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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종렬 광주가톨릭대학교 신학연구소 2012 神學展望 Vol.- No.178
안중근은 1879년 9월 2일에 태어나서 1896년 가을에 가톨릭 신앙을 만나 다음해 1월에 토마스라는 세례명을 택하여 입교하였다. 이때 이후 안중근에게 가톨릭 신앙은 불가분리한 형태로 그의 존재를 구성하는 무엇으로 자리잡고 그의 존재의 방향과 질을 규정하는 인자로 작용한다. 안중근은 1909년 10월 26일 9시 30분경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고 옥에 갇힌 상태에서 “안응칠 역사”와 “동양평화론”을 썼다. 안중근은 이토를 저격한 이후 오해해서 그를 살해하였다는 것을 인정하라는 일본 정부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심문과 공판을 받으면서 자신의 존재를 걸고 자신의 평화 사상과 투신을 항구하게 지켜 갔다. 사형대에 오르면서까지, 도리어 일본을 친구국으로 여겨 동양평화를 설득하고자 하였다. 본고에서 안중근이 동양평화 비전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프랑스 파리외방전교회 사제들을 통하여 세계와 동아시아 정세에 대한 식견을 넓힐 수 있었던 것을 주목하면서 그 흐름을 검토하였다. 그는 히라이시 우지토(平石氏人)와 면담하는 자리에서 일본과 청국과 한국의 황제들이 교황과 세계민 앞에서 평화를 도모한다는 것을 인정받을 것을 제안하였다. 이것은 그가 가톨릭교회에 대해 갖고 있던 신뢰를 반영한다고 보인다. 안중근이 피력한 동양평화 비전에는 동아시아 사상과 상통하면서 동아시아 가톨릭교회의 영성의 독특성을 드러내는 하느님의 정의와 하느님의 집안에 관한 의식이 배어들어 있다. 그는 자신의 평화론을 단순히 한국과 일본 사이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보다 더 근원적이고도 거시적으로 한국인과 일본인을 포함하여 인류가 한 하느님에 의하여 창조된 한집안을 이룬다는 인식 위에서 평화 비전을 제시한다. 그리하여 한국과 일본은 물론 온 세계민이 천명 내지 천도를 준거로 정의로운 형제 관계를 구현하도록 설득하고 있다. 그의 “동양평화론”이 정치적 차원만이 아니라 일정하게 종교적 성격을 띠기에 이른 것은 바로 이런 영성적 차원에서 비롯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