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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후기 '華陽洞' 공간의 정치적 의미

        박소희 고려대학교 대학원 2023 국내석사

        RANK : 1899

        兩亂과 명 멸망을 거치면서 형성된 尊周大義는 조선후기 지식인들에게 의리의 차원으로 설정되어, 통치의 정당성을 부여한 가치로 인식되었다. 존주대의론의 전개 과정에서 형성된 ‘화양동’ 공간의 위상에 대해 파악하기 위해서는 이의 흐름과 연계하여 살펴야만 한다. 이를 위해서는 조선후기 존주대의와 ‘화양동’ 공간을 유기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조선후기 존주대의가 태동함에 따라 조성된 ‘화양동’ 공간의 여러 변곡점을 추적하였다. ‘華陽洞’은 현종 7년(1666) 송시열이 우거하기 시작한 이래 조선후기 尊周大義에 대한 권위를 상징하는 곳으로 점차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송시열은 ‘화양동’에 머물며 중국식 의복을 착용하거나 명 황제의 어필 암각을 통해 이곳이 존주대의를 기억할 수 있는 공간이 되도록 조성하였다. 송시열 사후 그의 문인들은 송시열의 도통을 시각화한 華陽九曲 설정하여, ‘화양동’의 존주대의에 대한 위상을 강조하고자 했다. 또한 숙종 21년(1695) 己巳換局 당시 실추된 송시열의 권위를 회복시키고자 송시열의 문인들은 ‘화양동’에 華陽書院을 건립 후, 사액을 받아내었다. 이에 따라 ‘화양동’은 점차 노론의 정치·사상적 위상을 담지한 공간으로 기능하기 시작했다. 한편, 명 멸망 1주갑인 숙종 30년(1704)을 전후하여, 국가와 송시열의 문인들은 大報壇과 萬東廟를 설립하여, 존주대의를 현창하고자 했다. 이 과정에서 경상도 상주에서 영남 남인의 거두인 李萬敷와 ‘江門八學士’의 일원인 成晩徵 간에 만동묘를 둘러싼 논쟁이 발생했다. 이의 핵심은 만동묘의 非禮性과 黨論의 유무였다. 이러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화양동’은 숙종 42년(1716) 이루어진 丙申處分을 통해 노론의 정치적 부침 속에서도 그 명맥을 이어갈 수 있었다. 18세기 접어들어 국가가 존주대의를 주도하려는 움직임이 발생함에 따라 ‘화양동’ 또한 한 차례 변동을 맞이한다. 영조는 ‘화양동’에 대한 견제를 통해 국왕의 위상을 강화하는 조치를 시행하였다. 그 과정에서 대보단에 홍무제와 숭정제를 합사하는 등 만동묘와 대보단 간의 위계를 설정하였다. ‘화양동’을 견제하였던 영조와 달리 정조는 ‘화양동’과 송시열이 지닌 존주대의에 대한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특히 정조는 정조 즉위년(1776) 발생한 ‘이명휘 옥사’를 통해 이러한 의지를 적극적으로 표출하였다. 그러나 정조는 ‘화양동’과 송시열의 이미지를 어디까지나 존주대의의 명목에만 국한하는 모습을 보인다. 또한 정조는 󰡔尊周彙編󰡕 「皇壇志」의 부록으로 「華陽洞志」를 수록하여, ‘화양동’이 존주대의의 자장 하에 포섭되었음을 드러내었다. 17~18세기를 거쳐 확고한 정치·사상적 지위를 획득한 화양동은 19세기에도 그 위상을 견지하였다. 하지만 그 위상이 높아짐에 따라 ‘화양동’의 폐단 또한 지적되었다. 순조 3년(1803) 11월 ‘강세정 사건’을 통해 공권력에 직접적인 도전을 하거나 ‘福酒村’과 ‘華陽墨牌’를 통해 불법적인 이득을 취하였다. 한편 ‘화양동’은 이곳의 정치‧사상적 지위를 강조해주던 만동묘와 화양서원이 연이어 철폐됨에 따라 위기를 맞게 된다. 그러나 고종 11년(1874) 만동묘가 복설됨과 동시에 국가 사전체제 하에 편입되어 ‘화양동’의 위상은 다시금 강화될 수 있었다.

      • 尤庵 宋時烈의 碑誌文 硏究

        박관규 高麗大學校 大學院 2011 국내박사

        RANK : 1834

        본 論文은 557편에 달하는 尤庵 宋時烈(1607-1689)의 碑誌에 초점을 맞추어 尤庵 碑誌의 主人公인 墓主의 性向과 主題의 主要 領域 및 時代的 位相을 종합적으로 고찰함으로써 尤庵 碑誌의 具體的 面貌를 파악하였다. 그 결과 17世紀 朝鮮의 知性界에서 碑誌의 制作이 전대에 비하여 활성화되게 된 文化的 實狀과 原因, 特徵의 實態를 감지할 수 있었다. 尤庵은 17世紀 朝鮮 性理學의 수준을 대변하는 巨儒이자 山林으로서 그 학문적 位相과 정치적 지위가 뚜렷하다. 그는 文章에만 치력한 文士가 아니었다. 그러나, 평생 동안 講學과 作文 活動을 왕성하게 전개하여 그의 문집 󰡔宋子大全󰡕에는 그 누구보다도 한문학의 제 문체가 풍부하고 충실하게 수록되어 있다. 그 중에서 551 편에 달하는 碑誌는 그 양적 부분이 매우 압도적이다. 특히 우암의 碑誌文은 淸陰 金尙憲(1570∼1652)과 谿谷 張維(1587∼1638)의 계보를 이어받아 당대에 일가를 이루었는데, 그의 필력은 웅혼하였고 韓愈와 歐陽脩의 영향 하에 주자의 문체를 參用한 것으로 평가되었다. 尤庵 硏究는 朝鮮 後期를 이해하는 關鍵, 혹은 關門이라는 전제 하에 현재까지 철학과 사학 분야에서 연구가 꾸준하게 진행되어 왔으며 2007년 ‘우암 탄신 400주년’을 전후하여 학술 발표와 토론회가 개최되는 가운데 우암에 대한 여러 방면의 학술적 관심이 고조된 바 있다. 그러나 우암에 대한 기존의 연구는 17세기 이후 조선의 지식인 사회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전제로 하여 우암에 대한 인식이 긍정적이거나 혹은 부정적인 것으로 양 극단에 치우쳐 그 실상에 대한 객관적 평가가 부족한 실정이다. 우암에 대한 褒貶은 주로 그의 정치적 처신과 행적에 대한 후인들의 이해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으며 객관적이며 심도 있는 접근 방식과 연구 결과는 현재 미진하다. 본 논문은 기존의 우암 연구에 있어서 제한적인 시각의 범위를 확장하기 위한 일환으로 작성되었다. 일단 우암의 저작 가운데 주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550여 편에 달하는 尤庵의 碑誌를 연구 대상으로 삼아 우암 비지가 획득한 존재의 실태와 문학적 수준, 시대적 위상을 도출해 내어 아직까지 활성화되지 못한 碑誌 硏究에 대한 한 대안을 모색, 17세기 비지 찬작의 정채로운 한 현장의 단면을 우선 밝혀내었다. 尤庵의 碑誌文에 대한 구체적이며 본격적인 접근은 17세기 비지 찬작의 실태와 수준을 파악할 수 있는 시금석이다. 우암은 栗谷의 생애 및 학문과 관련된 碑誌 2편, 孝宗(1619∼1659)의 생애를 정제된 구조 안에서 펼쳐 낸 「寧陵誌文」 등 陵誌 3편을 포함하여 약 557 편의 비지를 찬작하였다. 우선 조선시대를 통 털어 가장 다수의 작품을 찬작해 낸 점에서 그 사적 위상과 의미를 간과할 수 없다. 尤庵 碑誌가 양적으로 풍부하게 된 배경에는 이미 20대에 沙溪 金長生(1548∼1631)의 문하에 입문한 이후 西人系 名家 및 名人들과 인적·학적·정치적 교류의 범위가 확대되고 심화된 점과 무관치 않다. 청탁과 수락의 과정에서 우암은 비지에 대한 자신의 기본 관점과 서술 과정에 있어서 撰作의 動機와 敍述의 方向, 墓主-被撰者에 대한 자신의 시각과 평가의 방향, 교정의 세부 내용 등 비지에 관한 제반 미학적, 수사적 담론을 치밀하고 다양하게 전개하였다. 본 논문에서는 557여 편의 방대한 양을 자랑하는 尤庵의 碑誌 전체에 우선 초점을 맞추어 찬작의 주요한 배경을 간파하기 위하여 우암 및 그 주변 인물들이 전개한 방대한 담론의 양상을 검토할 뿐만이 아니라 우암 비지와 직접 관련된 기사를 우암의 詩, 疏箚, 書, 祭文, 序文, 記文, 跋文 등에서 우선 두루 섭렵함으로써 당시 우암과 교류의 양상이 뚜렷한 17세기 지성들의 증언까지 함께 고찰하였다. Ⅱ장에서는 우선 17세기에 비지의 찬작이 유행하게 되는 분위기 속에서 비지의 功效에 대한 당대 인식과 우암 비지에 있어서 주요한 인물의 양상을 검토하였다. 이 검토를 통하여 우암이 비지를 다작하게 된 이유와 당시 우암의 지위가 어떠한 관계에 있는지 설명해 보았다. 우암이 다작을 하게 된 일차적인 배경에는 王室의 요청 및 17세기 西人系 家門의 성장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특히 우암 및 그 주변 인물들의 비지에 대한 소통의 양상을 우암의 서간문 전체와 주변 인물들의 언급 등 방계 자료를 면밀히 조사하고 검토하여 비지의 功效와 찬작의 일반적인 관행, 우암의 기본적인 찬작 성향을 중심에 두고 찬작을 둘러싼 제반 논의들을 통하여 17세기 서인계 문인 사회에서 비지에 대한 제반 주요 논의의 양상이 구체적으로 밝혀졌다. Ⅲ장에서는 우암 비지에 形象化된 主題의 主要領域을 時代相의 反映, 君臣 知遇와 尊周大義의 追求, 正學 守護와 時流 批判, 政治的 危機와 晩節의 闡揚 네 개의 영역으로 나누어 밀도 있게 고찰하여 보았다. 이들 주제의 주된 영역은 尤庵의 碑誌에 있어서 가장 비중 있는 墓主의 삶을 대변하고 있는데, 우선 17세기 시대적 한계와 특수성 속에서 당대 명인들의 인상적인 삶을 양상과 지향, 시대에 대한 고민을 파악 가능케 한다. 우암은 시대의 폭압 속에서 명멸해 간 명인들의 삶을 애도하고 동조하였으며 시대적 한계를 극복하는 개인의 삶을 보여주는 가운데 시대와 인간 가치에 대하여 當爲의 準則을 제시하고 있다. 이 장에서는 이들 조선 명인들의 삶을 통하여 우암이 지켜내고 현양하고자 한 삶의 가치를 파악하는 과정에서 17세기 사대부 사회에서의 삶의 지향이 갖는 보편적 분위기와 전후의 시대와는 매우 변별적인 특성 등을 파악하는 가운데 우암 비지의 주요 작품이 획득하고 있는 미적 수준의 면모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우암이 채택된 어휘의 심각성, 시대상의 면모를 통하여 비지의 찬자로서 우암의 시각과 문제의식 등이 구조적, 형식적으로 어떻게 구현되고 있는 지 그 미적 수준의 정도를 간파되는 것이다. Ⅳ장에서는 17세기 비지의 찬작 현장에서 우암 비지의 위상을 정리하였다. 우암은 당시 정치와 문화의 중심으로 부상한 서인계 명가 뿐만 아니라 왕실과 학계로부터 비지의 찬작이 쇄도할 정도로 그 위상이 높았을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이 비지의 문체 자체에 대한 인식과 그 사적 전개 양상에 대한 지식이 풍부하였다. 그리고 당시 557편에 달하는 비지를 요청 받아 생산해 내는 과정에서 조선시대의 여타 문장가들보다 비지의 서술 방향과 표현 방식에 대한 의미 있는 담론을 전개하였다. 따라서 17세기 비지의 찬작 현장과 작품 활동 양 측면에서 우암 비지의 위상은 간과할 수 없는 위치를 점하고 있다. 본 장에서는 우암 비지에 대한 당대의 평가와 비지에 대한 우암의 기본 시각이 갖는 의미, 우암 비지에 관류하는 주제의 영역이 보여주고 있는 시대적 의미를 염두에 두고 17세기 비지의 정채로운 영역을 차지하고 있는 우암 비지의 성격을 도출하였다. 우암은 그의 일생 동안 문장가로 자부했던 인물은 결코 아니다. 그의 인생 목표는 문장가로서의 삶이 아니라 전도된 시대의 가치를 교정하고 正學의 계보를 정립, 수호하는 학인으로서의 삶이었다. 우암 비지는 17세기의 주요한 역사적 사건을 대변하는 주요한 시대적 소산으로서, 時代의 價値를 고수하면서 生死를 불고하다 명멸해 간 17세기의 지성과 명인들에 대한 尤庵의 哀悼이자 獻辭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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