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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東坡와 秋史의 書藝 美意識 比較硏究

        변영문 高麗大學校 大學院 2014 국내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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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고는 한국과 중국의 예술분야에서 탁월한 예술가 중 한 명이라고 할 수 있는 추사와 동파의 미의식을 고찰한 것이다. 이는 형이상학화한 유학(성리학・송학・신유학・주자학이라고도 부름)이 시작된 시기의 東坡 蘇軾(1037~1101)과 성리학이 교조화로 인한 공리공담의 폐해를 반성하고 대안적 철학으로서 실학이 무르익은 시기의 秋史 金正喜(1786~1856)의 예술사상을 대비시켜 고찰하여 이 둘의 심미의식의 동이점을 도출하였다. 秋史와 東坡를 거론하는 이유는 두 사람은 활동했던 지역과 시대는 다르지만 儒ㆍ佛ㆍ道 사상이 融會되어 詩ㆍ書ㆍ畵가 一律로 귀결되는 學藝一致현상으로 동일하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서 한 시대의 저명한 예술가의 작품에는 그 시대의 철학이념이 깃들어있기 때문에 추사와 동파의 학문과 예술의 성취를 통해서 우리는 韓中文化交流史의 일면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다. 東坡의 미의식과 秋史의 미의식을 각각 尙意와 尙古로 규정하였다. 또 東坡의 미의식을 神韻과 抒情의 美意識, 無意ㆍ無住의 美意識, 淸新과 淡泊의 美意識으로 분류하여 논증하였고, 추사의 미의식은 性中天의 美意識, 實事求是的 美意識, 中和論的 美意識으로 분류하여 논하였다. 東坡와 秋史는 共히 儒者 門人으로서 유가적 中和的 미의식을 간직하고 있으면서 東坡는 이른바 근대적 성향의 미의식으로 전환된 반면 秋史는 전근대적인 성리학과 실학적 미의식에 머물고 있음을 발견하였다.

      • 龍洲 趙絅 詩文學 硏究

        정해출 高麗大學校 大學院 2014 국내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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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세기 말에서 17세기 후반에 이르는 50여 년간은 조선왕조 500년을 통하여 가장 험난했던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임진왜란, 인조반정, 이괄의 난, 정묘‧병자의 양대 호란과 극심했던 자연재해, 그리고 趙大妃의 服을 둘러싼 禮訟의 소용돌이 속에서 죽고 죽이는 정치적 派爭 등이 전개되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시기를 살았던 本考의 주인공 龍洲 趙絅(1586~1669)은 광해군 때 북인의 출사 요구를 뿌리치고 거창 ‧ 함양(안의) 등지에서 옮겨 다니며 10여 년간 은거생활을 하다가 인조반정 이후 신진 언관으로 조정에 출사했다. 당시 격렬한 언론활동으로 반정공신들의 권력독점과 탐학을 공격하는 등 利를 버리고 義를 추구하는 眞儒의 길을 걸었다. 아울러 그는 폭넓은 교유를 보여주었다. 특정 당파에 국한되지 않고 남인계를 비롯하여 노론과 소론, 북인계(중북) 인사들과 두루 사귀었다. 이는 曺植(1501~1572) ‧ 吳健(1521~1574) ‧ 鄭逑(1543~1620)로부터 文緯(1555~1632)를 잇는 학맥의 영향을 받았고 金湜(148∼1520)에 연원하는 尹根壽(1537~1616)의 문하를 출입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용주는 당시 許穆(1595~1682)과 함께 남인계의 공론을 주도해 나가는 위치에 있었으면서도 다른 당파에 속한 인물들과도 公義에 입각하여 격의 없는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인물이었다. 용주는 인조 대에 대제학을 역임했고, 인조가 승하한 뒤 「長陵誌文」을 찬술했으며, 효종이 승하한 뒤에는 諡冊文을 지었다. 이처럼 서인이 주도하는 정국에서 문형을 맡은 일이나, 양대 임금을 위한 주요한 傳後文字의 찬술자로 선발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바로 그가 당시 朝野의 선비들로부터 당파를 초월하여 대문장가로 인정받았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본 논문에서 주로 다루고자하는 그의 한시 작품은 이 같은 고난의 시기를 살아가면서 分泌된 현실인식의 응축물이다. 파란만장한 內憂外患의 격동기를 살아가며 정치가로, 문인으로 적잖은 업적을 남겼던 용주에 대한 학계의 관심은 지금까지 遲遲不進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학문과 문학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물론이고, 심지어 구체적으로 一代記를 조명하는 글조차 거의 없었다. 임병양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살아간 용주의 시대에 비추어 그의 의식세계도 간단치가 않았을 것으로 본다. 한시연구는 간단히 작품의 형식적 내지 내재적 분석도 중요하지만 다양한 산문자료의 도움을 받아 창작배경 및 주제형성의 이면을 추적하여 객관화된 이해에 도달하는 것도 긴요한 일이다. 다시 말해서 시가창작과 산문창작 사이의 소통관계를 알아내어 서로 보완해주는 연구방법이 효과적이라고 생각한다. 용주의 사상이 산문저작으로 드러나기도 하지만 일정 부분 시를 통해 집약적으로 발현된다는 점도 간과하지 말자는 것이다.

      • 陽村 權近의 詩文學 硏究 : 館閣風詩를 중심으로

        이광소 高麗大學校 大學院 2015 국내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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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陽村 權近은 麗末鮮初의 뛰어난 문장가이자 정치가이며 朝鮮 性理學의 기틀을 마련한 대학자이다. 그는 조선 최초의 文衡으로서, 文敎行政에 있어 당시의 보편적 문학관이던 ‘文以載道’에 충실하면서도, 詩賦詞章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등, 문학의 현실적 效用價値에 중점을 두는 정책을 폈다. 그러한 詞章 중시 경향은 조선조 문학의 큰 주류를 이루어 후대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본고에서는 조선초 館閣文學의 체제를 완성하여 후대 館閣人의 전범이 된 陽村의 館閣風 詩文學 중에서 특히 정치 외교적으로 중요하게 여겨졌던 應制詩와 頌祝詩 및 交遊詩들을 고찰하여, 그의 文學觀과 現實認識 및 政治的 理想을 탐토해 보았다. Ⅱ장에서는 양촌의 生涯와 師友關係를 살폈다. 양촌은 1352년에 權僖와 漢陽趙氏 사이에서 5형제 중 4남으로 태어났다. 양촌의 가문인 安東權氏는 고려의 문신귀족 중에서도 손꼽히는 집안이었다. 양촌은 증조부인 權溥로부터 이어져 온 家學으로 공부한 후 17세에 成均試에 합격하고, 이듬해에 殿試에 합격하여 벼슬에 나아갔다. 고려에서는 주로 文翰과 敎育 관련의 직책에 종사했으며, 조선에 들어서는 大司憲으로서 당시 폐단이 크던 私兵制度를 상소를 올려 혁파하고, 또 文衡이 되어 유교 정치의 이념 제시 및 유교적 敎化를 강조하는 중심적 역할을 담당했다. 양촌은 성균관 수학 시절의 은사이자 科擧의 座主인 李穡, 그리고 중국 制科의 좌주인 李仁復?權仲和?白文寶 등을 스승으로 모시며, 그들의 門生들과 폭넓게 교유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이색은 그의 학문과 교유관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Ⅲ장에서는 본 논문의 핵심 연구주제인 陽村의 館閣風 詩文學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검토 고찰했다. 1절에서는 그 예비로서 館閣文學의 유래와 개념에 대해서 간략히 살폈다. 고려 및 조선의 館閣은 대체로 唐宋의 제도를 모방하여 설치되었는데, 북송 때 圖書나 歷史의 편수를 관장하던 昭文館?史館?集賢院을 館閣이라 했다. 대체로 관각기관에 종사하는 문인 관료들은 타부서나 일반 문인들과는 달리, 詔令과 詞命 등 칙명에 따라서 작성한 문장들이 典雅莊重함으로 충일되고 또 그렇게 되기를 추구했는데, 이러한 문장의 풍격을 館閣氣라 했다. 관각문학의 주요 특징인 ‘典雅’는 문장과 언사에 經典에의 전거가 있고 高雅하며, 또 인물이 학문적 수양이 풍부하고 언어 행동이 엄숙하여 속되지 않음을 형용하는 말이다. ‘莊重’은 당당한 위엄과 엄숙하고 정중함, 법도에 따른 전아함, 존귀함과 推崇 등의 의미가 함축된 말이다. 館閣氣가 있는 문장을 官樣文章이라고도 하는바, 그것은 朝廷臺閣에서 사용되는 장대하고 전아한 풍격의 문장, 문체가 豊?하고 기상이 溫潤한 문장을 말한다. 제2절에서는 양촌이 조선 왕조 성립 초에 明나라와의 대외 관계에 있어 초미의 현안으로 대두되었던 表箋問題의 전개와 그 해결 과정을 살펴보았다. 元나라를 물리치고 明을 세운 태조는, 고려 조정이 親元派와 親明派로 다투면서 明의 사신 蔡斌을 살해하고 요동 정벌군을 출동시킨 적이 있는데다가, 朝鮮으로 왕조가 바뀐 뒤로도 조선이 명나라를 치려한다는 誣告를 접하고, 줄곧 조선에 대한 의혹의 눈길을 거두지 않았다. 그리하여 조선의 정국을 주도하는 실권자로서 명의 요구에 맞서 陳圖를 제작하거나 軍制를 개편하는 등 요동정벌의 방략을 구체화하고 있는 鄭道傳을 제거하기 위해, 賀正表의 내용을 트집잡아 정도전을 중국으로 송치하라고 촉구했다. 조선에서 이에 응하지 않자 明은 군대까지 출동시켜 정벌하겠다고 위협했다.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陽村이 자진해서 명나라에 들어가, 우리가 해외에서 生長한데다 언어가 달라서 글에 吏文이 잘못 섞여들었음을 황제에게 사죄드렸다. 그러자 황제는 漢詩 24수의 제목을 정해 주며 시를 지어 올리도록 명하였다. 양촌은 표전 문제라는 중대한 외교적 현안을 해결하기 위해 중국을 崇慕하는 우리 왕의 事大精誠을 표출하며, 조선이 대국을 거스르려는 의도는 추호도 없다는 뜻을 치밀하게 조직하여 시를 지어 올렸다. 시편마다 사대정성과 공경의 뜻이 충만한 시들을 보고 중국 황제는 흐뭇해하며, 지금까지의 표전문제를 없었던 것으로 치부하여 양국관계가 호전되었다. 제3절에서는 朝鮮의 건국과 함께 臣民들을 회유하고 다독이기 위해 많은 頌祝의 樂章들이 지어졌는데, 이때 양촌도 「天監」「華山」「新廟」 등 여러 편의 頌祝詩를 지어 올렸다. 그는 이들 시에서, 고려가 無道한 정사로 백성의 신임을 잃게 되자, 하늘이 고려를 멸망시키고, 백성의 생활을 보살피는 李成桂에게 새로이 天命을 내려 조선조를 세우게 했다는 頌祝의 노래를 지었는데, 그것이「天監」이다. 또, 1천여 전 신라시대부터 漢陽이 고려를 대신하는 나라의 도읍이 될 것이라고 圖讖書에 전해 내려왔는데, 이번에는 바로 德 있는 이성계가 天命을 받아서 도읍을 한양에 정했다고 노래한 것이「華山」 시이다. 그는 이 시에서 하늘이 만든 金城湯池의 이 요해지가 도읍이 되어 조선왕조가 무궁하게 이어지며 백성들이 평안한 삶을 영위하게 될 것이라고 송축했다. 또「新廟」는 조선왕조의 도읍이 한양에 조성되자, 맨 먼저 조상의 사당을 세우고 군왕이 국가와 백성을 위해서 조상과 天地神明에게 제사 드림을 찬미하며, 君王에게 많은 복을 내려주도록 비는 노래이다. 양촌은 이 태조가 天命에 의해 무력의 사용 없이 禪讓으로 국가를 넘겨받아 종묘사직을 일으키고 조상에게 제사 지냄으로써 聖帝明王과 같은 군주가 되었으므로, 고대의 전통적 예에 따라 그 공적을 찬미하고 宣揚하는 송축시를 지어 악장으로써 조야에 널리 불리워지고 후세에 대대로 전해져야 마땅하다고 시의 幷序에서 그 이유를 밝히고 있다. 사실 이런 시들은 어수선한 사회적 혼란 상황을 수습하고 民心을 안정시키기 위해, 失德한 고려조를 대신하여 천명을 받은 有德者가 왕조를 세우고 하늘의 뜻에 따라 천도했으니, 그런 나라는 당연히 하늘의 도움을 받아 평안하고 부강한 나라가 될 것이라는 의식과 믿음을 백성들에게 심어주기 위해 제작된 선전의 노래이다. 제4절에서는 양촌의 館閣風 交遊詩 중에서 관각문인들 사이에 많이 酬唱되고 또 정치적으로도 매우 중요했던 送別詩와 次韻詩들을 고찰했다. 제1항에서는, 예로부터 길 떠나는 사람에게 勸勉이나 警戒의 말로 贈言을 했는데, 그러한 전통에 따라 주고받은 送別詩와 送序를 다음의 세 가지로 분류 고찰했다. 먼저 지방에 補職받아 파견되는 관료들에게 준 詩와 序에서 양촌은,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니 牧民官으로서 되도록 부세와 노역을 줄이고 백성의 삶을 보살피는 仁政을 베풀도록 당부했다. 다음에는 귀환하는 중국 사신에게 주는 送別詩와 序들을 고찰했다. 사신에게 주는 시들에서는 반드시 황제의 성덕으로 四海의 백성들이 편안한 삶을 누린다는 식의 頌讚으로 서두를 장식한 다음, 사신에 대해 온갖 미사여구로 그의 인격 및 學行 등을 칭양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 군왕의 중국에 대한 절절한 事大精誠의 표상이나 接伴하는 자신의 소회 등으로 글을 마무리 지었다. 양촌은 이런 식의 문장 제작법을 상국에 대한 禮儀이자 外交文學의 관례로 확신하고 있었다. 또 人道의 확립이 家庭倫理로부터 시작되는 것으로 보고 부모에 대한 孝道를 극히 중시하는 양촌은, 관료들의 歸覲을 효도의 실천으로 이해하여 그들을 크게 칭송하며 격려하곤 했다. 그러면서도 언제나 小人의 효도가 아닌 君子의 효도를 강조하며 권면했다. 즉 부모 곁에서 口體를 봉양하는 것은 凡民의 효도이니, 立身揚名하여 높은 벼슬에 올라 부모를 기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편, 벼슬을 버리고 은둔하려는 관료들에겐, 君臣之義는 大倫이고 벼슬을 하는 것은 君臣간의 義理를 행하는 일이므로, 설령 도가 행해지지 않더라도 자기 몸만 깨끗이 하기 위해 은둔하는 것은 大倫을 어지럽히는 일이라며 용납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歸隱하는 관료들에겐 항시 다시 조정으로 돌아올 것을 잊지 말고 부지런히 몸을 닦아 훗날 다시 조정에서 治化를 펴 줄 것을 권면하곤 했다. 제2항에서 儒家 선비와 官僚들 사이에 성행한 양촌의 次韻詩들을 고찰했다. 차운시도 역시 관료들 사이에 서로 稱揚?勸勉한 시와, 중국 사신과 수창한 시 및 吏隱이나 宦路에서의 落魄한 情緖를 표출한 시 등 세 부류로 나누어 고찰하였다. 전통시대 王朝社會의 經世的 理想은 儒家의 道와 임금의 敎化가 온전히 실행되어, 백성의 생활이 안정되고 풍속이 醇厚한 도덕적 세상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양촌도 그러한 至治의 사회를 구현하고 자기 시대의 군왕을 明君으로 만들고자 하는 목적에서, 서로 칭양하고 권면하는 문장과 시를 많이 제작했다. 여기서는 양촌이 館閣臣僚들과 수창한 차운시들 중에서, 世敎 및 王化를 위해 공적 있는 자들을 아낌없이 칭찬하며, 아울러 더욱더 盡忠報國하도록 권면하는 시들을 고찰하여, 관각 문신으로서의 그의 이상이 어디에 있는지 살펴보았다. 다음은 중국 使臣들과 수창한 차운시들을 고찰했다. 사신들과의 차운시도 그 구성적인 틀은 送別詩와 동일하여, 먼저 황제의 성덕과 황실의 존엄 및 그 德治를 송찬하고 그 다음에 이어 사신 당사자를 칭양하는 투식이다. 사신과의 酬唱詩는 사신이 비록 연배가 어리고 직위가 낮은 자라 하더라도 반드시 황제의 대리자라는 의미에서 매우 정중하게 우대했던 것이다. 그들에게 주는 글들은 결국 使臣 당사자뿐 아니라. 중국 조정에까지 알려지고 읽혀질 것을 예상하여 그처럼 포괄적 내용으로 제작되었던 것이다. 양촌은 仕宦 초기인 20대부터 그의 詩文에서 吏隱의 뜻이 많이 표출되고 있다. 陶淵明의 歸去來辭 이후에 유학 선비의 관료로서 隱士를 동경하는 경향이 사대부들의 전통으로 이어져 왔다. 양촌도 그러한 隱의 정신, 즉 江湖歸田意識을 관념적으로 견지해 오고 있어서, 실제로 歸隱을 결행하지 않으면서도 평생토록 그 뜻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평소 儒學者로서 兼濟天下의 정치철학과 消長原理의 인생관이 신념으로써 체질화된 양촌에게 있어, 그러한 去官이나 隱의 염원은 아마도 현실의 자족감에서 비롯된 관념적인 의식이 아니었던가 싶다. 따라서 그러한 처세관으로 인하여 자신이 봉사했던 고려를 넘어뜨리고 易姓革命으로 등장한 조선조에 寄附하게 된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Ⅳ장에서는 양촌이 제작한 館閣風詩의 特徵에 대해서 고찰했다. 館閣文學의 法式을 제정하고 館閣體를 확립했다고 평가되는 양촌의 문학이나 사상은 물론 모든 세계관이 儒敎의 經術에 그 바탕을 두고 있다. 그는 當代를 유교적 이상사회, 즉 敎化된 백성이 안정된 생활을 누리며 孝悌忠信을 실천하는 도덕적 사회를 이룩하기 위하여, 관각문신으로서 수많은 訓謨辭令과 각종 詩文에서 그의 이상인 仁政의 德治主義와 忠孝의 敎化主義 및 爲民의 民生主義를 추구했으며, 또한 국가의 安危와 대외 관계의 善隣을 위해서 崇明의 事大主義를 옹호 견지했던바, 이는 바로 양촌 관각풍 시문학의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문장의 풍격은 대체로 館閣文章의 경우는 전통적인 풍격 그대로 典雅莊重하지만, 詩의 경우는 典雅平澹 내지 平淡溫厚한 미감이라고 할 수 있다. 종래, 학계에서 官僚文人들은 士林들과의 비교 속에서 다소 부정적으로 평가되어 왔는데, 그것은 16세기 중반 이후 政界를 장악한 士林들이 자신의 정통성을 강조하기 위해 만든 성리학의 道統論에 근거하여 연구를 진행시켜온 결과로 볼 수 있다. 조선 性理學의 토대를 세우고 館閣體를 확립한 양촌의 문학은, 그 중에서도 특히 館閣風 詩文學은 연구자들의 주목을 별로 받지 못해 왔다. 이제는 우리 문학의 연구도 성리학적 도통론을 추수하는 종래의 사고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양촌은 유교적 德治와 敎化 및 臣民의 안정된 삶을 꿈꾸며, 그런 사회의 확립을 위해서 조선왕조의 文敎政策을 개혁하고 관각문학의 토대를 확립하여 전수한 대학자이자 관료였다. 따라서 그의 館閣風 詩文과 崇明 事大意識에 대해서는 새로운 조명과 평가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된다.

      • 部首中心 體系에 대한 批判과 聲符中心 活用硏究

        금하연 高麗大學校 大學院 2012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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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Ⅵ. 結 論 본고는 지금까지 부수에 묻혀있던 성부를 기준으로 삼아 한자를 재정렬하여 학습이나 검색에 활용할 수 있는 성부중심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한 이론적 배경을 모색해 보는 작업이었다. 김근은『한자의 역설』에서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사람들이 인식하고 사는 세계는 기실 한자가 재현(또는 표상)한 세계이고, 따라서 그 세계의 질서는 다름 아닌 한자의 질서를 뜻한다. 누군가가 한자를 체계적으로 정리했다면 그것은 세계를 재현했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라고 했다. 한자의 90% 이상은 형성문자이고 형성문자는 부수와 성부의 결합으로 만들어진다. 지금까지는 부수를 기준으로 삼고 나머지 부분을 숫자로 치환해버림으로써 검색에 혼란을 초래했다. 본고는 성부의 획수를 헤아리는 ‘부수중심’ 대신 성부의 음을 활용하려는 것이다. 부수중심이나 성부중심이나 모두 ‘성부찾기’를 하고 있는 셈인데 그것이 성부인줄 알고 찾느냐 하는 여부와 그 찾는 방법에 있어서 막연한 숫자로 복잡하게 찾을 것이냐, 아니면 단순한 음으로 간단히 찾을 것이냐 하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또한 효율면에서 국어사전과는 달리 6개의 받침을 활용하는 것이 反切이나 韻의 영향에서 벗어난, 훈민정음 창제정신에 어울리는 일이며 받침(종성)의 개념이 없는 중국&#8228;일본인들 보다 훨씬 더 편리하게 한자를 검색&#8228;학습할 수 있는 방법이다. 성부의 획수가 아닌 음을 기준으로 하고 6개의 받침을 활용한다는 것은 그만큼 더 세분해서 만들었다는 말이므로 결국 검색범위가 좁아지는 것이고, 그 결과 물리적으로 국어사전보다 빨리 찾을 수 있는 검색시스템을 만들 수 있게 된다. 동양 3국 중에서 초성&#8228;중성&#8228;종성이 뚜렷한 것은 우리나라의 한글뿐이므로 받침을 활용하는 것은 아주 독자적인 시스템이며 학습&#8228;검색의 측면에서 저들의 어떤 시스템보다 효율적이다. 저들이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고유한, 독자적 것으로 국어의 특징을 가장 잘 살린 것이다. 그러나 이것의 온전한 정착을 위해서는 또한 국어사전과의 조화를 꾀해야 하는 무거운 숙제도 남아 있다. 이제 새로운 시스템을 활용한, 실용을 위한 ‘성부중심의 활용자전’들과 ‘성부를 활용한 학습방법’의 모색이 필요해졌으나 前者, 後者 모두 일개인의 힘으로는 애초에 불가능한 것이므로 단체급의 관심이 필요한 일이다. 우선 충효 위주의 유교이데올로기가 아닌 한자의 현대적 위상, ‘의사소통’을 위한 새로운 한자상을 정립하여 봉건잔재로 가득 찬 한문은 전문가에게 맡기고 표음문자인 국어의 단점을 보완하는 ‘國字로서의 韓字’로 정리되어야 할 것인데 ‘성부중심’은 이것과 아주 잘 어울리는 것으로 한글에 가장 적합한 독자적인 검색시스템이며 漢字에서 ‘脫中華의 초석’이 될 것이다. 한자의 성립과정에서 본다면 『상서』<周書:多士 第二>에서 동이족으로 알려진 ‘은나라에 이미 책이 있었다’고 했으니 동이족의 일원이었던 우리에게도 일말의 지분은 있는 것이다. “惟爾知惟殷先人有冊有典, 殷革夏命. (너희들은 은(殷) 나라 선인(先人)들의 서책과 전적(典籍)이 있음을 알 것이다. 거기에도 있듯이 옛날에 은나라도 하(夏) 나라의 명을 개혁하였다.)” 더구나 은나라는 주변의 동이족에 밀려서 5~6번씩이나 수도를 옮겨야 했을 정도로 오히려 주변의 ‘동이족이 은나라를 몰아낼 만큼 더 강대국이었는데 그들에게 글이 없었겠는가?’ 하는 강한 의문이 남는다. 21번 주에서 보듯 중국 내에서도 갑골문에서 이미 六書가 다 보이므로 270여 년 사용된 갑골이 한자의 기원일 수는 없다(中國文字從起源發展到甲骨文階段,決非三、五百年可以做到.)는 의견이 있다. 敎育城.亞洲(http://www.edcity.asia/)의 <中國文明源流及考古>라는 글에서는 ‘商代의 갑골문과 금문이 이미 상당히 성숙된 한자였므로 이로 추정하건데 학자들은 夏代에 이미 문자가 있었던 것으로 단정한다. 夏代문자는 이미 보편적으로 인정된다’(商代的甲骨文、金文已是相當成熟的漢字,因而學者斷定夏代應有文字。事實上,考古發現的夏代文字,已基本爲學術界所普遍認可)고 주장한다. 이것에 대한 막연한 증거의 하나로 魯某氏가 ‘살아 있는 화석’이라고 주장한 ‘모계언어와 부계언어의 차이’가 있다. 군사정부 시절에는 ‘군관민 일체’가 민정시절에는 ‘민관군 일체’로 표기 되는 것처럼 단어에서 글자의 순서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한국 중국 연놈 갈봄 여름 없이 엄마 아빠 손잡고 오가며 그 집 앞을 지나노라면 음양 남녀 춘추 父母 왕래 일월 특히 주목할 것은 동양사상의 핵심을 이루는 ‘陰陽’이라는 단어다. ‘男女’나 ‘日月’이라는 단어를 쓰는 사람들은 마땅히 ‘陽陰’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陰陽’은 분명히 ‘父母’가 아닌 ‘엄마아빠’를 말하는 사람들과 더 잘 어울린다. 여기서 새삼 한자의 주인이 되자는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동안 한자에 주력한 중국인들의 노고를 폄하할 생각은 없다. 다만 한자가 단순히 중국인들 만의 것일 수는 없을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는 것이다. 어쨌거나 국어의 성능향상을 위해서는 전체 한자에서 우리가 필요로 하는 만큼만을 정리해서 ‘韓字’로 부를 수 있는 근거를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니, 적정수의 표제자를 선정한 후, <별첨 5>에서 보듯이 하나의 한자에 주어진 수십 개의 뜻 중에서 단어에 사용된 뜻만 취사선택해서 영어 Vocabulary에서 라틴어 어근을 활용하듯이 국어의 능력을 키우자는 것이다.

      • 金剛山 관련 文學作品에 나타난 儒家的 思惟 硏究

        양승이 高麗大學校 大學院 2012 국내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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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강산 관련 문학작품에 나타난 유가적 사유를 고찰하였는데 본고는 금강산을 주제로 생산된 문학작품을 통해 문학에서는 명소를 문학적으로 어떻게 형상화하였는지를 살펴보고, 나아가서는 한국문학사의 지형도를 그려보고자 하는 의미에서 출발하였다. 이에 역사적 전개 과정 속에서 거시적인 금강산 문학작품이 지닌 특성을 파악하기 위해 미시적으로 신라, 고려, 조선 전기, 조선 중기, 조선 후기, 개화기로 나누어 분석ㆍ검토함으로써 각 시대별로 나타나는 특징을 고찰하였다. 본래 금강산 관련 문학작품은 신라시대 최치원부터 시작되었으나 본격으로 작품이 창작된 시기는 고려 후기를 거쳐 조선조에 들어와서 많이 창작되어, 627여 명이 문학작품을 남긴 것을 알 수 있었다. 한시 작품은 13,019여 수 이고, 산문 작품은 422여 편이다. 山名이 신라시대에는 상악, 개골산으로 불렀으나, 금강산이란 용어가 쓰인 기록은 &#985172;화엄경&#985173;에 처음으로 나오고, 동진시대 법기보살이 금강산으로 왔다는 설이 있고, 그 뒤로 민지, 최혜, 이곡 등이 금강산이라는 명칭을 기문, 서문, 비문에 사용하였으며, 당나라 때의 징관도 &#985172;화엄경소&#985173;에 금강산이라 명칭을 사용한 것을 알 수 있으니 금강산이란 명칭을 사용한 연대는 1350년 이전으로 소급하여 올라갈 수 있다. 그런데 저울 바탕에 “金剛山長安寺”란 명문의 새겨져 있으니 그 연대는 1350년이다. 또한 동진시대 법기보살이 금강산으로 온 기록에 대해서는 민지, 이곡, 당나라 때 사람인 징관은 긍정적으로 인식하고 있다. &#985172;삼국유사&#985173;에서 불교 신앙의 상징물이 인도에서 신라로 직접 전해졌다는 설화가 있는데 이는 불교가 전래되기 전의 일이라고 一然은 附記했다고 했다. 그런데 이에 대하여 조선조 율곡 이이는 부정적으로 보고 있으므로, 서로 주장을 달리하는 두 학설이 있다. 고려 말 성리학의 수용과 함께 주희나 장식 등의 산수유기도 수용되면서 사대부의 전형적인 자연관이 나타났는데 산수 경물의 관찰을 통해 이치의 형태를 살피고 이의 감수를 통해서 심신을 수양하는 것이 그것이다. 또한 여말 사대부들이 지은 산수유기를 통해 불교와의 사상적 갈등 속에서 성리학이 수용되고 발전되는 양상을 엿볼 수 있었으며, 사대부의 자존 의식도 엿볼 수 있었다. 조선 초기의 유교 이념의 사회에서 사대부들은 불교를 배타적으로 보지 않는 성향을 발견할 수 있었는데 이는 아직 유교 이념이 확고한 뿌리를 내리기 전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굳이 불교와 대결 의식을 가질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여말 선초의 사대부들은 강호를 벗하면서 유유자적하고 만족한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 이는 자연과 정치현실이 조화로운 연속체로 파악되며, 그 배후에 깔린 집권사대부층의 현실긍정과 낙관주의의 연장선상에 놓이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성리학적 학문세계가 완숙되는 조선 중기에는 성리학적 이치와 연결하면서 금강산을 깨달음의 대상, 또는 道의 본원으로 금강산을 인식한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러한 이념 우위의 인식은 금강산의 명소를 두고 창작한 시문을 유가 사상적으로 연결시켜 이해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유가적 사유양태와 시문학적 형상화에서는 퇴계와 율곡의 기행시와 산수유기를 통해 유가의 문학적 논리를 살펴보았는데 눈으로 금강산의 아름다운 경치만 보지 말고 山水之趣, 즉 산수에서 흥취를 느끼고 도체를 인식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념 우위의 위치에 있는 사대부들은 금강산을 시문학적으로 어떻게 묘사하였는지를 살펴보았는데 16, 17세기에는 산수 자연의 경물을 관찰하여 만물의 이치를 궁구하였다. 퇴계 이황은 이기이원론을 주장하였고 율곡 이이는 이기일원론을 주장하면서 만물의 이치를 궁구하였다. 이것은 김창협과 김창흡에 이르러 인물성동론과 성범심동론으로 연결시켰으며, 국토 재발견으로 확대되어 금강산으로 많은 문인들이 유람하게 되었다. 유가 문인들은 금강산의 경계가 아름답고 청정하여 인간세계와 다른 仙境의 세계로 인식하였다. 티끌을 씻어내는 장소로서는 봉래산 보다 더 좋은 곳은 없는 것으로 생각하여 왔기 때문에 금강산으로 유람하여 마음을 청정하게 하고 그 眞境에서의 감회를 仙趣詩로 묘사하였다. 불교적 낙토로 금강산을 시적으로 형상화한 것을 살펴보았다. 여기서는 승려들이 창작한 시문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유가적 사대부로서 불가적 색채가 비교적 짙은 김창흡과 최창대, 그리고 이덕수를 위주로 살펴보았다. 불교 색채가 짙은 유가문인들은 금강산과 그 사찰에 대하여 거부반응을 일으키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17, 18세기에 있어서 금강산을 묘사하는 이론적 기반은 무엇이고 금강산을 형상화하는 시적 논리는 무엇인지를 살펴보았다. 낙론계에서는 인물성동론을 주장하고 성범심동론을 주장하였는데 사람과 사물의 본성이 같다고 한 데서 사람만을 대상으로 궁구하던 단계에서 탈피하여 자연에 관심을 돌려 우주만물을 탐구의 대상으로 삼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이같이 사람과 사물의 본성이 같고 성인과 일반인의 본심이 같다고 하는 사상으로 인하여 낙론계에서는 중인ㆍ서리나 여항문인들과도 교유를 하게 되었다. 요컨대 조선의 자연, 인물과 풍물, 풍속 등의 시어를 사용하여 문학과 예술적으로 형상화함으로써 사실주의적 예술이 꽃피게 되었다. 금강산의 문학적 형상화 방법을 살펴보았는데 장유ㆍ김수증ㆍ김창협ㆍ김창흡 등과 그 문하를 중심으로 창작된 작품을 통해 문학적 논리를 살펴보았다. 그들의 시문론의 핵심적 용어는 天眞, 天機, 自然 등으로 요약됨을 알 수 있었다. 시인의 내면에서 천기가 표출되어 사실적으로 형상화한 작품이 좋은 시란 뜻이다. 낙론계 그룹의 작가와 주요 작품을 살피고 농암 김창협의 시를 예로 들어 검토해 보았다. 이에 앞의 문학적 논리에 어긋나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우리의 산천이나 속어를 시어로 활용하여 고유한 산천경계를 묘사함으로써 조선적 시풍으로 형상화하였음을 김창협의 천기가 발현된 작품을 통해 알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眞境에서 형사와 신정으로 作詩한 진시이다. 김창흡과 그 문하의 작품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김창협의 <구룡연>에서는 첫째 못에서부터 아홉째 못까지 묘사하였는데 못의 특징별로 여실히 묘사하였다. 대표적으로 첫째 못 1수만 시 형식을 분석하여 보았는데 &#40655;이 맞지 않아 고체시로 보아야 함을 알 수 있었는데 시를 비평할 때에 성조의 높고 낮음과 字句의 工拙을 논하지 않고 境界를 진실하게 묘사하고 정서를 충실하게 표현한 시를 천하의 좋은 시라고 보는 것이 이 시기의 작시 경향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것은 형사와 신정으로 비평의 기준으로 삼고 인물성동론과 성범심동론으로 그들의 이념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조선 후기에는 민우수ㆍ박윤원ㆍ황경원 등의 금강산 관련 문학작품을 통해 심미적으로 산수 자연을 이해한 것을 알 수 있었다. 심미적 자연 묘사는 17세기 말 18세기 초에 이르러서는 중국의 성리학을 완전히 이해한 바탕 위에서 산수 자연에 대한 인식도 바뀌게 되었다. 이와 같은 심미적으로 자연을 이해하는 관점은 18세기 후반으로 이어졌다. 18세기 초의 김창협과 김창흡 등의 낙론 학맥의 계보와 사상적 동향은 낙론계 학맥의 주류를 이루었던 이재ㆍ홍계희ㆍ임성주ㆍ김원행ㆍ황윤석ㆍ박윤원ㆍ홍대용ㆍ박지원ㆍ민우수ㆍ김종후ㆍ김종수ㆍ김양행 등의 북학파로 이어진다. 그 뒤에는 이익과 정약용 등의 실학사상으로 이어진다. 산수 유람의 확산과 탈이념화에서는 3개의 절로 나누어 살폈는데, 홍대용과 박지원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조선 후기로 내려오면 한시에 나타난 산수유람의 의미는 이념적 색채가 탈색되면서 자연 역시 우주만물의 원리를 궁구하는 道體로서가 아니라 遊賞의 공간, 놀이의 공간으로서의 성격이 강해져서 세밀한 사실적 묘사를 하려는 의미가 강했다. 이러한 기행한시에 나타난 성격 변화는 자연스레 작품의 내용과 형식의 변화를 끌어내게 되어, 북학파 또는 실학파의 한시는 그 이전 시기와는 차원을 달리하는 새로운 양상을 띠게 되었다. 박지원이나 정약용 등의 작품에서 그러한 사실을 엿볼 수 있다. 박지원 문하의 북학파들은 장편시를 창작하였다. 박지원과 유득공, 박제가 등이 그들이다. 박지원은 70구의 장편시는 그의 득의작이라고 할 수 있으며, 박제가와 유득공도 50운 100구라는 장편시를 창작하였다. 이렇게 장편으로 이루어진 것은 19세기 금강산 기행시가 개인적 체험을 중시한 경향이 있기 때문에 작품으로 나타난 것이다. 이러한 사상적 움직임은 박지원과 홍대용의 단계에서는 아직 조선사상계의 일각을 점할 뿐이었으나 그들을 뒤이은 이서구ㆍ남공철ㆍ서유구ㆍ김정희 등이 활동하는 19세기 전반에는 서울의 경화사족 사이에 크게 유행하기에 이르렀다. 북학파는 조선의 문화건설 방향을 둘러싼 당시의 시대적 고민에 대한 하나의 포괄적 해법으로 제시된 것인데 이러한 정치의식 위에 전통적인 것과 새로운 것의 조화와 융합을 주장하였다. 변화된 사회적 요구에 부응하는 시대적 대응으로써 북학론이 고창되고 여기에 새로운 物論과 人間論을 갖춘 사회사상 그리고 경제지학을 중시하는 학문론과 법고창신의 새로운 시문풍이 결합되어 이들의 사상을 이루었다 한편 소론 경화사족들은 북학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서학에서 시대적 고민의 해법을 찾았던 남인 일각의 사상적 모색이나 양명학적 지향을 북학으로 연장시켜 갔다. 조선 후기 실학파의 문인들은 낙론계 그룹 문인들이 형사와 신정으로 物을 묘사하되 형사와 신정의 비중을 대등하게 하거나 신정에 좀 더 비중을 두고 있는 것과 달리 실학파들은 형사와 신정으로 物을 묘사함에 있어서 형사 쪽으로 비중이 경도된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作詩한 것이 마치 作畵한 것과 같이 외면의 형상화에 치중하였는데 이것은 바로 시화일치적인 사유이며 실학적으로 관찰하는 자세이다. 유상ㆍ체험의 공간으로 자연을 이해하였는데 19세기 이전의 기행시는 개인적인 기행 체험의 성실한 보고 보다는 여행의 흥취를 표출하는 도구로서의 성격이 강하였다. 그래서 여정이나 경물 등에 대해 서술을 하는 경우에도 작품의 전체적인 흐름과 조화를 깨지 않는 정도에서 이루어졌다. 반면에 체험 기록에 충실한 작품들은 자신의 감흥이나 감회를 드러내고자 하는 목적보다는 금강산에 가 보지 못한 이들에게 간접 여행을 체험하게 하려는 의도가 강하게 작용하였다. 따라서 출발에서 回程까지의 여정뿐만 아니라, 여행 중에 견문한 것을 상세하게 기록하는 것이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국토에 대한 긍지와 민족의 정서 발현에 대해 살펴보았는데 19세기 사대부 문인들이 전통적인 유람 풍속 속에서 국토와 민족에 대한 관심을 표현하였다면 육당과 춘원은 국토 순례나 민정 사찰을 통해 민족혼과 국가 의식을 고취하였다. 즉 주체적 민족의식에 눈뜬 전통사상으로서의 조선 후기 실학사상이 개화사상으로 피어났고, 이 개화사상을 이어받은 육당과 춘원이 문화적 민족주의, 민족적 계몽주의로 확대 심화하였다. 금강산 관련 문학작품의 미적 특질을 살피기 위해 단편시와 장편시, 산문으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문학작품에 나타난 미적 특질이 단편시의 경우, 특히 절구에서는 대상과 작가가 합일되어 무아지경을 이루는 것이 전편에서 나타나는 것이 특징이다. 반면에 장편시나 산문에서는 자연 사물의 대상에 대해서 작자의 시상이나 정서가 유아지경으로 전개되다가 어느 시점에 가서 흥취가 고조되면 대상과 작자가 합일되어 혼연일체가 되어 무아지경을 이루니, 문장에서 부분적으로 무아지경이 나타남을 알 수 있었다. 이것이 장편시에서 나타나는 특징이라고 할 수 있겠다. 수사적인 측면과 내용적인 측면을 보면, 시대적인 이념이 반영됨을 알 수 있었다. 짧은 시보다는 긴 장편시나 산문에서 좀 더 자세히 유가적 사유를 언급한 것을 알 수 있었다. 특히 17, 18세기 이후로 내려오면 한시나 한문산문, 한글산문, 또는 기행가사에서 대부분 장편을 이루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은 우리의 국토지리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작품을 기록할 때 우리의 역사, 풍속, 고적, 설화, 풍물, 민속, 언어 등의 전반적인 문화를 자세히 묘사하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의 동인은 문학적 측면, 정치적 측면, 사상적 측면, 종교적인 측면, 문화적 측면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문학적 측면에서 보면 국외적으로는 명대 이래 중국에서 많은 산수유기가 창작되고 방대한 選集으로 편찬되었다는 점이고, 국내적으로는 명말 청초의 인물인 원굉도나 왕사임의 소품체 산수유기가 유입되어 18세기 조선에서 각광을 받았다는 점이다. 정치적인 측면에서 보면 국외적으로는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들어서서 정권이 교체되었으며, 이에 국내에서는 숭명배청의 이념을 견지한 조선 사대부들이 중국을 오랑캐의 나라가 되어 버렸다고 멸시하게 되면서 자국의 고유문화에 대하여 관심을 갖게 되었다는 점이다. 사상적 측면에서는 신라시대의 신선사상과 고려시대의 불교사상, 조선시대의 성리학 사상, 호락논쟁, 개화사상 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특히 조선 중기에는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의 철학 사상은 18세기로 오면 성범동이론과과 인물성동이론으로 연결된다. 이러한 인식이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로 내려오면 북학과 실학으로 연결되었다. 또 실학사상은 개화사상으로 피어났고, 이 계화사상을 이어받은 이광수와 최남선은 문화적 민족주의, 민족적 계몽주의로 확대 심화시켜 ‘朝鮮主義’로 응결시켰다. 종교적인 측면에서는 금강산의 명칭에서도 확인 되는 바 금강산에는 유교, 불교, 선교사상이 공존하여 유불선 삼교를 포함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금강산은 佛國土나 樂土로 인식되어 종교인, 사대부, 시인, 묵객, 일반민중, 국외인 등등 수많은 사람들이 순례하면서 많은 문학작품을 생산하였다. 문화적 측면으로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이후에 조선 고유문화에 대한 관심이 확대되었다. 이는 국토지리의 재발견으로 연결되면서 많은 문인들이 산수유람을 통해 특별한 체험을 하였다. 이처럼 금강산에서 문학작품의 창작이 성행하게 된 의미와 요인은 시대마다 차이가 있으며 상당히 복합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으로 금강산 관련 문학의 창작이 성행한 것은 일찍이 공자가 말했던 ‘樂山樂水’의 정신에 바탕을 두고 있음이 분명하다.

      • 李穀 文學 硏究

        강동석 高麗大學校 大學院 2011 국내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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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논문은 高麗 後期의 문인 稼亭 李穀(1298~1351)의 詩와 散文을 考究하고, 이를 토대로 그의 세계에 대한 인식 및 그 의미를 해명하는 데에 목적을 두어 작성된 글이다. 우선 이곡의 문학사상은 고려 후기 사상적 유입으로 인해 실천적 학문을 강조했던 성리학적 성격과 원시유학의 사상의 접선에 있었으며, 문학이 지니는 효용으로서 선한 성정을 이끌어내고 교화가 되게 하는 문이재도적 문학론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한 문학사상 아래 이곡의 시세계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가지고 있다. 우선 天人相關論的 정치관과 지식인으로서의 책임감이다. 천재지변을 人事의 잘못으로 단정하고 지식인으로서의 책임감을 보인 사대부 문학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다음으로 비판적 사회관과 회귀의식이다. 현실적 어려움에서 오는 냉담한 社會觀을 보이는가 하면 심지어 고려와 원이라는 양국의 관직생활에 있어서도 꾸준히 회귀의식을 표출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자연을 매개로 인생을 회고하며 반성하는 시선이다. 이곡은 자연을 媒介로 인생을 懷古하며 반성하는 작품도 적지 않게 보였는데, 그 회고와 반성에는 단순한 탄식이 아니라 내면을 정화하려는 의도 역시 다분히 깔려 있으며, 시적 배경은 대부분 樓臺나 樓閣, 그리고 높이 솟은 바위, 산봉우리 등으로 트인 공간이며 맑고 푸른 것들이다. 이곡의 산문세계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보인다. 우선 효절에 대한 강조이다. 여기에는 한낱 구호에 머무르는 수준이 아닌, 실천에 대한 강조라는 면에서 성리학적 면모가 확인될 뿐만 아니라 사대부의 문학 정신을 읽을 수 있었다. 더욱이 고려 말, 진부하고 비현실적인 사유체계에 반발하여 실학으로서의 성리학이 도입되고 그것이 문학과 사상의 교섭으로 이루어져 사회 문제에 보다 적극적인 관심을 보이게 된 점은 이곡 산문에서 사대부의 리얼리즘의 표출과 의식지향이라는 작품화로 나타난다. 그리고 문학 활동을 통해 동녀 징발의 저지와 고려의 풍습을 원나라에 인정받고 유지시킨 은 문학사에서의 큰 업적으로 기록된다. 아울러 산문에서 보여준 객관 대상에 대한 인식과 대응 방식은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논리적으로 정리하고 인정하며, 인간의 윤리적 삶과 연관시키려는 사대부적 사유의 결과물로 해석된다..

      • 高麗時代 畵論 硏究

        김대원 高麗大學校 大學院 2012 국내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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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고는 한국 畵論의 시원으로 간주되는 고려시대 화론을 연구한 것으로, 고려 문인들이 남긴 題畵詩文의 회화기록을 망라하여 고려의 회화이론 전반을 규명하였다. 전반적으로 고려 화론의 형성배경과 문인의식을 고찰했으며, 세부적으로는 고려 화론을 주제별 &#8228; 소재별로 분석하여 고려 회화에 내재된 예술정신을 종합하였다. 고려의 화론은 독립된 성격으로 전해지지는 않지만 제화시문을 통해 당시의 회화사조 &#8228; 회화인식 &#8228; 회화풍격 &#8228; 회화비평 등을 두루 살필 수 있었다. 첫째, 고려 화론의 형성배경과 문인의식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고려 화론은 통일신라말기 崔致遠에 의해 중국의 화론을 수용하는 것에서 비롯되었다. 이후 北宋代 蘇軾을 중심으로 파급되었던 文人畵論이 고려 중기에 부분적으로 전래되어 李奎報를 비롯한 고려후기 能文能吏形 사대부들을 중심으로 풍미하였다. 특히 고려는 왕도정치에 필요한 인재등용을 위해 개국초기부터 과거제도를 채택하고 漢文學的 文風이 진작되면서 제화시문도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고려 화론은 北宋과의 활발한 문화교류를 통하여 중국의 대표적인 화론서인 張彦遠의 &#985172;歷代名畵記&#985173;가 유입되면서 본격화되었다. 이 무렵 金富軾은 회화에 참여하기 시작했던 문사들의 입장을 대변하여 ‘氣韻非師論’에 토대를 두고, 신분이나 인품이 높은 사람이 학문과 도를 추구하는 연장선상에서 遊藝하는 자세로 그린 그림이 가치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현상은 무신집권기 문인학자 및 관료지식인들이 그림을 시와 함께 자신들의 감흥교환과 심성도야 등의 내적 자원을 확충하는 매체로 활용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특히 北宋의 문인화사상을 적극 수용함으로써 회화에 대한 관심과 창작활동이 더욱 고조되었다. 그 가운데서도 蘇軾에 대한 존숭은 崇蘇熱을 이룰 정도였기 때문에 그를 중심으로 강조되었던 ‘詩畵一致論’과 ‘重神似論’을 비롯하여 ‘胸中成竹論’ &#8228; ‘身與竹化論’ &#8228; ‘心手相應論’ 등의 회화이론이 성행하였다. 李仁老가 ‘시화일치론’을 개진한 것을 비롯하여 林椿, 崔滋 등이 화론을 형성하는 데 일정한 기여를 했다. 그러나 보다 투철한 의식과 사유체계에 의해 자신의 견해를 표명한 인물은 李奎報였다. 이규보는 사물의 외형뿐만 아니라 生成化育하는 참모습도 표현되어야 한다는 ‘眞似論’을 통해 회화가 수행해야 할 실천적 지침을 제시하였다. 그리하여 고려의 그림이 감상화의 성격으로 발전하는 데 계도적인 역할을 했다. 이처럼 무신집권기를 통해 활성화된 회화는 李承休, 安軸, 李齊賢, 李穡 등 고려말기의 신흥사대부를 거쳐 조선전기로 전승되었다. 둘째, 고려 회화에서 創作論과 風格論을 분석하면 다음과 같다. 창작론은 사물을 익숙하게 관찰해야 한다는 觀物熟尋의 경향이 두드러졌다. 특히 고려의 전반기에는 天變地異의 자연현상을 그리는 풍조가 성행하였는데, 그림으로 표현된 자연현상을 통해 災異나 祥瑞로 여겨 위정자의 정치성과를 가늠하고 修省하는 자료로 삼았다. 이는 天人感應의 修養的 성격이 강한 것이었다. 人物畵의 경우도 통치계층의 도덕적 수양과 관계되는 鑑戒畵가 주류를 이루었다. 아울러 고려의 사대부들은 회화의 본질적인 용도와 기능까지도 피력하여 회화의 존재가치를 중시하였다. 즉, 고려시대의 회화는 道의 체현과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 있다고 파악함으로써 藝道一致의 사유로써 회화의 본질을 인식하였다. 한편 산수화는 초기의 실용적 기능에서 점차 감상물인 臥遊物로 이행되면서 우리 산천의 아름다운 실경을 통해 우리 자연의 참된 본체인 眞景을 담아내었다. 따라서 고려의 산수화론은 자연친화적인 실경론으로 전개되었다. 산수화는 중기를 지나면서 목적의식을 벗어나서 작가의 사상을 내재한 실경산수화로 변천하면서 情景交融을 지향하는 意境論이 심화되었다. 花鳥나 翎毛 그림은 사물의 이치를 분명하게 파악한 후에 표현해야 생동하는 모습을 나타낼 수 있다는 格物體現의 논리가 두드러졌다. 또한 觀物熟尋을 통해 표현대상물과 작가의 物我一體를 중시하는 창작론이 대두되었다. 곧 대상물은 생명력을 갖춘 참모습을 표현해야하며, 이를 실현시키기 위해 창작은 만물창조와 같은 경지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견해이다. 고려시대는 묵죽 &#8228; 소나무 &#8228; 초상 &#8228; 산수 &#8228; 모란 &#8228; 매화 &#8228; 매 &#8228; 곰 &#8228; 말 그림 등의 제화시문 곳곳에서 氣韻의 중요성을 피력하였는데, 이는 곧 성정이 자유로워야 그림에 기운이 생동한다는 방법을 내재한 논리이다. 따라서 고려 화론의 풍격은 氣韻生動으로 규정할 수 있다. 고려 화론의 기운론은 작가의 인품과 결부시켜서 작품에 표현된 기운은 곧 작가의 인격이 화면에 반영되기 때문에 작가의 타고난 기운이 표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어떤 소재라도 기운이 표현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또한 인물화에서는 傳神寫照를 강조하는 形神論의 풍격이 강하였다. 그러나 점차 形似보다는 神似를 중시하는 성향이 회화 전반에 피력됨으로써 神似論의 風格이 두드러졌다. 고려시대의 회화품평은 詩話를 援用하는 점이 특징인데, 이는 文藝相須를 지향하는 문인화론의 성행이 주된 원인으로 볼 수 있다. 그리하여 작가는 창작에 임할 때에도 우주만물의 생성근원과 법칙을 깊이 탐구 &#8228; 체득하여 만물의 생성변화작용에 참여하여 物我와 心手의 一體化를 통해 대상물의 참모습을 반영할 때 비로소 참된 창작의 경지로 나아갈 수 있다고 인식한다. 회화비평에서도 이러한 경지에서 창작이 수행되어야 할 것을 요구하였다. 또 고려시대 제화시문들은 대부분 詩話用語가 사용되었는데, 이는 시화일치사상에서 비롯된 당연한 결과였다. 이러한 용어들은 구체적이며 체계적이지는 않지만, 글을 읽으면 그림이 자연스럽게 연상되어 상상력을 유발시키는 효과가 있었다. 셋째, 고려 화론의 본질적 가치관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고려 문인들은 국가적 차원의 불교영향 하에서도 유학의 문풍을 중시함으로써 학문과 예술이 서로 관련된 詩畵一致의 文藝相須를 지향하였다. 이러한 풍조는 중기에 접어들면서부터 북송과의 문화교류를 통해 소식 등의 문인화론에 토대를 둔 詩畵一致思想의 보편화와 餘技的 회화관의 유행으로 이어졌다. 넷째, 고려 회화에 드러난 예술정신을 종합하면 다음과 같다. 鑑戒的이며 比德的인 審美意識이 두드러졌으며, 法古善變의 자주의식을 엿볼 수 있었다. 고려 화론은 소식의 화론을 적극 수용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를 맹목적으로 수용한 것은 아니었다. 선택적 수용과 창조적 변용을 통해 새로운 의미로 인식해야 한다는 新意論이 대두하여 중국의 회화사조와 회화이론을 自得的으로 援用하였다. 그리하여 중국의 고전을 본받더라도 우리의 시각과 인식으로 수용하고 적절히 변용해야 한다는 善變의 사유가 두드러졌으며, 이러한 변화의 문학정신은 회화창작으로 연계되었다. 또한 고려시대는 회화와 시문을 통하여 현실을 반영하고 시대비평정신을 피력하였다. 고려 회화에 표출된 비평정신은 自主와 自由를 염원하는 의식이 강하였다. 요컨대, 고려시대에는 회화의 이론의 체계가 갖추어져 있지 않는데다가 회화의 진적도 거의 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화론을 전문적으로 논하기란 쉽지가 않다. 하지만 제화시문을 통하여 고려의 회화관과 심미의식의 전반을 파악할 수 있었다. 본고는 이를 통해 고려 화론을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데 기반을 마련하고, 나아가 우리 회화의 근간을 찾고 우리 회화에 대한 주체적 인식과 자득적 비평을 시도하였다. 이러한 점이 고려 화론 연구의 의의라 하겠다.

      • 李奎報 漢詩의 內面意識 硏究

        이희영 고려대학교 대학원 2016 국내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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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고는 고려 중기의 대표적인 문인이었던 李奎報(1168~1241) 한시에서 보이는 그의 내면의식을 살펴보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Ⅱ장은 삶의 방향에 대한 모색이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이규보의 내면의식을 살펴보고자 하였다. 이 시기는 1196년 4월 최충헌이 집권하기 전까지에 해당한다. 여기에는 이규보가 자신을 바라보는 세상에 대하여 자각하기 시작하고, 출세하지 못하는 현실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야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반영되어 있다. Ⅲ장은 격변의 시대 속에서 이규보가 겪었던 좌절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하였다. 1196년 5월 개경을 떠나 여주를 경유하여 상주로 갔다가 다시 개경으로 돌아오는 1196년 10월까지에 해당된다. 이규보는 이 여정의 과정에서 쓴 시를 모아 󰡔江南集󰡕을 엮었으며, 󰡔東國李相國全集󰡕권6의 시 대부분이 여기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유람의 과정 속에는 부당한 현실 속에서 그가 느꼈던 막막한 정서와 寒士로서의 침울하고 공허한 마음이 반영되어 있다. 이규보는 강남 유람 이후에 개경에서 벼슬 생활을 하고자 하는 의식을 이전보다 더욱 강하게 드러내기 시작하고 있다. Ⅳ장은 새로운 삶을 위한 자기 성찰이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그의 내면의식을 살펴보고자 하였다. 이 시기는 1197년부터 1207년 12월까지로, 그가 直翰林으로 權補되기 직전에 해당된다. 이규보는 몇 차례 求官을 위한 노력으로 全州司錄이라는 지방관을 맡았으나 탄핵을 당하게 된다. 그 뒤에는 경주에 반란이 일어나자 招討兵馬로 자진하여 복무했으나 공을 인정받지 못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이규보는 이러한 인생의 부침 속에서 자기 침잠에만 빠지지 않고 개경의 草堂에서 閑寂의 興을 통하여 긍정적 삶의 자세를 가지려고 노력하였다. Ⅴ장은 官人으로서의 고민과 애착이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그가 조정에서 보여준 행보에서 보이는 내면의식을 살펴보고자 하였다. 이 시기는 1207년 12월부터 1237년 12월 29일 71세의 나이로 치사할 때까지에 해당된다. 그는 이 기간 동안 두 번의 굴곡을 겪게 되는데, 1219년 桂陽都護府副使 兵馬鈐轄의 외직으로 좌천된 것과, 1230년 63세의 나이에 猬島로 유배를 당하게 된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仕宦의 굴곡에도 불구하고 1234년 67세의 늦은 나이에 재상의 자리에 오른다. 이규보는 이 기간 동안 말과 행동을 삼가면서 소극적인 관인의 모습을 보여주었고, 白首의 나이에 조정에서 자신의 뜻을 펼칠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아 있지 않다는 생각으로 仕宦에 대한 애착을 드러내기도 한다. 한편으로는 ‘乞退’의 요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아서 고민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혹시라도 늦은 나이에 명리를 탐한다거나 賢人들의 진출을 막는다는 부담스러운 주변의 시선을 의식한 행동이라고 보인다. Ⅵ장은 현실의 속박과 자유의 지향이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그의 내면의식을 살펴보고자 하였다. 이 시기는 1238년부터 그가 세상을 떠나는 1241년까지이다. 이규보는 이 기간 동안 자신의 일상과 주변의 사물들에 관심을 기울이며 시로 읊어내었고, 고려가 처한 몽고와의 대치 국면과 災異로 인한 백성들의 삶과 같은 대내·외적인 문제에 대한 근심을 시로 보여주기도 하였다. 그는 이러한 어려운 상황에서는 자신이 지켜나가야 할 방향이 ‘困窮’이라고 하여 ‘淸白’한 삶을 살고자 하였다. 결국 이러한 그의 일면은 현실의 속박에서 벗어나 마음속의 진정한 자유를 얻기 위한 행보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이상의 논의를 통해서 그 동안 부분적으로 논의되어 확인하지 못했던 이규보의 많은 시들이 조명될 수 있게 될 것이며, 아울러 그의 한시 속에 숨겨져 있던 내면의식 까지도 확인할 수 있으리라고 본다. 이를 통해서 이규보가 무인 집권기 속에서 직면했던 다양한 삶의 문제들에 대하여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대처해 나갔는지 확인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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