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chineseinput.net/에서 pinyin(병음)방식으로 중국어를 변환할 수 있습니다.
변환된 중국어를 복사하여 사용하시면 됩니다.
안동대학교 민속학과 안동대학교 민속학과 2000 민속학연구 Vol.6 No.1
조선시대 선산(善山)도호부였던 그 당시 선산읍 4개 동에 북문, 동문, 남문, 서문의 사대문이 있었다. 또 산은 북에는 비봉산(飛鳳山). 동에는 냉산(冷山), 남에는 금오산(金烏山), 서에는 월류산(月流山)이었다. 선산 서문(면문)에서 보면 달이 서편 높은 산으로 흘러 기운다 하여 그 산명을 월류산이라 불렀다. 산세가 아홉 개 봉(峯)으로 되어 있는데 능선마다 이름하여 동편부터 성주골, 족제비골, 너북골, 여더래골, 큰골, 제피골, 물방골, 통시골, 모과나무골이다. 이렇게 뒷산 이름 월류와 마을을 중심으로 부챗살같이 퍼져 있는 골을 합쳐서 월류(月流)골이라 하게 되었다
평택 임씨와 타성들의 조화를 이룬 웃무실 : 봉곡 1 리
안동대학교 민속학과 안동대학교 민속학과 2000 민속학연구 Vol.6 No.1
현대의 농촌사회는 대중매체, 교통, 통신 등의 발달 하에 이전과는 달리 정보의 수용과 대체가 빨라졌다. 또한 기술의 발달로 농업의 생산성이 향상되고, 농기계를 사용하는 경작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따라서 지금의 농촌은 예전과는 비교 할 수 없을 만큼 도시화가 진행되었으며, 이는 농촌사회 구성원들의 사고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급속한 발달에도 불고하고 현대의 농촌에는 여전히 예전의 문화 요소들이 존재하고 있다. 이것은 현재의 농촌문화가 새로운 문화와 전통문화라는 두 가지의 문화가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음을 의미한다. 봉곡1리 또한 한국 농촌의 한 마을이기에 이러한 문화적인 성격을 그대로 지니고 있었다.
안동대학교 민속학과 안동대학교 민속학과 1999 민속학연구 Vol.5 No.1
포항시 북구 송라면 화진3리는 본래 청하현의 북면에 속하는 '화산'이라는 마을이었다2). 신라 35대 경덕왕 때에 그 명칭을 그 명칭을 해아(海阿)로 고쳐, 유린군(有隣郡 : 영해)에 유린군에 포함시켰다. 또 고려초에는 이 명칭이 청하(淸河)로 개칭되었으며, 제 8대 현종 9년(1895년)에 경주의 속현이 되었다. 이조 태조때에 감무(監務)를 두고, 그 뒤 영조 때에 縣內, 東, 南, 北, 驛 등 6개의 면으로 되었는데, 제 26대 고종 32년(1895년) 지방관제 개정에 의하여 청하군으로 바꾸어 명하면서 다른 군의 여러 면을 통합하였다. 1914년에는 군면 폐합에 따라 영일군에 편입되고 송라면에 속하게 되었다. 이때에 화산은 耳津(1里)와 大津(2里)의 津字를 취하고 3里인 花山(一名 華山)의 華字를 취하여 華津이라 명명하여 화진3리라고 한다. 그리고 96년의 시군의 통합에 따라 포항시 북구에 속하게 되었다.
안동대학교 민속학과 안동대학교 민속학과 1999 민속학연구 Vol.5 No.1
이번 답사에서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지경1리라는 마을내의 작은 갈등관계였었고 이러한 점을 감안하여 글을 서술하고자 노력하였다. 각각의 영역별로 서술한 것에서 살펴볼 수 있었듯이 지경1리는 생업기술에서나 생업기술을 기반으로 생겨나는 사회조직에서, 또는 마을의 신앙체계 속에서 작은 갈등들을 살펴볼 수 있었다.
송라면 광천 1 리 하광마을 : 완전한 하나를 꿍꾸는 빛 속 (下光) 의 사람들
안동대학교 민속학과 안동대학교 민속학과 1999 민속학연구 Vol.5 No.1
하광마을은 500년 전 입향시조인 용씨와 지씨 부부를 시작으로 마을이 형성되었으며 상광에서 하광으로 옮겨진 마을이다. 500년 역사를 가진 만큼 마을사회는 체계를 유지하며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다. 마을의 모둠살이는 마을전체를 아우르는 대동회를 중심을 개발위원회ㆍ노인회ㆍ부인회ㆍ초군회ㆍ산림계의 개별 모둠들로 각각의 성격과 기능을 유지하는가 하면 외지에 사는 사람들의 모임인 석메회와 다른 마을과의 연대모둠인 동갑계와 칠성계 등으로 질서정연하게 유지되고 있다. 이들 개별 모둠들은 실제로 제 각각의 기능을 다할 뿐만 아니라 운영에 있어서도 체제를 갖추고 있다. 이러한 모둠살이는 마을사회를 하나의 조직으로 아우르며 오랜 역사를 거치면서도 단합된 면모를 보인다.
안동대학교 민속학과 안동대학교 민속학과 1998 민속학연구 Vol.4 No.1
지난 20년 동안, 현대세계는 인간이 자연환경에 입힌 손상을 경고하였다. 미국에서 단 한 주간도 농경지의 상실, 공해, 흉어, 산성비, 쓰레기, 삼림의 황폐화 등에 관한 뉴스 거리를 접하지 않고 지낼 수 없다. 저개발국가에도 다른 일련의 문제들이 닥치고 있다. 토양부식, 삼림벌채, 초지화, 그리고 야생생물의 멸종 등이다. 환경이 손상되면 가뭄이나 다른 자연재해가 광범위한 기아, 사회의 무질서 그리고 급속한 사회 불안을 야기한다. 이러한 일이, 미국의 대다수 학생의 기억에 생생한 방글라데시, 하이티, 아프리카 Sahel지역 전체에서 일어났다. 우리는 이제 이러한 문제의 모든 비용을 계산하려는 노력을 시작하였다.
안동대학교 민속학과 안동대학교 민속학과 1999 민속학연구 Vol.5 No.1
1. 광천리의 역사와 공간적 위치 광천리(光川里)는 현재 영일군(迎日郡)의 10개 면 중 두 번째인 송라면(松蘿面)에 속해 있으며, 송라면은 원래 1914년 행정구역폐합조치 이전에는 청하군에 속한 지역이었다. 청하군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어서 고종 32년 1895년 지방관제개정에 의하여 내북면에 편입되었으며, 하광(下光), 학산(鶴山), 산령(山令), 심방(尋芳), 두곡(斗谷), 이진(耳津), 북중(北中), 동하(洞下), 지경(地境), 화산(華山), 대진(大津)의 11개 동을 관할하였다. 그 뒤 1914년 행정구역폐합조치에 따라 내북면(內北面)의 광천(光川), 관동(館洞), 송천(松泉), 외일(外一), 외이(外二), 외삼(外三), 방화(芳花), 조사(祖師)의 8개 동리를 병합하여 광천, 대전, 덕천, 방석, 상송, 조사, 중산, 지경, 하송, 화진의 10개 리로 개편하고, 조선시대 송라도찰방(松蘿道察訪)의 이름을 따라 송라면이라 하였다. 현재 송라면은 동쪽으로는 동해에 접하며, 남쪽은 청하면과 신광면, 서쪽은 죽장면, 북쪽은 죽장면과 영덕군의 남정면에 접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