those art historians under the name of new art history have developed a critique of the traditional art history, and pursued what could be called a "horizontal" study of an object or range of objects. That is to say, they've highlighted the social conditions under which it was made, for whom, by whom, and most importantly, how it is signified in the cultural context. They've regarded that art is not hermetic and autonomous, but bound up with the social and economic structure of its time, as well as conditioned by artistic tradition and institutions. That all sounds natural in terms of methodology of art history in these days. But it was received rather "radical" back in 1970s - to be exact, in 1975 at Leeds University when MA course under the name of Social History of Art began. It means that new art history has drastically affected on the discourse of art history for the last 35 years. This research thus has been launched especially to look into academical backdrop and intellectual influence on this "new" methodology of art history. I thought that it is necessary to take into account the British cultural background, its intellectual tendency in particular in which new art history was formed to be an established academic discipline. This paper, therefore, explores what grounds under the discourse of new art history in terms of theoretical methods and how it works to the point of reading certain artworks in specific time and space from multi-layered perspectives. Among them, Timothy.J.Clark and Griselda Pollock are the representative art historians who are dealt in detail in this research. The former is introduced along the category of Social History of Art of which theoretical backdrop is mainly from Neo-Marxism. And the latter's perspective is shown as is charged with post-structuralist theories especially of Foucault and Lacan. What Clark counts most in his sociological approach of art history is, above all, class and its social apparatus in visual representation. He has always shown however that artworks are only really intelligible within accounts that demonstrates their complex "situatedness" within many contexts of relation to other forms of historical evidence. On the other, in Pollock's case, sexual difference and its configuration in signifying network is what has been most concerned. Devoted to methodological approaches of semiotics and psychoanalysis particularly, she has been keen on what could be represented and what could not, focusing on sexuality and race as well as class. Apart from their different approaches, Clark and Pollock as new art historians have pit themselves against the dominant art-historical account of history as anaemic background or inert backdrop to study the work of art, then they are equally critical of the "mechanistic Marxist's notion that artworks simply "reflect" ideologies, social relations, and history. Clark's and Pollock's social history of art has remained focused on questions to do with the way to make sense of specific artworks. In this paper, this has been analysed in relation to the British positivist tradition, which avoided general theoretical ideas in favour of piecemeal and eclectic approaches to their subjects. Influenced by the revolutionary move set in 1968, new art history can be said to be an intellectual product of the late-sixties tolerance for left-wing and "continental" ideas which has changed the nature of academic methods of art history. Since then, traditional style scholarship such as formalism and iconography has been challenged by new art historians like Clark and Pollock who were affected by the sixties brand of marxism and post-structuralism. In this paper I attempted to show how their fundamental bases for their methodology actually work in their reading of art works. Clark's reading of Courbet and Pollock's reading of Degas were examplified as case studies among many. The issues that the new art history challenged are still in much use in most current art histories. Those are the tradition's claim to be value-free, its belief in the impartiality or neutrality of historians, its suspicion of theoretical reflection, its ignorance of aesthetics and criticism, its obsession with fact-gathering and its blindness to social structures and political conditions. Those criticism came up with the critical aspiration of the new generation of art history at that time. It seems important to trace and learn from the way new art history challenged and thus pushed the boundary of its discipline in order to cope with demands and enquiries of art history to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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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0년대 중반 경성의 초상: 1935년 『동아일보』에 연재된 「서울풍경(風景)」 연구

          성효진 미술사와 시각문화학회 2020 미술사와 시각문화 Vol.26 No.-

          This paper attempts to explore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Landscapes of Seoul,” which was published serially in the Dong-A Ilbo (Dong-A Daily Newspaper) in 1935, and the city image of Gyeongseong in the mid-1930s. The “Landscapes of Seoul” is composed of illustrations by the eminent artist Yi Ma-dong (1906-1980) and writings by Seo Hang-seok (1900-1985) and Sin Nam-cheol (1907-1958). There are two main points of focus in this study. Firstly, the growing interest in the urban space and visual culture of Gyeongseong was heightened when the “Landscapes of Seoul” was published. Secondly, the “Landscapes of Seoul” was published in the form of newspaper illustrations based on the premise of readers. The most popular themes for Koreans were chosen and dealt with in the “Landscapes of Seoul.” Therefore, the main focus of this essay is to examine that the “Landscapes of Seoul,” serialized in the form of newspaper illustrations, was a portrait of the city in the middle of the 1930s when interest in the city and art markedly increased. In the mid-1930s, Gyeongseong called Dae-Gyeongseong (Great Gyeongseong) and the area of Gyeongseong expanded. The urban space of Gyeongseong was considered a huge spectacle. The royal palaces symbolizing Hanseong, the old capital city of the Joseon dynasty (1392-1897), were turned into representative amusement parks in Gyeongseong. The department store, symbolic of the modern city of Gyeongseong, was established as the center of urban culture. The situation was also frequently dealt with in the newspapers. The newspaper was one of the most popular visual media. Theserialization of the novel was a powerful strategy to attract readers’ attention. Novel illustrations painted by prominent artists of the time played a key role in creating the urban images of Gyeongseong. Along with novel illustrations, newspaper illustrations in the mid-1930s gained enormous popularity. The “Landscapes of Seoul” exploring the urban space of Gyeongseong under the title of Seoul is one of the most unusual works of art. The “Landscapes of Seoul” is a collaborative work consisting of illustrations and writings published for about a month between June and July 1935. Yi Ma-dong drew illustrations and wrote the first four episodes. From the fifth to the 13th episodes, Yi drew illustrations and Seo Hang-seok and Sin Nam-cheol wrote episodes, while the other two episodes only featured Yi Madong’s illustrations. The characteristics of the work are the following. Firstly, the places covered in the work are limited to the Bukchon (Northern Village) area. Namchon (Southern Village), the urban center of Gyeongseong, was excluded. Secondly, the perception of urban space is demonstrated, as seen in modern buildings, asphalt roads, and utility poles that are considered to symbolize modern cities. Thirdly, the places that appear on popular postcards are differently depicted in the “Landscapes of Seoul.” The selection and exclusion of sites in the “Landscapes of Seoul” are similar to visual media such as postcards. Both newspaper illustrations and postcards played an important role in the diffusion and proliferation of urban images of Geyongseong. The “Landscapes of Seoul,” aimed to attract readers’ attention, shows how the urban city of Gyeongseong looked and how the visual images of the modern city appealed to the public. The use of the name Seoul, not Gyeongseong, however, important in understanding the “Landscapes of Seoul.” It was not easy to find the remaining traces of the old city of Seoul in the mid-1930s. As the modern city of Gyeongseong rapidly developed, old villages and monuments all disappeared. What represented the old capital city of Seoul vanished. Nostalgia for the old city emerged in the mid-1930s. Therefore, the “Landscapes of Seoul” is a portrait of Gyeongseong which was overlapped with the fragmented memories of Koreans about the old city. Both the present ... 이 글은 1935년 『동아일보』에 연재된 「서울풍경(風景)」이 1930년대 중반 경성(京城)의 도시 이미지와 맺고 있는 관계를 고찰하려는 시도이다. 「서울풍경」은 미술가 청구(靑駒) 이마동(李馬銅, 1906-1980)의 삽화와 문필가인 경안(耿岸) 서항석(徐恒錫, 1900-1985) 및 양산(凉山) 신남철(申南澈, 1907-1958)의 글로 이루어져 연재된 기사이다. 본 연구에서 중점을 둔 것은 두 가지이다. 첫째, 「서울풍경」이 게재된 1930년대 중반은 경성의 도시 공간과 시각문화에 대한 관심이 고조된 시기였다. 무엇보다 경성의 도시 공간 자체가 당시 하나의 거대한 구경거리였다. 둘째, 「서울풍경」은 독자를 염두에 둔 신문 삽화의 형태로 연재되었다. 「서울풍경」에는 신문이 발행된 시점에 신문의 독자, 즉 당대인들에게 가장 화제가 된 주제들이 선택되었다. 따라서 본고의 초점은 1930년대 중반 도시와 미술에 대한 관심이 고조된 상황에서 신문 삽화의 형태로 연재된 「서울풍경」이 도시 이미지의 한 단면임을 구체적으로 밝히려는 데 있다. 「서울풍경」이 연재된 1930년대 중반 경성의 도시 공간은 볼거리가 넘쳐났다. 한성(漢城)을 상징하는 장소들인 궁궐은 경성의 대표적인 유원지가 되었다. 경성을 상징하는 백화점은 문화의 중심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무엇보다 1934년 조선시가지계획령(朝鮮市街地計劃令)이 경성에 적용되면서 1936년 경성은 그 영역이 확장된 대경성(大京城)으로 탈바꿈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당시 가장 대중적인 매체인 신문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주목되는 점은 신문 간의 구독 경쟁이 치열해진 가운데 신문 역시 독자에게 볼거리를 제공해야 했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소설 연재는 독자를 유인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전략으로 여겨졌다. 또한 소설 삽화는 소설 연재에 있어서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 소설 삽화는 점차 소설만큼 이나 인기를 끌었다. 그 결과 1930년대 중반에 이르러 소설에서 독립된 형태의 신문 삽화가 등장하였다. 「서울풍경」은 이례적인 예로 이마동의 삽화 및 문필가 서항석, 신남철의 글과 함께 이루어져 1935년 6월에서 7월 사이에 약 한 달간 연재되었다. 「서울풍경」이 신문에 게재된 형태를 보면 삽화가 글의 부연(敷衍)이기보다는 삽화가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한다. 첫 4회는 이마동이 그림을 그리고 글을 썼다. 5회에서 13회까지는 이마동이 그림을 그리고 서항석과 신남철이 글을 썼다. 마지막 2회에는 이마동의 그림만 실렸다. 삽화 및 글의 특징은 세 가지로 압축된다. 첫째, 작품에서 다루어진 장소들 대부분은 북촌(北村) 일대에 한정되어 있다. 경성역(京城驛)조차도 봉래교(蓬萊橋)에서 바라본 모습이다. 이로 인해 식민 근대 도시 경성을 상징하는 남촌(南村) 일대와 백화점은 배제되었다. 둘째, 근대화된 도시 공간에 대한 인식이 나타났다. 대부분의 삽화에 조각난 형태로 얽혀진 근대식 건물들, 넓고 평평한 도로, 높은 전신주, 거미줄 같이 엮인 전선 등이 나타났다. 셋째, 일부의 장소들은 엽서에 나타난 장소들이지만 경성역을 제외하고는 엽서와는 다르다. 마지막 4회에서 다루어진 동소문(東小門)은 거의 허물어질 듯한 모습이다. 「서울풍경」에서 확인된 장소의 선택 및 배제, 엽서와 같은 시각 매체와의 유사성 등은 도시 이미지의 형성과 닮아있다. 명소 엽서들은 당대인들에게 도시를 대표할 만한 이미지들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서울풍경 ...

        • KCI등재

          욕망의 방: 라이프치히 미술관의 패널화 〈사랑의 주술〉과 15세기 독일의 에로티시즘 문화

          한유나 미술사와 시각문화학회 2020 미술사와 시각문화 Vol.26 No.-

          독일 라이프치히 미술관에는 라인강 하류 지역 출신의 한 화가가 15세기 후반에 제작한 〈사랑의 주술(Liebeszauber)〉이라는 작은 회화 한 점이 소장되어 있다. 이 그림은 삼면의 벽으로 둘러싸인 실내 공간 중앙에 위치한 누드의 한 여성이 작은 상자에 담긴 심장 모형에 부싯돌로 불을 붙이는 동시에 스펀지로 물을 뿌리는 장면을 담고 있다. 대다수의 선행 연구들은 이 여인이 뒤쪽 문가에 기대어 방 안을 들여다보고 있는 남성을, 당시 실제 행해지던 특정 주술을 사용하여 유혹하고 있는 것이라 해석하였다. 브리기테 뤼만트(Brigitte Lymant)는 이 견해에 반박하며, 여성의 행위를 중세 후기 로맨스 문학에서 유행했던 ‘점화와 진화’의 메타포와 연결시켰다. 남성 구애자가 자신의 심장에 불꽃을 일으킨 여성에게 고통스럽다 토로하면서 그녀로 하여금 물을 뿌려, 즉 자신의 사랑을 받아 주고 궁극적으로는 성적 관계를 통해 그 고통을 잠재워 달라고 애원하는 서사 구조를 시각화했다는 것이다. 본고는 뤼만트의 논의를 확장시켜, 라이프치히 패널의 주요 인물인 누드의 여성과 남성 구애자, 그리고 그들이 위치한 공간 및 세부 오브제들의 상호 관계를 종합적으로 파악하면서, 이 작품을 관통하는 중심 주제와 시각 구조가 무엇인지 밝히고자 하였다. 먼저, 중앙의 여성 누드는 1400년경부터 독일 로맨스 문학에서 에로틱한 사랑의 화신으로서 핵심적 역할을 담당했던 ‘거짓 미네’의 도상을 차용한 것으로, 이 작품의 초점이 인간의 성적 욕망임을 분명히 밝힌다. 또한 외부인의 출입이 가능했던 부엌 혹은 식당과 같은 공적 공간의 요소들과 외부로부터 완전히 차단된 사적 공간인 욕실의 요소들을 하나의 방 안에 교묘하게 교차시켰다는 점도 중요하다. 이는 여성의 신체를 열린, 또는 닫힌 공간으로 비유하는 동시대의 수사학에 기대어, 성적 결합에 대한 남성의 환상과 이것이 실현되지 못한 현실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라이프치히 패널은 두 개의 창문과 열린 문의 배치를 통해 정면을 포함한 사방에서 여성의 몸을 모두 관찰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감상자들에게 상기시킴으로써 그들의 관음증적 욕망을 극대화시킨다. 또한 의미가 중의적이거나 모호한 세부 요소들을 통해 감상자에게 끊임없이 수수께끼를 던지기도 한다. 예를 들어 바닥에 웅크린 개는 중세 상징의 전통에 따라 신실함과 성적 욕망, 우측 창가의 앵무새는 순결과 방종과 같은 서로 상반된 의미로 해석이 가능하다. 이들의 의미를 명시해 줄 글을 적을 수 있는 띠 장식(banderole)은 공백으로 남겨져 있다. 감상자는 자신의 문화적 지식을 최대한 사용하여 난해한 그림의 내용을 이해할 수 있는 하나의 내러티브로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에로티시즘에 대한 자신의 관점에 대하여 재조명하고 숙고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A fifteenth-century female nude painting by a Lower-Rhine painter, now in the Museum der bildende Kunste Leipzig, is known by its modern title, Love Spell. The woman stands at the center of a richly furnished room while sparking fire and sprinkling water on a heart-shaped object stored in a casket. Most scholars have regarded the woman as bewitching the man at the door in the background, practicing a certain love magic. Brigitte Lymant on the other hand, convincingly argued that the woman’s performance reflects a popular metaphor of “kindling and extinguishing heart” in late medieval German literature. It refers to a suitor’s pain of love and his plea to his beloved to fulfill his desire. Lymant clarified the meaning of the main motif, but the general framework that connects the figures, the space, and other details has yet to be interpreted. This paper first shows that the female nude adopts the iconography of falsche frau minne, the personification of lust, well-known in the visual culture of fifteenth-century Germany. Minne’s body, twisted like a serpent's, refers to the traditional representation of Eve, which underlines Minne’s character as a temptress as well as her playfulness as a queen of fools. It is also noteworthy that the room in the Leipzig panel combines the characteristics of private and public areas of a medieval house. While the woman is located in her private bathroom equipped with a basin, jug, and a mirror, the man at the door looks into a kitchen or a dining room open to visitors. The room, either as closed or opened, symbolizes the female body: the former case stands for the virtue of chastity; the latter, by contrast, alludes to the availability of sexual intercourse. The ambiguous look of the man belies that he is unable to see the woman with his physical eyes in reality, and his desire has not been gratified yet. In his fantasy, however, he penetrates the room, that is, the woman’s body. From the viewer’s perspective, the Leipzig painting also activates the viewer’s voyeurism in an unusual way. It creates an illusion as if the viewer could observe the woman’s body from every direction—amely, through the two windows on both sides and through the back door, while the viewer already faces her body frontally. The painting further challenges the viewer with its enigmatic, multivalent details such as the dog and parrot. According to medieval symbolism, the dog stands for both fidelity and sexual desire, the parrot for both chastity and slackness. The meaning of each object cannot be fixed, as the entire composition is a combination of reality and fantasy in the first place. This ambiguity lets the viewer work on his/her own speculation, which ultimately leads to self-knowledge, the insight into his/her own understanding of eroticism. That is to say, the Leipzig panel stages not only a room of sexual desire, but also a room of intellectual desire where the viewer confronts and fathoms onesel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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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욕 메트로폴리탄미술관 소장 트뤼브너 조상비(造像碑, the Trübner Stele)의 진위 논쟁 재고(1) ―조상기(造像記)와 문헌 및 금석학적 자료를 중심으로

          하정민 ( Ha¸ Jungmin ) 미술사와 시각문화학회 2021 미술사와 시각문화 Vol.27 No.-

          미국 뉴욕의 메트로폴리탄미술관(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내 아시아관에는 높이가 308cm에 달하는 대형 불교 조상비가 전시되어 있다. 이 조상비는 〈트뤼브너 조상비(the Trübner stele)〉로 불리는데, 이전 소장자였던 외르그 트뤼브너(Jörg Trübner, 1902?-1930)의 성을 따서 붙여진 것이다. 명문에 의하면 이 조상비는 북위(北魏) 영희(永熙) 2년(533)에 제작되기 시작했으며, 동위(東魏) 무정(武定) 원년(元年, 543)에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트뤼브너 조상비〉는 구미의 여러 유명 미술관에 소장된 중국 불교 조각들 중에 가장 논의가 분분한 예 중 하나이다. 이 조상비는 6세기 불교 조각의 가장 중요한 명작으로 높이 평가받기도 했으며, 동시에 20세기 초의 위작이라고 폄하되기도 하였다. 특히 〈트뤼브너 조상비〉 정면의 많은 부분이 보수되면서 원형을 잃고 다시 조각되었다며 그 의미가 축소되기도 했다. 〈트뤼브너 조상비〉를 둘러싼 논란을 해결하려는 시도는 간단하지 않지만, 중국 불교미술 연구사에 있어서뿐만 아니라 구미(歐美)의 중국 조각 컬렉션의 역사와 의미를 조명하는 데 있어서도 매우 중요하다. 이러한 작업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질 수 있다. 먼저 이 조상비의 정면과 뒷면에 새겨진 조상기와 여러 제명(題名)들을 6세기 중엽의 역사적, 지리적 상황과 대조해 보는 것이다. 다음은 조상비에 새겨진 불·보살상의 도상과 양식, 조각의 주제 및 화면 구성과 배치 등을 마찬가지로 6세기 중엽 전후 중국의 불교 석굴, 조상비 및 단독 조상(造像) 등에 나타난 시각적 요소들과 비교함으로써 미술사적으로 면밀하게 검토하는 것이다. 이 조상비의 정면 조각의 표현에 대해서는 진위 여부에 논란이 많았다. 반면 이와 대조적으로 조상기의 내용 및 서체(書體)에는 그간 특별히 논란이 제기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조상비를 건립한 주요 공양자(供養者), 이와 관련된 이 조상비의 명칭, 그리고 이 조상비가 원래 세워졌던 지역 및 사원명(寺院名) 등과 관련해서 논란이 있는 부분이 적지 않으므로, 조상기의 내용을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본고는 〈트뤼브너 조상비〉의 명문을 자세히 조사하여, 기록된 공양자의 인명과 관직명, 그리고 원래 위치에 관해 알려 줄 수 있는 지명 등이 6세기 중엽의 역사적, 지리적 상황과 잘 부합된다는 사실을 밝힌 글이다. 따라서 이 조상비의 명문 부분만으로 판단한다면 〈트뤼브너 조상비〉는 6세기 중엽경에 제작된 진작(眞作)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으로 생각된다. 다만, 〈트뤼브너 조상비〉를 건립하는 데에 가장 중요하게 기여한 공양자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이도찬(李道贊), 혁련자열(赫連子悅), 무맹종사(武猛從事) 등 다양한 의견이 있다. 이 조상비의 원래 위치 및 관련 사원에 대해서도 이견이 있으나, 대체로 하남 북부의 기현(淇縣) 부근으로 그 범위를 좁혀볼 수 있다. 조상기와 제명 등 조상비에 기록된 명문은 6세기 중엽 무렵의 역사적 상황에 대한 기록을 잘 담고 있다. 이 명문이 틀림없이 6세기 중엽경 제작된 진작으로 판단됨에 따라 〈트뤼브너 조상비〉의 진위 문제 중 절반 정도는 해결된 셈이다. 그러나 이러한 명문 관련 논의의 진행만으로는 이 조상비의 진위 문제를 완전히 해결할 수는 없다. 따라서 〈트뤼브너 조상비〉의 진위에 대한 논란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조상비에 새겨진 불·보살상과 여러 인물들 및 장식 요소 등을 미술사적으로 상세히 분석해야 한다. 필자는 〈트뤼브너 조상비〉는 6세기 중엽경에 제작된 원작이 이후 어느 시기엔가 보수되면서 재조각되어 다시 봉안된 것일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한다. 이에 대해 필자는 별고를 통해 다룰 생각이다. A large Buddhist stele, called “the Trubner stele” named after Jorg Trubner (1902-1930), its former owner and an art dealer, is displayed at the gallery for Chinese Buddhist art on the second floor of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in New York. According to the inscription carved on the front and obverse sides of the stele, its creation began in 533 during the Northern Wei dynasty (386- 534) and was completed in 543 during the Eastern Wei dynasty (534-550). The Trubner stele is one of the most controversial Chinese Buddhist sculptures housed in several renowned art museums in Europe and the United States. It has been highly acclaimed as the most important masterpiece among Chinese Buddhist sculptures from the sixth century, disparaged as a forgery in the early twentieth century, or even disregarded for having been considerably recut and restored. The effort to resolve the controversy surrounding the Trubner stele is not that simple, but the issue is crucial not only in the history of Chinese Buddhist art, but also in illuminating the history and contribution of the collections of Chinese sculptures in Europe and the United States. Such investigation can be carried out in two main ways. The first is to compare the names of men who participated in the creation of the stele, their official titles, and place names carved in the dedicatory inscription of the stele to the historical and geographical circumstances of the mid-sixth century. Secondly, visual imageries carved on the stele, such as Buddhas, bodhisattvas, other figures, and ornamental elements should also be extensively investigated in terms of form, style, and iconography, using visual elements from Buddhist caves, Buddhist steles, and freestanding sculptures in China from the sixth century. In contrast to the controversy over the authenticity of the sculptures carved on the frontal surface of the stele, little question has been raised over the contents and calligraphic style of the stele’s inscription. However, it is essential to analyze the inscription, since there are many controversies concerning the main contributor of the stele, the original geographical location, and the temple wherein it was originally established. This paper investigates the dedicatory inscription on the Trubner stele and reveals that the names of patrons, their official titles, and place names are in good accordance with the historical and geographical circumstances of the mid-sixth century. Thus, it can be an important clue in locating the original location. Accordingly, this stele can be considered a genuine Buddhist sculpture produced in the midsixth century. However, there are various opinions on who contributed the most to the construction of the stele, including Li Daozan, Helian Ziyue, or the wumeng congshi. There is also disagreement about the original location of this stele and the associated temple, but it cannot be determined accurately at this point. In general, the area can be narrowed down to the northern part of the Henan province near Qi County. Since the dedicatory inscription carved on the stele reflects the historical situation of the mid-sixth century, the inscription itself can be regarded as a genuine work created at that time. Thus, at least half of the issue regarding the authenticity of the Trubner stele appears to be resolved. Nevertheless, these discussions over the dedicatory inscription alone does not fully address the issue of authenticity over the stele. In order to resolve the controversy, it is fundamental to closely examine Buddhist imageries and other visual elements carved on the stele. It is highly likely that the genuine piece of the Trubner stele was created in the sixth century, but the frontal surface of the stele had been substantially damaged and thus had to be recarved and rededicated at some point to be the present form of the Trubner stele. I would like to proceed with this argument through a separate pa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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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시열 초상화의 제작과 ‘대현(大賢)’의 이미지 구축

          이성훈 미술사와 시각문화학회 2020 미술사와 시각문화 Vol.26 No.-

          Song Siyeol (1607-1689) is an eminent scholar who immensely influenced the political as well as the academic world in the late Joseon period. In 1680, he received several portraits of him from scholars Kim Jingyu (1658-1716) and Kim Changeop (1658-1721), and another portrait painted by the court painter Han Sigak (1621-?) in 1683. Portrait Sketch of Song Siyeol with a Square Hat, Portrait of Song Siyeol with a Square Hat, and Portrait of Song Siyeol Standing were presumably produced during that time or a little later than this. Song Siyeol’s students and disciples planned and executed the creation of his portraits in 1680 and 1683, when Song Siyeol was summoned to the capital city of Hanyang (present-day Seoul). Their purpose of producing the portraits was to preserve the appearance of their venerated teacher so that he could be forever remembered and cherished. Furthermore, it was also in preparation for hanging them inside Confucian shrines, which might be constructed when he died. Even Song Siyeol himself showed a strong interest in possessing his portraits. The Southern Song philosopher Zhu Xi (1130-1200), whom Song Siyeol revered most highly, had commissioned a number of portraits of him and wrote essays and poems for his portraits during his lifetime. In emulation of this, Song Siyeol commissioned his portraits and wrote texts about them already before the year 1680. In the portraits dated 1680 and 1683, Song Siyeol is shown wearing the clothes of a hermit featuring Confucian robes such as simui or po and bokgeon. At that time, this kind of attire was generally associated with Zhu Xi. In addition to that, such robes were also understood as a symbol of loyalty to the Ming dynasty, which collapsed in 1644. The Manchu Qing dynasty was established after the collapse of the Ming. Thus, the portrayal of Song Siyeol as a recluse can be interpreted as an expression of his philosophy and principles: continuing the teachings of Zhu Xi and following the wisdom of the Chinese sages, while living in the remote countryside with the desire for revenging on the Qing dynasty which ended the Ming. After Song Siyeol’s death, numerous copies of his original portraits were produced. Among those, there are portraits that were partially embellished upon request from his later followers. Portrait of Song Siyeol with a Square Hat is such a case. In this portrait, Song Siyeol is wearing a hat and a robe that are difficult to identify as a certain type of costume. His clothes are similar to those worn by historical figures or ancient Chinese sages depicted in Joseon narrative paintings and paintings of sages. Consequently, the clothing in these portraits of Song Siyeol shows his disciples’ intention to venerate him as a great sage who could be compared with ancient sages such as Zhu Xi.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은 조선 후기에 정계와 학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학자였다. 그는 1680년에는 김진규와 김창업으로부터, 1683년에는 화원 한시각으로부터 자신의 초상화를 그려 받았다. 〈송시열 초상 초본(방건본)〉(김진규본), 〈송시열 초상(방건본)〉(김창업 본), 〈송시열 입상〉(한시각 본)은 바로 이때 이 화가들이 제작한 초상화이거나 그것의 이모본이다. 송시열의 제자 및 문도들은 1680년과 1683년에 그가 상경했을 때 그의 초상화 제작을 계획하여 실행했다. 그들이 그의 초상화를 제작하고자 한 목적은 무엇보다 그들이 숭모하는 선사의 모습을 그림으로 남겨 영원히 그를 기억하고 추모하며 또한 그의 사후 건립될 수 있는 원사 내에 걸어 봉안하는 것에 있었다. 한편 송시열 또한 자신의 초상화를 가지고자 했다. 그는 자신이 가장 추앙했던 주자가 평생 여러 차례 초상화를 제작하고 관련 글을 남긴 것을 본받아 1680년 이전에 이미 자신의 초상화를 직접 주문하고 자신의 초상화 관련 글을 썼다. 1680년과 1683년에 제작된 송시열 초상화에서 송시열은 심의나 포, 복건 등 유복을 착용한 모습으로 재현되었다. 당대에 심의나 복건은 주자를 상징하는 옷으로, 아울러 심의·복건을 포함한 유복은 청나라가 명나라를 멸한 상황에서 대명의리를 상징하는 옷으로 이해되었다. 따라서 이때 제작된 초상화에서 유복을 착용한 모습으로 표현된 송시열의 이미지는 명나라가 멸망한 상황에서 초야에서 복수설치의 마음을 가진 채 주자의 학문을 계승하고 성현들의 가르침을 따르고자 했던 그의 철학과 신념이 투영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송시열 사후에 그의 초상화는 이모의 방식을 통해 많은 복제본이 생산되었다. 그러나 이 중에는 〈송시열 초상(방건본)〉처럼 후대에 그의 문도들의 주문에 따라 부분적으로 윤색이 이루어진 초상화도 있다. 이 초상화에서 송시열은 그 복식 종류를 특정하기 어려운 건과 포를 착용하고 있다. 그런데 그가 입은 포는 조선시대 고사도나 성현도 등에 서 고사나 성현이 입은 것과 유사한 형태의 것이다. 따라서 이 복식은 송시열을 주자를 포함한 옛 성현에 비견되는 ‘대현(大賢)’으로 추앙하고자 한 그의 문도들의 의사가 투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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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논고 :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각세계의 구성요소-시론

          양정무 ( Jeong Mu Yang ) 미술사와 시각문화학회 2002 미술사와 시각문화 Vol.1 No.-

          This essay assesses the possibility of the study of Italian Renaissance an in terms of [he so-called ``visual culture``. Looking into an as pan of human culture and proposing that the study of art is ultimately integrated into the much broader study of human life, it will suggest that the art-historical study of Italian Renaissance, the area which has been traditionally associated with cultural studies since its beginnings, should once again take a pioneering role of reorienting the objects of an history with reference to the new point of view arising from the visual culture. It will value most the period eye` proposed by Baxandall in 1972 as the starting points of the study of Renaissance an from the perspective of visual culture, but show that his theory must be tuned so as to accommodate a wider range of visual culture in Renaissance Italy. The period eye originally suggested by him is preoccupied with value-free matters such as mathematical education, dancing, and religion. This study adds to it more socio-political and gender-biased eye, In conclusion, it will argue what is of importance here is not to list up the various components of visual culture but to recapture the process of the making of visual network in Renaissance Ita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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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에 전래된 구영의 작품과 구영 화풍의 의의

          서윤정 미술사와 시각문화학회 2020 미술사와 시각문화 Vol.26 No.-

          Qiu Ying had an enormous influence on the Korean artworld since both his genuine paintings and copies and forgeries of his originals, were transferred to the Joseon dynasty via multiple routes. This study examines the following questions to provide Joseon literati’s and artists’ perception and understanding of Qiu Ying’s painting and his style and reconsider the Chinese master’s legacy and influence on late Joseon art. How were forged paintings closely copied after bona fide works of Qiu Ying? Which kinds of paintings, copies, and forgeries bearing Qiu Ying’s signature and seals were available to Joseon audiences? How was the quality and quantity of Qiu Ying’s works exported to Korea in comparison with his paintings circulated in the contemporary Chinese art market? Where were Joseon Koreans’ reception and appreciation of Qiu Ying’s artistic achievements based? What is Qiu Ying’s impact on the spread of new iconography and the innovative style in late Joseon art? Through delving into the extant documents and his accomplished works, this paper investigates the painter’s critical stylistic characteristics and thematic scopes, which form his legacy as an artist with unmatched versatility and technical virtuosity in beautiful-woman paintings and blue-and-green landscapes. Noting that copies and forgeries of Qiu Ying’s genuine paintings that flooded the markets as well as woodblock illustrations modeled after his work served as a significant source for Joseon Koreans to understand the artist’s style, this research attempts to relocate Qiu Ying’s place in a transcultural context and redefine the Chinese art collections in the Joseon dynasty from multivalent perspectives. The study offers not only vital clues to various routes from which Chinese paintings were transferred to Korea, but also explores cross-cultural exchanges in East Asia through issues in connoisseurship and art market. It also closely examines the creation of copies and forgeries, the flourishing of commercial art in the Suzhou area, and the wide circulation of Suzhou fakes and Huizhou woodblock prints in East Asia. In addition, this is pertinent to the changes of style and iconography in various visual media, the eclectic adaptation of new motifs and styles, the Joseon elite’s increased interest in the garden culture of Suzhou during the Ming dynasty. 구영의 작품은 다양한 경로와 매체를 통해 조선에 전해져 조선의 화단과 문화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 실제로 조선에 유입된 구영의 관서가 있는 작품은 얼마나 충실하게 구영의 화풍을 반영하고 있는 것일까? 조선시대 사람들이 생각한 구영의 이미지와 화풍은 어떤 층위의 작품을 토대로 형성되었으며, 그들의 이해가 실상과는 어떤 차이가 있으며 당시 문화계와 화단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본 논문은 이러한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필자는 문헌기록을 상세히 검토하여 조선시대 문인들이 감상했던 구영의 작품과 그들이 그려낸 ‘구영상(仇英像)’을 재구성하고 조선에 유입된 구영 회화의 다양한 면모를 제시하였다. 조선에 전해진 구영의 작품은 양적, 질적인 측면에서 중국에서 유통되던 구영의 작품과 차이를 보이며 실상과는 다른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즉 중국에서 보는 ‘회화사’나 ‘구영의 화풍’은 조선에서 이해한 ‘회화사’와 ‘구영의 화풍’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 이는 비단 구영의 작품뿐 아니라 조선에 전해진 중국 회화의 질과 양에 관한 문제와도 관련되어 있으며, 국내에서의 중국 회화 수집에 관한 경향과 그 지식의 형성 과정과도 연관되어 있다. 구영 그림의 동전(東傳)과 그의 화풍에 대한 연구는 중국화의 조선 유입과 그 경로, 중국 서화 수장과 감상이라는 문제뿐 아니라, 작품의 진위 여부, 모사와 복제, 소주 지방에서 이루어진 상업 회화의 제작과 유통, 소주편과 휘주 판화의 동아시아적 확산이라는 동아시아 문화교류 현상에 대한 단서를 제공한다. 더 나아가 조선에 전래된 구영 그림과 그의 화풍에 대한 검토는 회화, 소설 삽화, 판화 등 매체에 따른 양식의 변화와 작품을 통한 화풍과 도상의 전래 문제, 새로운 화제의 전래와 도상의 선택적 변용 과정, 명대 소주의 정원과 문인 문화에 대한 조선시대 문인들의 관심을 규명하는 데 있어 중요한 연구 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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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지사이언스로서의 아비 바르부르크(Aby Warburg)의 미술사

          윤희경 미술사와 시각문화학회 2011 미술사와 시각문화 Vol.10 No.-

          1980년대 이후 “도상적 전회(Ikonische Wende 혹은 pictorial turn)"라는 표현과 함께 이미지에 대한 연구가 20세기 초 이래 인문학의 중심화두였던 언어를 대신하며 다양한 분야에서 학문적 연구의 중심 주제로 부상하기 시작했으며 이에 따라 이를 다루는 분야로 이미지 사이언스(Bildwissenschaft)라는 새로운 학문이 등장하게까지 되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미술(사)학 역시 점차 이미지학으로 확장해가는 추세를 보이고 있으며 이와 관련하여 1900년경 활동했던 독일의 미술학자 아비 바르부르크(Aby Warburg)가 시대를 앞선 이미지학의 선구자로서 새롭게 관심을 받으며 조명되고 있다. 본 연구는 이미지 사이언스로서의 아비 바르부르크의 미술사연구의 독창적 시각과 방법론에 관해 조명해 보고자 하는 시도이다. With the increasing recognition of Image's power to shape the way of perceiving and structuring the world, recently the images became the centrale object of the scholarly concern. As a result, Image Science as the interdisciplinary research area came to birth. In this context Art History as a scholarly discipline also began to extend its scope to the Image Science, expanding the research objects to all the image products of humankind. In this new orientation of Art History, 20th-century German scholar Aby Warburg was regarded as a pathfinder and came to be the focus of scholarly interest. Warburg researched the Images not according to the aesthetic criterion but rather in the perspective of cultural anthropology. For him the images are the results of the effort of mankind to solve their basic existential conflict with the nature, in which they are thrown to survive. According to Warburg there are two basic polar dispositions of human mind facing the unknown natural force, namely the rationality and logos on one hand and the affect and mythos on the other hand. The human being oriented themselves in the world antagonistically oscillating between these two poles. Warburg argued that the Image reflected the human way of orientation between these two poles and therefore the images should be regarded as the symptom of the psychosocial development in every historical periods. Therefore Warburg didn't limit his research objects to the fine arts and dealt with all kinds of man-made images seriously. So he proclaimed himself as an image historian instead of art historian. According to Warburg the Classical ancient world provided the later historical periods with the archetypes for the expression of the affect, which he called "Pathosformel". Warburg understood the "Pathosformel" as a engram of ecstatic experience in intensely excited state of mind, which originated in the ancient Dionysian ritual. When the psychical state of given historical period came to be rigid because of the suppression of affect, than the ancient "Pathosformel" provides the energy for the antagonism. In this way the Classical ancient archetypes constantly run in the European image world. But these archetypes get modified and transformed passing through the history, as the original pagan aspects of the intense affect were sublimated into the acceptable form according to the needs of the given historical period. Therefore for Warburg the way how the recalled Pathosfomel is reprocessed and transformed provides an important clue to reconstruct the psychosocial history. In his latter years he invented a new method to present the result of his life long research on the reception and transformation of ancient archetypes as a symptom for the psychosocial state. He produced systematical image atlas, called "Mnemosyne Atlas", which remained unfinished due to his death. The Mnemosyne Atlas consists of 66 boards with more than 1000 montaged images, which encompass all kind of visual symbols including painting, illustration, scientific schematic drawing, news photos and stamps. So it is the history of human psychosocial development pursued not in descriptive written words but in images. Warburg arranged each image and board in such a way that between images and boards the various significant connections of meanings are to be found. In this way Mnemosyne Atlas leads the viewer to an open understanding of h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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