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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대학교 민속학과 안동대학교 민속학과 1998 민속학연구 Vol.4 No.1
오산2리(초산)은 농업에서 어업으로의 전향이라는 생업적 특성과 함께 수자원의 부족에 늘 고심해 왔던 세월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바다와 인접한 어촌이면서도 농사를 지으며 양반의식으로 생활해 왔던 과거 오산3리에서 소작을 하던 이들 중 상당수가 오산2리로 이주해 왔다. 따라서 오산2리 사람들은 자신들의 전력에 대해 상대적으로 열등감을 가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으나, 당연히 직접적인 표현은 삼가는 눈치였다.
송라면 광천 1 리 하광마을 : 완전한 하나를 꿍꾸는 빛 속 (下光) 의 사람들
안동대학교 민속학과 안동대학교 민속학과 1999 민속학연구 Vol.5 No.1
하광마을은 500년 전 입향시조인 용씨와 지씨 부부를 시작으로 마을이 형성되었으며 상광에서 하광으로 옮겨진 마을이다. 500년 역사를 가진 만큼 마을사회는 체계를 유지하며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다. 마을의 모둠살이는 마을전체를 아우르는 대동회를 중심을 개발위원회ㆍ노인회ㆍ부인회ㆍ초군회ㆍ산림계의 개별 모둠들로 각각의 성격과 기능을 유지하는가 하면 외지에 사는 사람들의 모임인 석메회와 다른 마을과의 연대모둠인 동갑계와 칠성계 등으로 질서정연하게 유지되고 있다. 이들 개별 모둠들은 실제로 제 각각의 기능을 다할 뿐만 아니라 운영에 있어서도 체제를 갖추고 있다. 이러한 모둠살이는 마을사회를 하나의 조직으로 아우르며 오랜 역사를 거치면서도 단합된 면모를 보인다.
안동대학교 민속학과 안동대학교 민속학과 1999 민속학연구 Vol.5 No.1
이번 답사에서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지경1리라는 마을내의 작은 갈등관계였었고 이러한 점을 감안하여 글을 서술하고자 노력하였다. 각각의 영역별로 서술한 것에서 살펴볼 수 있었듯이 지경1리는 생업기술에서나 생업기술을 기반으로 생겨나는 사회조직에서, 또는 마을의 신앙체계 속에서 작은 갈등들을 살펴볼 수 있었다.
안동대학교 민속학과 안동대학교 민속학과 1999 민속학연구 Vol.5 No.1
포항시 북구 송라면 화진3리는 본래 청하현의 북면에 속하는 '화산'이라는 마을이었다2). 신라 35대 경덕왕 때에 그 명칭을 그 명칭을 해아(海阿)로 고쳐, 유린군(有隣郡 : 영해)에 유린군에 포함시켰다. 또 고려초에는 이 명칭이 청하(淸河)로 개칭되었으며, 제 8대 현종 9년(1895년)에 경주의 속현이 되었다. 이조 태조때에 감무(監務)를 두고, 그 뒤 영조 때에 縣內, 東, 南, 北, 驛 등 6개의 면으로 되었는데, 제 26대 고종 32년(1895년) 지방관제 개정에 의하여 청하군으로 바꾸어 명하면서 다른 군의 여러 면을 통합하였다. 1914년에는 군면 폐합에 따라 영일군에 편입되고 송라면에 속하게 되었다. 이때에 화산은 耳津(1里)와 大津(2里)의 津字를 취하고 3里인 花山(一名 華山)의 華字를 취하여 華津이라 명명하여 화진3리라고 한다. 그리고 96년의 시군의 통합에 따라 포항시 북구에 속하게 되었다.
안동대학교 민속학과 안동대학교 민속학과 2000 민속학연구 Vol.6 No.1
소재리가 속해 있는 구미시의 동북부에 위치하여 서북쪽으로는 무을면과 옥성면, 서쪽으로는 김천시 감문면, 남쪽으로는 고아읍, 동쪽으로는 낙동강을 접하고 있다. 선산읍은 신라시대에는 일선주 숭선군으로, 고려시대에는 선주부로 조선시대에는 일선현, 선산군 등 조선시조 태종 13년이래 580여 년 동안 군청 소재지로 이어져왔다. 일선현, 선산군으로 개칭되는 동안에 동내방(東內防), 독동방(禿東防), 서내방(西內防) 무래방(舞來坊)방 등 4개방(個坊)을 통합하여 선산면으로 불리어지다가 1979넌 5월 1일 대통령령 제9409호에 의거 읍(邑)으로 승격하였다. 그 후 1983년 2월 15일 행정구역 조정(대통령령 제1027호)에 의해 옥성면의 봉곡리,포상리와 금릉군 감문면의 소재리, 봉남리가 편입되어 현재 27개가 리가 되었다.
안동대학교 민속학과 안동대학교 민속학과 2000 민속학연구 Vol.6 No.1
습례라는 지명(地名)은 '모름지기 사람이라면 반드시 예절을 익혀야 한다'는 뜻이라고 한다. 1914년 행정구역 통ㆍ폐합에 따라 개령군 무송면의 월유동 일부를 병합하여 현재의 습례라고 했다. 이에 관한 전설로는 '조선초기(1435년경) 손씨(孫氏)라는 사람이 어질고 덕(德)이 있는 사람을 골라 수련당(修練堂)을 짓고 이곳에서 마을 사람들의 덕을 닦게 하였다'고 전한다. "수련당"은 약 250년 전에 소실되었다고 전하며, 그 이후 많은 덕망이 있는 인물이 배출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습례2리에는 2개소의 자연지명이 있는데 하나는 배터이고 또 다른 하나는 대발골이다. 배터는 오래 전에 마을 앞까지 배가 들어 왔다 하여 유래된 명칭이며, 대발골은 뒷산 밑에 대나무 밭이 여기저기 많아 붙여진 명칭이라 한다. 또 한 본 배터와 500m 떨어져 있는 대발골은 동쪽에 위치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