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SS 학술연구정보서비스

검색
다국어 입력

http://chineseinput.net/에서 pinyin(병음)방식으로 중국어를 변환할 수 있습니다.

변환된 중국어를 복사하여 사용하시면 됩니다.

예시)
  • 中文 을 입력하시려면 zhongwen을 입력하시고 space를누르시면됩니다.
  • 北京 을 입력하시려면 beijing을 입력하시고 space를 누르시면 됩니다.
닫기
    인기검색어 순위 펼치기

    RISS 인기검색어

      검색결과 좁혀 보기

      선택해제

      오늘 본 자료

      • 오늘 본 자료가 없습니다.
      더보기
      • 趙泰億의 使行文學 연구 : 對日觀을 중심으로

        조영심 연세대학교 대학원 2014 국내석사

        RANK : 247423

        본 논문에서는 1711년 신묘사행의 정사 趙泰億(1675∼1728)의 사행문학을 통해 그의 대일관을 연구하였다. 1711년 신묘사행은 임란 이후 시작된 조선후기 통신사행에 있어서 시기적으로 중간에 놓인 사행이며, 회차로는 여덟 번째 사행이다. 조태억은 정사로 일본을 사행하며 그 체험을 개인문집인 『謙齋集』6, 7, 8권에「東?錄」으로 남겼다. 그러나 『겸재집』이 미간행 문집인데다가 「동사록」이 『海行摠載』에 실리지 못해 접근성이 떨어져 사행문학 연구에 있어서는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또한 이 시기의 사행문학이 여항 문인들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었기 때문에 정사로서 일본을 사행한 조태억 연구는 사행문학 연구의 주류를 차지하지 못했다. 현재까지 조태억 개인을 조망한 연구는 없었으며, 대체로 막부의 집정관으로 통신사 접대를 담당한 新井白石와 관련된 연구에서 조태억이 거론되었다. 신묘사행은 이전 회차인 1682년 임술사행부터 조일 양국 간에 늘어나기 시작한 문화적 교류의 분위기를 타고 많은 교류의 흔적을 남긴 사행이다. 조태억도 이러한 문화 교류의 흐름에 합류하고 있었다. 제술관 1인, 서기 3인이라는 사문사 체제가 정립된 이 시기, 조태억은 정사였기 때문에 일본인과의 시문 교류에 의무가 없었지만 그의 「동사록」에는 일본인들과 교류한 시들이 다수 포함되어있다. 그리고 이 시들 중 일부는 일본에서 간행된 필담창화집 23종에 수록되어 있다. 이 밖에서 일본인에게 보낸 서문과 贊, 銘이 『겸재집』내에 수록되어 있다. 이와 같은 자료들에는 일본인과의 교류뿐 아니라 일본에 대한 조태억의 선험적 인식과 일본 각 지역에서의 견문 및 술회가 드러나 있어 조태억의 대일관을 살필 수 있는 좋은 자료로 활용되었다. 위의 자료를 바탕으로 본고에서는 조태억이 일본을 체험하기 이전에 지니고 있던 일본에 대한 선험적 인식과 주변인들의 ?章을 통해 사행에 임하는 태도를 세 가지로 나누어 살폈다. 먼저, 조태억은 일본 사행을 새로운 유람으로 생각하고 기대했으며 주변인들도 일본의 자연 경관을 즐기고 돌아올 것을 당부했다. 두 번째로 임진왜란이 끝난 후 100년이 지난 시기였지만 일본이 임진왜란의 주범국이라는 것에 적개심을 지니고 사행에 임했다. 일본이 전쟁의 원흉이라는 사실은 주변인들도 잊지 못하는 터였지만, 일본에 대해 복수의 의지를 다지는 인물이 있는가 하면, 과거보다 현재의 교린 상태를 중요시하여 和로써 대할 것을 당부하는 인물도 있었다. 마지막으로 조태억은 존화주의에 입각하여 일본을 이적시하며 사행에 임했다. 조태억의 주변인들도 마찬가지로 일본에 대해 이적으로 파악하는 관점을 지녔다. 기본적으로 조선을 오랑캐인 일본보다 우위에 두는 입장에서, 회유와 유화책으로 일본인을 대할 것을 당부하거나 인간의 본성과 감정은 같은 것이라는 이해 아래 대등하게 대해야 함을 강조했다. 실제 일본을 체험하며 선험적 인식과 태도는 유지되거나 변형되었다. 이 과정에서 일본 체험을 통한 조태억의 대일관이 형성되었다. 본고에서는 조태억의 대일관을 일본의 자연, 일본의 문물, 일본인에 대한 것으로 분류하여 살펴보았다. 먼저, 조태억은 일본의 자연을 긍정적으로 바라봤다. 기행시와 창화시를 막론하고 일본의 승경을 찬미하였으며, 자연을 우열논쟁의 대상으로 파악하지 않고 일본의 것이더라도 좋으면 받아들이는 태도를 보였다. 두 번째로 일본 문물의 장점을 포착하는데 주력했다. 임진왜란의 주범으로 여겨지던 豊臣 가문을 무너트린 德川 가문의 위업을 높이는 것으로 일본에 대한 적개심을 해소한 후 일본의 번화와 좋은 점을 시의 소재로 삼았다. 일본의 우수한 풍속을 기록했으며 중국의 제도와 비교해 우월성을 인정하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일본인에게서 교화의 가능성을 발견했다. 新井白石을 만나 소통하면서 武國으로 인식했던 일본이 文을 향해 변화해가는 분위기를 느꼈고 중화로의 교화를 유도했다. 시문에 익숙하지 않은 일본인에게도 시문을 보내어 文을 통해 소통하려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조태억이 일본을 체험하기 이전에 지니고 있던 일본에 대한 선험적 인식은 당대인들이 보편적으로 지니고 있던 것이면서도 조태억이 속한 소론계의 일본 인식과 맥을 나란히 하는 것으로, 적개심과 이적관을 유지하면서도 일본에 대해 우호적인 태도를 강조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조태억이 실제 체험한 일본은 훌륭한 자연 경관을 지녔고 앞선 제도 등 좋은 을 발견할 수 있는 공간이었으며 文에도 관심을 보이는 나라였다. 이에 기본적으로 우호적인 태도를 지녔던 조태억은 일본에 대한 이해와 인정의 범위를 넓히고 그들에게 한 발짝 나아가 포용하려는 대일관을 보였다. 비록 중화주의나 화이관에서 탈피하거나 실학적 태도로 일본을 배우는 것에까지 미치지는 못했지만 일본에 대한 열린 자세는 선구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시기의 연구들은 대체로 위항 문사들에게 초점을 맞추었지만 정사였던 조태억도 문화교류의 일면을 차지했으며 대일관에 있어서도 상당히 포용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조태억 개인에게 있어서는 사대부로서 경직되지 않은 대일관을 지닌 인물이었다는 점에 그의 사행문학 연구에 의의가 있다. 한편으로 사행문학사의 흐름 속에서 홍세태·신유한 및 여항의 문인들과 함께 사행문학이 심화를 이루는데 초석을 다졌다는 것에 조태억 사행문학 연구의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 1711년 通信使의 使行錄과 일본 인식

        허창회 韓國學中央硏究院 2019 국내석사

        RANK : 247326

        本稿は趙泰億の『東槎錄』、任守幹の『東槎日氣』、金顯門の『東槎錄』等、1 711年の使行録を中心として、1711年の通信使の日本認識を分析したもので ある。先行研究では17、18世紀の朝鮮人が小中華主義に立脚した文化優越主義 で日本を認識したと分析してきたが、その中には根拠が不十分であるところもあっ た。ゆえに、1711年の通信使が日本をどのように認識していたのかを根拠とし て既存の見解を批判的に検討してみた。 18世紀の初葉、朝鮮は外交的な困難を覚えていた。日本との間では倭館を巡っ ての様々な事故を經驗しており、清国とは不法入国の事件が起こるたびに皇帝の意 向を伺う困難な立場にあった。よって朝鮮朝廷は日本に通信使を差遣するついでに 交奸に関する約条を締結することで対外的な困難を少しでも緩めようとした。17 11年の通信使の三使はこのような重い任務を帯びていたので、日本を夷狄視する よりは友好的に見ていたり、少なくとも先入観を持たない人物が選抜されたものと 見られる。 このような推論は三使の生涯や思想で裏付けられる。まず正使の趙泰億は少論の 巨頭だった崔錫鼎の弟子であり、崔錫鼎はまた少論の領袖だった南九萬の弟子であった。崔錫鼎と南九萬は朱子学の外にも様々な分野に幅広く関心を持っていた人 物であり、趙泰億の文集『謙齋集』では彼らの影響を受け老荘思想や閭巷文学、仏 教等についての事柄があまねく記されている。また副使の任守幹は師承関係は確認 できなかったが、趙泰億ととても親密な間柄で政治的な考えが同じであったと推測 される。通信使として日本滞在中、二人は少なからぬ数の詩を取り交わし、使行後 も親交が厚かったことは任守幹の死後、趙泰億が彼の祭文を詠んだことからもわかる。趙泰億と同じく、任守幹の文集『遯窩遺稿』にも日本の仏教や自然、文化、詩 文等、幅広い內容が含まれている。最後に従事官だった李邦彦は文集を残さず師承 関係も確認できなかったが、趙泰億や任守幹と親密な間柄だったことが『謙齋集』 や『遯窩遺稿』に見られるので互いに影響を与えあっていたと言えよう。 文集から見る趙泰億と任守幹の開放的な態度は日本に差遣されて書いた使行録で もそのまま見られ、つとに日本人と交流経験のある日本語の訳官であり1711年 当時押物通事として派遣された金顯門が残した使行録と見比べてみても大きな違い が見られなかったほどだ。彼らは先ず日本人が秩序整然で法をよく守り、通信使を 礼を尽くして迎えたと記した。また日本の風景が美しい事を率直に認め、感嘆する 記録が使行録のあちこちに記されており、先の1655年の通信使が日本の美しさ を認めながらも敢えて無視しようとした事に比べると1711年の通信使はより開 けた視線で日本を見ようとしたと言えよう。このような認識は日本の経済について も同じで、1655年の通信使が日本の豊かさを認めながらも批判的に見なそうと した反面、1711年の通信使は日本の寺院や諸太守たちの邸宅は勿論、民家に至 るまで幅広く観察し、客観的で友好的な態度で記錄した。また物產が豊富で、日本 人の経済的な水準が中国に劣らないと評価した。最後に文化においても、町中、道 路、舞楽、風俗等について見聞きしたことをそのまま記錄する―方、建築物、橋、 工芸、舟歌等を肯定的に評価した。日本を指して'蠻'と言う表現を始め小中華主 義から完全に脱した姿までは見えなかったが、中華と比較的無関係な部分までも残 らず批判する文化優越主義的な態度もまた見られなかった。 要するに小中華主義に立脚した文化優越主義で日本を夷狄視したと言う従来の見 解とは違い、1711年の通信使は小中華主義からの脱却には至らなかったが文化 優越主義に立脚して日本を見るのではなく、南九萬や崔錫鼎等、少論系の人物たち と同じく様々な分野に幅広い關心を持ち日本固有の価値を、ありのままその通り認 める態度を取った。1711年の使行録に日本の姿が実証的で客観的に描写されて いることはこのようなな脈絡から理解できる。 이 논문은 趙泰億의 『東槎錄』, 任守幹의 『東槎日氣』, 金顯門의 『東槎錄』 등 1711년 사행록을 중심으로 1711년 통신사의 일본 인식을 분석한 결과이다. 선행 연구에서는 17, 18세기 조선인이 소중화주의에 입각한 문화우월주의로 일본을 인식했 다고 분석해 왔으나, 그 가운데에는 충분한 근거를 갖추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이에 연구자는 1711년 통신사가 일본을 어떻게 인식했는지를 근거로 기존의 견해에 대해 비판적으로 검토하였다. 18세기 초엽 조선은 외교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일본과의 사이에서는 왜관을 둘러싼 여러 가지 사고들을 경험하고 있었으며, 청과 관련해서는 犯越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황제의 의향을 살피는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었다. 이에 조선 조정은 일본에 통신사를 파견하는 김에 交奸과 관련된 約條를 체결함으로써 이러한 대외적인 어려움을 조금이라도 완화하려고 했다. 1711년 통신사의 三使는 이러한 막중한 임무를 띠고 있었으므로, 일본을 이적시하기보다는 우호적으로 보고 있었거나 적어도 선입견이 없는 인물이 선발되었을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추론은 三使의 생애와 사상으로 뒷받침할 수 있다. 먼저 正使인 趙泰億은 少論의 巨頭 崔錫鼎의 제자였으며, 최석정은 또 소론의 영수인 南九萬의 제자였다. 최석정과 남구만은 주자학 외에도 다양한 분야에 두루 관심을 가지고 있던 인물들 이었으며, 조태억의 문집인 『謙齋集』 에는 이들의 영향을 받아 老莊 사상과 閭巷 문학, 불교 등에 대한 관심이 두루 나타나 있다. 또한 副使인 任守幹은 師承 관계는 확인되지 않으나 조태억과 매우 친밀한 사이로서 정치적인 이해가 같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통신사로서 일본을 방문하는 동안 두 사람은 적지 않은 수의 시를 주고받 았으며, 사행 이후에도 친분이 두터워 임수간의 사후 조태억이 그의 祭文을 지을 정도였다. 조태억과 마찬가지로 임수간의 문집인 『遯窩遺稿』 에는 일본의 불교나 자연, 문화, 詩文 등 폭넓은 내용이 담겨 있다. 끝으로 從事官 李邦彦은 문집을 남기지 못했고 사승 관계도 확인되지 않으나, 조태억이나 임수간과 두터운 친분을 맺은 것이 『겸재집』 이나 『돈와유고』 에 드러나 있으므로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을 것으로 볼 수 있다. 문집에서 보이는 조태억과 임수간의 개방적인 태도는 일본에 파견되어 쓴 사행록 에서도 그대로 나타나는데, 일찍부터 일본인을 상대한 경험이 있었던 일본어 역관으 로서 1711년 당시 押物通事로 파견된 金顯門이 남긴 사행록과 비교해 보아도 큰차이를 발견하기 어려울 정도다. 이들은 먼저 일본인이 질서정연하고 법을 잘 지키며 통신사를 예를 다하여 맞이했다고 보았다. 또한 일본의 풍경이 아름답다는 것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감탄하는 기록을 사행록의 곳곳에 남기기도 했는데, 앞선 1655 년 통신사가 일본의 아름다움을 인정하면서도 애써 외면하려 했던 것에 비하면 1711년 통신사는 보다 열린 시선으로 일본을 바라보았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모습은 일본의 경제에 대한 인식에서도 마찬가지였는데, 1655년 통신사가 일본의 부유함을 인정하면서도 비판적으로 바라보려 했던 반면 1711년 통신사는 일본의 寺刹 과 여러 太守들의 저택은 물론 民家에 이르기까지 두루 관찰하고 객관적이며 우호 적인 태도로 기록했다. 또한 물산이 풍부하여 일본인들의 경제적인 수준이 중국에 못지않다고 평가했다. 끝으로 문화에서도 시가지, 도로, 음악과 춤, 풍속 등에 대해 보거나 들은 그대로 기록하는 한편 건축물, 다리, 공예, 뱃노래 등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비록 일본을 가리킬 때 ‘蠻’ 이라는 표현을 쓰는 등 소중화주의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모습을 보이지는 못했지만, 중화와 비교적 관련이 없는 부분까지도 모두 비판하는 문화우월주의적인 태도를 취하지도 않았다. 요컨대 소중화주의에 기반한 문화우월주의로 일본을 夷狄視하였다는 기존의 견해와 달리 1711년 통신사는 소중화주의로부터 자유롭지는 못했으나 문화우월주의에 기반하여 일본을 바라보지는 않았으며, 남구만이나 최석정 등 소론계 인물들과 마찬 가지로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일본 고유의 가치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며 인정하는 태도를 취했다. 1711년 사행록에 일본의 모습이 실증적이고 객관적으로 묘사된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겠다.

      연관 검색어 추천

      이 검색어로 많이 본 자료

      활용도 높은 자료

      해외이동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