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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육수요자’개념 및 사용에 대한 비판적 논의

        오형균 한국교원대학교 대학원 2012 국내석사

        RANK : 247615

        This study tried to reveal the problem of the concept of ‘educational consumer’ and the usage of the term. This research was done in three main directions. First, in order to derive the concept of the term, I did a research on how academic fields, educational institutions, students, parents accept the concept of ‘educational consumers’ and I analysed each case. Second, in order to reveal the conceptual error of ‘educational consumer’, I compared the values of education and economy. Third, the term had many problems in usage so the relationship between its concepts and usage was discussed. A school has educational functions, but also it has political functions, economic functions, child care functions, and social-role-selecting functions. Students in school do not only have educational experiences. Sometimes students make a decision in the economic perspective, and pursue economic value. They make a choice for economical reasons. These properties of students are similar to the consumers’ in economy. The similarity between students and consumers makes us accept the term of ‘educational consumer’ naturally without any critical thinking. The concept of ‘educational consumer’ do not seem to be used in the same way in academic fields as well as various educational institutions. Any study even tried to find the meaning of the term. But in some studies, the term was mentioned and I tried to derive the meaning from them. And I make a result that the term has the several meanings of ‘child’, ‘learner’, ‘people who demand needs objectively’, ‘people who make a choice’, ‘beneficiaries’, ‘people who demand needs subjectively’, ‘customer’, ‘people who make an incomplete decision’, ‘people who have a right to demand’. And with the various meanings above, I tried to know how students and parents recognize the term. Most students and parents recognize the term of ‘educational consumers’ as the people who can demand needs subjectively. This meaning has no significant difference from the terms such as consumers and clients in economy. It might be considered not a big problem because students have the same properties with consumers. However, it is likely to make us have a wrong concept that students’ main work in school is done in the economic field. Another term for students is the term of ‘subject of school education’. I compared this term with the term ‘educational consumer’ to give you a clearer idea. Students are the subjects of economy and they can dream economical accomplishments. However, making a choice in the economic perspective does not mean education. Education is associated with human intellectual, moral, and physical growth and it pursues the human integral growth. People tend to think that if they do not get the economic benefits from education, it fails. Educational value and economic value are confused here. There is a fundamental reason why ‘educational consumer’ can not be used. The terms ‘students vs. consumers’, ‘teachers vs. providers’, ‘knowledge vs. goods’ seem to be comparable within a system and they seem to be able to put together, but education and economy have completely different system and each is made up of different elements. The values of each area are different and the same phenomenon will be understood differently. Education and economy have different systems and education can not be seen and judged in the economic perspective. If we judge education in the economic point of view, this can cause confusion and give us a wrong idea about education. As a result, the term ‘educational consumer’ is difficult to be accepted. It is hard to say that the values of education and economy get confused because the term of ‘educational consumer’ are being used. But the term can make us more confused. Correct usage of terms can not solve all the problems but at least it prevents us from misunderstanding. This study would be successful if it helps us remind that the concept of ‘educational consumer’ has a problem and we should think twice when we use it. This study was done to analyze the recognition of the concept of ‘educational consumer’. I found that the term has a problem and its use and concept tend to adhere to reality. This study is done in a hypothetical level so more in-depth studies for possibilities and limitations must be followed. However, I hope that it could be the significant groundwork for the followed studies on this subject. 본 연구는 ‘교육수요자’라는 용어의 개념 및 사용의 문제점을 밝히는 것이 목적이다. 탐색은 크게 세 가지 방향에서 이루어졌다. 첫째, 학계, 교육기관, 학생·학부모는 각각 ‘교육수요자’ 개념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 분석하였다. 둘째, ‘교육수요자’ 개념의 오류를 밝히기 위하여 교육과 경제의 논리를 비교·대조하였다. 셋째, 용어 사용의 문제점을 밝히기 위하여 개념과 용어 사용의 관계에 대한 논의를 하였다. 학교는 교육 기능 외에도 정치 기능, 경제 기능, 보육 기능, 사회 선발 기능 등을 담당한다. 이러한 학교에서 학생은 교육만을 경험하지 않는다. 학생은 학교에서 정치와 경제를 경험하기도 한다. 복합적인 학교 경험 가운데 학생은 때로는 교육적 주체로, 때로는 정치적 주체로, 때로는 경제적 주체로 지위를 달리 한다. 학생이 경제 경험을 하고 경제적 주체가 된다는 말은 학생이 어떤 활동이나 사건을 경험할 때 경제적 관점으로 상황을 판단하고 경제적 가치를 추구하며 경제의 논리에 따라 어떤 선택을 한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경제적 주체로서의 속성은 학생을 ‘교육수요자’라고 부를 수 있는 요인이 될 수 있다. ‘교육수요자’라는 용어는 ‘5·31교육개혁안'을 계기로 학교에 도입되었으며, 7차 교육과정에서 ‘교육수요자’, ‘수요자중심교육’ 등이 사용되기 시작하면서 아주 일반적인 용어가 되었다. 그런데 ‘교육수요자’ 개념은 학계는 물론, 각종 교육기관에서도 완전히 통일된 개념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교육수요자’가 어떤 개념을 지닌다고 밝힌 연구도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수요자중심교육’을 다룬 몇 가지 연구들을 비교·대조하여 ‘교육수요자’ 개념 도출을 위한 작업을 실시하였다. 그 결과 ‘교육수요자’는 아동, 학습자, 객관적(교육적) 요구를 하는 자, 선택을 할 수 있는 자, 수혜자, 주관적 요구를 하는 자, 고객, 소비자, 불완전한 선택을 하는 자, 요구를 할 수 있는 권리를 지닌 자 등의 개념들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밝힐 수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이끌어낸 다양한 ‘교육수요자’의 개념들을 가지고 학계, 교육기관, 학생·학부모는 각각 ‘교육수요자’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 파악하고자 하였다. 학계에서는 ‘수요자중심교육’을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교육수요자’ 개념이 달라졌고, 각종 교육기관에서는 ‘교육수요자’ 개념이 혼착 되는 현상이 일부 나타났으나, 대체적으로는 ‘요구를 하는 자 혹은 요구를 할 수 있는 자’ 정도로 여기는 것 같았다. 학생·학부모의 경우는 대부분 ‘교육수요자’를 ‘주관적인 요구를 하는 자, 혹은 그러한 권리를 지닌 자’로 인식하는 경향이 짙었다. 학생·학부모가 인식하는 ‘교육수요자’ 개념은 경제에서의 ‘수요자’, ‘고객’과 큰 차이가 없었다. 학생에게 경제에서 말하는 수요자의 속성이 있기 때문에 ‘교육수요자’라는 용어는 자연스러울 수 있고 이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큰 문제가 아니라고 여길 수도 있다. 그러나 ‘교육수요자’로 학생을 지칭하는 것은 학교에서 학생이 하는 주된 일의 영역을 경제로 간주하는 것이다. 학생을 지칭하는 또 다른 말인 ‘학교 교육의 주체’라는 용어와 비교해 본다면 보다 명확해질 것이다. 학생은 경제적 주체로서 경제적인 성취를 꿈꿀 수 있다. 그러나 학생이 경제적 주체로서 상황을 판단하고 가치를 선택하는 행위를 교육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것은 경제적 행위이다. 교육은 인간의 지적·도덕적·육체적 성장과 관련된 일이라는 사실이 인정된다면 교육이 추구하는 것은 인간의 성장이다. 그런데 경제적 성장·이익을 가져오지 못하는 교육은 실패라고 여기는 현상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교육적 가치와 경제적 가치가 혼동되고 있는 것이다. ‘교육수요자’라는 용어를 사용할 수 없는 보다 근원적인 이유가 있다. 학생과 수요자, 교사와 공급자, 지식과 재화는 언뜻 비교할 수 있고 하나의 체계 안에서 종합할 수 있을 것 같지만 교육과 경제는 상이한 체계를 지닌 영역이고 각 영역을 구성하는 요소에서 현격한 차이가 있다. 교육이 추구하는 가치와 경제가 추구하는 가치가 다르고 어떤 관점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동일한 현상도 다르게 파악된다. 교육과 경제가 서로 상이한 체계를 지니고 있음에도, 교육 영역에서 경제적 주체로 가치를 판단하고 선택한다는 것은 개념상 혼란을 가져올 수 있다. 결국 ‘교육수요자’라는 용어는 개념 자체가 성립되기 어렵다. ‘교육수요자’ 같은 용어 때문에 교육의 가치와 경제의 가치가 혼동되었다고 말하기는 힘들지만 ‘교육수요자’와 같은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이러한 현상을 더욱 확고히 할 수 있다. 용어의 올바른 사용에 대한 논의가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수는 없다. 그러나 적어도 불필요한 오해를 방지하고, ‘수요자중심교육’, ‘교육수요자’ 개념이 어떤 점에서 문제가 되는지를 고민해보는 계기가 되었다면 본 연구는 목적을 다한 셈이다. 기존 선행 연구가 주로 ‘수요자중심교육’의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에 대한 탐색에 관심을 두었던 반면 본 연구는 ‘교육수요자’ 개념은 어떻게 인식되고 있는지를 분석하고자 하였다. ‘수요자중심교육’ 개념에서 ‘교육수요자’ 개념을 따로 도출하는 시도를 하였고, ‘교육수요자’ 개념 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의 확인이 이루어졌으며, 용어 사용과 개념이 고착화되는 현상 간의 관계를 일부 밝힐 수 있었다. 물론 아직 가설적인 수준에 머무는 것이기에 그 가능성과 한계에 대하여는 좀 더 깊이 있는 연구가 이어져야 하겠으나 이 방면의 연구에 기초적인 토대를 마련했다는 의의를 지니고 있다.

      • 조선전기 향교의 교관정책 연구

        최연일 한국교원대학교 대학원 2012 국내석사

        RANK : 247615

        본 연구에서는 경국대전 성립 전ㆍ후의 향교 운영과 교관정책을 살펴볼 것이다. 특히 향교 운영의 흥패를 가늠할 수 있는 교관의 파견정책과, 교관의 선정과정을 통해 조선전기 교육정책의 의의와 한계를 고찰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연구 문제는 다음과 같다. 첫째, 향교의 창설 배경과 과정을 살펴볼 것이다. 둘째, 향교의 교육대상이라 할 수 있는 교생을 살펴볼 것이다. 셋째, 향교의 교재와 구체적인 교육 방법을 살펴볼 것이다. 넷째, 조선전기 향교 교관 파견정책의 시행과 문제점을 살펴볼 것이다. 마지막으로, 기존 선행 연구물에서 제시한 교관처우 문제를 재논의 할 것이다. 향교는 세종실록 지리지와 경국대전에 의하면, 주ㆍ부ㆍ군ㆍ현에 각 1개교씩 향교를 설치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조선전기 향교의 개수가 329개의 향교가 창설되고, 경술국치 이전까지 향교는 각 고을에 존속하여 교육기능과 선현의 제향기능을 수행하였다. 조선조에 들어 본격적으로 향교가 설립되고 체계성을 갖추기 시작하였다. 뿐만 아니라, 구체적이고 공식적인 향교진흥책이 마련되기까지 한다. 수령의 7가지 임무 가운데‘학교교육의 진흥’을 구체적으로 명시함으로써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다. 향교의 교생의 입학 대상과 연령을 살펴보면, 일반적으로 17세부터 40세까지이며 󰡔증보문헌비고󰡕의 입학규정에 알 수 있듯이, 사족은 물론 가난한 집안 출생의 유생인 경우에도 학문에 대한 뜻과 일정수준의 학습 능력을 가지고 있다면 입학할 수 있었다. 이는 향교의 주요 목적이 지방인재의 등용과 민풍순화의 역할을 띠고 있다는 점에서 이유를 찾을 수 있다. 또한 당시 향교 교생에게는 과거시험에 응시할 수 있는 혜택, 호역 면제, 실력 여하에 따라 교관으로 선발되거나, 생원ㆍ진사시의 회시를 바로 볼 수 있는 특전을 부여했다. 향교의 교육과정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게 여긴 교재는 󰡔소학󰡕이다. 󰡔소학󰡕은 유교 사회의 도덕규범이 될 만한 용어만을 초록한 입문서로 교생의 道의식, 윤리의식의 확립을 위해 중요시되었다. 먼저 󰡔소학󰡕, 󰡔가례󰡕, 󰡔효경󰡕, 󰡔삼강행실󰡕을 배우고 난 뒤 四書인 󰡔대학󰡕, 󰡔중용󰡕, 󰡔논어󰡕, 󰡔맹자󰡕를 익히고 이어 五經을 익히는 것이 일반적인 순서였다. 또한, 각 개인의 교생 수준에 맞는 개별적인 학습방법을 통해 교육과정이 운영되었다. 향교의 교관은 교생을 가르치는 교수를 뜻하는 말이다. 향교 교관의 명칭은 태종代 吏曹의 건의에 따라“문과 출신 6품 이상 교수관은 某官儒學敎授官이라 칭하고, 참외는 훈도관, 생원과 진사는 교도라 칭하였다. 이후 󰡔경국대전󰡕에 수록된 교관의 명칭은 교수와 훈도라는 명칭으로 불리었다. 교관의 자질은 경의에 밝고, 도덕성을 겸비한 자로 조선전기 향교 교관 파견의 원칙은 문과급제자로 삼았다. 문과급제자의 교관파견을 원칙으로 삼은 점은 향교 교관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에 문과급제자, 생원ㆍ진사, 유학, 지역에서 사표가 될 만한 인물의 천거를 통해 다양한 방법으로 교수자원의 확보노력이 시행되었다. 향교 교관의 선정은 서울과 지방으로 나뉘어 취재하였다. 서울은 예조에서, 지방은 관찰사가 四書와 二經으로 시험하여 후보자를 보고한 다음 교수관에 임명하여 보내는 것을 정식으로 삼았다. 예외적으로 평안도ㆍ함길도ㆍ황해도ㆍ강원도의 경우에는 변방이라는 지리적 여건 때문에 四書一經 또는 四書로 조정하여 교관을 취재하기도 하였다. 아울러 선발된 교관에게는 생도들의 학업성취, 교관의 근무태도를 중심으로 평가를 하였다. 마지막으로, 조선전기 향교교관의 처우는 어떠하였는가? 기존의 선행 연구물의 입장은 당시 향교 교관의 경제적 처우와 사회적 위상이 낮았다고 평가한다. 분명 일견 타당한 지적이다. 하지만 교관의 처우를 개선하기 위한 정책적 노력 역시 검토가 필요하다. 첫째는 향교 교관의 경제적 처우에 관한 것이다. 교관의 녹봉은 󰡔경국대전󰡕에 기록되어 품계에 따라 지급되었다. 따라서 교관의 경제적 처우문제를 논하기에는 적절하지 않다. 뿐만 아니라, 관찰사사에 의해 선발 된 학장의 경우는 비관인 신분이라는 점에서 녹봉이 주어지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를 두고 경제적 처우가 좋지 않았다는 지적은 타당하지 않다. 둘째는 향교 교관을 선정하는 하나의 방법으로 좌천자를 교관으로 임명하는 사례가 있었다. 당시 학문적 소양이 높지 않은 幼學이 교관으로 임명되는 폐단을 방지하기 위해 문과 급제자에 한정하여 좌천자를 교관으로 임명한 것을 알 수 있다. 부족한 문신출신의 교수자원을 확보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마지막으로 태종 16년(1416) 호조에서 국가 용도를 줄이기 위해 학장 및 훈도관의 식사제공 일부를 없애자는 의견을 통해 당시 교관에 대한 처우문제를 제기하였다. 하지만 당시 학장 및 훈도관에게 국한된 것이 아닌 거의 모든 관직자에게 적용한 점에서 교관만의 처우를 문제 삼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이는 국난의 해결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행해진 조치일 뿐이다. 위의 논의들을 통해 조선전기 향교의 운영과 교관정책의 우수함만을 논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나름의 시대에서 최선의 노력을 다하였고, 그에 따라 조선전기 교육제도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이에 대한 조선전기 향교의 운영과 교관정책에 의미 있는 평가가 이뤄줘야 할 것이다.

      • 헐버트의 교육 관련 활동 연구 : 그의 서신 중심으로

        강세영 한국교원대학교 대학원 2013 국내석사

        RANK : 247615

        본 연구는 1886년 조선정부가 설립한 육영공원 교사로서 내한했던 미국인 헐버트(Homer B. Hulbert, 1863-1949)가 남긴 서신을 중심으로 분석했다. 헐버트는 조선말기, 대한제국, 일제강점기, 대한민국을 거치는 격동의 시기에 한반도를 지켜본 역사 속의 인물로서, 평생 한국과의 인연을 뗄 수 없는 삶을 살았으며, 대한민국 땅에 묻혔다. 그는 고종과도 친분이 두터웠던 인물로 다른 선교사들과 다르게 조선 정부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활동했다. 그는 교육, 정치, 선교, 언론, 학술 등의 다방면에서 활동하며 저술을 남겼고 해외에서도 조선과 관련하여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헐버트는 춘생문사건, 고종의 밀서 전달, 헤이그 특사 활동, 「코리아리뷰」 발행, 「독립신문」 발행 협조 등 조선 정부와 관련된 정치 및 저술 활동을 하였기 때문에 그에 대한 많은 연구가 이와 같은 대외 활동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런데 그는 조선정부가 설립한 관립학교의 교사로서 약 15년간 복무했고 그의 교육 활동에 대한 집중적인 연구는 많지 않다. 본 연구는 헐버트가 육영공원, 한성사범학교, 관립중학교 재직 시절에 남겼던 서신을 중심으로 그의 교육 활동과 그가 당시 병진했던 대외적 활동을 분석하여 그가 어떠한 교육자였는지를 알아보고자 하였다. 육영공원 재직 시절부터 관립중학교 사임까지 그의 서신에서 분석하고자 한 연구문제는 다음과 같다. 첫째, 헐버트의 각 학교에 부임하게 된 경위는 어떠했으며 각 학교 부임 및 사임 동기는 무엇이었는가? 둘째, 그는 각 학교 재직 당시 학교 직무 외에도 많은 활동을 활발히 병행했다. 그의 학교 직무 외 활동은 어떠했으며 그러한 대외 활동의 저의는 무엇이었는가? 셋째, 각 학교 복무에 관련된 서신 내용을 기초하여 볼 때 그에 대한 기존의 견해는 재해석되어야 할 여지가 많다. 서신 분석을 통하여 드러나는 그와 그의 교육 활동에 대한 재평가 사항은 무엇인가? 우선, 헐버트의 육영공원 재직 기간을 살펴보았다. 서신에서 보이는 그의 육영공원 부임 동기, 『사민필지』 집필 과정, 골동품 수집, 육영공원 사임과정에 대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그는 선교와 한국인의 교육을 위해서 한국에 내한했다고 알려졌다. 그러나 이러한 동기 외에도 그는 자신의 부채를 해결하고 부를 쌓기 위해 내한했다. 그의 이러한 경제관념은 육영공원 교육 외에 돈벌이가 되는 다른 곳에도 관심을 갖게 했다. 그는 육영공원 교사 급여로 만족하지 못하고 한국 관련 정보를 수집하고 기록하여 외신에 항상 꾸준히 투고했다. 이로써 원고료도 받고 한국과 해외에서 명성을 얻고자 했다. 미국에 돌아갔을 때를 대비해서 한국 관련 책자와 강연을 꾸준히 준비했다. 그는 육영공원 2차 계약 때 길모어(Gilmore)와 함께 급여 인상을 요구했으며 이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미국으로 다시 돌아갈 생각도 했었으나 2차 계약을 체결하고 한국에 남았다. 신식 학문을 가르쳤던 그는 육영공원 학생들이 볼 교과서가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빨리 깨달았다. 그리고 신식 학문에 대하여 한국인들이 관심이 많으나 그들이 정작 접할 책이 없다는 것, 신식 과목 교과서 제작 분야에 아무도 나서지 않고 있다는 것도 깨달았다. 그는 육영공원 학생들이 가장 관심이 많았던 지리 과목을 우선 번역하여 순수 한글로 『사민필지』를 집필했다. 이로써 고종과 한국인들에게 명성을 얻고 육영공원 재계약에 도움이 되기를 원했다. 헐버트는 내한 초기부터 또 다른 돈벌이 수단으로써 한국의 골동품 수집에도 관심을 가졌다. 한국 골동품을 헐값에 사들여 후에 미국에서 활용할 계획이었다. 그의 한국 골동품 수집 및 거래는 내한 초부터 1907년 그가 미국으로 귀국한 이후까지 찾아볼 수 있다. 한편 그는 육영공원에서 3차 재계약을 성사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선행연구가 지적한 것처럼 조선 관리들의 부패, 학원들의 학습 해이, 조선정부의 육영공원 축소 방안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조선 왕실에 고용된 교사였지만 조선 왕실을 타도하고 부정하는 수업을 실시하였기 때문이었다. 다음으로 헐버트의 한성사범학교 재직 시 활동을 살펴보았다. 그의 사범학교 부임 경위와 학교 내 직위, 계약 조건, 교과서 제작, 그가 사범학교 업무 외에 진행했던 겸직 활동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헐버트는 1895년 춘생문사건으로 고종과 다시 친분을 쌓는다. 이어서 그는 「독립신문」의 영자면을 담당하여 서재필을 도왔고 한성사범학교에 교습으로 부임했다. 교습은 사범학교의 교육과정과 교육방법을 결정할 수 있는 자율성을 부여받았다. 그가 부임하면서 사범학교 내에 사범과 외에도 영어과가 설치되었고 유교 교육 위주였던 사범학교 교육에 신식 과목인 지리, 수학, 영어 등을 추가하여 가르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사범학교 본래 취지였던 신식 교원 양성 전문 과정에는 별다른 기여를 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는 이 시기부터 본격적으로 한국 내 대외 활동을 활발하게 병행하기 시작했다. 그는 「코리아리뷰」를 창간했고 많은 교과서를 발행했다. 또한 외신에 한국 관련 전문가로서 적극적인 글쓰기를 병행했으며 개인적으로 부동산 투자에 뛰어들었다. 그가 이렇게 많은 활동을 동시에 진행하느라 사범학교 교육은 더 이상 진전하지 못했고 5년 후에 사범학교 교습 재계약을 성사하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헐버트의 관립중학교 재직 시 활동을 살펴보았다. 그의 관립중학교 부임 경위와 그가 함께 추진했던 대외 활동은 다음과 같다. 그는 관립중학교 부임 초창기부터 귀국을 준비했다. 대한제국의 국운이 거의 다한 시점에서 그의 귀국 준비의 첫 번째 이유는 자녀 교육 문제였다. 자녀들이 미국에서 제대로 교육받기를 원했으며 그는 가족만 미국으로 보내고 한국에 홀로 남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리고 대한제국에 속해 교직 활동을 했던 자신의 입지도 불안해짐을 감지하고 미국에서의 진로를 적극적으로 준비하기 시작했다. 한성사범학교 시절부터 시작한 부동산 사업과 내한 초부터 지속한 골동품 투자로 단기간에 수익을 보았다. 또한 그는 미국이나 한국에서 한국 전문가로서 입지를 다질 빠른 승진 가도를 모색했다. 따라서 한국 관련 많은 대외 활동에 활발히 참여했다. 많은 한국 관련 집필을 지속했고 세인트루이스박람회(St. Louis World Exposition) 외국서기관으로 출마 시도를 하였으며 중국, 홍콩, 한국의 Y.M.C.A 총괄 임원으로서 바쁘게 활동하다가 결국 고종의 밀서 전달 임무를 수락하고 관립중학교를 사임하게 되었다. 이상의 논의를 통하여 헐버트가 한국과 한국인보다는 자신의 부와 명예를 더욱 중시했고 이것을 의식하고 친한 활동에 임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일개 교사나 선교사로 활동하기보다는 조선정부와 관련되어 대외적으로 활동하기를 선호했다. 그는 한국인을 위한 교과서를 제작하였고 한국 관련 기사를 해외에 꾸준히 투고하였으며 고종의 밀서를 전달하러 미국으로 갔다. 그리고 헤이그 밀사로서도 활동하였다. 이러한 그의 공식적 친한 행보는 그가 한국인과 한국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헌신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의 서신을 통해 그가 자신의 명예와 부에 대한 대가를 의식하고 활동을 선택하고 참여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므로 그의 대외적 친한 활동과 교육활동에 대하여 그가 한국에 매우 충성스러웠고 한국을 위해 헌신하고 희생했다는 기존의 평가는 지나치게 과장되었다. 이것은 헐버트의 공식적 대외 활동만을 보고 기존 연구가들이 내린 결론일 것이다.

      • 역주『胎敎新記』연구

        나영숙 한국교원대학교 대학원 2013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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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연구는 『태교신기(胎敎新記)』역주이다. 『태교신기』는 조선 정조 24년(1800)에 사주당 이씨(師朱堂 李氏, 1739-1821)가 기존의 단편적인 태교 관련 기록을 종합하여 체계화한 세계 최초의 전문 태교 지침서이다.『태교신기』는 사주당 자신이 읽은 경서(經書)와 사서(史書) 및 의서(醫書)에서 태교 관련 이야기를 뽑아 정리하고, 몸소 네 명의 자식을 낳아 기른 경험을 토대로 저술하였다. 후에 아들 유희(柳僖, 초명: 유경(柳儆), 1773-1837)가 장구(章句)를 나누어 음(音)을 달고 뜻을 해석하여 1801년에 완성하였다. 『태교신기』는 조선시대 태교서로서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대부분의 태교 관련 문헌들이 태교를 책의 일부분으로 다루면서 단편적인 사실들을 취합해 놓은 것과는 달리, 『태교신기』는 태교의 이념과 원리에서부터 구체적인 실천방법까지 담고 있는 유일한 태교 전문서라는 점에서 다른 태교 관련 서적과 차별화되는 특징이 있다. 본 연구는 『태교신기』를 바탕으로 한국 전통 태교의 특성을 해석학적 연구 방법으로 탐구하였다. 특히 『태교신기』의 본문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주를 번역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하고, 원문에 대한 주기(註記)를 정리하는 한편, 이사주당이 참고한 전거를 일일이 확인하고 제시하였다. 본 연구는 『태교신기』의 역주 작업을 통해 한국 전통 태교를 바르게 이해하고, 현대 사회에서 태교의 중요성을 제대로 인식하고 실천하도록 돕는 데 목적이 있다. 연구 내용에 대하여 고찰한 결과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한국 전통 태교는 태아시기를 인간 교육의 시작으로 보고 있으며, 처음이 정성스러우면 이루어짐이 번성한다는 생각에서 출발하였다. 따라서 태교는 근본을 바르게 하기 위한 원초적 교육 활동으로 이해할 수 있다. 둘째, 한국 전통 태교의 요점은 ‘삼감(謹)’ 혹은 ‘경이존심(敬以存心)’이다. 임부가 보고, 듣고, 말하고, 행동하는 등의 모든 일상생활에서 조심하는 것이 태교를 위한 마음가짐이다. 특히 임신 3개월까지의 태교가 더욱 중요하다. 이때는 태아의 모양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고, 성(姓)이 결정되기 전이므로 임부가 보고 듣는 것에 따라 태아가 감응하여 모양이 이루어진다. 셋째, 태교는 임신부터 출산까지 열 달 동안 한시적으로 실행하는 활동이 아니라 결혼 전부터 평소에 마음가짐과 일상생활을 건전하게 하는 일과의 연계선상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지속적인 활동이다. 넷째, 태교에는 부부가 심신이 건강한 상태에서 수정에 임하고, 열 달 동안 태교에 힘쓰며, 주변 사람들이 임부를 보살펴 태교의 좋은 환경을 조성하는 일이 함께 포함된다. 다섯째, 태교의 내용은 유학 교육의 시작으로서 군자를 교육하는 내용과 다르지 않아 임산부나 여성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모든 성인에게 요구되는 도덕규범이 그 핵심을 이룬다. 여섯째, 『태교신기』는 조선시대 여성의 저작물이지만 현대의 시각으로 보아도 합리적이고 과학의 정신을 담고 있다. 시대를 막론하고 태교의 중요성은 부지불식간에 인정하고 있으나 현대사회에서는 태교를 적극적으로 실천하지는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태교의 중요성을 제대로 인식하고 실천하는 것이 필요하다.

      • 조선시대 善惡籍 연구

        박현준 한국교원대학교 대학원 2012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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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연구는 향약의 보급과 善惡籍은 어떤 관련이 있으며, 향약문에서 선악적을 어떻게 규정하였고, 실제 선악적은 어떻게 기록되었고, 학교에서 선악적은 언제부터 사용되었으며, 學規에서 선악적을 어떻게 규정하고 활용하였는지를 목적으로 하였다. 이 연구는 향약문과 學規에서 선악적과 관련된 규정들이 마을구성원과 학생들에게 어떻게 적용되었고, 그에 따라 조선시대의 인재등용제도에서 선악적이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주목하였다. 연구문제는 다음과 같다. 첫째, 향약의 보급과 선악적은 어떤 관련이 있는가? 둘째, 향약문에서 선악적을 어떻게 규정하고 있는가? 셋째, 실제 선악적은 어떻게 기록되었나? 넷째, 학교에서 선악적을 사용한 이유는 무엇인가? 다섯째, 學規에서 선악적을 어떻게 규정하고 있는가? 여섯째, 학교에서 선악적을 어떻게 활용하였나? 향약에서 선악적이 어떻게 활용되었는지 살펴보면, 1519년 「주자증손여씨향약」이 보급되면서 善惡籍의 사용이 일반화되었다. 여러 향약문에서 선악적의 구체적인 활용을 중시했다. 「주자증손여씨향약」(1519)~「契中章程」(1905)까지 각종 향약문의 서문에서 선악적을 두고 활용할 것을 규정하였다. 향약의 4대조목이 선악적 기록의 준거로 활용 되었다. 善籍者는 講信禮에 여러사람들 앞에서 드러내어 칭찬해주었고, 선물을 주거나 동역에서 빼주는 등 우대해주었다. 악행자를 악적에 기록하는 것은 고발하기보다는 죄를 뉘우쳐서 개과천선시키기 위함이었다. ‘환난’조목의 실천을 선악적에 기록함으로써, 공동체의 존속과 유지를 위한 보험의 기능을 강화할 수 있었다. ‘月旦集會讀約의 禮’이나 ‘동회의식’과 같은 향약의 정기적인 집회에서 선악적을 활용함으로써 마을구성원들은 향약의 규범과 실천을 내면화하였다. 각종 향약문의 구조 비교를 통하여, 주희와 율곡이 모두 선악적의 활용을 강조하여 향약문을 작성한 것을 알 수 있었다. 또한, 󰡔人吏諸官屬記過󰡕에서 실제 악적의 구체적인 기록을 살펴보았다. 조선시대에는 향약의 실천과 내면화를 위해서 선악적을 기록·활용하였다. 학교에서 선악적이 어떻게 활용되었는지 살펴보면, 1407년 「삼관학식」에서 삼관에 過簿를 두고 활용하였고, 1437년 「학관개정안」에서 전국 각 학교에 善罰簿를 두고 활용하였다. 1582년 「학교모범」에서 학교의 선적에 기록되기 위해서는 도덕적 모범이 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학문성취가 뛰어나야 했었다. 악적을 기록하는 것이 惡籍者를 고발하기 보다는 죄를 뉘우치고 개과천선시키기 위함이었다. 심지어 제적당한 경우에도 재입학의 기회를 주었다. 1731년 「치양적법」에서 ‘결석, 성적, 도덕적품위’를 선악적 기록의 원칙으로 삼았다. 선악적의 내용을 각 단위 서당에서 관에 보고하였다. 1731년 「낙육재절목」에서 낙육재생은 국가로부터 많은 경제적 지원을 받는 일종의 장학생이었고, 그 특혜를 누리기 위해서 높은 수준의 도덕적 품위와 성실한 학습태도를 지녀야 했다. 18세기 「덕곡서재월삭강회약」에서 ‘月朝約會儀’를 통해 학교의 공식행사에서 선악적을 활용하였다. 1881년 「의학재규약」에서 악적이 2권으로 세분화되어 관리되었다. 1889년 자암서당에서 실제 선악의 기록을 고찰하였고 선악적의 기록이 학생대표선발에 활용되었다. 조선시대에는 학교에서 선악적을 기록·활용함으로써 학습자에게 필요한 도덕성을 기를 수 있도록 하였다. 인재등용제도에서 선악적이 어떻게 활용되었는지 살펴보면, 1437년 「학관개정안」에서 罰簿에 기록된 사람에게는 ‘제수, 공거, 과거’를 허가하지 않았다. 1582년 「학교사목」에서 당장·장의·유사가 선악적을 상고하여 결격사유가 없는 사람만 과거에 응시하게 하였다. 1669년 「관학유생강독절목」에서 성실하게 공부하고 성적이 우수한 학생은 식년회시에 바로 응시할 수 있는 특전을 주었고, 불성실하게 공부하고 성적이 열등한 학생은 과거에 응시할 수 없도록 하였다. 1887년 「관학원절목」과 「각면권강12조」에서 수업에 성실하게 참석하지 않거나 도덕적 결함이 있는 경우 學案에서 삭제되고 과거에 나갈 수 없도록 규정하였다. 인재선발제도에 선악적이 직접적으로 활용되었고, 도덕성에 결함이 있는 惡籍者는 과거에 응시할 수 없도록 규정하였다. 또한 조선시대의 유생은 향약의 선악적과 학교의 선악적을 통해 2중으로 도덕성을 검증받아야만 했다. 이상의 연구에서, 조선 500년 동안의 향약과 학교에서 이루어졌던 선악적의 활용은, 선행자는 여러 사람들 앞에서 드러내서 칭찬·우대해 주고 악행자는 죄를 뉘우쳐서 개과천선시키기 위함이었다. 학교에서 선적에 기록되기 위해서 도덕적 모범과 우수한 학문적 성취를 동시에 보여야 했었다. 인재등용제도에서 선악적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였고, 도덕적으로 결함이 있어 악적에 기록된 자에게는 ‘제수, 공거, 과거’를 허락하지 않아 관리가 될 수 없게 하였다. 조선은 무려 500년 동안이나 향약과 학교에서 선악적을 기록하고 이를 인재등용제도에 활용해 왔다. 향약에서 선악적을 기록·활용하여 마을공동체를 화목하게 만들고, 학교에서 선악적을 기록·활용하여 ‘뛰어난 학업성취, 도덕적 품위, 성실한 학업태도’를 골고루 갖춘 인재를 길러내고자 하였다. 인재등용제도에서 善籍者는 우대해주고, 惡籍者는 관리가 되는 것을 금지했다. 선악적 기록 시스템이 500년동안이나 향약과 학교에서 존속할 수 있었던 것은, 구성원들의 자발적인 동의가 없이는 불가능하다. 선악적의 기록절차 및 도덕적 준거, 선악적을 집회에서 공식절차화한 것, 선악적을 관리등용제도에 활용할 것을 제도화한 점 등을 구성원들이 직접 참여하고 만들어갔던 것이다. 조선시대 500년을 넘어 일제시대까지 선악적을 활용한 사실에서 이것이 얼마나 뿌리깊은 전통이었는지 알 수 있다.

      • 돌보는 이로서의 교사 : 나딩스의 돌봄교육론을 중심으로

        강복임 한국교원대학교 대학원 2013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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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연구의 목적은, 자유교육 대안으로서의 돌봄교육을 체계화하고, 돌보는 이로서의 교사의 특징과 교육적 의의를 밝히는 데 있다. 정서를 도외시한 지식교육을 비판하며 돌봄교육을 제안한 나딩스는, 돌봄을 ‘돌보는 이’와 ‘돌봄을 받는 이’의 상호 기여로 완수되는 관계로 보았다. 돌봄에 있어 ‘돌보는 이’는 ‘전념’과 ‘동기의 전이’의 의식 상태를 갖게 되고, 돌봄을 받는 이는 ‘감수’, ‘인정’, ‘반응’의 의식 상태를 보인다. 학교에서의 돌봄은 교과지도 및 생활지도와 어떻게 구분되는가? 교과지도의 초점은 ‘교육내용’에 있고, 돌봄의 초점은 ‘사람’과 ‘관계’에 있다. 또한 돌봄은 인간의 실제적 필요(신체적 필요와 관계․수용․격려 등의 정서적 필요)의 충족을 강조한다. 그리고 돌봄은 생활지도와 관계 형성, 실천의 다방향성, 주체의 능동성 측면에서 개념적으로 차이를 지닌다. 교육 실제에 있어 돌봄은, 돌봄이라는 구체적 ‘목표’, 돌봄의 핵심주제로 이루어지는 ‘교육내용’, 돌봄의 실현을 중시하는 ‘교육방법’을 통해서, 교과지도와 생활지도의 구분을 유연하게 하고 통합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틀’이 될 수 있다. 자유교육과 대비하여 살펴볼 때, 돌봄교육의 목적, 내용, 방법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자유교육의 목적은 합리적인 마음의 발달이고, 돌봄교육의 목적은 돌봄 능력의 발달이다. 분리와 고립 상태에서 살아갈 수 없는 인간은 돌봄을 통해서,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고, 다른 누군가(혹은 무언가)를 돌볼 수 있는 능력을 계발할 수 있다. 자유교육의 내용은 ‘지식의 형식’이고, 돌봄교육의 교육내용은 ‘돌봄 핵심주제(centers of care)’이다. 돌봄 핵심주제는 교육프로그램에 적용하는 탐구 주제로서, ‘자아, 친밀한 사람들, 낯선 사람과 멀리 있는 사람들, 동물․식물․그리고 땅, 인간이 만든 세상, 사상’ 여섯 개로 구성되어 있다. ‘돌봄 핵심주제’에서 ‘중심(center)’은 자아를 의미하고, 자아를 중심으로 하는 동심원은 점점 외곽을 확대해 간다. 이것은 ‘관계의 폭(양적 확대)과 깊이(질적 심화)의 성장’을 의미한다. 자유교육의 방법은 지식의 전수이고, 돌봄교육은 돌봄을 방법이 따라야 할 핵심적인 가치기준으로 여긴다. 돌봄교육 방법의 특징은, 첫째 동적이고 둘째, 사적영영에도 관심을 갖고 있으며 셋째, 배움에 따르는 고통과 연관된 학생들의 정서에 민감하고, 넷째, 학생들은 ‘동반자’로서 서로를 돕는다. 나딩스는 돌봄교육의 구체적 방법으로 모범, 대화, 실천, 확증을 제시하였다. 돌봄교육의 목적, 내용, 방법을 함께 정리하여 진술하면 다음과 같다. 돌봄 관계를 형성하기 이전의 인간은, 분리, 고립, 불안, 외로움 등의 상태에 있다가 돌봄을 경험하면 그 상태로부터 벗어나서 누군가(혹은 무언가)와 관계를 맺고 유지하고 강화하며, 누군가(혹은 무언가)를 돌볼 수 있는 상태가 된다. 그러므로 돌봄의 경험은 곧 돌봄 능력의 계발이며, 돌봄 능력의 발달을 가능하게 하는 돌봄교육은 곧 ‘관계 교육’이다. 이처럼 돌봄교육에서 돌봄은 교육의 목적이자, 내용이자, 방법이 따라야 하는 핵심적인 가치 기준이다. 돌봄교육은 지식교육에서 소홀했던 ‘정서와 관계’를 중시하며, 합리성과 정서, 지적 성장과 도덕적 성장, 추상화된 지식과 삶의 실제가 통합되는 교육을 지향한다. 따라서 돌봄교육론은 ‘관계 교육’을 통하여 교육의 통합을 지향하는 ‘통합교육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돌봄교육이 통합의 이상대로, 지식교육을 포용하는 교육이론 및 실천이 되기 위해서는, 보완되어야 할 점이 있다. 먼저 돌봄 능력의 성장 또는 차이를 명확하게 하고, 신체․정신적 성장 단계에 따른 돌봄 능력의 수준 차이를 구체화할 필요가 있다. 나아가 돌봄 핵심주제별 성장의 수준 차이 역시 상세화하고 각 단계에 적절한 교육방법을 제시할 필요가 있다. 또한 ‘직접 대면, 상호 기여’라는 돌봄 개념 속성과 관련하여, 돌봄 핵심주제별 성격과 특성을 분명하게 제시해야만 한다. 무엇보다 지식의 가치에 관한 일관성 있는 입장 표명이 필요하고, 이에 대한 타당성 여부의 검증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구체적으로, 교육의 핵심으로 존중받아 온 ‘교과’의 가치는 ‘특권층이 소유했었다’는 ‘지위’에서 비롯되었다는 주장과, 지식의 가치를 학생들의 흥미에 따라 선별할 수 있는 것으로 본 점은, 면밀한 검토와 검증이 필요한 부분이다. 돌봄교육론은 보완이 필요하지만, 지식교육 실제의 문제 파악 및 변화 방향 모색에 도움이 되며, 교사의 역할을 재조명한다는 데 의의가 있다. 돌보는 이로서의 교사는 첫째, 함께 사는 사람이다. 함께 사는 교사는 학급 분위기와 학교의 일상에 변화를 촉구한다. 또한 ‘학교는 가족의 기능과 역할을 분담하고, 가족 공동체의 유대와 같은 정서적 유대를 경험하고 강화할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는 시대적 요청을 반영하고 있다. 둘째, 교육받은 사람의 ‘발전적 징후’를 지닌 사람이다. 교사는 학생들의 지적․도덕적 성장의 사표가 되고, 지속적으로 성장해야 할 의무를 지니며, 자아를 돌보고 동료들을 돌볼 수 있어야 한다. 셋째, ‘어머니형 리더십’을 지닌 교사이다. 교사는 어머니와 같이 부드럽게 가르치며, 포기하지 않고, 인내하면서 학생들을 돌본다. 그러나 교사의 구체적․개별적 돌봄은 한계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교사는 한계를 인식하고 세계의 구조적 문제와 정의의 문제에도 관심을 두어야 한다.

      • 마르틴 부버의 철학에 비추어 본 교사의 역할

        정세영 한국교원대학교 대학원 2013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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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육학 연구에서는 교육적 관계를 매우 중요한 주제로 다루고 있다. 이 주제와 관련하여 부버의 철학을 교육학 연구에 적용하는 시도들이 있다. 그것은 그의 철학이 갖는 특성 때문이다. 부버의 철학은 흔히 관계 철학, 만남 철학이라고 일컬어질 정도로, 그의 철학 체계에서 ‘관계’와 ‘만남’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는 직접적으로 교육적 관계에 대해 언급하기도 하는데, 그의 교육이론에서도 ‘관계’와 ‘만남’은 여전히 중요한 개념으로 다루어진다. 부버에 관한 대부분의 연구들은 그가 말하는 두 근원어에 대한 설명으로부터 시작된다. 부버가 말하는 두 근원어, ‘나-너’, ‘나-그것’은 분리될 수 없는 짝말이다. 부버의 두 근원어는 부버 철학을 이해하는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핵심적인 개념이다. 부버에 관한 연구들을 검토한 결과, 부버의 철학 체계 전반을 구성하는 핵심 개념인 근원어를 다룰 때는 연구자마다 이해 수준의 차이가 있기는 하였지만 양립할 수 없을 정도의 관점 차이를 드러내지는 않았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교육에 그의 철학을 적용할 때는 마치 전혀 다른 철학인 것처럼 연구자들의 해석이 드러났다. 부버의 철학이 교육에 적용될 때, 서로 다른 해석이 발생하였던 가장 커다란 이유는 그가 말하는 교육적 관계의 특수성 때문이다. 부버는 교육적 관계를 ‘나-너’ 관계이면서도 ‘일방적 포용의 관계’라고 말한다. 이 발언에 대한 해석은 부버의 교육적 관계가 상호 포용적 관계라는 입장, ‘나-너’, ‘나-그것’의 관계가 서로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는 입장, 부버의 철학과 그의 교육이론이 정합성을 지니지 않는다는 비판적 입장 등으로 크게 구분된다. 이 세 가지 입장에서 논의된 부버에 관한 연구들을 검토한 결과, 몇 가지 문제점을 발견하게 되었다. 첫째, 부버의 ‘나-너’, ‘나-그것’의 관계를 상식적인 어휘로 해석하였다. 구체적으로는 ‘나-너’의 관계는 교사와 학생의 관계, 교육내용은 ‘나-그것’으로 이해하였다. 둘째, 부버가 하지 않은 주장들, 예컨대 교육적 관계가 상호 포용의 관계라거나 ‘나-너’, ‘나-그것’이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는 주장을 마치 부버의 견해인 것처럼 다루었다. 셋째, 부버의 교육이론이 지닌 특수성은 그의 철학 체계에 모순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문제인 것처럼 비판하였다. 특히 세 번째 문제점과 관련된 사항은 보다 집중적으로 다뤄질 필요가 있었다. 부버가 제시한 교육적 관계는 그 특수성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그의 교육이론이 전체 철학과 논리적 모순을 지니지 않는다. 교육적 관계에 대한 서로 다른 해석에서 비롯된 교사의 역할은 대부분 부버의 교육이론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되었다. 즉 가르치고 배운다고 할 때, ‘너’를 인간관계에만 국한하였다. 반면 ‘너’를 세계 전체로 인식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부버의 교육이론이 그의 철학 체계에서 지니는 의미에 대해서는 오해하고 있었다. 본 연구에서는 교육적 관계에서 교사가 담당해야 할 역할로 중계자와 일방적 포용의 관계자, 그리고 대가를 제시하였다. 중계자로서 교사는 ‘너’로서의 교육내용을 아동에게 중계해 주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때 교사를 통해 중계된 ‘너’로서의 교육내용이 아동에게 영향을 미치므로, 중계자로서의 교사는 아동이 ‘너’로서의 교육내용과 만나는 데 간접적인 역할을 한다. 일방적 포용의 관계자로서 교사는 아동을 일방적 포용의 관계로 대할 때, 그 관계가 아동을 교육하는 것이다. 관계가 교육을 하기 위해서는 관계자가 필요하다. 이러한 의미에서 교사는 관계가 교육을 하는 데 직접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자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중계자와 관계자가 바람직하게 조화될 때, 모범적인 교사상인 대가를 상정할 수 있다. 대가의 삶은 교육내용과 방법의 탁월함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삶에서 배어 나오는 ‘너’의 정신이 아동에게 자연히 스며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아동은 ‘너’의 세계와 만나는 데 한계를 가지고 있지만, 교육은 아동이 ‘너’의 세계와 만날 수 있게 한다. 이는 일방적 포용의 관계에 기초한 것이고, 그 관계가 형성되는 데 있어 교사의 역할은 중요하다. 아동은 교사를 통해 ‘그것’으로만 보던 시각에서 벗어나, 작용하는 ‘너’의 세계를 보게 되고 만나게 된다. 본 연구에서는 교육학 연구에서 부버의 철학이 적용될 때 어떤 문제점들이 있는지를 유형화하여 제시하였다. 특히 부버의 철학과 그의 교육이론이 내적 정합성을 지닌다는 사실을 밝힘으로써 부버의 철학이 교육학 연구에 어떻게 적용되어야 하고, 부버의 철학에 근거한 교사의 역할이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분명히 하였다. 물론 부버의 철학에 근거한 교사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밝혔다고 하더라도, 부버의 철학을 교육 현실에서 따를 당위적인 이유는 없다. 그러나 교육학 연구에서 부버의 이론을 적용한다고 하면서, 그의 이론을 왜곡하여 해석·적용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본 연구는 부버의 철학을 교육이론에 적용하고자 할 때, 그의 교육이론이 지니는 이해를 밝혔다는 의의가 있다.

      • 사가독서제도가 교원 파견연수제에 주는 정책적 함의

        오성탁 한국교원대학교 교육대학원 2013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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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가독서제는 인재배양을 목적으로 세종대에 시작되어 오랫동안 일관되게 유지된 조선의 독특한 문신 재교육제도이다. 젊고 총명한 문인을 선발하여 본업에서 벗어나 학문적 소양을 배양하여 훗날 국가를 위해 능력을 발휘하게 하였다. 세조대에는 사가독서라는 말 대신 겸예문제가 실시되었지만, 사가독서제를 전승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성종대에는 사가독서자들이 학문에 전념할 수 있게 독서당이라는 공간을 마련해 주기도 하였다. 이때부터 사가독서라는 말 대신 독서당이나 별칭으로 호당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중종대에는 사가독서의 절목을 만들어 좀 더 체계화하였다. 폭군이라 불린 연산군대에도 사가독서제는 존속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으로 인해 선조대 말기부터는 사가독서제가 정상적으로 운영되지 못했다. 거기에다 1636년에 발발한 병자호란은 조선사회를 폐허 상태로 만들었다. 이로 인해 인조대에서 영조대에는 전후 복구에 역량이 집중됨으로써 사가독서제가 정상적으로 운영될 수 없었다. 전후 복구가 마무리된 정조대에 이르러서는 사가독서제와 목적은 같으면서 운영방법은 더욱 정교해진 초계문신제가 도입되었다. 『대전회통』에 의하면 사가독서자는 정3품 이하의 문신 중 학문이 뛰어난 자를 대제학이 뽑아 겨를을 주어 호당에서 독서하도록 한다고 되어 있다. 시행 초기에는 주로 사가독서자들의 자율적인 학문연마가 주를 이루었고, 교육과정이나 교육 내용 등에 제한이 가해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1476년에 「사가독서문신권장절목」이 만들어져 구체적인 방법과 대우를 제도화하였다. 명종대에는 정사룡에 의해 「사가독서개규의」가 만들어졌는데, 사가독서의 연원, 독서의 장소, 사가독서자에 대한 예우, 독서의 내용 등에 대한 규정을 마련하였다. 정조대에는 사가독서제를 전승한 초계문신제가 도입되었는데, 교육과정이 매우 체계화된 「초계문신강제절목」을 만들어 시행하였다. 사가독서자는 정해진 규정에 의해 엄밀하게 선발되었다. 만일 원칙에 벗어나서 선발을 할 경우 매우 혹독한 비판을 면치 못하였다. 미래를 위한 인재를 배양하기 위해서는 선발에서부터 공정해야 하는 것이다. 사가독서자들에게는 당상관의 예우를 해 주었으며, 학문배양에 필요한 물적, 제도적 조건을 갖추어 주었다. 임금은 사가독서자들에게 늘 관심을 가졌으며 때론 직접 술을 내리기도 하였다. 사가독서제는 조선시대 전반에 걸쳐 학문적 능력을 갖춘 인재배양이라는 목적에 맞게 운영되었다. 사가독서자들은 훗날 뛰어난 학문적 소양을 바탕으로 국가의 주요 요직에서 활약하며 조선사회를 문치사회로 이끌었다. 현대 운영 중인 교원의 재교육제도 중 사가독서제와 유사성을 발견할 수 있는 것으로는 학위과정으로 운영 중인 대학원 파견연수제와 비학위과정으로 운영 중인 학습연구년제가 있다. 학위과정으로 운영 중인 교원의 파견연수제로는 한국교원대학교에서 운영 중인 대학원의 특별전형 석사과정과 정책전문대학원의 특별전형 박사과정이 있다. 대학원 석사과정은 2년간, 정책전문대학원 박사과정은 3년간 파견 발령을 받아 전문성을 지닌 교수진의 강의와 스스로의 연구를 통해 전문성 신장과 자질 향상을 위한 기회를 가지고 있다. 비학위과정으로 운영되는 교원의 학습연구년제는 2010년 시범운영을 거쳐 2011년 도입되어 운영되고 있다. 학위과정과는 달리 교원들이 한시적으로 직무에서 벗어나 전형 과정에서 검증된 연구계획서에 의해 자율적으로 자신의 능력을 배양할 수 있는 제도이다. 공개채용을 통해 교원이 된 자들에게 더 뛰어난 능력을 배양할 기회를 준다는 것은 역사적인 전통이 없으면 쉽게 실시할 수 있는 정책이 아니다. 우리 사회는 열심히 학문에 전념하여 이뤄낸 성과에 대해서 높이 치하해 주는 전통이 있다. 누구에게나 기회가 열려 있으며 열심히 노력하는 자에게는 보다 큰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있다. 혈통이나 엽관제 및 논공행상에 의해 주요 자리를 나누어 갖는 제도와는 전혀 다른 능력 위주의 전통이 우리 사회 저변에 깔려 있는 것이다. 교원을 대상으로 한 학위과정 대학원 파견연수제와 학습연구년제를 보완하고, 더 나아가 교원의 능력을 배양할 제도로 정착시키기 위해 외국의 사례가 아닌 우리 역사에 존재하였던 사가독서제에서 정책적 함의를 도출하는 것은 역사적으로나 제도·정책적으로 상당한 의미와 시사점이 있다.

      • 플라톤의 목적론적 형이상학의 교육학적 함의 : 『국가론』과 『티마이오스』를 중심으로

        김효은 한국교원대학교 대학원 2015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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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논문의 목적은 플라톤의 철학을 목적론적 형이상학으로 규정하는 가운데, 교육과 형이상학의 관계를 밝히고 그것의 교육학적 함의를 도출하는 데에 있다. 현대의 형이상학은 형이상학적 실재의 객관적 의미를 드러내는 데 집중한 나머지, 실재를 인식하는 ‘인간의 마음’과 스스로를 드러내는 ‘실재의 마음’이라는 두 가지 주관성을 도외시하였다. 이에 본 연구에서는 이러한 주관적 측면을 드러내는 데 적합한 ‘목적’의 개념에 따라 플라톤의 철학을 고찰하여, 플라톤의 목적론적 형이상학은 ‘선의 이데아’라는 형이상학적 실재의 객관적 의미와 주관적 의미를 모두 설명해주는 완전한 형이상학이며, 그 안에서 교육과 형이상학은 서로를 기반으로 하며, 서로의 가치를 보장해 주는 관계임을 밝히고자 하였다. 플라톤의 목적론적 형이상학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추구해야 할 가치가 있는 목적’의 존재를 믿고 그것을 추구하고자 하는 인간의 본성, 즉 ‘교육적 마음’을 발견한 소크라테스의 교육론으로부터 출발한다. 플라톤은 이러한 교육적 마음을 통해 인간의 행위뿐만 아니라 사물의 세계까지 설명함으로써 고대 희랍의 인간 형이상학과 사물 형이상학을 하나의 체계로 통합시켰다고 볼 수 있다. 플라톤의 철학에서 ‘이데아’는 교육적 마음을 통해 사물의 세계를 이해하는 과정에서 제시되는 개념으로 사물의 본성, 즉 ‘형식’을 가리키지만, 그 이상으로 그 사물이 추구하는 ‘목적’으서의 의미도 갖고 있다. 플라톤은 이데아에 목적의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국가론」에서 인간과 세계 모두가 지향하는 궁극 목적의 의미를 가진 ‘선의 이데아’라는 형이상학적 실재를 제시한다. 「국가론」에 제시된 세 가지 비유는 선의 이데아가 인간의 교육적 마음으로부터 나왔으며, 교육의 과정을 통해 인식 가능함을 보여줌으로써, 선의 이데아를 통해 우주의 생성을 설명한 「티마이오스」의 이야기의 전제가 된다. 「티마이오스」에서 우주는 ‘데미우르고스’라는 신적인 제작자가 본으로서의 이데아를 보고 만든 모상으로 설명되고, 선의 이데아는 ‘세계-영혼’의 형태로 이 세상에 드러나 세계 속에 있는 모든 것들이 선의 이데아를 향해 나아가게 하는 힘을 부여한 것으로 묘사되었다. 즉 선의 이데아는 형식으로서 존재의 세계에 고정되어 존재하지 않고, 영혼이라는 형태로 이 세계에 스스로를 드러내는 목적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여기서 데미우르고스와 세계-영혼은 인간의 교육적 마음과 같은 것이 세계 안에도 있다는 생각의 신화적 표현으로, 스스로를 드러내는 ‘실재의 마음’의 측면을 보여준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티마이오스」에 나타난 목적론적 세계관은 결국 선의 이데아의 존재를 믿고, 이 세계가 영혼을 가지고 목적을 향해 살아 움직이는 것으로 보며, 자신 또한 목적론적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인간의 교육적 마음과 관련된 문제로 귀결된다. 목적론적 세계관은 교육받은 인간이 세계를 바라볼 때 가져야 할 마음을 가리키는 것이며, 나아가 교육의 과정이 지향하는 선의 이데아의 객관성을 확보해 준다는 점에서 교육의 과정에 가치를 부여한다. 결국 플라톤의 목적론적 형이상학 안에서 교육과 형이상학은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며 정당화시켜준다. 「국가론」에서는 선의 이데아에 대한 세 가지 비유를 통해 형이상학적 실재를 인식하고자 하는 인간의 마음이 설명되고, 「티마이오스」에서는 이 세계에 스스로를 드러내는 실재의 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국가론」에서 선의 이데아에 대한 지식을 얻는 유일한 방법으로 제시된 디알렉티케는 그 자체로 교육을 의미하는데, 그 안에는 인간의 마음과 실재의 마음이 모두 설명되어 있다. 교육이야말로 현대의 형이상학이 놓치고 있던 형이상학적 실재의 주관적 측면을 모두 설명해줄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교육론을 바탕으로 하는 플라톤의 목적론적 형이상학은 현대 형이상학의 한계를 극복하게 해주는 완전한 형이상학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플라톤의 목적론적 형이상학은 교육의 과정과 목적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요구한다. 먼저 교육의 과정에는 선의 이데아를 인식하려는 인간의 능동적인 노력과 함께 선의 이데아가 내 마음과 세계에 드러나기를 기다리는 수동적인 자세가 요구된다. 또한 교육의 목적은 교육의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며, 교육의 과정 안에 깃들어 있고 교육의 과정을 이끌어 가는 ‘교육적 마음’을 갖게 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 홍대용의 과학사상이 과학교육에 주는 시사점 연구

        홍석원 한국교원대학교 대학원 2010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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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연구에서는 담헌 홍대용의 과학사상이 현대 과학교육에 주는 시사점을 알아보고자 했다. 동양의 일반적인 정신문화는 서양의 정신문화에 비해 분석적이기 보다 종합적이며, 경험적이기 보다는 사변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다. 현재 학교에서 교육하는 과학은 서양에서 발전해온 학문이므로 우리의 정신적 바탕과는 다른 측면에서 발전해온 학문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교과서에 실린 과학은 논리적, 경험적, 분석적인 특징을 많이 지니고 있다. 그러다보니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과학교육은 우리의 정신적인 전통보다는 서양적인 방식으로 표현하려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과학적 개념을 우리의 전통적인 정신에 조화되는 방식으로 표현하고 설명한다면 쉽게 이해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서양과학이 우리에게 전래 되고 수용되었을 때, 서양 과학은 어떤 과정을 거쳐 전래되었는지, 어떤 방식으로 수용되었는지 알아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 하겠다. 홍대용은 동양의 자연관을 수정하여 서양의 과학 사상을 수용한 뒤, 자기 나름의 자연관과 우주론의 체계를 세우려고 노력한, 18세기 조선의 과학사상가이자 과학자였다. 홍대용은 서양의 과학 사상을 수용, 발전시켜 地球說, 地轉說, 인력설, 무한우주설을 비롯한 여러 가지 진취적인 과학 사상을 제시하였다. 비록 홍대용이 과학교육에 대해 직접적인 언급을 하지는 않았지만 과학에 대한 중요성을 일찍 깨닫고, 일생에 걸쳐 서양 과학 사상을 수용하고 연구하였던 사람이므로 홍대용의 과학사상이 현대 과학교육에 주는 시사점을 알아보려 하였다. 주자 성리학에서 생각하는 理의 개념은 당위와 규범의 원리가 되는 절대적이며, 인간과 자연현상을 아우르는 만물의 존재근거이자 주재자로서의 통제원리이다. 그러나 홍대용이 말하는 理는 , 사물이나 현상이 가지는 속성이나 법칙 혹은 원리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않으므로, 주자 성리학적인 자연관을 넘어서 새로운 자연관의 틀을 확보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홍대용은 陰陽五行說에 대해서도 자연현상을 무조건적으로 陰陽으로 설명하는 陰陽說을 비판하고, 五行 가운데 水,火,土 세 가지만을 원소로 인정하였다. 그는 陰陽五行說을 우주 생성의 체계로 본 것이 아니라, 단순히 자연의 현상과 실생활에서 흔히 볼 수 있고 유익하게 이용할 수 있는 다섯 가지 물질로 보았다는 점이 성리학적 사고방식과 차이가 있는 것이다. 홍대용의 과학사상은 서양의 과학사상을 바탕으로 하여 발전시켰는데, 天圓地方說을 믿고 있던 시대에 일식과 월식에 비친 그림자로 달이 둥글고 지구가 둥글다는 과학적인 근거를 제시하며 지구가 둥글다는 地球說을 주장 하였으며, 더 나아가 地轉說을 주장하였다. 지구가 둥글다면 지구 표면 어디에서나 인간이 살 수 있는데 그 이유를 지구 둘레에 중심을 향하는 힘이 작용하고 있다고 보고, 그것을 소위 上下之勢라고 했다. 지구가 자전함으로써 지구 둘레의 氣가 소용돌이를 만들어 上下之勢라는 지금의 인력과 같은 힘을 만들어 낸다고 하며, 인력설을 생각한 것이다. 또한 그는 지구 둘레의 上下之勢가 다른 별이나 행성까지는 미치지 못한다고 보았고, 우주는 무한하다는 무한우주설을 주장하기에 이른다. 홍대용의 과학사상이 현대의 과학교육에 주는 시사점으로, 비판적 사고와 창의적 사고, 실용·실증적 과학정신, 실천적 활동, 수학의 강조라 생각하고 이에 대해 알아보았다. 과학교육에서 학생들이 가지고 있는 오개념은 때론 학습에 심각한 장애를 가져올 수 있으므로, 오개념을 극복하는 것이 과학교육에서 중요한 과제중의 하나라 하겠다. 이런 오개념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과학사를 이용한 수업이 사용될 수 있을 것이다. 과거 과학자들이 오개념의 극복을 위해 밟았던 과정을 보면서 학생들은 자연스럽게 오개념을 해소할 수 있을 것이다. 홍대용의 우주론은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정확하다고는 말하기 힘들지만,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는 기존의 생각에서 지금은 상식이 되어버린 지구가 둥글다는 생각으로의 발전과정을 살펴본다거나, 지구가 둥글다는 말도 받아들여지기 힘들었던 시기에 지구가 회전한다거나 더 나아가 무한한 우주를 상상하기도 했다. 이런 홍대용과 그의 과학사상을 살펴보다 보면, 오개념을 극복해 가는 과학자의 모습을 찾아 볼 수 있을 것이다. 오개념의 발생 원인을 실생활과는 거리가 먼 과학교육에서도 찾을 수 있다. 교과서를 이용하거나 변인들을 통제한 이상적인 조건아래에서 이루어지는 실험실에서의 수업은 다양한 변인들이 존재하는 실생활에서의 적용이 쉽지 않다. 수업시간에 학습한 내용이 실생활과는 거리가 있거나 반대로 적용될 경우, 힘들게 배운 과학지식이 필요 없게 느껴지는 경우가 있다. 그럴 경우 오개념은 없어지지 않으며 과학적 지식보다는 직관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할 것이다. 이런 오개념의 발생을 줄이고 과학적인 개념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는 실생활과 밀접한 과학교육이 이루어 져야 할 것이다. 홍대용의 실용성을 강조한 이야기들이 과학교육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은 아니지만 과학이라는 학문이 현대인 생활의 많은 부분에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어느 정도 과학교육에 시사 하는 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홍대용은 당시 조선의 과학기술적 수준으로 볼 때, 자연과학자, 수학자, 기술자의 면모를 고루 갖춘 18세기 조선의 과학자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홍대용이 일생동안 견지한 비판적사고와 창의적 사고, 실용·실증적 과학정신, 실천적 활동, 수학적 사고 등은 오늘날 과학교육에서 생각해 볼만한 가치가 있을 것이다. A purpose of this study was to determine the detailed influences of the science education through Hong, Dae Yong's science thought. Hong, Dae Yong(Damheon, 湛軒 洪大容 1731-1783) whom I want to treat examine, investigate, deal with, work in this thesis. He is seen to have tried to construct a new philosophical system to solve the conflict between traditional view of nature and newly accepted Western one. And from such viewpoint, he attempted a new interpretation about the “Li(理)” and the “Chi(氣)” of nature. Hong, Dae yong showed a new pattern of interpretation about the Greate Absolute in Chinese Philosophy mentioned by Cju Hsi(朱熹 1130-1200), that is, the "Li" of nature. That is, he Seemed to negate a priori reality of ideal existence besides experiential reality. The superintendence of "Li" of nature was negated because the principles not only existed in the "Chi" of nature comprising things, but they varied in the contents according to the dispositional changes of the "Chi" the essence of forming and changing material world, he explained that the force had not only simple character of matter but also metaphysics one. The "Li" of nature is said to have been a wider concept including even ethicality and morality besides rationality thought by us, whereas he showed more rational interpretation by excluding ethicality, that is, concept of value from traditional "Li" of nature. Traditionally, yin and yang(陰陽) and Five Elements(五行) not only were naturalist concepts mobilized when explaining concrete nature phenomenon including human body, but also they were ontological concepts of explaining the generation of existences and existences themselves. They built confucian world view that can explain cosmology, ontology, ethology and so on through forming independent knowledge and thinking system regarding the relations between the heaven and man. Hong, Dae Yong freed himself from such thinking of a confucian world view and explained it with objective laws or principles of natural phenomena. And if the thinking that earth was living existence formed the basis of traditional theory of geomancy(feng-shui 風水地理), he showed the attitude of affirming the basis but rejecting the theory itself. Hong, Dae Yong wrote an essay covering many ideas on natural phenomena. This essay, “Uisanmundap(毉山問答)“ is in the form of dialogue between hermit in Mount Ui on the border of China amd Eastern Barbarians, Sirong(Oldman Plactical, 實翁) and a visitor from the East, Heoja(Mr. Empty, 虛字). On the diurnal rotation of the earth was written in this essay. Hong Dae yong, however, did not allow the idea of revolution of the earth around the sun, as is shown in the quotation above. He raised the possibility only to refute it. In fact, Hong, Dae Yong's solar system was that of Tycho Brahe(1546-1601), putting the earth at the center of the revolutions of the sun and the moon, while making five planets to go around the sun. Of course, the only difference between the official Tychonic system and Hong's system was that Hong, Dae Yong made the earth rotate, while Tycho stuck to the revolution of heavens. Historical signification of Hong, Dae Yong's cosmology in general and his theory of the diurnal rotation of earth in particular, however, should not be overemphasized. For one thing, Hong, Dae Yong's ideas were unnoticed by his Korean contemporaries, not because the intellectual milieu of times were hostile to his views, but because his ideas were irrelevant to the intellectual climate of late Chosun(朝鮮). The idea of spherical earth seems to have given a nudge for Korean scholar toward proto-nationalistic self awakening. Hong, Dae Yong's system of scientific thinking made possible a new concept of science education. There are some implications of science education through Hong, Dae Yong's science thought. Firstly, Critical thinking and the Creative thinking. Secondly, Pragmatic educational thinking and Substantiative science education. Finally, He emphasize Practical activity and Mathematics. He emphasized practicality-centered thinking, which can be applied to real life, and scientific technique teaching based on actual proving. An objective, demonstrative and empirical method of teaching through experiments and observ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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