高麗時代의 建築 硏究는 현존하는 遺構와 관련 史料의 부족 등으로 거의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기 때문에 현재 論議되고 있는 高麗時代 建築의 내용은 피상적인 수준에 머물고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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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 漢陽大學校 大學院, 1997
1997
한국어
서울
xi, 247 p. : 삽도 ; 27 cm.
Abstract : p. 245-246
參考文獻 : p. 234-244
서지적인 주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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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麗時代의 建築 硏究는 현존하는 遺構와 관련 史料의 부족 등으로 거의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기 때문에 현재 論議되고 있는 高麗時代 建築의 내용은 피상적인 수준에 머물고 있다. 따라서 本 論文은 高麗時代를 대상으로 當時代 建築의 보편성을 내포하는 寺刹建築의 空間 構成形式에 대하여 고찰하였다.
고려시대는 佛敎國家로서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寺刹을 營建하였으며 불교를 배척했던 朝鮮時代와는 시대적 상황이 다르다. 따라서 朝鮮時代 후기에 지어진 현존하는 대부분의 寺刹과 고려시대 사찰의 공간 형식은 다르게 나타날 것이다.
먼저 營建 主體에 따라 영건 방식에 차이가 있을 것이며 이러한 영건의 차이에 의하여 나타나는 건축적 특징을 파악하였다. 配置에서는 현존하는 遺構가 부족하기 때문에 文獻을 중심으로 構成要素의 변화를 파악하여 配置의 변화를 추정하였다. 또한 外部空間과 內部空間은 상호 유기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정확한 배치의 파악을 위해서는 내부공간의 이해가 先行되어야 하며 따라서 내부공간도 중요한 연구의 대상이 된다. 이러한 관점을 바탕으로 하여 이루어진 본 논문의 결론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高麗時代는 佛敎國家로서 寺刹을 영건하는 主體가 國家나 僧侶, 個人 등으로 다양했다. 僧侶나 個人에 의해 營建된 寺刹은 國家에 의해 영건된 寺刹에 비해 일반적으로 規模가 작고 영건기간이 길게 나타나는데 이것은 國家 영건의 寺刹에 비해 經濟的 능력이나 人力의 공급 등의 면에서 불리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僧侶에 의해 영건된 寺刹의 경우 高麗 前期보다 後期에 영건의 규모가 증가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 이유는 高麗 後期에 寺刹에 經濟力이 집중되어 營建能力이 확대되고 敎理나 信仰이 발달함에 따라 所要空間이 증가하여 보다 많은 건축 공간의 요구가 있었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이러한 영건방식의 차이에 의해 나타나는 공간적 특징을 추정하면 國家 營建의 寺刹은 國家 주도에 의한 計劃的인 영건이 가능하였을 것이며 따라서 각 單位 空間이 回廊 등에 의하여 분할되는 형식으로 구성될 수 있었을 것이다. 반면에 僧侶나 個人에 의해 영건된 寺刹은 計劃的인 營建이 곤란하며 형편에 따라 수시로 증·개축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계획상 자유로운 형식을 취한 것으로 보인다.
2) 高麗時代의 立地選定에는 道詵의 風水圖讖思想이 기준이 되었다. 그러나 당시의 文獻에 의하면 寺刹의 立地的 條件을 설명함에 있어서 고려 초기에는 대부분 주변 환경이 아름답거나 또는 修行이나 居住하기에 적합한 곳이라고 하였으며 후기에는 주로 風水地理的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것은 비록 고려시대 全期間에 걸쳐 風水圖讖思想이 유행했다고 할지라도 高麗 初期와 後期의 입지관에 차이가 있음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당시 營建된 寺刹의 實質的인 立地條件을 살펴보면 일부 平地도 나타나지만 대부분 낮은 山을 뒤로 하고 前面에는 넓은 들이 있고 山 前面의 완만한 傾斜地에 立地하며 경사지를 몇 개의 낮은 段으로 구성하여 각각의 건물을 배치하였다. 따라서 垈地의 位置가 도시와 촌락과 같은 地域上의 차이는 존재할지라도 建物을 配置하기 위한 地理的 조건은 평지와 큰 차이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立地條件에 의해서 後面을 제외한 三面이나 또는 前面이 開放感을 갖기 때문에 영역의 한정이나 폐쇄감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寺刹 全體를 둘러싸는 담이 필수적인 요소이기도 했다.
3) 高麗時代 配置의 특징으로는 構成要素의 증가와 변화를 들 수 있다. 사회의 발달과 변화뿐만 아니라 敎理가 發達하고 다양한 宗派가 형성됨에따라 信仰의 대상이 증가하며 이는 곧 配置의 構成要素가 증가하는 요인이 된다.
以前 時代에는 하나의 佛殿 안에 다양한 佛像이 봉안되었는데 이러한 佛像들이 독자적인 殿閣을 가지면서 佛殿의 分化가 이루어졌다. 이와 같이 配置의 構成要素가 증가하고 분화하면서 많은 建築的 空間이 필요하게 되었으며 이들 空間의 증가에 따라 이전과 같이 回廊이 金堂과 塔을 둘러싸는 획일적인 配置方式으로는 해결할 수 없게 되었으며 配置의 복잡성이 나타나게 된다.
高麗時代에는 回廊의 意味나 機能이 약화되거나 경제적인 문제 그리고 특히 佛殿의 分化나 새로운 구성요소가 증가하면서 寺刹 내에 많은 建築的 空間이 필요하게 됨에 따라 回廊이 변화하게 된다.
回廊의 변화는 金堂의 동서쪽에 위치하는 회랑이 儀禮空間이나 生活空間으로 이용되었는데 이에 반해 남쪽의 回廊은 부분적으로 개조되어 다른 용도로 사용되는 경우도 있지만 형태는 그대로 존속되면서 寺刹의 前面을 차단하여 외부에 대해 폐쇄적인 공간을 형성하게 된다. 이렇게 남쪽 回廊이 寺刹의 前面을 폐쇄하면서 일정한 질서를 부여하기 때문에 回廊의 안쪽은 다양한 구성요소를 자유롭게 배치할 수가 있었다.
4) 進入空間의 경우 現在 寺刹의 입구는 三門의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高麗時代에는 構成形式이 다르고 각 門의 명칭도 달리 나타난다. 그리고 天王門에 봉안되고 있는 四天王像은 원래 金堂에 봉안되었고 門에는 仁王像이 봉안되던 것이 佛殿이 분화되면서 四天王像이 門에 봉안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儀禮空間은 寺刹의 핵심적인 空間으로 여기에는 塔과 佛殿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佛敎가 도입되면서 원래 木塔이 영건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統一新羅時代 이후에 石塔으로 바뀌면서 木塔의 수가 줄어들기는 하지만 꾸준하게 영건되었다. 石塔과 木塔의 가장 큰 차이는 建築的 空間이 존재여부라고 하겠다.
塔의 目的이 舍利의 봉안에 있기 때문에 木塔에도 사리가 봉안되었지만 그 외에 佛像이 봉안되어 佛殿의 기능도 하였으며 上層部에는 佛經이 봉안되어 大藏殿의 기능도 있었다. 이러한 기능이 있었기 때문에 木塔의 內部空間은 이용될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었을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나라의 木塔은 上層으로 올라갈 수 없는 것으로 인식되어 왔다. 그러나 文獻에 의하면 조선시대 초까지만 해도 木塔의 상층부로 올라갔다는 내용이 기록된 것으로 보아 올라갔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따라서 現在 올라갈 수 있음을 보여주는 實證的인 유구가 없기 때문에 이에 대해서는 좀더 깊은 연구가 필요할 것으로 생각된다.
佛殿은 佛像을 봉안하는 곳이기 때문에 平面의 형식은 佛像의 봉안방식과 禮佛儀禮에 의해 결정된다. 古代의 佛殿은 高句麗의 경우 三金堂 形式이었지만 百濟나 新羅는 하나의 佛殿으로 이루어진 單佛殿 형식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當時에는 하나의 佛殿에 여러 종류의 佛像이 봉안되어 있었다.
高麗時代에는 敎理나 信仰 등이 발달하면서 원래 하나의 佛殿에 봉안되었던 여러 종류의 佛像들이 각각의 殿閣을 가지면서 分化하게 된다. 즉 佛殿에 봉안되었던 主尊佛 외의 佛像은 該當 殿閣에 각각 봉안되고 四天王像은 天王門에 봉안되었다. 그리고 王의 影幀은 별도의 影殿을 갖게되고 祖師의 像은 祖師堂에 봉안되게 되었다. 이렇게 佛殿이 분화되면서 佛殿의 규모는 축소된다.
佛殿 바닥은 일반적으로 塼으로 마감되었는데 여기에 왕골자리를 깔거나 床을 깔았으며 內部에서는 신발을 벗고 坐具를 사용하였다. 佛殿 內部의 出入에 관해서는 지금까지 佛殿이 성스러운 곳이기 때문에 출입할 수 없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였다. 그러나 文獻에는 일반 信徒들도 그 안에 들어가서 禮佛을 드렸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佛殿은 出入可能한 공간이었을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에 佛殿의 출입에 관해서는 再考되어야 할 것이다. 佛殿에서는 佛像을 도는 繞佛儀禮 즉 행도나 祈禱, 念佛儀禮 등이 행하여졌는데 佛殿의 내부공간은 이러한 儀禮에 적합하게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寺刹의 生活空間은 당시 일반 사회의 생활방식에 영향을 받게 된다. 그런데 지금까지 高麗時代에 귀족들의 起居樣式은 立式生活方式이 일반적이라고 하였는데 비록 床과 榻을 사용하였지만 그 위에서 생활하는 坐式生活이었다. 이러한 坐式生活을 바탕으로 온돌이 발달하게 되고 이에따라 麗末鮮初에 이르러서는 이전에는 별도의 건물에 각각 존재하던 온돌과 마루구조가 하나의 건물에 통합되면서 우리나라 생활공간의 특성을 형성하게 되었다. 寺刹의 생활공간인 寮舍에서도 이러한 영향을 받아 高僧들은 의자를 사용하기도 하였지만 일반적으로 床이나 榻을 사용하는 坐式生活이었다. 그리고 寮舍의 내부에는 여러 가지 벽화를 장식하여 마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