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農本을 표방하였다. 이는 농업 이외의 産業을 末業으로 인식하고 사회에서 요구하는 최저 단계의 수준으로 억제하는 것이 정책의 기본 방향임을 의미하였다. 이와 같은 정책 방향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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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 高麗大學校 大學院, 2002
2002
한국어
151 판사항(4)
서울
iii, 280p. : 삽도 ; 26cm.
참고문헌: p. 259-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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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農本을 표방하였다. 이는 농업 이외의 産業을 末業으로 인식하고 사회에서 요구하는 최저 단계의 수준으로 억제하는 것이 정책의 기본 방향임을 의미하였다. 이와 같은 정책 방향을 魚鹽業에 적용한 이념이 조선의 건국과 함께 표방한 '山林川澤 與民共之'였다. 魚鹽業의 생산무대인 川澤을 王土思想의 擬制下에 편제하고 특정인의 독점적 점유를 금지하였다. 중앙 및 지방 재정에 필요한 어염 생산물은 身役制와 결부시켜 확보하였다. 그외 직접 생산자의 자유로운 활동을 보장하고 그 생산물의 일부를 收稅하여 국가재정으로 활용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은 어염업의 발전에 따른 생산 구조의 변화와 身役制의 변동, 국가재정의 악화 등을 배경으로 일정한 수정이 불가피했다. 조선정부가 정책 전환의 기로에서 선택할 수 있는 것은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어염업을 末業으로 파악하는 기본 인식은 유지하되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여기에도 다시 두 가지 입장이 있었다. 첫째, 생산현실을 인정하고 효율적인 수세를 통해 국가재정을 확보하되, 정부가 그 생산과 판매에는 가급적 관여하지 않는 것이었다. 둘째, 국가에서 어염 생산과 판매에 적극 관여하는 방안이었다. 일종의 國營 혹은 官營의 방식이었다. 조선 후기 어염 정책은 기본적으로 이러한 입장에서 입안, 시행되었다. 그것도 전자가 주류였다. 후자는 국가재정이 악화되어 非常의 財政政策이 필요했던 시기에 국한되어 시행되었다.
조선 정부가 선택할 수 있었던 또 다른 길은 末業觀을 극복하고 생산자에게 유리한 생산환경을 제공하는 한편 효율적인 수세체계를 마련하는 것이었다. 이는 어염업만이 아니라 상업에 대한 인식 변화도 전제하였다. 따라서 상품경제 발전에 따라 어염 생산에 대한 과세와 함께 어염생산물의 유통 이윤도 국가재정으로 흡수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조선 정부는 이러한 방식으로의 전환은 끝내 이루지 못하였다. 여기에 조선 정부 어염정책의 기본적인 한계가 있었다.
이 글에서는 이러한 인식을 전제로 국가재정 상황의 변화와 정치세력의 교체, 그리고 어염업의 발전 등을 배경으로 한 조선후기 어염 정책의 변화과정과 의미를 고찰하였다. 이하에서 본문의 내용을 요약하는 것으로 맺음말을 대신하고자 한다.
17세기 전반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국가재정이 매우 악화되었던 시기였다. 전쟁 피해복구와 청나라에 대한 무거운 세폐부담은 非常의 財政政策을 시행해야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 정부는 국가에서 어염생산과 판매를 직접 담당하는 鹽鐵使制나 兩湖鹽鐵使制, 국가가 어염세를 거둬 직접 판매하는 鹽鐵調度使制를 시행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염철사제와 같은 정책이 시행되었던 것에는 16세기 이래의 財政政策論 변화에 기인한 측면이 있었다. 당시 정책 입안자들은 전쟁이라는 특수상황에는 국가에서 소금 전매제를 시행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200년 이상 인정되었던 私鹽을 금지하고 엄밀한 의미에서의 소금 전매제를 시행하기는 어려웠다.
그러므로 당시 정책 입안자들은 劉晏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와 함께 그가 시행했던 전매제 중의 한 방식인 '常平鹽制'를 선택적으로 수용하였다. 정부에서 소금을 생산해 産地에서 상인에게 넘기고, 상인이 내륙지방으로 운반하여 판매하는 '商運商販'은 정부에서 소금 장사를 하여 '與民爭利'한다는 비판을 받을 가능성이 높았다. 내륙에서 상인이 고가로 소금을 판매하면 정부에서 소금을 專賣하는 명분이 퇴색하고, 재정을 확보하기 위한 정책일 뿐이라는 비난을 받기 쉬웠다. 따라서 국가에서 직접 소금을 생산하고 판매하면서도, 그 명분으로 소금 공급을 원활하게 하고 내륙지방 鹽價를 낮게 조절하여 국가와 백성 모두에게 이롭다는 것을 내세워야 했다. 이러한 정책과 명분은 조선의 현실과 맞았다. 때문에 당시 정책 입안자들은 유안의 소금 전매제를 조선의 현실에 맞게 재해석하고 그의 전매제 중에서 '상평염'만을 선택적으로 수용하였다.
이러한 입장에서 시행되었던 것이 鹽鐵使制였다. 염철사제는 염철사와 煮鹽官을 파견해 전국의 소금 생산지에서 관이 직접 자본을 대고 鹽戶를 동원하여 소금을 생산하였다. 그리고 생산한 소금을 내륙 지방으로 옮겨 상평염 방식으로 운영하는 것이었다. 이 조치는 군량 확보와 진휼 차원에서는 일정한 효과를 보았다.
그러나 염철사 파견 이후 지방관의 반발, 煮鹽을 빙자한 鹽戶 침탈 등 여러 가지 폐단을 낳았고 결국 폐지되었다. 이후에는 守令管理制로 바뀌었으나, 이 역시 권력을 빙자한 상업 독점이라는 폐해를 낳았고 1598년(선조 31)년 폐지되었다.
이러한 염철사제의 경험 때문에 임진왜란 이후와 광해군대에는 鹽鐵調度使制가 시행되었다. 염철조도사는 공물상납과 전세수입이 격감한 상황에서 鹽鐵을 판매하여 얻은 이익으로 부족한 국가재정을 보충하려는 것이었다. 염철조도사의 역할은 鹽鐵을 판매하여 그 자금을 가지고 국가의 수요품을 구입하는데 그치지 않았다. 鹽鐵판매로 얻은 자금을 활용하여 다양한 상업활동에 종사하였다.
이 제도는 염철사제와는 다른 운영방식이었다. 이때는 국가에서 소금 생산을 주관하지 않았다. 다만 국가에서 어염세를 직접 수세, 판매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운영 과정에서 결국 유통부문의 이익을 흡수하는 형식, 그것도 소금 이외의 상품을 貿販하는 형식으로 변질되었다. 이러한 결과는 이 시기 어염정책에 대해 '與民爭利'라고 비판하는 주장에 더욱 설득력을 주었다. 常平鹽制와 같은 운영이라는 명분하에 시행되었던 염철조도사제는 오히려 '與民爭利'라는 비판자의 주장에 설득력을 주었다. 이러한 역사적인 경험은 이후 국가가 소금 생산, 판매에 관여하는 정책을 펴는 데 제한적인 요소로 작용했다.
이러한 역사적인 경험을 반영하고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에 대한 歲幣 부담을 해결하기 위해 조선 정부는 1638년(인조 16) 양호염철사제를 시행하였다. 소금 생산과 판매에 입지조건이 좋은 瑞山과 泰安, 羅州, 靈光 지역의 鹽利를 이용하여 세폐에 충당하려 하였다. 운영 방법은 국가에서 생산비용과 시설을 제공하고, 요역 감면과 생산량의 일부를 지급하는 조건으로 노동력을 동원하여 소금 등을 생산하였다. 이를 통해 확보한 魚鹽은 해당 지방관의 책임하에 면포로 貿易하여 중앙에 상납하게 하였다. 그런 점에서 염철사제와 동일한 형태였다. 다만 시행 지역이 4곳에 국한되고, 염철사의 직임을 해당 지역 수령이 맡았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었다.
이 제도의 시행은 적지 않은 재정 효과가 있었다. 4지역에서 바치는 상납액은 면포 340통이었다. 이 액수는 쌀로 환산하면 6,800石~9,066石정도로 당시 호조 田稅收入의 10분의 1에 가까운 액수였다.
그러나 이 제도는 대다수 관료들이 '전매제'와 유사한 정책이라는 시각을 갖고 있어 지속적으로 시행되지 못했다. 양호염철사제는 청나라의 세폐 부담을 해결하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 병자호란을 겪고 난 직후 농민들의 담세 능력이 떨어져 무거운 세폐 부담을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마련한 정책이었다.
1645년(인조 23) 청과의 외교관계가 어느 정도 정상화되고, 세폐부담이 줄어들었다. 양호염철사제가 존속해야 할 중요한 명분이 매우 약해진 것이다. 따라서 조선 정부는 이 제도의 효율적인 운영을 모색하기보다 운영상의 폐단과 그 事體의 不正을 더 큰 문제로 인식하였고, 鹽戶와 지방관의 부담을 덜어준다는 취지로 상납액을 감축하였다. 그리고 효종 즉위와 함께 그 폐지가 운위되었고, 해당 지역 어전과 염분에 대한 절수도 재개되었다. 그러면서 호조 상납액을 마련하는 방식이 防納의 형태로 운영되었다. 지방관들은 서울에 있는 사람에게 防納을 하게 한 다음, 그 액수를 현지 생산자에게 받아내게 하였다.
이러한 변화는 이미 양호염철사제의 성격이 완전히 퇴색했음을 의미하였다. 양호염철사제는 그 지역의 어염 생산과 판매를 국가에서 직접 관장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방납제와 같은 운영은 서산 지역 등에 있는 호조 소속 어전과 염분에 대한 수세 형식으로 변화하였고, 그마저도 정상적인 수세가 아니라 鹽民등에 대한 수탈의 형태가 되었음을 말해주는 것이었다. 따라서 효종 연간부터 서서히 양호염철사제의 본질은 퇴색되었고, 숙종 16년경이면 이미 원래 의도와는 전혀 다른 성격으로 운영되었다.
17세기 후반 어염 정책의 특징은 궁방과 아문에 의한 어염 절수 확대와 이를 제한하려는 노력으로 요약할 수 있다. 궁방 절수는 仁祖反正 이후 4궁의 성립과 왕실 사재정을 확보하려는 국왕의 비호에 힘입어 확대되었다. 각 아문과 군영문도 '各司自辦'의 원리에 의해 개별적인 재원을 확보하면서 절수를 행하였다.
어염 절수의 성행은 권력기관에 의한 자의적 침탈의 확대라는 측면도 있었지만, 조선의 재정운영 원리에 기인한 측면도 있었다. 조선 건국 이래의 어염업 이윤을 흡수하는 원칙이 조선후기 현실에 맞게 변용된 것이었다. 어염 절수는 조선 전기 어염세 용도와 관련된 아문들과 궁방에게만 허용되었다. 薦新, 進上과 관련이 있는 아문, 국방과 관련이 있는 아문 등이 그것이었다.
이 시기 궁방과 아문은 새로 만들어진 漁箭, 漁場, 鹽盆과 지방 군현에 속해있던 것을 주로 절수하였다. 어전과 염분의 경우 그것이 설치되는 대지에 대한 절수를 근거로 수세권을 행사하기도 하였다. 특히 어염업의 발전과 함께 새로 개발되는 어장의 수세권을 두고 궁방과 아문 등이 선점하기 위해 각축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절수 관행이 바뀌었다. 어장은 먼저 수세하고 다음에 절수 허가를 받아내는 방식이었다. 그리고 궁방과 아문, 군현, 사대부 등 당시 권력기관이나 지배층 모두 어염업에 대한 지배력을 행사하기 위해 섬을 입안하거나 절수하는 경우도 많았다. 섬에 있는 토지를 절수한 것을 기반으로, 섬에 딸린 어전과 염분에 대한 권리를 행사하거나 섬에 사는 사람들에게 어염 생산물의 일부를 수세하였다.
이러한 궁방과 아문의 절수는 주로 수세권의 성격을 갖고 있었지만, 염분을 설치하거나 어전과 자염에 필요한 땔감을 부담하는 경우도 있었다. 다시 말해 궁방, 아문의 절수는 수세권만 행사하는 것과 궁방이 어염 등의 생산과 경영에 개입하는 것의 2가지 형태가 있었다. 이 점에 이 시기의 특징이 있었다. 이전 시기 국가의 직접적인 어염 생산과 판매 형태가 소멸하고, 궁방이나 아문과 같은 개별기관에 의한 어염업 생산, 판매, 그리고 수세가 이루어졌던 것이다.
이 시기의 궁방과 아문 절수 확대는 여러 가지 폐단을 낳았고, 따라서 정부의 대책도 궁방과 내수사의 어염절수를 제한하는 것을 중심으로 진행 되었다. 절대권력인 국왕의 비호하에 전개되는 궁방 절수의 확대는 왕실재정과 왕권의 확대를 의미했다. 반면 인조반정 이후 정계에 등장한 산림세력은 왕실재정을 혁파하여 국가재정에 편입시키거나 최소화하려는 입장이었다. 이 시기 어염 정책은 조선 전기부터 왕실 사재정은 인정받고 있었다는 것과 궁방절수를 혁파하면 결국에는 사대부들이 그것을 私占할 것이라는 논리로 맞서는 국왕과 '山林川澤 與民共之'와 '人君無私藏'의 명분을 내세워 궁방 절수를 혁파하려는 山林勢力(山黨)의 주장이 시대적, 정치적 상황에 따라 가감되면서 일정한 타협을 도출하여 절수를 제한하는 형태로 이루어졌다.
인조 연간에는 賜與와 折受받은 어염처는 합법화하는 반면 私立案은 혁파하는 것이 기본 방향이었다. 그러나 효종 즉위와 함께 정계에 복귀한 산당은 적극적으로 궁방 절수 혁파를 주장하였다. 1610년(효종 10)에는 효종과 송시열이 북벌론의 지속적 추진에 합의하면서 그 대가로 궁방과 아문 절수를 혁파하여 군수에 사용하기로 하였다. 효종의 急逝와 조사의 부실 등의 이유로 이 조치는 시행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 조치는 현종 연간 산당이 궁방 절수를 혁파하라고 주장할 때 중요한 명분이 되었다. 국왕은 祖宗朝에서 사여하고 절수했기 때문에 혁파 할 수 없다고 하였다. 이에 대해 산당은 절수 혁파는 先王인 효종의 遺志라고 맞섰다. 현종 초년에는 어장 절수를 금지하는 등의 조치가 있었지만, 북벌론을 추진했던 元斗杓 등의 저지와 1664년(현종 5) 服制문제로 인한 산당의 퇴조로 유야무야되었다. 그러나 1670, 1671년 庚申大饑饉이라는 큰 흉년이 일어났다. 이에 安民策의 일환으로 1672년(연종 13) 궁방 및 아문의 어염 절수처에 대한 원칙이 마련되었다. 이것이 「壬子事目」이다.
이 조치로 제궁가의 久遠賜與와 혁파하기 곤란한 어염 절수처만 적당한 수준으로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혁파하였다. 그리고 이후 궁가와 아문, 호세가들이 이를 절수하거나 分占하는 것을 엄금하고, 혹 이러한 사실이 있으면 감사가 일일이 적발하여 啓聞하도록 하였다. 「임자사목」 은 기존 궁방의 어염 절수에 대한 限年革罷의 원칙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1698년(숙종 24)에는 「乙亥定式」의 후속 조치으로 宮房에 대한 分給 원칙이 마련되었다. 그것은 신궁방은 염분 3좌, 시장은 1처를 지급하되 어전 절수는 금지하고, 구궁방은 기존의 절수처는 인정해주되 이후로는 절대 절수를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비록 모든 궁방이 아닌 新宮房에 대한 것이었지만, 어쨋든 궁방이 소유할 수 있는 어전과 염분의 수를 제한하는 조치가 처음으로 취해진 것이다.
이처럼 궁방 어염 절수가 지나치게 확대되는 것을 막으려는 조치는 기존 궁방과 신설 궁방의 절수 숫자를 일정하게 제한하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정치세력의 교체로 인한 민생 안정의 필요성, 유례없는 흉년으로 인한 농민 경제의 파탄은 민생을 안정시킬 특단의 대책을 강요하였다. 이에 국왕이 궁방과 내수사에 대한 일정한 양보를 함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타협안은 일정한 한계가 있었다. 어느 정도 시기가 지나면 궁방과 아문의 어염 절수는 재개되었다. 국왕은 신궁방이나 4궁 등의 요구를 가능한 한 허용하였다. 각 아문을 담당한 신하들도 재정상의 곤란을 들어 어염절수 회복을 요구하였고, 이는 받아들여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定數分給의 원칙이 성립한 것은 의미가 있다. 국왕과 신하 모두 궁방과 아문의 어염절수에 대한 일정한 원칙을 가지고 논의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국왕은 신궁방이나 기존 궁방의 어염 절수에 대해 규정 이내의 것이면 문제삼지 못하도록 주장할 수 있었고, 신하의 입장에서도 규정을 넘어선 절수에 대해서는 부당성을 지적하고 혁파하도록 요구할 수 있었다.
18세기 전반은 북벌 정책의 포기와 경제 정책 위주로의 전환, 잦은 흉년으로 인한 재정 고갈, 빈번한 정권교체를 극복한 국왕 주도의 蕩平論 대두 등 전반적인 국가 정책 기조가 변화했던 시기였다. 탕평론의 대두와 함께 정치 전면에 등장한 국왕은 安民策을 추구하는 한편으로 호조를 중심으로 중앙재정을 확보하는 정책을 주도하였다. 조선 정부의 어염 정책 역시 이러한 정책기조와 궤를 같이하였다.
그것은 크게 두가지 형태로 나타났다. 첫째, 戶曹專管收稅論에 입각한 정책이었다. 이는 중앙 정부에서 어염세를 전관하여 재정으로 활용하는 방안이었다. 둘째, 명지도 공염제 시행을 통해 재정을 활용하는 방안이었다. 정부에서 직접 소금을 생산, 판매하여 그 이윤을 국가재정으로 활용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두 정책은 모두 시행과정에서 어염에 기득권을 갖고 있던 세력의 반발과 중앙 정부에서 소금 생산과 판매에 관여하는 것에 부정적인 관료들의 반대 때문에 변질되었다.
전자는 크게 두 가지 방식을 취하였다. 하나는 어염 수세 규정을 정비하여 疊徵과 濫徵의 폐단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궁방 절수를 제한하는 한편, 어전, 염분 등 생산수단에 대한 세액을 일정하게 규정하는 정책을 시행하였다. 그러나 이 규정들은 생산 현실에 조응한 규정이었다기보다는 행정 편의적인 일률적 규정의 형태로 귀결되었다. 어염업의 현실상 복잡하고 다양한 생산 현장을 반영하기에는 미비한 수세 규정이었다. 두 번째는 호조에서 관할하는 어전, 염분을 좀더 확실한 방식으로 장악하는 代定 規定을 강화하는 한편, 궁방 등의 어염 절수처에 대해서는 差人의 중간 부정을 막기 위해 호조에서 수세를 대행하여 궁방과 아문에 劃給하는 방식으로 귀결되었다. 1728년(영조 4)에 결정된 호조의 官收官給制가 그것이었다. 그러나 이마저도 제대로 시행되지 않았다. 정부는 원칙으로서 官收官給制를 천명 하였지만, 현실 운영에서는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였다.
공염제 역시 시행과정에서 그 의도와 운영방식이 크게 바뀌었다. 1731년(영조 7) 흉년을 극복하기 위해 시행되었던 명지도 공염제는 상당한 재정효과를 보았다. 그러나 공염제는 在朝, 在野의 부정적인 인식 때문에 지속적으로 시행되지는 못하였다. 정부는 명지도 공염제 시행이 갖는 재정상의 이점을 활용할 방안을 모색하였고, 그 대안이 蒜山倉 設立이었다.
산산창 설립 이후 명지도 공염제 운영은 이전과 다른 형태를 띠었다. 운영 방식은 정부에서 봄에 소금 생산을 위한 초기 투자 비용을 대여해주고 소금 생산을 마친 가을에 이자 명목으로 소금을 거둬 이를 판매, 이윤을 얻는 방식이었다. 그리고 이마저도 중앙재정으로 활용하는 것이 아니라, 시행 중간에 상당부분은 감영이 운영을 주관하였고 그 이윤도 주로 감영의 재정원으로 사용되는 변화를 보였다.
어염세 수세규정 정비와 관수관급제, 명지도 공염제는 비록 성공한 정책은 아니었지만, 이 시기 어염 정책의 기조가 이전 시기와는 다른 입장에서있음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이 시기는 어염 생산 부분에 대한 국가와 궁방, 아문의 관여를 최대한 배제하였다. 그리고 수세는 차인 대신 호조에서 주관하고 이를 각 기관에 분배하는 방식을 취하였다. 이러한 방향 전환은 어염 생산을 民間에 맡기는 것으로 어염 정책의 기조가 바뀌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전 시기까지 국가나 국가기관인 아문, 궁방 등은 어떠한 형태로든 생산에 투자하거나 관여하였다. 이를 완전히 배제하고, 민간에서 생산을 하고 정부에서는 합리적인 세액만을 수세하는 방식으로의 전환이었다. 이 점에서 이 시기 정책기조의 변화는 획기로서의 의의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정책은 균역법 시행으로 그 완결을 보았다. 균역법이 조선후기 어염 정책의 확립이라는 의미를 갖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18세기 중반에 시행된 균역법은 조선후기 어염정책에서 획기적인 의미를 지녔다. 많은 한계가 있지만, 어염세 수세 기준이 이전에 비해 명확하고 체계적으로 규정되었다. 그리고 균역법은 어염세를 중앙재정으로 활용하자는 논의의 최종 결과였다.
兪棨, 李師命, 이익명 등의 양역변통론과 어염세 이정을 결부시킨 개혁안을 살펴보면 특징적인 사실이 드러난다. 이들은 양역변통론에 있어서는 儒布, 戶布, 丁布등으로 각각 달랐다. 그러나 어염절수를 혁파하고 그 수입을 양역변통에 필요한 비용으로 충당하자는 주장은 비슷하였다. 그것은 주로 어염세를 전관하는 별도의 관서를 세우고 거기에서 얻어진 수입을 양역변통에 활용하자는 주장이었다. 그리고 양역변통론에서의 '別立一司' 에 의한 재원 운영 방식은 숙종 연간에 주로 논의되었던 어염세를 전관하는 별도의 관서 설립안과는 차이가 있었다. 양역변통과 무관하게 이루어진 논의에서는 기존에 수세권을 행사하였던 궁방이나 아문에 적당한 세액을 보전해주었다. 이 논의는 영조 연간에는 戶曹 官收官給制의 형태로 시행되었다.
반면 양역변통과 결부시킨 안에서는 기존의 수세권에 대한 배려가 없었다. 궁방, 아문이 사적으로 수세하던 것을 완전히 혁파하고 이를 군사 재정 등으로 활용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이와 같은 양역변통론에서의 어염세 대책은 균역법 시행에서는 균역청에서 어염선세를 전관하는 한편 궁방 등의 어염 절수를 모두 혁파하는 형태로 연결되었다. 그러나 양역변통론에서는 호포제 등으로 양역제를 대신하되 재원이 모자랄 가능성에 대비한 예비재원으로 어염세를 상정하였다. 이를 위해 궁방 등의 어염 절수를 혁파하고 어염세를 전관하는 별도의 관서를 만들자는 주장을 하였다. 한편 균역법에서는 본격적인 호포제나 결포제 등은 시행되지 않았다. 이 점은 균역법 시행 당시의 시대적 배경과 관련이 있었다.
영조는 양역변통과 어염세 문제를 각각 다른 방식으로 해결하려 하였다. 양역변통은 戶布制로, 어염세는 호조에서 수세하여 각 궁방과 아문에 分給하는 방식으로 해결하려 했다. 다시 말해 1728년(영조 4) 시행하였던 호조의 관수관급제와 같은 방식을 염두에 두었다.
그러나 양역변통이 원만하게 처리되지 않았고 결국 減疋로 결정이 되었다. 이는 영조가 탕평의 구체적인 성과로서 양역문제를 어떻게든 해결하려 했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취한 조치였다. 이에 따라 감필로 예상되는 부족 재정을 충당할 재원 마련이 시급한 과제가 되었다. 가장 현실적인 재원이었던 어염세는 급대재원으로써 전액 균역청에 귀속되었다. 더욱이 영조는 균역법을 성공적으로 완수하기 위해서는 모든 조치를 취할 용의가 있었다. 각 아문이나 지방 재정을 희생하는 것보다 균역법 시행이 더 우위에 있었다. 그리하여 궁방·아문 절수 혁파와 어염세 釐正이라는 과제는 균역법시행에 종속된 형태로 이루어졌고, 지방 재정의 희생을 전제로 하였다. 여기에 균역법 시행은 불완전함을 내포하였다.
어염선세의 定稅過程도 마찬가지였다. 정부의 의도는 給代財源을 확보하는 한편 궁방이나 아문 등에 의해 자행되던 폐단을 바로잡으려는 것이었다. 특히 그 이전까지 가장 큰 문제였던 疊徵과 濫徵, 白徵이 일어날 가능성을 막기 위해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러나 어염 정세 과정에서 정부가 주안점을 둔 것은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세액부과가 아니라, 이전보다 가벼운 세액 책정에 있었다. 뿐만 아니라 급대재원을 당장 마련해야 하는 시급함 때문에 합리적이고 충실한 조사를 할 만한 기간도 없었다. 그러므로 균세사의 定稅는 이전의 세부담보다 경감하는 수준으로 마무리되었다.
「均役廳事目」해세 조항도 균세사가 정세한 전반적인 틀에 약간의 보완을 하는 수준으로 마무리되었다. 균역법은 수세기관을 일원화하여 첩징, 남징의 폐단을 없앴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가 있는 정책이었다. 그러나 균역법에서 규정한 海稅는 어전이나 염분, 선박 같은 생산수단에 부과하는 것이었다. 이는 조선후기 財政觀내지 商業課稅觀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정부에서는 상품이나 상인에 대한 과세에 부정적이었다. 「孟子」의 '關而不征'에 기반한 상업정책으로 일관하였다. 그러므로 균역법의 어염세도 생산 수단에 부과되었던 반면, 어염업에서 파생되는 상업 이윤에 대한 고려는 하지 않았다. 이 점이 이후 해세 운영 과정에서 한계로 작용하였다.
균역법 시행 이후 어염선세는 隨起收稅의 형태로 운영되었다. 매년 어전, 염분 등의 실상을 파악하는 한편, 稅案은 式年마다 수정하게 하였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그렇지 못하였다. 매년 실정을 파악하게 한 조치가 제대로 시행되지 않았다.
균역법 시행으로 재원의 상당부분을 상실한 지방관은 이 조항을 악용하였다. 지방관은 생산 현황의 변동을 정확히 파악해 稅案을 조정해야 했다. 그러나 지방 재정의 악화와 私利를 채우려는 욕심 때문에 지방관과 서리들은 陳廢된 어전, 염분은 稅案에서 제외시키는 한편, 새로 설치된 어전 등에 대해서는 제대로 보고를 하지 않았다. 이러한 어전들은 지방관이 사적으로 수세하여 재원으로 이용하였다.
이 때문에 균역청 세입은 날로 줄어, 20여 년만에 이 지나자 수만냥이 줄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784년(정조 8) 어염선세의 道比摠收稅가 시행되었다. 이는 균역청에서 각 지역의 魚鹽船 상황을 정확히 파악할 수 없는 단점을 보완하기 위한 것이었다. 아울러 균역청의 세입을 안정적으로 확보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그 시행 방식은 다음과 같았다. 비총 세액을 결정하기 전에 各道 道臣은 그 지역 어전, 염분 등의 실상을 정확히 파악하여 세액을 결정하였다. 이를 균역청에 보고하고, 이후에는 매년 이때 결정된 세액만을 균역청에 납부하였다. 도신은 매년 각읍의 어전, 염분 상황을 파악, 읍의 세액을 조정해주었다. 아울러 수세액이 많으면 후에 수세액이 부족할 때를 대비해 비축하게 하였다.
어염선세 수취 방식이 도비총으로 바뀐 것은 어염선세를 혁파할 때 그 대체 재원을 마련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정부에서 필요한 최소한의 재원을 안정적으로 확보하려는 것이었다. 이는 어염세가 균역청 급대재원과 관련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어염세 수세가 도비총형태로 전환되었다는 것은 여러 가지 면에서 한계를 보이는 것이었다.
첫 번째는 생산관리의 측면에서 문제가 있었다. 조선 정부는 수세 과정에서 야기되는 여러 가지 부정행위와 이로 인한 생산자의 피해에서 어염세액 감축의 원인을 찾았다. 어염세의 수취가 생산자의 재생산기반을 파괴할 정도로 가혹한 수준이었는지, 재생산 기반이 취약한 생산자들이 지속적으로 생산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할 방법은 있는가에 대한 정책적인 고려가 없었다. 균역법 시행 이후 조선 정부의 어염 정책이 생산과 관리는 민간의 자율에 맡기는 입장을 취하였던 데서 기인한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조선정부의 어염 정책은 한계를 갖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두 번째는 유통과 관련된 측면이었다. 도비총수세는 어염세의 운영과 관련된 모든 권한을 감사에게 위임한 것이었다. 아울러 현지 어염업의 발전과 관련된 이윤을 수취하는 방식도 지방관에게 위임하였다.
균역법에서 규정한 海稅는 엄밀한 의미에서 상업과세라고 하기는 어렵다. 상품 유통과정에서 파생하는 이윤을 흡수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어전이나 염분, 선박 같은 생산수단에 부과되었다. 물론 이는 균역법 시행 당시의 상품경제 발전 수준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했다. 균역법 시행 당시까지는 아직 유통경제가 크게 활성화되지 않았다. 궁방 등이 포구 절수를 통해 행했던 수세는 주로 어염의 생산처인 어장이나 염분에 대한 수세, 즉 생산부문에 대한 수세와 선박에 대한 수세가 대부분이었다. 물론 선박에 대한 수세는 엄밀한 의미에서 나중에 商稅라고 표현되는 유통부문에 대한 세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商稅項目이 독립적인 수세항목으로 설정되는 것은 포구에서 상품유통이 크게 발전할 때 가능했다. 적어도 균역법 시행 당시의 상품경제 발전 수준은 유통세 개념의 수취가 公的인 영역 뿐 아니라 私的인 영역에서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정조대 이후에는 상황이 많이 바뀌었다. 전국적으로 포구 유통망이 형성되고 상품 유통이 활성화되었다. 점차 상품 유통을 통해 얻어지는 이익이 커졌고, 이를 흡수하는 객주 등이 각 포구마다 나타났다. 또 궁방이나 아문에 의한 포구 절수도 다시 전개되었다. 그리하여 포구를 기반으로 한 상품 유통세는 객주와 지방관, 궁방, 아문에 의해 사적으로 수취되었다.
이와 같은 변화는 정부의 어염세 수세 방식에 무언가 전환이 필요했음을 의미했다. 그것은 어염업과 생산수단에만 세를 부과하던 방식과 함께 어염 유통 과정에 대한 합리적인 수세규정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조선정부는 염분 및 상선에 대해 균역청 이외에는 수세할 수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였다. 정부는 상품 경제의 발전과 관련해 파생한 상품유통세를 海稅와 동일한 범주로 파악하여 수세해서는 안된다는 입장을 천명하였다.
게다가 정부는 해세를 道比摠 방식으로 운영하면서 어염세 수취와 관리를 각도에 일임해버렸다. 정부는 급대재원만큼을 매년 안정적으로 확보할 뿐 실제 운용에 대해서는 방기한 것이었다. 이후 상품유통세가 무명잡세의 형태로 국가기관 등에 의해 비공식적으로 흡수당하고, 중앙정부의 재정에는 포함되지 못한 결과도 여기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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