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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女流歌人「伊勢」の歌と人生(Ⅱ) : 中宮溫子の死後から晩年にかけて

        增淵はる美 서경대학교 1996 論文集 Vol.24 No.-

        이 論文은 日本 平安(헤이안)時代(794-1185)의 女流作家인 伊勢(이세)의 生涯와 作品을 통하여 日本平安時代의 女流作家들의 和歌를 음미하는데 目的이 있다. 당시 伊勢는 유명한 女流歌人이었으며, 平安時代의 女流文學을 형성하는 女官들의 先驅的 役割을 하였다. 궁중생활의 기록에 의하면 그녀의 生涯는 元慶元年頃 (875-877)에서 元慶8年(945)까지 생존하였다고 考慮된다. 伊勢의 궁중생활은 宇多(우다)天皇의 御息所溫子(야스꼬)에 出仕한 것에서 시작되며, 出仕後 溫子의 동생인 藤原仲平(후지와라 나카히라)외의 사랑에 빠졌으나, 그 사랑은 오래가지 못하였다. 그 때문에 고통스러워진 伊勢는 잠시 大和(야마도)에 있는 부모 곁으로 돌아가 있었다. 그러나 그 후 재차 溫子의 명에 의해 出仕하여 貫平8,9年頃에는 宇多의 皇子를 출산했다. 그러나 그 皇子는 8살이 되기 전에 죽었다. 貫平9年 宇多天皇은 讓位되어 溫子는 다이고天皇의 양모로서 皇太后로 봉해졌다. 이에 伊勢는 계속해서 溫子의 女官으로서 출사했다. 또 宇多上皇도 즉위 3년만에 出家했다. 溫子皇后도 계속 병중이라 延喜3년에 붕어했다. 溫子의 딸이었던 均子女王은 宇多天皇의 제4皇子 敦慶(아쯔요시)親王의 부인이 되었지만 이 女王도 延喜10年 21세로서 죽었다. 宇多院은 延喜13年亭子院歌會를 개최하였다. 伊勢는 唯一한 女流歌人으로서 출장하여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溫子皇后의 붕어 후에는 伊勢의 女官으로서의 기록은 끊어졌다. 그러나 敦慶親王괴의 사이에서 태어난 딸 中務(나가쓰가사)가 있었다(나중에 中務가 어머니의 뜻에 따라 女官으로서 그리고 女流歌人으로서 활약하였다). 敦慶親王과 伊勢와의 관계는 溫子太后의 부어후에 생긴 일이여, 親王 23세 때이였으며, 伊勢는 10년 정도 親王보다 연상이였다. 親王과 伊勢의 관계를 贈答歌에서 살펴 보면 음악상의 교류도 있었으며, 延長8年 44세로서 親王이 죽을 때까지 그 관계는 지속되어졌다. 伊勢의 만년에 관한 것은 거의 알 수 없으나 承平3年 北宮(기타노미야, 다이고 第14皇子) 御裳着屛風歌, 承平4年 다이고 皇后50御賀屛風歌, 同7年 陽成院70御賀屛風歌,天慶元年(938)動子內親王哀悼歌가 있었다. 연대가 확실한 伊勢의 歌는 여기서 끝나고 있다. 이 논문은 溫子太后 사후부터 伊勢의 만년까지의 歌를 통해서 伊勢의 實人生에 관해서 고찰해 보았다. 금후의 과제로는 伊勢의 歌가 딸인 中務, 道綱(미찌쯔나)의 생모, 和泉式部(이즈미시끼부), 그리고 紫式部(무라사키시기부)에 어떠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가에 관해 연구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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