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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韓國 先史 玉에 대한 硏究

        노희숙 漢陽大學校 大學院 1997 국내석사

        RANK : 236335

        本考는 韓半島出土 先史 玉을 통하여 韓國 先史時代의 문화상을 살펴보려는데 그 궁극적인 목적이 있다. 먼저 한반도에서 출토된 선사시대 옥을 곱은옥, 대롱옥, 구슬옥으로 크게 분류하고 각 종류별로 형식분류를 시도하였다. 곱은옥의 형식은 A式(半月形), B式(半결形), C式(魚形), D式(초생달형), E式(牙形), F式(半環形), G式(不定形)으로 분류하였는데, A式은 구멍의 갯수에 의해 다시 A l式(양쪽투공), A2式(한쪽투공)으로 분류하고, E式식은 腹部에 새겨져 있는 어임의 有無로 El式 과 E2式으로 분류하였다. 대롱옥은 외형적 형태에 의해 I式(원통형)과 II式(대추형)으로 분류하고, 直徑의 크기에 따라 A, B, C, D, E式으로 분류하고, 다시 직경과 길이의 비율에 따라 1, 2, 3, 4式으로 분류하였다. 구슬옥은 직경의 크기에 따라 A, B, C, D式으로 분류하였다. 韓國 先史時代 玉의 時代別 特徵을 살펴보면 新石器時代에는 주로 점판암제, 곱돌제, 대리석제 등 보통의 돌을 사용하고 있지만 翡翠製나 碧玉製도 소량으로 사용되었다. 곱은옥의 형식은 모두 不定形인 G式만 보이며 대롱옥은 원통형과 대추형이 보인다. 현재로서는 함경도와 평안도, 충청도 지역에서만 나타나고 있다. 靑鋼器時代가 되면 天河石製가 처음으로 나타나며 遺蹟은 韓半島 全域에 걸쳐 분포한다. 新石器時代에는 찾아볼 수 없었던 새로운 形式의 다양한 곱은옥이 출현한다. 대롱옥의 재질은 碧玉製가 주로 사용되며 크기도 다양해진다. 황해, 평남·북 지역은 벽옥제와 함께 석제, 점관암제, 석회암제 등의 재질도 사용되며 직경의 크기가 크다. 南部地域은 晋陽 大坪里와 같이 직경이 2cm가 넘는 것도 있으나 주로 I A2式이 주를 이룬다. 구슬옥은 전남지방에서 多出하고 있으며 직경 2cm이상의 大形 구슬옥도 출토되고 있다. 초기철기시대에 들어오면 細形銅劍과 함께 반결형인 B式의 곱은옥이 금강유역에서 初出된다. 遺蹟內 共伴 양상을 보면 세형동검, 조문경과 함께 출토되고 있고 石棺墓에서만 나타난다. 대롱옥은 벽옥제의 경우에 직경의 크기가 0.5cm이하인 A式이 출토되고 있으며 合松里, 素素里, 鳳安里에서는 유리제 대롱옥이 初出된다. 초기철기시대에는 청동기시대에 비해 대롱옥의 크기가 작아지는 양상을 보인다. 구슬옥 역시 직경 0.5cm이하인 A式의 구슬옥만 보인다. 韓半島의 靑銅器文化는 크게 遼寧의 琵琶形銅劍文化와 吉林地域의 石棺墓文化 와 관련이 깊다. 韓半島의 西北地域은 遼寧地域과, 東北地域은 만주와 연해주와 그 文化傳統을 같이 한다. 遼寧地域의 비파형동검문화는 해로를 통해 錦江流域으로 들어왔으며 다시 강을 따라 南下하여 한반도 남부지방의 청동기문화를 형성한다. 初期鐵器時代에 들어서면 금강유역에 새로운 형식의 곱은옥이 등장하고 석관묘에서 劍, 鏡, 玉이 세트를 이루며 출토되고 있는데, 이것은 이 시기에 금강유역으로 새로운 문화요소가 유입된 결과로 보여진다. 韓半島 玉 文化의 性格은 인접한 中國 東北地域, 더 나아가 蒙古·시베리아·日本과의 상호 比較硏究를 통하여 접근할 때 더욱 분명해지리라 생각한다. The ultimate purpose of this thesis is to examine cultural features of prehistoric times in Korea, through prehistoric beads excavated in Korean peninsula. We divided them into three groups--i.e., curved beads, tubular beads, ball-shaped beads--and then tried to classify each group according to the bead shapes. Curved beads were thereby classified into A-type (half-moon shaped), B-type (half-ring-shaped), C-type (fish-shaped), D-type (crescent-shaped), E-type (tooth-shaped), F-type (arch-shaped), and G-type (irregular). A-type beads were subdivided, by the number of holes in it, into AZ-type (with one hole) and A2-type (with two holes), and E-type beads were also subdivided, existence and non - existence of belly-carving, into El- and E2-type. Tubular beads were classified into I-type (cylinder-shaped) and II-type (jujube-shaped), and subdivied into A-, B-, C-, D-, E-type, according to the diametral size, and into 1-, 2-, 3-, 4-type, according to the proportion of diameter and length. Finally, ball-shaped beads were classified into A-, B-, C-, D-type according to the diametral size. Characteristics of Korean prehistoric beads vary in time. In the Neolithic Age, mostly ordinary stones--such as argillite, agalmatolite, and marble--were used, though sometimes jadeite and jasper were also used. Curved beads were made only in G-type (irregular shape), and tubular ones were cylinder-shaped or jujube-shaped. At present, Beads of this age are found only in Hamkyong-do, Pyongan-do, Chungchong-do areas. In the Bronze Age, however, Amazon stone beads appeared for the first time, and sites of this age are distributed throughout Korean peninsula. Various new types of curved beads, which were not found in the Neolithic Age, made their first appearance. Tubular beads were made mostly of jasper and in various sizes. In Hwanghai-do and Pyongan-do areas, ordinary stones, argillite, and limestone were used as well as jasper, and diametral sizes increased. These beads were mainly in IA2-type, though in southern Korean areas, some were over 2 in diameter. Ball-shaped beads are frequently found in Chollanam-do and some of them are large ones over 2 in diameter. In the Early Iron Age, B-type (half-ring-shaped) curved beads are found along with slim-shaped bronze daggers. These sites have something in common: that is, slim-shaped bronze daggers and bronze mirrors are found with beads, and they are excavated only in stone-cists. Tubular beads made of jasper are all A-types, which are smaller than 0.5 in diameter, and glass-made ones are found in Hapsong-ri, Soso-ri, and Bongan-ri. In this age, tubular beads tend to decrease in size, compared to those in the Bronze Age. Ball-shaped beads are all A-types, which are smaller than 0.5 in diameter. The Bronze Age culture in Korean peninsula is closely related with the jute-shaped-bronze-dagger culture in Liaoning and the stone-cist culture in Gilin. Northwestern areas of Korean peninsula share the same cultural tradition with Liaoning, and Norhheastern areas with Manchuria and the maritime province of Siberia. The jute-shaped-bronze- dagger culture of Liaoning came to Korea overseas through the mouth of Kum-gang, and then spread southward along the river to form the Bronze Age culture in southern areas of Korean peninsula. In the Early Iron Age, new types of curved beads appeared in Kum-gang river valley therefore, they are being excavated along with bronze daggers and beads in stone-cists there. That seems to be the result of new cultural elements that had been introduced to Kum-gang river valley from outside. The characteristics of bead culture in Korean peninsula will be clearer if we approach them through international cooperative studies with Mongolia, Siberia, and Japan.

      • 임진·한탄강 유역 원삼국시대 주거지 연구

        김지한 한양대학교 2015 국내석사

        RANK : 236319

        본고에서는 원삼국시대 주거지의 평면형태 및 규모, 노지의 형태, 출토유물 등의 요소를 통하여 임진 ․ 한탄강 유역의 원삼국시대 주거지의 특징 및 편년에 대해 알아보았다. 원삼국시대의 주거지는 입구의 유무와 평면형태에 따라 분류하였으며, 평면 평태는 돌출도에 따라 원형, 방형, 오각형, 육각형으로 구분하였다. 규모는 주거지의 주축방향과 이에 직교하는 폭의 길이로 분류하였으며, 입구의 유무에 따른 성격 차이를 비교하였다. 구들시설은 형태에 따라'ㄱ‘자형과 ’ㅡ‘자형으로 분류하였다. 마지막으로 출토유물의 유형 및 형태, 개체 수에 따라 시기를 구분하였다. 앞의 방법론으로 주거지의 편년을 분석한 결과, 임진 ․ 한탄강 유역의 원삼국시대 유적을 BC 100~AD 300년 정도로 획기하였다. 또한 원삼국 1기, 원삼국 2기, 원삼국 3 기, 원삼국 4기(한성백제기) 등 세부적으로 4시기를 구분하였다. 원삼국 1기는 다시 전반과 후반으로 세분할 수 있는데, 전반에는 방형 주거지와 노지가 확인되며, 유물은 경질무문토기의 출토 빈도가 매우 높다. 원삼국 1기 후반에는 오각형계의 주거지가 설치되고 Ⅰ,Ⅱ형의 구들이 시설된다. 유물의 양상은 전반과 비슷하지만 타날문토기의 비율이 조금 더 증가한다. 원삼국 1기의 시기적 편년은 BC 100~AD 150년경으로 보인다. 원삼국 2기에는 오각형계 중 C1, Ca2형에 이어 Cb2형의 주거형태가 확인된다. 또한 구들시설은 Ⅱ형 보다는 Ⅲ형의 빈도가 증가한다. 주거지의 규모도 다양하게 분포하는 시기이며, 주거지의 개체수도 많다. 유물은 경질무문토기와 타날문 토기가 비슷하게 확인된다. 시기는 AD 150~200년경으로 보인다. 원삼국 3기는 기존의 주거형태가 계속 이어지며, 육각형계(D형)의 주거형태가 소수 확인된다. 구들시설도 Ⅳ형과 Ⅴ형이 소수 발견된다. 유물은 타날문토기가 완성형으로 보이며, 장란형의 대형옹이 확인된다. 경질무문토기도 없어지지는 않지만 비율이 줄어든다. 시기는 AD 200~250년경으로 보인다. 임진 ․ 한탄강 유역에서 원삼국 2기와 3기에 해당하는 유적은 분석 유구 중 60기에 대당하며, 짧은 기간에 유구가 밀집하여 분포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시기가 임진 ․ 한탄강 유역이 가장 번성하였던 시기로 보이며, 당시 이 지역 정치체의 존재를 추측할 수 있는 자료라 할 수 있다. AD 3세기 중엽 이후에는 방형계의 주거지와 육각형계의 주거지가 확인되는데, 방형계의 규모는 소형에 속하며 육각형계의 주거지는 중~대형에 속한다. 또한 구들시설은 'ㅡ'자형 구들이 주를 이룬다. 유물은 타날문토기가 주를 이루며, 한성백제 시기의 토기 유형도 확인된다. 이는 임진 ․ 한탄강 유역에 한성백제의 영향이 미치기 시작하였다는 것으로 보았다. 주거지의 분석 결과 원삼국 3기와 원삼국4기 사이에 단절적인 현상이 발견되는데, 당시 이 지역에 있었던 기리영 전투라는 역사적인 사건의 영향으로 단절적 현상이 나타나는 것으로 추측하였다.

      • 多뉴鏡에서 漢鏡으로 轉換에 대한 硏究

        안경숙 漢陽大學校 大學院 1998 국내석사

        RANK : 236319

        銅鏡은 靑銅器時代 이래로 대표적인 신분상징물로 알려져 있고, 시기적인 변화의 차이가 뚜렷해 편년의 근거로 이용되고 있다는 점을 중시하여 당시 상황을 파악하는데 가장 적합한 遺物로 파악하였다. 이를 위해 多鈕鏡으로부터 漢鏡으로의 전환을 두가지 측면에서 살펴 보았다. 우선 묘제에 있어서는 石棺墓-積石木棺墓-木棺墓라는 점진적인 발전과정을 거쳤음을 알 수 있었다. 다음으로 遺物의 양상에 있어서는 銅鏡의 부장에 있어서 의기적 성향의 多鈕粗文鏡에서 多鈕精文鏡으로 발전하다가 과도기적인 多鈕素文鏡의 과정을 거쳐서 交易品의 하나인 漢鏡으로 전환됨을 알 수 있었으며, 漢鏡에 대한 三韓의 對外交易品은 鐵과 布였음도 파악하였다. 이러한 검토를 근거로 각 단계를 銅鏡所有者의 성격을 중심으로 3단계로 설정하였다. I단계는 묘제에 있어서는 石棺墓, 積石木棺墓가 단독으로 조성되었고, 多鈕粗文鏡․多鈕精文鏡을 내며 점차 異形銅器․銅鈴과 함께 儀器的 성향을 강하게 함축하고 있음을 보았다. II단계는 積石木棺墓, 木棺墓가 집단으로 조성되기 시작하며, 多鈕鏡의 퇴화양식인 多鈕素文鏡과 漢鏡이 漢式遺物들과 함께 공반됨을 알 수 있었다. 앞서 多鈕鏡이 제의권으로 권위를 상징했다면 이 단계는 교역의 권한으로 인해서 권위를 상징했음을 알 수 있었다. III단계는 집단묘역 내에서도 우월한 규모와 입지를 차지하고 漢鏡․倣製鏡을 내며, 鐵素材와 北方系遺物을 공반함을 알 수 있었다. 이는 새로운 교역루트의 확보와 철산지의 확보가 중요시 되었다. 多鈕鏡이 祭儀勸을 갖는 것은 한손으로 드는 單鈕와는 달리 걸기위한 多鈕라는 점과 鏡背面에 시문된 문양이 상징하는 바를 들 수 있었다. 반면 漢鏡은 이와 달리 單鈕를 가지므로 동일한 기능으로 보기는 어렵다. 즉 漢鏡과의 가장 큰 차이점은 鈕의 수와 함께 倣製鏡으로의 모방이라는 점을 들어 권위상징의 직접성과 간접성을 언급하였다. 이로인해 多鈕鏡이 출토되는 사회가 제의권에 의한 祭政一致의 사회에서 靑銅器時代 이후로 비중이 증가되어 가는 交易으로 정치적 중심이 전환된 祭政分離의 사회로 바뀌었고, 당시의 지도자는 교역을 담당하며 개방적인 사회의 조직과 조직원의 결속을 강화시키는 역할을 하던 이였음을 알 수 있었다.

      • 전곡리유적의 형성 과정과 구석기 공작에 대한 연구 : 층위별 유물 출토 양상을 중심으로

        이한용 漢陽大學校 大學院 1997 국내석사

        RANK : 236319

        본 연구는 한반도의 구석기 유적중에 가장 대표적이라 할 수 있는 전곡리 구석기유적의 형성과정과 구석기공작에 대한 연구이다. 전곡리 유적은 1978년 최초발견된 이래 현재까지 10차례의 발굴조사를 통해 많은 양의 연구자료가 축적되어있지만 절대연대측정 과 주먹도끼에 관한 연구들에 비해 구석기공작 자체에 관한 연구는 미미했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1995년 발굴시 약 6백여점의 석기유물들이 동일면이라고 판단되는 층에서 집중적으로 발견되어 기존의 발굴에서 확인된 유물집중면과의 층위별 비교연구의 필요성이 증가 되었다. 본 연구에서는 81,92,95년의 조사에서 확인된 E0S1-I, W6S4, E93N65 지점들에서의 유물집중면이 층서적으로 다른 시기에 위치해 있다는 판단하에 각 지점의 유물출토상황과 석기공작의 특성을 비교 분석하였다. 연구결과 각 층위의 유물출토양상은 다듬은석기가 10% 내외인 전곡리의 임의가공적인 석기전통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출토유물중 다듬은 석기의 비율은 하층에서는 주먹도끼와 찍개를 중심으로 하는 비교적 대형의 석기들이 주를 이루고 상층으로 올라갈수록 찍개류의 비율이 감소하고 긁개류로 대표되는 소형석기와 박편, 돌부스러기의 비율이 증가하는 양상을 확인하였다. 이런 양상은 전곡리지역에서 일정기간 동안 임의가공을 전통으로 하는 석기문화가 시간적인, 기술적인 변화단계를 거치면서 지속됐다는 것을 추론할 수 있게 해준다. 한편 각 층위별 유물집중면은 지질학적인 변형도 일부 겪었을 것으로 판단되지만 접합되는 석기세트들과 반입석재은 이 지점에서 석기제작과 음식물가공 등의 고인류행위가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게 해준다. 현재로서는 각 층위간의 시간적 격차가 어느정도 인지는 파악 할 수 없지만 그리 오랜시간은 아닌 것으로 판단되며 기반암인 현무암의 K/Ar 연대와 전곡리 지역의 퇴적상황을 감안할 때, 전곡리유적의 연대는 20만년 전후라고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할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향후 유물집중면에 반영된 고인류의 구체적인 행위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며 석기유물들의 보다 체계적인 형식분류를 통해 전곡리 석기문화의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 한탄- 임진강유역 구석기공작의 제작과정 분석연구

        황소희 한양대학교 대학원 1998 국내석사

        RANK : 236319

        본 연구는 한탄-임진강 유역의 대표적 유적인 전곡리 구석기유적과 금파리 구석기유적의 석기비교연구를 통하여 이 지역 구석기공작의 성격을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다. 한탄-임진강 유역에는 전곡리 구석기유적과 금파리 구석기유적을 비롯하여 수십 여 곳의 구석기유적이 분포되어 있다. 1978년 전곡리 유적에서의 아슐리안형 주먹도끼의 발견은 1970년대 말까지 인도를 중심으로 구석기 문화권을 아프리카-유럽문화권(Hand-axe Culture)과 동아시아의 찍개문화권(Chopper & Chopping tool Culture)으로 2분 하던 모비우스(Movius H.JR)의 학설을 재고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이 지역에 대한 높은 관심을 불러 일으켜 한국 구석기고고학의 연구에 큰 발전의 계기가 마련될 수 있게 하였다. 본 고는 한탄-임진강 유역의 전곡리 구석기유적과 금파리 구석기유적에 대한 기존의 성형석기 위주의 연구방식에서 벗어나 석기제작과정상의 부산물인 박편과 석핵을 주 연구대상으로 하였다. 박편과 석핵은 성형석기를 제작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부산물 중 석기제작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가 되며, 성형석기보다 월등히 높은 비율로 출토되어 비교연구의 풍부한 자료가 되고, 무엇보다도 타격에 의한 박리흔적이 잘 남아 있다. 박편과 석핵을 분류체계에 따라 계량적 쪾형태적 쪾 기술적 분석을 실시한 후 일정한 유형별로 형식분류를 하여 한탄-임진강유역의 일반적인 석기제작기법의 양상을 살펴보았다. 박편은 일반적으로 타격면의 가공이 없이 자연면이나 박리면의 평면을 이용하여 떼어낸 것이 상당수이다. 특히 타격면이 자연면 평면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등면에 자연면이 전혀 남아 있지 않은 것이 가장 우세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동일한 자연면을 타격면으로 이용하여 연속적인 타격을 베풀어 박편을 박리시켜 나가는 제작기법으로 한탄-임진강유역 구석기공작의 한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석핵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는데, 집중적인 타격이 이루어진 원추형 석핵, 이중명칭을 부여할 수 있는 복합 석핵, 다각면 원구등도 상당수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 매우 즉흥적으로 일시적인 용도에 맞도록 비정형화된 간편한 제작을 보이고 있다. 또한 위의 두 유적은 모두 일정한 수평면에 수 백점의 석기유물이 높은 밀도를 보이며 집중적으로 출토되는 공통점을 보인다. 이 중 하나의 개체로 접합복원되는 자료가 전곡리 유적에서는 9세트, 금파리 유적에서는 8세트로 관찰되었다. 이 석기접합자료 중에서도 원석의 형태를 알 수 있을 만큼 접합복원이 이루어지는 접합유물자료가 있어 주목된다. 이 석기유물의 접합복원을 통하여 석기의 제작과정을 살펴보았다. 분석대상인 박편과 석핵 및 석기접합자료에서 보이는 한탄-임진강 유역의 구석기 공작의 성격은 다음과 같다. 도구로서의 기능이 비교적 확실한 것, 즉 계획적으로 제작된 석기의 정형성은 관찰하기 어려웠으며, 대단히 우발적, 비계획적, 비정형적인 제작방식이 주로 관찰된다. 이는 의도하지 않은 방향으로 떨어져 나가는 석재의 제약성과도 관련이 있겠지만 풍부한 석재와 함께 생계전략적으로 몇 가지 효율적인 기법만으로도 필요시에 선택적으로 석기를 제작할 수 있었음을 추론 할 수 있다.

      • 嶺南地方 原三國時代 住居址硏究

        임영옥 漢陽大學校 大學院 2000 국내석사

        RANK : 236319

        본 논문은 원삼국시대의 영남지방 주거지의 유형 및 구조의 변천과정을 파악하여 변화․발전 단계를 설정하고자 하였다. 먼저 주거지의 구조 요소인 평면형태, 기둥배치 방식을 중심으로 주거유형을 분류하였고, 이들 유형별 선후관계는 주거지 중복관계, 출토유물의 양상을 중심으로 검토하였다. 이러한 검토를 통해 주거유형의 변화과정을 3단계로 설정하였다 1단계는 방형과 원형주거지가 공존하는 단계이다. 초기에는 방형계 주거지가 지배적이며, 전체적인 양상은 장방형에서 점차 정방형으로 변화하며 기둥구멍이 나타나지 않는다. 이 단계의 말기로 가면서 원형주거지가 나타나 방형주거지와 공존하기 시작한다. 그 시기는 대략 기원전후에서 기원후 1세기말까지이다. 2단계는 방형주거지가 사라지고 원형주거지로 대체되는 단계이다. 이단계의 주거지는 내부구조에서 다양한 양상을 보이고 있는데, 특히 상부구조를 지탱하기 위한 기둥설치법과 벽체설치가 활발해지는 시기이다. 시기는 대략 기원후 2세기 초에서 2세기 말까지이다. 3단계는 원형주거지가 장타원형화 되었고, 내부의 기둥열이 어깨선 밖으로 확장되면서 실제 내부공간의 활용이 극대화되는 단계이다. 시기는 대략 기원후 2세기 말에서 3세기 중엽까지이다. 유형별 면적분포를 살펴보면, 방형주거지는 원형에 비해 소형이며, 원형 주거지 중 Ⅱb-1식은 늦은 단계일수록 대형화 되었고, Ⅱb-2식은 면적에 비해 내부 활용면적을 극대화한 주거형으로 파악하였다. 초기 원형주거지의 내부시설은 무시설형과 부뚜막형으로 나타나고, 늦은 시기로 갈수록 부뚜막구조가 정형화되고 있음을 파악하였다. 주거지의 구조변화는 토기와 같은 생활유물들처럼 시기적인 차이를 민감하게 반영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 사회문화의 흐름을 충분히 반영해 주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원삼국시대에 한반도 내에서 나타나는 지역별 주거형태의 차이는 삼한사회의 정치집단 및 주민집단의 문화적인 차이로 간주하였고, 영남지방의 원형주거지는 변진한의 특징적인 주거형태로 파악하였다.

      • 경기지역 조선 후기 분묘유적 출토 인골 연구 : 병리학적 특성 및 식생활 복원을 중심으로

        민찬홍 한양대학교 2022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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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 사람의 뼈에서 추출되는 정보는 당시 생활상을 추론할 수 있는 직접적인 증거로서 높은 가치를 지닌다. 뼈의 체질학적 분석을 통해서 해당 개체의 인구특성과 병리학적 정보를 추출할 수 있고, 뼈 내 콜라겐의 화학적 분석을 통해서 해당 개체의 식생활 정보를 추출할 수 있다. 이러한 이점에 따라 고고학에서도 옛 사람의 뼈를 이용한 생활상 복원 연구가 여러 건 수행되었다. 조선시대 후기를 대상으로 한 분석 사례가 많지는 않으나, 조선 후기 생활상에 대한 중요성이 인식되며 연구의 필요성이 증대되고 있다. 본고에서는 조선후기 한반도 경기 일대 유적에서 출토된 인골개체를 중심으로 연구를 수행하여 조선 후기 한반도 경기 지역의 병리 양상과 식생활 양상을 복원하고자 하였다. 연구에서는 체질인류학적 분석과 안정동위원소 분석 결과를 기반으로 조선 후기 경기 지역 인골 개체의 체질 특성과 병리, 식이 특성에 대해 살펴보았다. 체질적 특성에서는 이른 사망률이 특징적으로 나타났다. 연령 추정 결과 대다수(90%)가 50세 미만에 사망한 것으로 나타났고, 청년층(20-35)의 사망률이 절반에 가까웠다. 이에 따라 조선 후기 사회는 짧은 기대수명을 지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다음으로 연구대상 집단의 고병리흔 분석 결과 치아질환과 관절질환이 높은 유병률을 보이는 것을 확인했다. 관절질환은 대부분 골관절염으로 확인되었다. 골관절염은 노화 및 역학적 스트레스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표본 집단에서는 골관절염이 전 연령대에 고르게 분포하는 양상을 보였다. 따라서 연구대상에서 나타나는 관절염은 노동과 같은 반복적 운동 스트레스와 관련이 높을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치아질환은 대부분 충치와 에나멜 형성 부전증으로 확인되었다. 충치의 주요 발병 인자는 탄수화물 내 특정 당류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에 따라 본 연구에서는 표본 집단의 높은 탄수화물 섭취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에나멜 부전증은 유아기 영양스트레스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표본 집단에서는 앞서 높은 탄수화물 섭취가 추론된 바 있다. 따라서 높은 에나멜 형성 부전증 양상은 단일 영양소에 의한 영양 불균형에 따른 것일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다음으로 탄소와 질소 안정동위원소비 분석을 통해 연구대상 표본 집단의 주요 식료원과 식생활 특성을 살펴보았다. 그 결과 C3식물이 높은 비율(50% 이상)을 차지하며 주요 식자원으로 사용되는 것을 확인하였으며, 보조적으로 동물성 단백질의 섭취가 있었던 것을 확인하였다. 식료섭취 비율 모형(MixSIAR)을 통해 식료범주별 섭취율을 추산한 결과 C3식물 > 가축 > 어류 > 초식동물 > C4식물 순으로 섭취한 것으로 나타났다. 다음으로 표본 집단 내 인구, 질병, 묘제, 유적입지 요인에 따른 식생활의 차이를 살펴보았다. 평균비교분석 결과 요인별 식생활 차이가 확인되지 않았다. 이에 따라 해당 인구집단에서는 균일한 식이 섭취가 나타나는 것을 확인하였다. 연구에서는 이러한 양상의 원인에 대해서 농업생산량 증가와 유통경제의 발달에 따른 주요 식자원 공급확대의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마지막으로 일부 확인되는 이질적 식이가 나타나는 개체들에 대한 고찰을 진행하였다. 이질적 식이 섭취 개체들 사이에서는 특정한 범주로 구분할 수 있는 집단적 유사성이 나타나지 않았다. 따라서 이질적 식이를 나타내는 개체들은 개인적 요인에 의한 식이 섭취의 변화가 있었을 것이라 추정했다. 개인적 요인에서 고려할 수 있는 가정으로 거주 입지·환경, 특수 직업군의 종사, 신분의 차이에 따른 이질적 식이 등을 상정해 볼 수 있으나 본 연구결과로 추론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다. 뼈를 통해 살펴본 연구대상의 병리·식이 양상을 종합하면 첫째, 구강건강과 관절건강이 불량했으며 낮은 기대수명을 지녔던 것이 확인된다. 둘째, 쌀, 보리, 콩 등 몇몇 작물 위주의 단일화된 식이 섭취가 이루어졌으며, 사회경제적 요인에 따른 식단의 차이가 없었던 것이 확인된다. 이를 통해 당시 사람들의 전반적인 건강상태는 현대에 비해 열악한 양상을 보인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식생활에 있어서는 일부 곡류의 의존도가 높은 식단 구성을 지녔으며 사회경제적 요인과 상관없이 균일한 식단을 섭취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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