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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를 통한 구약신학적 연구 : 월터 카이저와 엘머 말텐스의 비교

        오성희 대신대학교 신학대학원 2008 국내석사

        RANK : 249647

        This study went behind as to ‘תירב’(berit) “We can say that the relation of Covenant between God and his people” and The Old Testament was especially written of the redemptive theology around ‘תירב'. The initial explicit mention that ‘תירב' was written in the Bible be revealed the Noachic promise in GE6:18 that “But I will establish my covenant with you” and the basic contents that was described in GE17:7 “I will establish my covenant as an everlasting covenant between me and you and your descendants after you for the generations to come, to be your God and the God of your descendants after you.” is your key of the whole God's Covenant in the Bible. This Covenant, up to the Adam promise, the Noachic promise, the Abrahamic promise, the Sinatic Covenant, the David's Covenant, the New Covenant, was expressed through various groups to have the character of unity and progression in the middle of the current of the history.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give a person an idea of that Jesus Christ have perfectly accomplished ‘תירב' in the center of the history of redemption and is assured the better Covenant. We can realize the importance of ‘תירב' under the situation that pay no attention to the theme of ‘תירב' in actuality. And Walter C. Kaiser and Elmer A. Martens, two evangelism theologists, that appeared recently have something in common to analyze the old Testament Theology that is based on the concept of Covenant. Walter C. Kaiser put the accent on the concept of Covenant and Promise and the Bible is the theological center of canon that can make proof of all ages. He provides the analysises about a link of the old Testament and the new Testament to leave the first start of Covenant from GE12:1-3, just like Abraham is the start point of the history of redemption in order to pursue the God's Covenant to focus on the Covenant of Messiah. Elmer A. Martens is based on the Covenant and promise that give emphasized to the Plot of the Old Testament to analyze the Theology of the Old Testament. He makes use of the words that is the God's Plan ,the concept of Covenant, to talk with Moses. He analyzed that the theme to join the Bible over all is the God's Plan and this plan is the salvation, the Covenant community, the knowledge to know God, the land. He explained that arrived in the Imperial Age to get through the former Imperial Age and get joined on the new testament to get through the later Imperial Age. And Walter C. Kaiser watched as the center another to guide steps those contents and interpret the Bible to establish the unique main theme that is the Covenant the Old Testament by diachronic method, by the ages or centuries. But Elmer A. Martens saw as Covenant of a model pattern that gradually branch out the Covenant in spite of appear by itself an Covenant to be broken off by the ages that God's plan appeared fourfold. So the concept of ‘תירב' is very important concept to comprehend the Bible. To establish the Covenant through the whole history of the Bible is the sovereignty act of God. As God's people in the God's Covenant must live to obey to the words of God's Covenant grace as people of new Covenant in Christ to thank the grace and love unconditionally for God to show mercy. 본 연구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많은 개념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신학적 개념인 “하나님과 그의 백성 사이에 세워진 언약(Covenant)의 관계”라고 할 수 있는 ‘תירב’(berit)에 대해서 살폈고, 특히 구약은 ‘תירב'를 중심으로 한 구속사적 신학을 기록하고 있다. 성경에 ‘תירב'가 나타나는 최초의 명시적 언급은 창세기 6:18절에 “나는 내 언약을 세우리니”라는 노아언약에서 나타나고 있으며, 그 기본적인 내용은 창세기 17:7절에 나타나는 “나는 너의 하나님이 되고 너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는 성경에 있는 모든 하나님의 언약의 핵심이다. 이 언약은 하나님과 아담과의 언약, 노아와의 언약, 아브라함과의 언약, 모세와의 언약 그리고 다윗과의 언약, 새 언약에 이르기까지 역사의 흐름 속에서 통일성과 점진성의 성격을 가지고 다양한 모양으로 나타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속사의 중심에서 ‘תירב'를 성취하시고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에서 완전한 성취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게 하는데 목적이 있다 . 이러한 ‘תירב'라는 주제가 오늘날 소홀히 여겨지고 있는 현실에서 구속사에 나타난 ‘תירב'의 중요성을 인식하였다. 그리고 최근에 나타난 복음주의 입장의 두 신학자인 월터 카이저(Walter C. Kaiser)와 엘머 말텐스(Elmer A. Martens)는 구약성경 신학을 ‘언약’이라는 개념에 기반을 두고 구약신학을 해석하는 공통점이 있었다. 월터 카이저(Walter C. Kaiser)는 ‘약속’ 내지는 ‘언약’(Promise)이라는 개념에 강조점을 두고 성경이 모든 시대별로부터 증명될 수 있는 정경의 신학적 중심점이라는 것이다. 그는 메시아의 약속에 초점을 두면서 하나님의 약속을 추적하기 위하여 구속사의 출발점이 아브라함인 것과 마찬가지로 ‘언약’의 첫 시작을 창세기 12:1-3절로부터 출발하여 신. 구약의 연관성에 대한 해석들을 제공한다. 엘머 말텐스(Elmer A. Martens)도 구약성경 신학을 해석함에 구약의 ‘흐름’(Plot)을 강조하면서 ‘계약’(Covenant) 내지는 ‘언약’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그는 하나님과 모세와의 대화 속에서 계약의 개념을 ‘하나님의 계획’이라는 말로 사용한다. 그는 언약의 패러다임을 발견한 출애굽기 5:22-6:8절에서 그 출발점으로 하여서 구약 성경을 전체적으로 묶어주는 주제는 ‘하나님의 계획’이며, 이 계획은 구원, 언약공동체, 하나님을 아는 지식, 땅이라고 한다. 그는 출애굽 사건에서 전(前) 왕정시대를 거쳐 왕정시대에 이르고 후기 왕정시대를 거쳐 그 후 신약으로 이어졌다고 한다. 따라서 월터 카이저는 구약성경을 통시적인 방법으로 즉 시대별로 또는 세기별로 ‘언약’이라는 독특한 중심 주제를 설정하면서 성경을 해석하고 그 내용들을 이끌어나가는 또 하나의 축으로 보았다. 그러나 엘머 말텐스는 하나님의 계획이 4중적으로 나타나는데 하나의 계약이 시대별로 단절되어 단독으로 나타남에도 불구하고 점진적으로 ‘계약’(Covenant)이 확장되어가는 일종의 모형론적인 계약형태로 보았다. 이렇게 ‘תירב'라는 개념은 성경 이해에서 매우 중요한 개념이었다. 성경의 역사 전체를 통하여 언약을 세우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행동이시다. 우리 또한 하나님의 언약 안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 된 자로서,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무조건적인 사랑과 은혜에 감사하며, 그리스도안에서 새 언약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야 한다.

      • 정경적 접근법의 신학적 의미와 해석학적 적용

        송덕만 대신대학교 신학대학원 2008 국내석사

        RANK : 249647

        성경은 모든 믿는자들을 위한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책이다. 성경은 초월성을 가지며,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이라는 신적인 차원에 속해 있다. 성경은 곧 하나님의 책인 것이다. 그러나 성경이 단순히 하나님의 계시를 포함하는 하나님 자신의 책만이 아니라 아울러 사람의 책이기도 하다. 구약성경을 살펴볼때 우리는 너무도 오랜 역사를 다루고 있는바 현대인들이 쉽게 공감할 수 없는 문화, 관습, 종교, 언어, 사상등이 깊이 스며들어 있어서 읽기에 매우 부담스러운게 사실이다. 이점에서 구약성경을 올바로 해석하여 그 의미를 오늘날의 사람들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한다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일이면서도 쉬운 일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특히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해석은 성경을 석의하는데 준수해야 할 법칙들을 다루는 것으로 성경의 진리를 정확히 전달하는 가장 중요한 작업이다. 그러나 요즈음 해석학이 관여하는 범위가 매우 넓어져 해석학은 역사적 상황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지켜야만 할 조건들을 근본적으로 따지는 것인데 이것은 석의하는데 적용시킬 방법론적인 법칙들과 아울러 역사적 이해에 관한 인식론적 전제들을 포착하는 것이다. 그런데 구약신학에 대한 자연스러운 방법론은 없다. 이에 대한 대답으로 “구약을 이해하기 위한 기본적인 준칙들을 찾아내고자 하는 사람은 어떤 의미의 해석학적 방법론을 거부하고 어떤 의미의 해석학적 방법론을 발전시켜 나가야 하는가?”란 질문을 할 수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오늘날의 하나님이라면 그어떤 해석학적 원칙도 그 본문으로 하여금 오늘날의 하나님을 증언하도록 강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런 이유로 적절한 이해를 하기위해서는 그 어떠한 방법론도 본문고유의 해설자인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령을 대신할 수 없다는 것이다. 역사적 본문으로서 오늘날 살아계신 하나님께 봉사하는 본문을 해석하는 사람은 모든 방법론의 한계를 알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므로 모든 활용가능한 수단을 동원하여 본문을 그 역사적 맥락속에서 이해하고 자의적인 해석을 배제하는데 관심을 쏟는 해석방법론이 추구되어야 한다. 다시말해 구약성경 본문의 원래 저자가 언제, 무슨말을, 어떤 의도로 했는지에 대해서 분석하는 작업으로 어느 주제를 역사적인 변화에 따라서 종적으로 연구하여 본문완성까지의 역사를 재구성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를 통시적(diachronic)방법이라 하는바 정경의 최종형태에 관심을 두고 있는 그 해석의 목표를 어느 주제를 과거나 미래를 고려하지 아니하고 어느 특수한 시기에서 관찰하려고 하는 공시적(synchronic)방법인 정경비평을 통해 역사비평학이 성경을 정경으로부터 이탈하여 정경으로서 신앙공동체안에서 성경의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오류를 시정하기위해 정경비평에서는 성경을 정경으로 읽으려 한다. 정경비평은 정경화공동체와 현대신앙공동체 사이의 연속성을 강조함으로써 학자들의 연구를 교회의 성경봉헌대로 인도하는 역할을 하였다. 정경비평은성경을 정경적인 형태로 보존한 공동체와 분리할수 없음으로 성경이 교회의 책임을 분명히 증거한다. 구약본문의 의미는 최종형태의 정경형태의 신학적 맥락에 의해 결정되며 성경해석의 주요 임무가 본문의 의미와 메시지를 찾기 위한 최종형태로서의 정경본문과 그 신학적 맥락에 초점을 맞추는데 있다. The Bible is the book that records words of God for all believers. The Bible is transcendental and belongs to the category of the divinity which means words of the revelation of God. The Bible, that is to say, is the book of God. But it is not only the book including the revelation of God, but also the book of human beings. The Bible has cultures, customs, religions, languages and thoughts that can rarely evoke the present men' sympathy simply because it has dealt with very long history, so we find out that we can not read it easily. On that point, it is necessary but uneasy to interpret the Bible correctly and to inform many people of the correct meaning of it. Especially, the interpretation in the traditional meaning is related to rules that we abide by when we construe the Bible, so it is very important to transfer the truth of it. Nowadays, however, hermeneutics has many and various categories. As the result, hermeneutics needs capturing epistemological premise about historical understanding and methodical rules for construing the Bible. And yet, there is not natural methodology about the Old Testament theology. In view of the results so far, we can answer as given below, "What kinds of methodologies of hermeneutics do we set aside and what sorts of methodologies of hermeneutics do we develop?" Any hermeneutical principle can not compel the text to testify today's God on condition that God in Israel is equal to today's God. Accordingly, no methodology can take the place of God's spirit which is interpreter of the text. Every hermeneutics scholars must recognize that every method has its' own limit. Therefore, he or she has to make good use of all the measures and pursuit of method of hermeneutics which is related to removing arbitrary interpretation . In other words, it's impossible to reconstruct history to completion of the text longitudinally beside the orignal author's intent. This is called diachronic method. In canon critique, they attempt to read the Bible as a canon to correct errors that historical critique doesn't fulfil well in faith-community as a canon. Canon critique emphasizes the continuity between canonical community and modern faith-community and it leads researches of scholars to the bible dedication stand of the church. The Bible clearly testifies responsibility of the church because canon critique can not be divided from canonical community. The meaning of the Old Testament depends on the canonical theological context and the principal task of the Bible interpretation focuses on matching with the meaning of the text and canonical text for the original message.

      • 이사야의 남은 자 사상 연구

        문기원 대신대학교 신학대학원 2006 국내석사

        RANK : 249647

        It is true that the terms like ( ראשׁ, טלפ , טלמ, רתי , dyric; ) which represent the concept of "the Remnant" in the Old Covenant is rather nonreligious and worldly. Historically, 'the remnant' means a group of people who have survived a disaster. As a mythological concept, the theory of "those who have survived" actually belong to the context of judgment and rescue, All of these words which represent the theory of "the Remnant " has a passive meaning that emphasizes God's sovereignty. Not long before the theory of "those who have survived" was formulated, it also appeared in the Old Covenant during the period of Elijah, Noah, Abraham and Lot, Jacob and the special events surrounding Joseph. In the case of Elijah, the theory of "the Remnant" is closely connected to the political situation and religiously crucial moment in Israel. While the theory of "the Remnant" until this time was centered on the past, after the events of Elijah, it concerns the survivors of the future. In such a politically, and historically delicate situation, the period of Elijah was the very first time that the term "the Remnant was theologically used." Amos promised that there would be survivors because of God's mercy. Micah pointed out that the people of the Israel would also be the object of judgment. Although God passed judgment, he also left survivors based on his benevolence and through them he emphasized the hope of restoring the future of Israel. The remnant of Isaiah ultimately mean that people would be prepared for God's kingdom. Isaiah proclaimed an era of reformation He anticipated God's eternal kingdom, not the old and decayed organization of the past. Isaiah surely believed that Yawheh would control all the events of the land. So he regarded the present tragedy as part of the greater plan. This tragedy was sort of a discipline. It was looked upon as a method of purification leaving behind purified person, after Yahweh removed the impurities of the race. Meanwhile, the prophets of the community after Isaiah such as Haggai and Zechariah went about their based on their experiences in difficult times in prison and light of recovery after in prison. The times after imprisonment opened a new age just like the prophecies of the times before imprisonment. As messengers of God, they warned the people of the destruction, disgrace, and of being captured, and on the other hand, they advised them to look for shelter in God. Haggai and Zechariah confirmed the hopes from before exile. Which hopes based upon the fact that Yahweh Zion and the kingdom of David were chosen were becoming a reality. They regarded the small community of the Jews as the true survivors of Israel, and they also considered Zerubbabel as the descendant of David who ruled the remaining people. Although their preaching was bold and very dangerous, their message was a positive proclamation which showed a future full of hope for the remaining people. In conclusion, the remaining people who appeared before Isaiah were the remnant of purification, and show us that they have returned to Jerusalem after have been purified (in other words, after they have been imprisoned). 구약 성경에서 “남은 자”의 개념을 나타내고 있는 사알(ראשׁ), 파라트( טלפ ), 마라트(טלמ), 야탈(רתי ), 사라드( dyric; ), 등의 주된 용법과 파생어들이 비종교적이고 세속적이라는 것이다. 이 “남은 자”는 때로는 역사적으로는 확실한 실재, 즉 재앙으로부터 살아남은 백성들의 “남은 자”를 의미한다. 또한 신학적인 개념으로서의 남은 자 사상이 심판과 구원의 문맥에 속하여 그 개념이 양면적이었다. 그리고 남은 자 사상을 나타내는 이러한 단어들은 모두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역을 강조하는 것으로 수동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남은 자”사상이 엘리야 시대에 이르러 신학적으로 정립되기 이전에도 노아, 아브라함과 롯 이야기, 야곱과 에서의 이야기, 요셉의 생애에 있었던 특별한 사건들을 통하여 구약 성경에 나타난다. 엘리야의 경우에는 “남은 자”사상이 이스라엘의 정치적인 상황과 종교적인 위기와 더불어 나타나고 있으며, 특히 지금까지 남은 자 사상이 과거의 사건 중심인데 반하여 엘리야의 사건 이후에는 미래의 남은 자를 언급하고 있다. 역사적, 정치적 난국 속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에게 적용되었던 “남은 자”용어가 신학적으로 사용된 것은 엘리야 시대가 처음이다. 이사야 이전 공동체의 선지자인 아모스는 하나님의 심판 가운데서 자비로 남은 자들을 남겨 두실 것을 약속하고 실제로 남겨두신다. 미가 선지자는 하나님의 심판날에 이스라엘 백성도 심판의 대상이 됨을 지적한다. 하나님이 심판을 선고하면서도 인애와 성실에 기초하여 남은 자를 두실 것이고, 그들을 통하여 이스라엘은 미래에 구원의 희망을 가질 것임을 강조한다. 이사야에서 남은 자들은 하나님의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왕국을 위해 스스로 준비하게 할 그런 성질의 것을 말한다. 왕의 기름 부음을 받은 사역자로서 이사야는 변혁의 새 시대를 선포하고 옛 시대의 남은 자들에게 위대한 왕의 오심을 준비하도록 권고하였다. 그는 옛 공동체가 낡고 썩어져가는 조직들에서 돌아서 하나님의 왕국의 새로운 불멸의 조직들을 고대할 것을 요청하였다. 이사야는 야훼가 지상의 사건들을 통제하고 모든 민족을 평화롭게 다스릴 당당한 왕권을 확립하려는 의도는 확고부동한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그래서 그는 닥친 현재의 비극을 그 계획의 일부로 보았다. 이 비극은 일종의 단련으로서 말하자면 야훼가 당신 민족의 성격에 쓸모없는 불순물을 없앤 다음 징벌을 받고 깨끗해진 한 백성을 남겨두려는 정화작업으로 보았다. 한편 이사야 이후 공동체의 선지자들인 학개, 스가랴는 포로기의 어두운 경험과 포로후기의 밝은 회복의 빛을 배경으로 사역하였다. 포로 이후의 시기는 포로 전기 선지자들의 예언이 성취되는 새 시대를 열었다. 하나님의 언약 기소자들로서 그들은 그 백성들에게 임박한 멸망과 수치와 사로잡힘을 미리 경고하는 한편, 그들이 하나님에게서 피난처를 찾을 것을 권고하였다 학개와 스가랴는 유배 이전의 국가 공식신학 고유의 희망들, 즉 야훼 시온과 다윗왕조를 영원히 선택하였다는 사실에 근거를 둔 희망들이 성취될 것을 확인하였다. 그들은 유대인들의 그 작은 공동체를 이스라엘의 참으로 남은 자들로 보았고, 또한 스룹바벨은 바로 그 남은 자들을 다스리는 대망의 다윗후손으로 보았다. 그들의 설교는 대담하고 선동적이며 극히 위험한 내용이 있었다 해도 그들의 메시지는 희망에 찬 남은 자들의 미래를 보여주는 긍정적인 선포였다. 결국 이상에서, 이사야 이전에 나타난 남은 자 사상은 정화를 통하여 남은 자들이며, 하나님의 포로기라는 정화 과정을 거치면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귀환민으로서의 남은 자라는 포로 후기의 남은 자들에 대한 이해를 보여준다.

      • 한국교회의 문제점과 그 대안 개혁주의적 입장에서

        황귀향 대신대학교 신학대학원 2006 국내석사

        RANK : 249647

        Up to now, it is true that Korean church has been envied by many foreign churches due to marvelous growth. However, there were too many negative points attendant upon it. Social confidence was too low, compared with the growth of church. Churches ought to be light and salt, but on the other hand, they have been smudged with local color, denomination, religious association and collusion with secular policy. Over 100 the presbytery are just like that and so are theological colleges established randomly. Church has always been in existence in the times of special circumstances. Theological work not considering this circumstances has concern to lose theological service spirit. That's because theological reason for being is not found in theology itself but placed in the work of serving church in the circumstances. But from the beginning Korean church disregarded logos and proliferated mysticism by moving only bless pursing persons of shamanism in the mind of Korean people and secondly produced the intelligence-superiority and god-human cooperative alminian aspect. It seems that pastoral tendency, being sensitive and putting emphasis on human will developed at similar time and the movement of prayer and mysticism impeded harmonious growth of faith in church, taking advantage of seclusion of Korean church. It seems that Korean church mistook 'only belief' for 'only faith'. It is 'positive way of thinking', not belief. Church should believe divine providence and ability but do within the recorded logos. What is important is not a way but essence and not the outer part but the inner part. There are a lot of diagnosis of future and we make an ambiguous diagnosis that Korean church will become decline in 40-50 years like European church, but we should not speak of decline without any prescription. There are things to be changed and things not to be changed. Things to be changed are everything in the world and the change has an effect on all areas of our life. However, things not to be changed are God's truth, that is logos. We live in the rapidly changing world situation. Future is coming closer toward us. We are in the world but not of the world. Therefore we can not live separately out of the world. Change of world brings about change of church. Besides, change of world brings a change of the way of faith, a view of the world and the values in large parts. Pastor has a responsibility to preach the Bible's permanent gospel to the rapidly changing world. If pastor don't see correctly the rapidly changing world, he is apt to fall into failure behind the times or helpless religious leader who falls in public moral of the times. Thus like logos in the chapter 24 and 25 of Matt. we should prepare future by recognizing presage of the times. We may destroy ourselves without alternatives toward the change of the times approaching unexpectedly while we depend ourselves in peace. There is a saying that future is not given but made. But to predict how future world and Korea will change is not easy. Because there are too many sudden accidents and outbreak in history, it is not easy to draw a conclusion frankly the development of history's direction. Nevertheless, future study has an imperfect but an important value because to propose alternative future makes a contribution to wise choice. Countries or peoples have no choice but to be failures behind the world history that can't understand correctly the current of the change that social, cultural, economic and scientific technical change become speed up like nowadays, and expectation and anxiety of future exchange. Thus our church should suggest the possibility of index to show the way church have to go next century of more various and diversified world. It shows that what is more important than ecclesiastical authority and denominational tradition is christian's individual religious conscience and each church's independent autonomy. So, it is thought that if adaptability and flexibility of organization is well utilized, we can develop more greatly together with absolute logos-centered faith and conscience-centered faith one of the merits of Korean church. Accordingly, it is urgent before everything to research on effective church management through provision against 21th century. 현재까지 한국교회는 경이적인 성장으로 많은 외국 교회들의 부러움을 산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에 따른 부정적인 요소가 너무나 많았다. 교회의 성장에 비해서 사회적인 신인도가 너무나 낮은 것이다. 빛이 되고 소금이 되어야 할 교회들이 그 반대로 지방색과 교파주의 교단주의 또한 세속정치와의 야합으로 얼룩져 왔기 때문이다. 100여 개가 넘는 장로교단이 그렇고 난립되어진 신학교가 그렇다 교회는 항상 특수한 시대적 상황 속에 존재해왔다. 이러한 상황을 고려하지 않는 신학작업은 신학의 봉사적 성격을 상실할 우려가 있다. 왜냐하면 신학의 존재목적이 신학 그 자체에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상황 가운데 처해있는 교회를 섬기는 일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처음부터 말씀을 제쳐두고 한국인의 심성 속에 있는 샤머니즘적 기복주의를 발동시켜 신비주의를 양산했다는 것이요, 둘째는 지성 우월주의와 신인 협동적 알미니안적 양태를 만들어 내었다는 것이다. 감성적이고 인간의 의지를 강조하는 목회적 경향들이 비슷한 시기에 일어났는데 특히 기도원 운동이나 신비주의 운동이 한국교회의 둔세주의에 편승하여 교회의 균형적인 신앙 성장을 저해한 것이 아닌가 한다. 한국교회는 “오직 믿음”을 “오직 신념”으로 잘못 오해한 것이 아닌가 한다. 이는 “젖극적 사고방식”이지 믿음은 아닌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능력과 섭리를 믿되 기록되어진 말씀 안에서 해야 한다. 우리에게는 방법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본질이 중요하며, 주변의 것보다는 내부의 것이 더 중요한 것이다. 21세기에 관한 진단은 많고, 한국 교회도 40-50년 후가 되면 유럽 교회와 같이 쇠퇴하게 될 것이라고 막연하게 미래를 진단하지만, 아무런 처방 없이 쇠퇴론만을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 세상에는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변하는 것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이며, 그 변화는 우리들의 삶의 전 영역에 미치고 있다. 그러나 변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진리 곧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급변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21세기는 시시각각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 우리는 세상에 속한 자는 아니나 세상에 살고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 밖에서 따로 떨어져 살 수 없다. 세상의 변화는 교회의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 뿐만 아니라 세상의 변화는 신앙의 방법과 세계관과 가치관을 많은 부분 바꾸어 놓고 있다. 목회자는 변치 않는 성경의 복음을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변해 가는 세상에 증거 하는 책임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목회자가 무서운 속도로 변하는 세상을 바로 읽지 못한다면 시대의 낙오자가 되거나, 그 시대의 풍속에 빠져서 무력한 종교 지도자로 전락하기 쉽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4장과 25장에서 말씀하신 대로 시대의 징조를 바로 알아 깨어 있어서 오는 미래를 준비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평안하다 평안하다고 자위하다가 갑자기 들이닥친 시대적 변화에 대안 없이 자폭할지도 모른다. 미래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말이 있다. 그렇지만 미래의 세계와 한국이 어떤 모습으로 변할 것인가를 예측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역사는 워낙 돌발적인 사건, 사고가 많기에 역사의 방향이 어떻게 전개될는지 단적으로 결론짓기는 어렵다. 그렇다 해도 대안적인 미래를 제시하는 것도 현명한 선택에 이바지하므로 미래의 연구는 불완전하다고 해도 중요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 오늘날처럼 사회적, 문화적, 경제적, 과학기술적인 변화가 가속화되고, 미래의 모습에 대해서 기대와 불안이 교차되고 있는 이러한 변화의 추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국가나 민족은 세계사의 흐름에 낙오자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교회는 보다 다양하고 다변화될 다음 세기에 교회가 어떤 길을 가야 할 것인가를 보여주는 지표가 될 가능성을 보여주어야 한다. 또한 교권주의와 교파의 틀보다는 더 중요한 것이 신자들 개개인의 신앙양심과 개교회의 독립적 자치권임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조직의 융통성과 유연함을 잘 살린다면 우리는 한국교회의 장점중의 하나인 절대적인 말씀중심의 신앙과 양심중심의 신앙을 보태어 더 발전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므로 21세기를 대비하며 효율적인 교회경영에 대한 연구는 무엇보다도 시급하다 하겠다.

      • 로마서를 통해서 본 피조물의 탄식과 회복의 의미 : 로마서8:18-27절을 중심으로

        김종인 대신대학교 신학대학원 2015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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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논문의 목적은 로마서8:18-27절을 통해서 생태신학자들의 주장을 비평하고 이 본문에서 바울이 우리에게 주려고 했던 메시지가 무엇인지 살펴보는데 있다. 이를 위해서 생태신학이 등장하게 된 원인부터 찾아보고, 생태신학자들의 다양한 의견을 소개할 뿐 아니라, 비판적으로 평가한다. 이러한 평가는 로마서8:18-27절을 살펴보면서 바울의 진정한 의도를 살펴보고 로마서를 통해서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피조물의 탄식과 회복의 의미에 대해서 살펴보게 될 것이다. 많은 생태신학자들은 환경보전의 주제를 가지고 로마서8:18-27절을 많이 다루고 있다. 하지만 바울은 로마서8장의 본문을 환경보존의 주제로 쓴 것이 아니다. 바울이 로마서를 쓰게 된 목적은 크게 3가지로 말할 수 있다. 선교적인 목적, 변증적 목적, 목회적 목적이 그것이다. 로마서는 이 세 가지의 목적으로 쓰여진 책이다. 이에 대해서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로마서에서 말하는 “피조물의 탄식”은 인간에 의해서 지속적으로 오염되고 있는 자연환경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피조물이 탄식하고 있는 이유는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서 자신의 뜻과는 상관없이 허무한데 굴복하고, 썩어짐의 종노릇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은 이것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다시 원래의 상태로 돌아가려고 해산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피조물의 회복을 말할 때 어디까지가 회복이며, 인간의 노력으로 피조물이 회복될 수 있는지, 바울이 말하는 피조물의 회복이 무엇인지 살펴볼 것이다. 이를 위해서 로마서8:18-27절을 분석하고 주해하여 피조물이 탄식하는 이유는 인간의 죄로 말미암음이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써 신자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입게 될 것이고, 피조물 역시 회복되어져서 그 영광에 참여될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피조물의 회복이라고 주장한다. 마지막으로 많은 생태신학자들은 현재 피조물이 오염되어 많은 대안을 내어놓고 있다. 하지만 성경에는 시간이 지날수록 환경이 개선되거나 좋아질 것이라는 말이 없다. 그래서 우리가 노력하고 관심 가져야 하는 것은 지금 당장의 해결방법을 찾는 시도가 아니다. 종말의 시대를 살아가는 신자들이 해야 할 일은 장래의 영광을 바라보면서, 현재의 고난 속에서 소망하면서 탄식해야 한다. 그리고 성령의 탄신의 간구에 참여하여 장래의 영광을 맛봄으로써 현재의 고난을 극복하며 소망 가운데 종말을 기다려야 할 것이라고 권면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 Calvin Wesley의 Sanctitication에 대한 유사성과 상이성에 관한 연구

        이충만 대신대학교 신학대학원 2007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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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화(Sanctification)는 동서 고금을 막론하고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큰 관심이며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가는 회복의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 접붙임을 얻고 그 분과 연합하여 하나가 될 때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될 수 있는 것이다. 즉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 거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 분의 거룩한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칭의(Justification)는-내 안에 계신 성령과 하나로 연합되어-우리를 그 분의 주권과 통치로 의롭게 하는 것인데, 존 칼빈에게 있어서 칭의의 구체적인 실현인 성화는 우리 안에서 성령의 계속적인 개혁의 작업이며, 성령이 인간을 계속적으로 다시 만드는 것으로 이해했다. 즉, 인간 쪽에서 하나님 형상의 회복을 위해서 노력하는 계속적인 투쟁 과정이다. 반면, 웨슬레는 성화로 이어지는 구원과정을 말함에 있어서칼빈이 말하는 칭의 후 성화 과정 중 더욱 진보한 완전 성화의 단계를 제시했다. 본 연구의 목적은 칼빈과 웨슬레의 성화론을 비교 고찰함으로써 퇴색(退色)되어 가는 한국교회 성도들의 신앙을 더욱 높은 차원으로 이끌어 올려 한국교회의 새로운 각성과 참된 부흥을 추구하는데 있다. 성화의 주체이신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십자가의 구원과 죽기까지 자기를 부인하고 포기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의 모델을 제시함으로 혼탁해져 가는 물질만능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에게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는데 도움이 되기를 기대한다. Sanctification is the biggest interest for Christians in East and West, past and present, and is a course of restoration imitating God’s image. We are grafted in Jesus Christ in order to restore God’s image, and be restored to God’s image when we unite with him in one. So we would acquire the righteousness through Jesus Christ who is in us by our faith and the Work of his Holy Spirit. This justification is, by uniting with the Holy Spirit in me, making us righteous by his dominion and reign, however to John Calvin the sanctification, the concrete actualization of the justification, is the continual work of reformation of Holy Spirit in us and is understood as Holy Spirit constantly making human again. Hence it is a process of continual battle of human trying to restore God’s image. On the other hand, Wesley, when speaking of the course of salvation to the sanctification, suggested more complete stage of sanctification among the process of sanctification after justification as said by Calvin. The object of this research is for the new awakening of Korean churches and to pursue the true revival by comparatively investigating sanctification theories of Calvin and Wesley and bring up the fading faiths of Korean Christians into the higher dimension. By presenting the model of Jesus Christ’s, who has denied himself until his death and given up, and cross’s redemption through the Holy Spirit that is the main body of the sanctification, I expect this to be helpful for the Christians of clouding present days of materialism to bear the roles of light and salt.

      • 한국장로교회의 분열과 합동에 관한 연구 : 1979년 주류(합동)와 비주류(구개혁)를 중심으로

        경주현 대신대학교 신학대학원 2010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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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무리들의 총체이다. 이러한 일련의 구원받은 무리들이 신앙의 공동체를 이루어 살아감으로써 구원받은 인간으로서의 삶에 실체성을 갖게 되는 것이다. 또한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피로 세우신 것이며, 또한 수많은 믿음의 선조들의 순교적 희생정신으로 말미암아 굳건하게 세움을 입게 되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하여 자신의 전 생애를 바친 인물이다. 그가 가는 곳마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었고, 또한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가 세워졌다. 이러한 교회가 19세기 말엽부터 본격적으로 한국에 전래되었다. 초기 한국에 입국한 선교사들의 신학사상은 대부분 장로교를 바탕으로 한 신학이었다. 그래서 한국에 세워진 교회는 자연 장로교적인 정치형태의 교회가 주류를 이루게 된 것이었다. 이러한 한국장로교회는 시대적 어려움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눈부신 성장을 이루어 왔다. 그러나 한국장로교회의 눈부신 성장 이면에는 분열이라는 상처들로 얼룩져 있는 것 또한 한국교회의 역사이며 가슴 아픈 현실인 것이다. 이러한 교회의 분열원인은 신학적인 문제일 수도 있고 또한 정치적이거나 혹은 교권적인 문제일 수도 있다. 그러나 신학적인 뚜렷한 이유 없이 단지 정치적이거나 교권적인 이유로 인한 교회분열의 흔적은 아직도 한국장로교회의 큰 아픔과 상처로 남아 있다. 1952년 고신측과의 분열, 그리고 1953년 기장측과의 분열, 1959년 통합(연동)측과의 분열, 1979년 개혁(비주류)측과의 분열, 1980년 합신측과의 분열 등이 대표적인 분열상이라고 할 수 있다. 각각의 분열 때마다 저마다 나름대로의 명분을 내세워 분열의 당위성을 주장했지만 그러한 명분이 과연 하나님과 교회 앞에 합당한 것이었는지는 가슴 깊이 반성해보고 되돌아보아야 할 우리들의 과제인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한국장로교 역사에서 괄목할 만한 역사적인 사건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주류)측과 구개혁(비주류)측 교단이 1979년 여러 가지 이유로 분열된 이후 26년 만인 2005년 9월 전격적인 합동을 이루게 되었다. 이는 그동안 수많은 분열로 얼룩진 한국장로교회가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는 하나다”라는 대명제를 이루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이며, 한국교회를 향하신 하나님의 역사임을 다시 한 번 깨닫게 하는 사건이라 하겠다. 이제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 교단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화합과 연합이라는 새로운 대 역사를 이루었다. 2005년 제90회 총회에서의 양 교단 합동은 어디까지나 성령의 역사였으며, 인도하심이었다. 이러한 성령의 인도하심 가운데 화합과 연합을 열망하는 전국 교회와 성도들의 눈물어린 기도가 양 교단 합동이라는 결실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앞으로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는 내적으로는 개혁주의 전통신학을 확립하고 발전시켜 성경적 대화합을 바탕으로 민족 복음화를 위하여 매진할 때이다. 그리고 개혁주의적 신앙과 신학을 계승하는 교단 간의 교회 연합활동에 있어서 그 어느 때보다 심혈을 기울여야 할 때이다. 또한 전통적 기독교 신앙관인 개혁주의적 신학사상을 계승 발전시키며 올바른 교회로서의 표지를 유지하며, 각 교단의 특수성을 존중하고 이해하여 기독교적인 행사와 선교에 대한 확장과 사회를 향한 봉사와 사업 등에 있어서 협력하여 참된 교회로서의 하나 됨을 추구해야 할 것이다. 외적으로는 성경중심의 세계관을 품고 세계 선교를 향하여 전진하여야 할 시점에 와 있다. 비록 한국장로교회가 걸어온 길이 정도의 길은 아닐지라도 그 길은 분명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 길이기에 우리는 한국장로교회의 역사적 발자취를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인 발자취를 기억하고 되돌아보아 역사에서 얻은 교훈에 대해서 계승할 것은 계승하여 더욱 발전시켜 후대에게 적용하도록 하여야 할 것이며, 버릴 것은 과감하게 버리는 결단이 있어야 할 것이다. 또한 세계 선교를 위하여 같은 신앙과 신학을 계승하는 단체들과의 연합활동을 전개하면서 전통적 기독교사상을 지닌 교회로서의 모습을 나타내어야 할 것이다. 이제 한국장로교회는 교단통합에 만족하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인 되시는 몸 된 교회를 바로 세우고 교회의 본래적 사명을 다시 한 번 되새겨 말씀의 바른 선포와 구원의 증거가 나타나는 생명력이 넘치는 교회가 되어 세계 선교를 향하여 힘차게 전진해야 할 것이다. 또한 하나님과 교회와 세상 앞에 더 이상 분열이 아닌 하나 됨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한국장로교회가 되길 소망한다.

      • 믿음의 교리와 실천에 대한 신학적 일치성과 상이성 : 칼빈과 바르트를 중심으로

        이효근 대신대학교 신학대학원 2008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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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e purpose of thesis is to clarify the saving faith or the justifying faith that reformed theologists emphasize based on the Bible. For this purpose I investigate the view of Calvin and Barth on the doctrine and the exercise of faith, particularly the reality and the identity of God, the faith toward God, the relation between faith and God. Calvin and Barth partially hold the same view on God revealing self, the sovereignty of God, the epistemological tendency in defining faith, the Trinity as object of faith. But they hold the very different view on the reality of God, the Bible, the identity of God in justifying, "imitatio Christi" and "fides salvifica" as the definition of faith, the identity of God as object of faith. The fundamental difference between the two theologists' views lies in the identity of living God, and in the reality of faith toward God. In Barth's theology, God is inseparable from His revelation, that is, God is none other than the revealer, the revealed. Barth's theology keeps the identity of living God within His revelation. And in work of faith, man himself is nothing for. He is not in control. He simply finds himself in the work of Jesus Christ. Therefore, Barth's faith is totally absorbed in Jesus Christ, it does not make him look to God. Barth's faith can only recognize the fact that his ontological “new right"(justification) established in Jesus Christ. On the other hand, Calvin does not regard God Himself as the Word of God. In Calvin's theology, God is not the God who exists in only His Word. God is the Creator, the Preserver, the Redeemer, the Judge, and the Revealer in His full existence. According to Calvin's Institute, faith looks to God directly through the Word of God. And in the reality of faith, the primary object of faith is God the Father(through the Mediator Christ). Calvin believe in the living God who works and bestows on us heavenly benefits through the Holy Spirit in our empirical world. The reformed theologists in discussing the doctrine and the exercise of faith emphasize the intellectual tendency, that is, the significance of doctrine and proposition. But they also look out for the dogmatic faith that can be caused by stubborn intellectualism. “notitia fidei" on which Calvin insist is not only intellectualism, but also knowledge that support faith as subordinate role. It is the persuasive force by the power of God, the mysterious notion that can produce salvation. We must believe the reality of God's existence and of His actual salvation. We believe not only in God the Father, but also in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Father and His Son by the secret energy of the Holy Spirit. Faith is the preeminent work of the Holy Spirit. Therefore, today now we bravely stand opposite each other the heterodoxy that express a heretical doctrine as Barth, because of the conservation of reformed faith and expansion of it. 본 연구는 칼빈과 바르트의 신앙론을 비교하면서 믿음의 교리와 실천에 대한 그들의 신학적 일치성과 상이성을 살펴보았다. 특별히 믿음의 대상으로서의 “하나님의 실재(實在)와 정체성(正體性)”, 하나님을 신앙하는 “믿음” 그리고 믿음과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그들의 견해를 살펴봄으로써 성경에 기초한 개혁주의의 견해를 확고히 하고자 했다. 두 신학자는 말씀으로 자신을 계시하시는 하나님, 칭의를 논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절대주권, 믿음의 정의에 대한 그들의 인식론(지식)적 성향, 믿음의 대상으로서의 하나님에 관한 삼위일체론 등에 있어서는 표면적으로 견해를 같이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실재성(實在性)과 성경관, 칭의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정체성(正體性), 믿음의 정의로서의 “imitatio Christi”(그리스도의 모방)과 “fides salvifica”(구원의 신앙), 믿음의 대상으로서의 하나님의 정체성 등에 있어서는 내용적으로 매우 다른 견해들을 갖고 있다. 두 신학자의 근본적인 상이성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정체성(正體性)과 그를 향한 믿음의 실재성(實在性)에 있다. 바르트의 믿음은 하나님의 자리에 말씀이란 계시 개념이, 믿음의 자리에는 전적으로 존재론화된 그리스도가 대치되어 하나님의 정체성과 믿음의 실재성이 결여되어 있다. 그는 믿음을 그리스도에게 전적으로 흡수시키며,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Deus pro nobis’(God for us)를 단순히 인지(認知)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반면에 칼빈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정체성과 믿음의 구체성, 현실성, 실재성에 있어서 명확하다. 그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창조자, 보존자, 구속자, 심판자, 전 존재의 계시자이시다. 그리고 그의 믿음은 “하나님이 베푸신”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는 유일한 수단으로, 그는 이를 통해 “그리스도를 소유하고, 그의 모든 유익”(Christ and all His benifits)을 누리게 된다고 주장한다. 믿음의 교리와 실천에 대한 개혁주의적 견해는 지식적 측면, 즉 교리와 명제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러나 완고한 지성주의로 인해 야기될 수 있는 교조주의적 신앙 또한 경계한다. 칼빈이『기독교 강요』에서 말하는 “신앙의 지식”은 지성주의도 아니고 믿음을 도와주는 종속적 역할로서의 지식도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권능에서 비롯되는 설득의 힘으로서 구원을 가능케 하는 신비적인 앎이다. 그의 믿음은 신앙의 지식에 의해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확신하는 복음 신앙이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은 바르트 신학과 같은 이단사상에 맞서서 투쟁함으로 성경에 기초한 개혁주의 신앙을 보수하고, 그것을 확산시켜나가야 할 시대적 사명을 완수해야 한다.

      • 송전탑 건설 갈등에 대한 생태 신학적 대안

        김충만 대신대학교 신학대학원 2015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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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태계 오염의 위기에 대해서는 오래전부터 그 심각성이 대두 되고 있었다. 수질오염, 토양오염, 대기오염 등 각종 오염들이 난무하게 되었고 그 원인으로는 무분별한 개발과 산업 혁명이후 급속도로 발전된 인간 중심의 개발이 그 원인이라고 할 수 있겠다. 여러 사회 문제와는 달리 환경오염과 생태위기는 인간사회의 존립 및 생존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이것이 한번 파괴되기 시작하면 회복하기 힘들다는 성격 때문에 문제가 더욱 심각한 실정이다. 이러한 환경오염으로 인해 인간이 그 댓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는 과정 중에 있다. 특히 근래에 들어서 이슈가 되고 있는 환경 오염에 대한 목소리는 고압 송전탑 건설로 인한 주민과의 갈등에서 비롯 되고 있다. 정부와 한국전력공사는 분명히 송전탑 건설 시 충분한 협의와 상호 협조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지만 사실은 전해 주민들의 의견이 수렴되고 있지 않는 실정에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송전탑 건설 지역 주민들의 소리를 높이고 있는 갈등의 배경에는 송전탑으로부터 나오는 전자파로 인한 의학적 갈등이 일어나고 있다. 이 의학적 갈등 사항에서 우리나라 전자파 규제와 유럽이나 미국과의 전자파 규제 치수가 터무니 없이 차이가 나고 있다는 점이다. 미국이나 유렵은 2mG를 제한 치수로 규정하고 있고 우리나라는 833MmG를 최소 기준점으로 잡아 놓고 있다는 점에서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한전과 정부는 지역 주민은 전혀 불안감을 가지거나 억울해 할 필요성이 없다고 주장하면서 전자파로 인해 백혈병이나 암 발병 율이 높아진다는 연구가 없다는 점을 들어서 괜찮다고만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갈등에서 밀양 지역에서는 급기야 주민중 노인 할머니가 분신자살하는 사건이 일어나고야 만 것이다. 또 다른 갈등으로는 토지 값 하락으로 인한 갈등과 환경 파괴에 대한 갈등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송전탑 건설 갈등으로 인해 고통 받고 심리적으로 많은 어려움에 쳐해 있는 주민들에게는 크나 큰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생태계 위기에 있어서 생태 신학적 입장에서 대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이미 많은 논문에서 생태계 위기에 따른 대안을 제시하고 있지만 본 연구에서는 송전탑 건설 갈등을 생태 신학적 입장에서 다루고 일반적인 대안에 더 추가하여 생태 신학적 입장을 밝히고 하나님이 만드신 창조 질서가 무너지지 않고 유지 되면서도 인간과 환경이 서로 WinWin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내고자한다. 이미 송전탑 건설 갈등에 대한 일반적 대안들이 생겨나고 있다. 고압 송전탑을 산 능선에 건설하기 위해서 많은 시간과 자연 미관, 야생동물의 삶의 터전을 파괴한다는 점을 들어 송전탑을 지중화 하자는 의견들이 속속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비용과 활용도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인간과 자연이 서로 WinWin 하고자 하는 것은 필수 불가결 한 일이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인간의 유익을 위해 건설한 송전탑이 또 다른 인간을 고통을 당하도록 하는 것은 이율배반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즉 송전탑 건설 갈등으로 인한 생태 신학적 대안은 바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창조질서를 회복하고 회복된 질서를 바로 잡는 일을 하는 것이다. 즉 송전탑 건설 갈등으로 인한 생태 신학적 대안은 창조 질서를 바로 세우는 일을 노력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생태계의 질서를 잡는 일은 인간 중심의 발전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으로 발전 방향을 모색하는 일이다. 하나님과 자연과 인간이 공존할 수 있는 대안을 모색하여 나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사람위에 사람이 없으며 사람은 자연을 잘 다스려야 한다. 하지만 지금까지 개발에 집중하다 보니 사람위에 사람이 있어서 한 사람이 편하면 다른 사람이 고통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사람은 단지 자연을 이용만하고 다스리지 않았다. 이러한 것들이 결국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무너뜨렸고 파괴해 버렸다. 따라서 생태계 위기에 따른 생태 신학적 대안은 하나님과 인간과 자연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로 연합되어서 서로 공존하여 창조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송전탑 건설 갈등에 있어서도 이미 일어난 갈등 속에서 그 대안을 찾기 위해 힘 써야 하며 창조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서로 협력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서로 사랑하며 이해하고 도와주기 위해 힘쓰는 아름다운 창조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앞으로 더욱 힘쓰며 나아가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 소선지서에 나타난 선교 신학적 사상

        이우윤 대신대학교 신학대학원 2007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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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교 신학적 사상은 신약에서와 같이 구약에서도 풍성하게 나타날 수 있다. 소선지서를 단일체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소선지서의 다음과 같은 선교 신학적 사상을 드러내어 준다. 첫째, 선지자와 예언의 진위성 문제를 통한 참 선지자의 특성은 “선교사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답하게 한다. 둘째, 오경의 죄  심판  은혜라는 유기적 주제는 소선지서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하나님의 심판과 하나님의 은혜사이의 신앙적 긴장감은 이스라엘에게는 사명에 항상 깨어 있도록 하는 선교적 동력이 되며, 열방에게는 언제든지 즉시로 하나님께 돌이키게 하는 근원적 힘이 된다. 셋째, 소선지서에 나타난 하나님-이스라엘-열방의 관계는 하나님이 이스라엘만의 하나님만이 아니라 모든 세계의 하나님인 것을 증거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통하여 열방에 대한 관심을 나타내시기도 하고, 열방을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끊이지 않는 관심을 드러내신다. 특히 새 이스라엘로서의 열방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은 오늘날의 교회로 그 모습을 드러내었고, 어떤 선교 대상이라도 적대적이지 않고 인내하는 사랑으로 섬겨야 할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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