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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景德王代 王子 金泰廉의 日本派遣 事情

        近藤 浩一 한국고대사탐구학회 2010 한국고대사탐구 Vol.5 No.-

        본고에서는 경덕왕 11년(752)에 왕자 김태렴 등 700여명이 일본에 파견된 사정에 대하여 일본 국내 사정이나 발해와의 관계 등 외적 요인을 중시하는 기존 연구와는 달리 파견의 주체인 경덕왕을 비롯한 신라정부의 입장을 검토하였다. 우선 경덕왕은 성덕왕의 정치를 이상으로 함으로써 對唐(漢化)政策을 계승하여 그에 따른 관제개혁을 단행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왕권강화를 꾀하고, 그에게 반대하는 불만 귀족세력을 억압하기도 하였다. 이를 통하여 대외적인 관계에 있어서도 일본 등 주변 제국보다 우위에 위치한 자세를 명백하게 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752년에 경덕왕을 중심으로 하는 王黨派가 일본에 적극적으로 조공하였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또한 경덕왕대의 정치 상황에서 경덕왕 등 왕당파에 불만을 가진 진골귀족으로 구성된 反專制主義勢力의 움직임이 주목된다. 경덕왕 13년(754)의 황룡사종 주조는 반전제주의세력인 효정과 삼모부인의 시주로 완성되고 있어, 그들의 부의 축적 정도를 알려준다. 더구나 김순정과 그의 손자인 김옹을 통해 알 수 있듯이, 반전제주의세력은 친일외교의 자세를 계승하였고, 왕당파가 추진한 대당정책에 대항하는 수단으로서 대일외교를 활용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752년의 김태렴 등 700여명의 일본 파견은 반전제주의세력의 요청으로 추진되었지만, 김사인을 비롯한 정부 중추부에 있던 인물들의 협력도 있었다고 생각된다. 김사인은 745년부터 757년까지 上大等으로 있으면서 왕당파에 속했지만, 반전제주의세력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한 이른바 중도적 인물이다. 그와 같은 인물이 사절단을 일본에 보낼 수 있도록 경덕왕에게 일부러 건의하였음을 짐작해 볼 수도 있다. 어쨌든 반전제주의세력이 대일외교를 요청한 이유와 경덕왕이 이를 일단 승인한 목적이 주목된다. 앞서 말했듯이 반전제주의세력은 많은 경제적 기반을 갖고 있어 자신의 공방에서 제작한 수공업 제품들을 일본에서도 교역하고자 대일외교를 적극적으로 요망하였다고 볼 수 있다. 경덕왕 쪽에서는 대당정책을 통한 왕권강화를 기본 방침으로 하면서도, 독자적 기반을 가진 반전제주의세력을 왕권 밑으로 회유하기 위해 대일외교를 승인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한편 752년의 대일외교는 정부 내에서 여러 의견 차이를 보였는데도 그들이 결속하여 사절단을 보낼 수 있던 명목에는 당시 王京人이 신봉하고 있던 華嚴宗을 통한 불교 교류가 큰 역할을 하였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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