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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中國易姓革命思想辨正

        朴炳奭(Park Byoung-suck) 한국동양정치사상사학회 2002 한국동양정치사상사연구 Vol.1 No.1

        「중국 역성혁명사상 해명: 맹가의 언행을 통해 2천3백 년의 수수께끼를 푼다」. 맹가(孟軻, 372-289B.C)이래 지금까지 동아시아에서는 아시아적 혁명이론으로 역성혁명론(易姓革命論)을 하나의 정설로 믿어왔다. 특히 유가의 맹가는 선양(禪讓)과 방벌(放伐)을 포함한 역성혁명을 처음으로 주창하고 인정하였다는 것이 하나의 정설로 믿어 의심치 않았고, 대부분의 연구자들이 이를 전제로 그와 중국의 (정치)사상을 분석하고 설명하여 왔다. 이 글은 역성혁명을 선양과 방벌로 구분하여 맹가의 이에 대한 입장을 분석하고, 나아가 역성혁명과 천명의 관계를 통하여 맹가의 혁명론의 입장을 재분석하였다. 이를 통해 2천3백 여년 동안 혁명론자로 믿어왔던 맹가는 진정한 의미의 혁명론자로 볼 수 없음을 증명하고자 하였다. 즉 중국 역성혁명론의 허구를 밝히고자 한다. 우선 『맹자』에 요순(堯舜) 간의 선양이 6회, 순우(舜禹) 간의 선양이 1회 언급되었다. 앞의 6회에서는 선양의 사실 또는 흔적을 알 수 있지만 맹가가 선양을 주장했다는 유력한 증거로 삼을 수 없다. 뒤의 1회(「만장 상」편)에서는 맹가의 구체적인 입장을 확인할 수 있다. 맹가는 여기서 선양은 권력변동의 최선책이 아니고, 아들이 불초하여 시행되는 차선책이다. 아울러 가치면에서 선양은 한 조대 내의 동성간의 계승과 차이가 전혀 없는 권력변동의 방식이다. 이러한 태도 때문에 전국시대 중기 선양설이 유행할 때 연왕 자쾌(子?)가 선양을 실천하고자 할 때 맹가는 궤변으로 이에 간섭하여 파괴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유가의 창시자인 공구(孔丘)는 정명사상(正名思想) 에서 군주가 군주 역할을 하지 못할 때 신하는 어떻게 해야하는지에 대한 답변을 하지 못했지만, 맹가는 그러한 군주를 ‘사내’(夫)로 규정하여 몰아낼 수 있다고 주장하여 공구가 남긴 문제를 해결하는 듯했다. 하지만 그는 방벌의 문제는 해결했지만 ‘역성’의 문제는 해결하지 못했다. 다시 말해 그에 있어 방벌의 주체는 동성(同姓)의 귀척지경(貴戚之卿)일 뿐, 이성지경(異姓之卿)은 자격이 없다. 자연히 백성의 혁명권도 부정된다. 따라서 맹가는 역성혁명론자라기보다 서구의 폭군 방벌론자 수준의 사상가일 뿐이다. 맹가는 선양과 천명의 관계를 언급하였지만 방벌과 천명의 관계는 고려하지 않고 민심만을 언급했다. 하지만 여기서의 ‘민’(民)은 일반 백성이 아니고 제후ㆍ경ㆍ대부ㆍ사 등 지배층을 의미한다. 서구사상에 대한 이해와 수용 이전의 중국의 어느 사상가도 백성의 혁명권을 체계적으로 주장한 적이 없다. 맹가이래 2천3백 여 년간 중국사상계에서 맹가가 역성혁명론자로 오인되고, 중국(정치)사상에서 인민에게 혁명권이 부여된 것으로 오인된 것은 중국의 전통적인 사상연구 방법론의 하나인 ‘단장취의’(斷章取義)에서 비롯된 것이고, 한국 학계의 이에 대한 믿음은 사대의식과 연구능력의 부족에서 비롯된 것으로 판단된다.

      • KCI등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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