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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종대 전반기 시무개혁 세력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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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www.riss.kr/link?id=T15116392

    • 저자
    • 발행사항

      서울 : 서울대학교, 2019

    • 학위논문사항

      학위논문(박사) -- 서울대학교 대학원 , 국사학과 , 2019

    • 발행연도

      2019

    • 작성언어

      한국어

    • KDC

      911 판사항(6)

    • DDC

      951.9 판사항(23)

    • 발행국(도시)

      서울

    • 형태사항

      x, 344 p. : 도표 ; 26 cm

    • 일반주기명

      지도교수: 이상찬
      참고문헌: p. 327-338

    • 소장기관
      • 국립중앙도서관 국립중앙도서관 우편복사 서비스
      •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소장기관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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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kakao i 다국어 번역

    본 연구의 목적은 조선후기의 개혁적인 움직임이 고종대 전반기 개혁・개방・근대화 정책의 추진으로 이어지고 있었음을 살펴보고, 이러한 흐름이 조선 내부의 다양한 정치 세력의 연합과 견제의 복합적 움직임 속에서 이루어진 결과였으며, 그 중심에 시무개혁 세력이 있었다는 점을 밝히는 데 있다.
    지금까지 고종 시대는 전근대와 근대를 잇는 연결 지점으로 주목되어 왔다. 하지만 개항 전후의 역사를 단절적이고 서구식 근대 중심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은 아직도 완전히 극복되지 못하였다. 19세기에 대해 고종 시대 이전은 ‘세도정치기’로, 그 이후는 ‘수구’와 ‘개화’로 구분하는 틀이 오랜 기간 유지되었던 것이다. 때문에 19세기 전반부터 후반으로 연결되는 정치세력의 계보적, 사상적 특성과 그들이 추진한 정책의 역사적 기반과 변화 과정이 명확히 규명되지 못하였다. 이에 본 연구에서는 19세기 전반부터 이어지는 시무개혁 세력의 성장과 정치적 행보,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가치, 그리고 시대의 흐름에 따른 개혁 정책의 계승과 변화, 발전상을 파악해보고자 하였다.
    세도정치기는 흔히 공공정치의 암흑기로 인식되지만 당대에도 여전히 공동체의 위기를 인식하고 현실을 개혁하고자 하는 세력의 문제의식은 존재하고 있었다. 당대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세력은 조선후기 정조대 북학의 맥을 잇는 개혁적 성향의 관료집단, 즉 시무개혁 세력이었다. 이들은 국왕의 독단적 정국 운영에는 동의하지 않았지만 개혁적 왕조국가라는 정조대의 이상적 국가상을 추구하였다. 따라서 개혁군주가 중심이 되는 안정적인 국가 운영의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순조, 효명세자, 헌종과 같은 19세기 초반의 국왕들과 보조를 맞추면서 철종대 이전까지 성장과 좌절을 거듭하며 꾸준히 역량을 축적하고 있었다. 이들은 철종대 농민항쟁으로 폭발한 현실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이들은 국가와 민의 관계를 신뢰에 기반을 둔 공동체로 인식하며, 환곡 등 기존 체제의 폐단을 보완하고 지배층의 책임을 강조하면서 개혁 방안을 마련하였다. 이들이 가지고 있었던 현실에 대한 이해는 사림정치의 이상을 추구하며 발전한 조선의 전통적 정치 문화와 사상의 범위를 뛰어 넘는 것은 아니었지만 당대 위기 상황을 해결하는 현실적인 역할을 하고 있었다.
    시무개혁 세력은 농민항쟁의 역동적인 힘을 동력으로 한 정권교체 국면에서 핵심 세력으로 역할하면서 정계의 전면에 등장하였다. 박규수를 중심으로 하는 시무개혁 세력은 정원용을 중심으로 하는 기존 집권관료 세력, 국왕권이라는 강력한 존재를 보유하고 있었던 대원군과 연합하여 세도정권을 종식시키고 정권교체를 이루어낼 수 있었다. 대원군은 조선 사회의 관성을 벗어난 새로운 가능성과 유연성을 지니고 있었던 인물이었지만, 기존 집권관료 세력과 시무개혁 세력은 조선의 전통적 정치문화를 계승한 보수적인 세력이었기 때문에, 고종 즉위 직후 집권세력의 지향은 정조대까지 진전을 보이다가 세도정치기에 멈추었거나 무너져버린 정치적 이상을 바로 잡아 국가 바로세우기에 매진하는 것이었다. 이에 그 대표적인 정책으로 경복궁 중건사업을 추진하였으며, 이 사업은 단순히 대원군의 왕권강화책이 아니라 당대의 집권세력이 정조대를 계승하여 19세기 이전 시기동안 이어져온 왕권 중심의 국정운영 노력을 계승하는 상징적인 사업으로서 의미를 지닌다.
    대원군의 집권은 기존 정치세력들과 연합하여 이루어진 것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대원군은 개혁노선을 이탈하고 단독 권력의 강화를 추구하였다. 당시 천주교 문제는 폭발적인 사회 갈등을 유발시킬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진 매우 민감한 주제였고, 기존의 집권층은 이에 대해 조심스럽고 신중한 입장을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대원군은 단독 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방편으로 천주교 박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하였다. 대원군의 천주교 박해는 척사, 척화라는 강력한 명분을 통해 유림세력과 민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대규모 박해를 통한 공포 정치의 확산과 민생의 동요는 결국 대원군을 민간의 여론과 멀어지게 만드는 중요한 이유가 되었다. 때문에 대원군이 본격적으로 단독 권력 강화를 시도했던 시기에 중앙 정계에서 물러나 있었던 시무개혁 세력과 기존 관료집단 세력은 다시 연합하여 고종의 친정을 이루어냈다.
    친정 주도 세력은 대원군의 강경한 척화론이 불러올 수 있는 전쟁의 위험을 우려하여 일본 서계의 접수를 주장하고, 일본에 대한 개방정책을 추진하였다. 이들의 최우선 목표는 무력충돌의 방지를 통한 민생의 안정이었다. 조일수호조규 체결 과정에서 보여주는 조선 정부의 대응은 평화 관계 유지라는 기본 기조 위에 일본의 침략 시도에는 단호하게 대처한다는 강력한 대응책이 함께하고 있는 것이었으며, 이러한 대처 방안에 따른 평화적 결말을 이끌어냄으로써 고종의 친정을 이끌었던 조선의 집권층의 목표는 달성될 수 있었다.
    고종의 친정까지 정국의 흐름을 주도했던 원로 세대는 개항 이후 자연스럽게 정계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또한 국왕 고종도 친정이라는 새로운 정국을 맞이하여 기존 정치 세력들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본인이 주도하는 독자적인 정치 구도의 구축을 시도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과거 제도를 통해 정계에 입문하여 국왕의 측근에서 청요직, 암행어사직 등을 수행하며 정계에 진출한 신진 세력이 등장하였다. 이들은 1870년대 이후 정부 정책을 이끌어 간 실무형 관료집단이 되었으며, 또한 시무를 고민하고 추진해나가고자 했던 이전 세대 시무개혁 세력의 명맥을 잇고 있기도 하였다. 이들 대부분은 암행어사와 조사시찰단 임무를 동시에 수행하였기 때문에, 대외 업무인 조사시찰단 직무에서도 ‘민생’과 ‘자주’라는 국내적 문제를 최우선으로 생각하여 신중하고 보수적인 관점에서 통상 문제를 바라보고 해결하고자 하였다. 또한 일본이 서구식 근대화를 무비판적으로 습득하고 있었던 면을 경계하고, 조선의 입장에서 문화라는 스스로의 강점을 기반으로 하여 주체적으로 ‘부국강병’의 의미를 만들어 나갔다. 이들은 이전 세대의 전통적 개혁 기조를 계승하면서도 19세기 후반 국내외의 변화한 현실을 적용한 새로운 모습의 개혁방안을 점진적으로 발전시켰다. 이들의 현실개혁 방안은 1881년 조사시찰단의 개혁 방안을 거쳐 1882년의 묄렌도르프 고빙을 통한 근대화정책의 시행 및 감생청의 개혁기조 천명으로 연결되었다. 또한 이들의 실무적 개혁방안은 당대 권력의 핵심에서 정책을 결정하는 위치에 있었던 여흥민씨, 풍양조씨 세력의 정책 방향의 기반이 되었다.
    시무개혁 세력의 지향과 직무 수행은 19세기 초반부터 고종대까지 이어지며 조선후기 민본의식의 기본 기조를 계승하면서 개항 전후 변화한 대내, 대외적 상황에 대응하여 발전해 나아갔다. 이들은 다양한 세력과 협력과 견제를 거듭하면서 19세기 조선 사회의 점진적이고 실질적인 개혁을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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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연구의 목적은 조선후기의 개혁적인 움직임이 고종대 전반기 개혁・개방・근대화 정책의 추진으로 이어지고 있었음을 살펴보고, 이러한 흐름이 조선 내부의 다양한 정치 세력의 연합과 ...

    본 연구의 목적은 조선후기의 개혁적인 움직임이 고종대 전반기 개혁・개방・근대화 정책의 추진으로 이어지고 있었음을 살펴보고, 이러한 흐름이 조선 내부의 다양한 정치 세력의 연합과 견제의 복합적 움직임 속에서 이루어진 결과였으며, 그 중심에 시무개혁 세력이 있었다는 점을 밝히는 데 있다.
    지금까지 고종 시대는 전근대와 근대를 잇는 연결 지점으로 주목되어 왔다. 하지만 개항 전후의 역사를 단절적이고 서구식 근대 중심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은 아직도 완전히 극복되지 못하였다. 19세기에 대해 고종 시대 이전은 ‘세도정치기’로, 그 이후는 ‘수구’와 ‘개화’로 구분하는 틀이 오랜 기간 유지되었던 것이다. 때문에 19세기 전반부터 후반으로 연결되는 정치세력의 계보적, 사상적 특성과 그들이 추진한 정책의 역사적 기반과 변화 과정이 명확히 규명되지 못하였다. 이에 본 연구에서는 19세기 전반부터 이어지는 시무개혁 세력의 성장과 정치적 행보,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가치, 그리고 시대의 흐름에 따른 개혁 정책의 계승과 변화, 발전상을 파악해보고자 하였다.
    세도정치기는 흔히 공공정치의 암흑기로 인식되지만 당대에도 여전히 공동체의 위기를 인식하고 현실을 개혁하고자 하는 세력의 문제의식은 존재하고 있었다. 당대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세력은 조선후기 정조대 북학의 맥을 잇는 개혁적 성향의 관료집단, 즉 시무개혁 세력이었다. 이들은 국왕의 독단적 정국 운영에는 동의하지 않았지만 개혁적 왕조국가라는 정조대의 이상적 국가상을 추구하였다. 따라서 개혁군주가 중심이 되는 안정적인 국가 운영의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순조, 효명세자, 헌종과 같은 19세기 초반의 국왕들과 보조를 맞추면서 철종대 이전까지 성장과 좌절을 거듭하며 꾸준히 역량을 축적하고 있었다. 이들은 철종대 농민항쟁으로 폭발한 현실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이들은 국가와 민의 관계를 신뢰에 기반을 둔 공동체로 인식하며, 환곡 등 기존 체제의 폐단을 보완하고 지배층의 책임을 강조하면서 개혁 방안을 마련하였다. 이들이 가지고 있었던 현실에 대한 이해는 사림정치의 이상을 추구하며 발전한 조선의 전통적 정치 문화와 사상의 범위를 뛰어 넘는 것은 아니었지만 당대 위기 상황을 해결하는 현실적인 역할을 하고 있었다.
    시무개혁 세력은 농민항쟁의 역동적인 힘을 동력으로 한 정권교체 국면에서 핵심 세력으로 역할하면서 정계의 전면에 등장하였다. 박규수를 중심으로 하는 시무개혁 세력은 정원용을 중심으로 하는 기존 집권관료 세력, 국왕권이라는 강력한 존재를 보유하고 있었던 대원군과 연합하여 세도정권을 종식시키고 정권교체를 이루어낼 수 있었다. 대원군은 조선 사회의 관성을 벗어난 새로운 가능성과 유연성을 지니고 있었던 인물이었지만, 기존 집권관료 세력과 시무개혁 세력은 조선의 전통적 정치문화를 계승한 보수적인 세력이었기 때문에, 고종 즉위 직후 집권세력의 지향은 정조대까지 진전을 보이다가 세도정치기에 멈추었거나 무너져버린 정치적 이상을 바로 잡아 국가 바로세우기에 매진하는 것이었다. 이에 그 대표적인 정책으로 경복궁 중건사업을 추진하였으며, 이 사업은 단순히 대원군의 왕권강화책이 아니라 당대의 집권세력이 정조대를 계승하여 19세기 이전 시기동안 이어져온 왕권 중심의 국정운영 노력을 계승하는 상징적인 사업으로서 의미를 지닌다.
    대원군의 집권은 기존 정치세력들과 연합하여 이루어진 것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대원군은 개혁노선을 이탈하고 단독 권력의 강화를 추구하였다. 당시 천주교 문제는 폭발적인 사회 갈등을 유발시킬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진 매우 민감한 주제였고, 기존의 집권층은 이에 대해 조심스럽고 신중한 입장을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대원군은 단독 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방편으로 천주교 박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하였다. 대원군의 천주교 박해는 척사, 척화라는 강력한 명분을 통해 유림세력과 민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대규모 박해를 통한 공포 정치의 확산과 민생의 동요는 결국 대원군을 민간의 여론과 멀어지게 만드는 중요한 이유가 되었다. 때문에 대원군이 본격적으로 단독 권력 강화를 시도했던 시기에 중앙 정계에서 물러나 있었던 시무개혁 세력과 기존 관료집단 세력은 다시 연합하여 고종의 친정을 이루어냈다.
    친정 주도 세력은 대원군의 강경한 척화론이 불러올 수 있는 전쟁의 위험을 우려하여 일본 서계의 접수를 주장하고, 일본에 대한 개방정책을 추진하였다. 이들의 최우선 목표는 무력충돌의 방지를 통한 민생의 안정이었다. 조일수호조규 체결 과정에서 보여주는 조선 정부의 대응은 평화 관계 유지라는 기본 기조 위에 일본의 침략 시도에는 단호하게 대처한다는 강력한 대응책이 함께하고 있는 것이었으며, 이러한 대처 방안에 따른 평화적 결말을 이끌어냄으로써 고종의 친정을 이끌었던 조선의 집권층의 목표는 달성될 수 있었다.
    고종의 친정까지 정국의 흐름을 주도했던 원로 세대는 개항 이후 자연스럽게 정계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또한 국왕 고종도 친정이라는 새로운 정국을 맞이하여 기존 정치 세력들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본인이 주도하는 독자적인 정치 구도의 구축을 시도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과거 제도를 통해 정계에 입문하여 국왕의 측근에서 청요직, 암행어사직 등을 수행하며 정계에 진출한 신진 세력이 등장하였다. 이들은 1870년대 이후 정부 정책을 이끌어 간 실무형 관료집단이 되었으며, 또한 시무를 고민하고 추진해나가고자 했던 이전 세대 시무개혁 세력의 명맥을 잇고 있기도 하였다. 이들 대부분은 암행어사와 조사시찰단 임무를 동시에 수행하였기 때문에, 대외 업무인 조사시찰단 직무에서도 ‘민생’과 ‘자주’라는 국내적 문제를 최우선으로 생각하여 신중하고 보수적인 관점에서 통상 문제를 바라보고 해결하고자 하였다. 또한 일본이 서구식 근대화를 무비판적으로 습득하고 있었던 면을 경계하고, 조선의 입장에서 문화라는 스스로의 강점을 기반으로 하여 주체적으로 ‘부국강병’의 의미를 만들어 나갔다. 이들은 이전 세대의 전통적 개혁 기조를 계승하면서도 19세기 후반 국내외의 변화한 현실을 적용한 새로운 모습의 개혁방안을 점진적으로 발전시켰다. 이들의 현실개혁 방안은 1881년 조사시찰단의 개혁 방안을 거쳐 1882년의 묄렌도르프 고빙을 통한 근대화정책의 시행 및 감생청의 개혁기조 천명으로 연결되었다. 또한 이들의 실무적 개혁방안은 당대 권력의 핵심에서 정책을 결정하는 위치에 있었던 여흥민씨, 풍양조씨 세력의 정책 방향의 기반이 되었다.
    시무개혁 세력의 지향과 직무 수행은 19세기 초반부터 고종대까지 이어지며 조선후기 민본의식의 기본 기조를 계승하면서 개항 전후 변화한 대내, 대외적 상황에 대응하여 발전해 나아갔다. 이들은 다양한 세력과 협력과 견제를 거듭하면서 19세기 조선 사회의 점진적이고 실질적인 개혁을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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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kakao i 다국어 번역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1) to examine how the reform movements in the late Joseon Dynasty led to the implementation of the reformative, open-door, and modern policies in the early years of Gojong’s reign; (2) to discover that these trends were the results of complex movements within alliance and check of various political forces inside Joseon; (3) also to discover that the contemporary affair reform (Shimugaehyeok) force was in the center of the movements.
    To date, King Gojong's reign has been noted as a link between the premodern and modern times. However, the disconnected and Western-oriented, modern-era-centered view on before and after port opening in Joseon history has not been overcome yet. For the 19th century, the division between before and after Gojong reign that sees before Gojong reign as ‘the era of clan politics,’ and after as ‘the period of the reactionaries and liberals’ has been long-standing. As a result, the hierarchical and ideological characteristics of political power have not been clarified and so do the historical basis and transition of policies that they pushed ahead. This study aims to identify the contemporary affair reform force’s growth and political movements continuing from the early 19th century, their values, and the success, change, and development of reform policies within the flow of the times.
    Although the era of clan politics is often seen as a dark period of public politics, there were still some forces that recognized the crisis of the community and tried to reform the reality. Those who were aware of the problems were reformative bureaucrats that carried on the legacy of Northern Studies from Jeongjo period, the contemporary affair reform force. They did not agree with the king's dogmatic management of state affairs but did seek the ideal image of the nation from Jeongjo’s reign as a reformist monarchy. Thus, to establish the foundation of stable management of state which is ruled by the reformist monarch, they steadily accumulated capacity before Cheoljong’s reign, developing themselves and sometimes feeling frustrated, by keeping pace with the kings of the early 19th century such as Sunjo, Prince Hyomyeong, and Heonjong. They played a key role in solving the real-life problems that were erupted from the farmers uprising in Cheoljong’s reign. They appreciated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state and the people as a trust-based community and presented reform plans by correcting the evil of existing system such as Government Grain Loan System and emphasizing the responsibility of the ruling classes. Their understanding of the reality was not beyond the traditional political culture and ideology of Joseon which were developed pursuing the ideal of the Backwoods Literati Politics, but they were playing a realistic role in solving the current crisis.
    The contemporary affair reform force emerged at the forefront of the political community, playing a key force in the situation of the change of government powered by dynamic energy from the farmers uprising. With Park Gyu-su as the center figure, the contemporary affair reform force was able to end the power of the nation's clan political party and achieve the change of government by forming a coalition with Daewongun who had the strongest figure of the royal authority, and also with existing ruling bureaucracy group where Jeong Wonyong was in the center. Daewongun had new possibilities and flexibility beyond the institutional inertia of Joseon society, but since the existing ruling bureaucracy group and the contemporary affair reform force were conservative forces that succeeded the traditional political culture of Joseon, the aim of the ruling party right after King Gojong's appointment was to seek political ideals that had stopped or collapsed during the era of clan politics, which had made progress only until Jeongjo’s reign. The representative state undertaking was the repair work for Gyeongbok Palace; it is meaningful not just as a means to strengthen royal authority but as a symbolic project to succeed the royal-authority-oriented government administration that was carried over during the pre-19th century, ruling power of the time succeeding Jeongjo’s reign.
    Even though Daewongun's reign was achieved by forming a coalition with existing political forces, over time, Daewongun sought to strengthen his independent power, breaking away from reform line. At that time, the Catholic issue was a very sensitive subject with the potential to cause explosive social conflict, and the existing ruling class took a cautious and prudent position toward this issue. However, Daewongun chose the extreme method, Catholic persecution, as a way to strengthen his independent power. Such method received support from Confucian Literati and the people due to its strong legitimacy of the rejection of negotiations and the expulsion of Catholicism; however, the spread of fear politics and the agitation of people's livelihood caused by massive persecution became important factors for Daewongun to keep out of public opinion. As a result, the contemporary affair reform force and the existing ruling bureaucracy groups, who had been stepping down from the central politics when Daewongun tried to strengthen his independent power, reunited to achieve Gojong's direct rule.
    The leading force for direct rule concerned about the danger of the war that Daewongun's firm stance toward the rejection of negotiations could lead to; therefore, they asserted the acceptance of the letter from Japan and carried forward an open-door policy for Japan. Their first goal was to stabilize the people's livelihood by preventing armed conflict. The Joseon government's response to the signing of the Korea-Japan Treaty was based on the basic principle of maintaining peaceful relationship, along with a strong countermeasure against invasions. The goal of Joseon's ruling elites who led King Gojong's direct rule could be achieved by drawing a peaceful conclusion according to such coping plans.
    The elder generation who led the flow of political situations until Gojong's direct rule naturally stepped down from politics after the opening of the port. King Gojong also attempted to establish his own independent political structure in the new political phase, freed from the influence of the existing political forces. In this process, new forces emerged that entered politics through the civil and military service examination system and performed Prestigious and Reputable Officer or Royal Secret Envoy positions close to the king. They became practical bureaucrats who led government policies from 1870s, and also remained in existence of previous generation’s contemporary affair reform force who agonized about contemporary affairs and tried to push forward them. Since most of them carried out both of Royal Secret Envoy and Inspection mission, they considered the domestic problems of 'people' and ‘autonomy’ as the top priority even in foreign affairs such as Mission of Inspection tasks; and this led them to look into and solve trade issues from a cautious and conservative perspective. They were also wary of Japan's unquestioning acceptance of Western modernization, and created the meaning of "national prosperity and military power" independently on the basis of cultural strengths from the perspective of Joseon. They continued to gradually develop a new style of reform that applied the changing realities at home and abroad in the late 19th century, while succeeding the traditional reformist stance of the previous generation. Their practical reform plans passed on to Mission of Inspection’s reform plans in 1881, and it led to the enforcement of modernization policies through the engagement of Möllendorff in 1882 and to Office Reduction Board’s clarification of the basis of reformation. In addition, their practical reform plans provided the basis for the policy direction of Yeoheung Min family and Pungyang Cho family, who were in the position to decide policies in the core of the power at that time.
    The aim and performance of the contemporary affair reform force continued from the early 19th century to Gojong’s reign, succeeding the basic stance of people-based politics and developing in response to the changing internal and external situations before and after the opening of the Joseon Dynasty. They led a gradual and practical reform of Joseon society in the 19th century, working together with various forces or keeping each other in che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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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1) to examine how the reform movements in the late Joseon Dynasty led to the implementation of the reformative, open-door, and modern policies in the early years of Gojong’s reign; (2) to discover that these trends wer...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1) to examine how the reform movements in the late Joseon Dynasty led to the implementation of the reformative, open-door, and modern policies in the early years of Gojong’s reign; (2) to discover that these trends were the results of complex movements within alliance and check of various political forces inside Joseon; (3) also to discover that the contemporary affair reform (Shimugaehyeok) force was in the center of the movements.
    To date, King Gojong's reign has been noted as a link between the premodern and modern times. However, the disconnected and Western-oriented, modern-era-centered view on before and after port opening in Joseon history has not been overcome yet. For the 19th century, the division between before and after Gojong reign that sees before Gojong reign as ‘the era of clan politics,’ and after as ‘the period of the reactionaries and liberals’ has been long-standing. As a result, the hierarchical and ideological characteristics of political power have not been clarified and so do the historical basis and transition of policies that they pushed ahead. This study aims to identify the contemporary affair reform force’s growth and political movements continuing from the early 19th century, their values, and the success, change, and development of reform policies within the flow of the times.
    Although the era of clan politics is often seen as a dark period of public politics, there were still some forces that recognized the crisis of the community and tried to reform the reality. Those who were aware of the problems were reformative bureaucrats that carried on the legacy of Northern Studies from Jeongjo period, the contemporary affair reform force. They did not agree with the king's dogmatic management of state affairs but did seek the ideal image of the nation from Jeongjo’s reign as a reformist monarchy. Thus, to establish the foundation of stable management of state which is ruled by the reformist monarch, they steadily accumulated capacity before Cheoljong’s reign, developing themselves and sometimes feeling frustrated, by keeping pace with the kings of the early 19th century such as Sunjo, Prince Hyomyeong, and Heonjong. They played a key role in solving the real-life problems that were erupted from the farmers uprising in Cheoljong’s reign. They appreciated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state and the people as a trust-based community and presented reform plans by correcting the evil of existing system such as Government Grain Loan System and emphasizing the responsibility of the ruling classes. Their understanding of the reality was not beyond the traditional political culture and ideology of Joseon which were developed pursuing the ideal of the Backwoods Literati Politics, but they were playing a realistic role in solving the current crisis.
    The contemporary affair reform force emerged at the forefront of the political community, playing a key force in the situation of the change of government powered by dynamic energy from the farmers uprising. With Park Gyu-su as the center figure, the contemporary affair reform force was able to end the power of the nation's clan political party and achieve the change of government by forming a coalition with Daewongun who had the strongest figure of the royal authority, and also with existing ruling bureaucracy group where Jeong Wonyong was in the center. Daewongun had new possibilities and flexibility beyond the institutional inertia of Joseon society, but since the existing ruling bureaucracy group and the contemporary affair reform force were conservative forces that succeeded the traditional political culture of Joseon, the aim of the ruling party right after King Gojong's appointment was to seek political ideals that had stopped or collapsed during the era of clan politics, which had made progress only until Jeongjo’s reign. The representative state undertaking was the repair work for Gyeongbok Palace; it is meaningful not just as a means to strengthen royal authority but as a symbolic project to succeed the royal-authority-oriented government administration that was carried over during the pre-19th century, ruling power of the time succeeding Jeongjo’s reign.
    Even though Daewongun's reign was achieved by forming a coalition with existing political forces, over time, Daewongun sought to strengthen his independent power, breaking away from reform line. At that time, the Catholic issue was a very sensitive subject with the potential to cause explosive social conflict, and the existing ruling class took a cautious and prudent position toward this issue. However, Daewongun chose the extreme method, Catholic persecution, as a way to strengthen his independent power. Such method received support from Confucian Literati and the people due to its strong legitimacy of the rejection of negotiations and the expulsion of Catholicism; however, the spread of fear politics and the agitation of people's livelihood caused by massive persecution became important factors for Daewongun to keep out of public opinion. As a result, the contemporary affair reform force and the existing ruling bureaucracy groups, who had been stepping down from the central politics when Daewongun tried to strengthen his independent power, reunited to achieve Gojong's direct rule.
    The leading force for direct rule concerned about the danger of the war that Daewongun's firm stance toward the rejection of negotiations could lead to; therefore, they asserted the acceptance of the letter from Japan and carried forward an open-door policy for Japan. Their first goal was to stabilize the people's livelihood by preventing armed conflict. The Joseon government's response to the signing of the Korea-Japan Treaty was based on the basic principle of maintaining peaceful relationship, along with a strong countermeasure against invasions. The goal of Joseon's ruling elites who led King Gojong's direct rule could be achieved by drawing a peaceful conclusion according to such coping plans.
    The elder generation who led the flow of political situations until Gojong's direct rule naturally stepped down from politics after the opening of the port. King Gojong also attempted to establish his own independent political structure in the new political phase, freed from the influence of the existing political forces. In this process, new forces emerged that entered politics through the civil and military service examination system and performed Prestigious and Reputable Officer or Royal Secret Envoy positions close to the king. They became practical bureaucrats who led government policies from 1870s, and also remained in existence of previous generation’s contemporary affair reform force who agonized about contemporary affairs and tried to push forward them. Since most of them carried out both of Royal Secret Envoy and Inspection mission, they considered the domestic problems of 'people' and ‘autonomy’ as the top priority even in foreign affairs such as Mission of Inspection tasks; and this led them to look into and solve trade issues from a cautious and conservative perspective. They were also wary of Japan's unquestioning acceptance of Western modernization, and created the meaning of "national prosperity and military power" independently on the basis of cultural strengths from the perspective of Joseon. They continued to gradually develop a new style of reform that applied the changing realities at home and abroad in the late 19th century, while succeeding the traditional reformist stance of the previous generation. Their practical reform plans passed on to Mission of Inspection’s reform plans in 1881, and it led to the enforcement of modernization policies through the engagement of Möllendorff in 1882 and to Office Reduction Board’s clarification of the basis of reformation. In addition, their practical reform plans provided the basis for the policy direction of Yeoheung Min family and Pungyang Cho family, who were in the position to decide policies in the core of the power at that time.
    The aim and performance of the contemporary affair reform force continued from the early 19th century to Gojong’s reign, succeeding the basic stance of people-based politics and developing in response to the changing internal and external situations before and after the opening of the Joseon Dynasty. They led a gradual and practical reform of Joseon society in the 19th century, working together with various forces or keeping each other in che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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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차 (Table of Contents)

    • 서론 1
    • 1. 문제 제기 1
    • 2. 연구 동향 7
    • 3. 논문의 구성과 이용사료 11
    • 서론 1
    • 1. 문제 제기 1
    • 2. 연구 동향 7
    • 3. 논문의 구성과 이용사료 11
    • Ⅰ. 세도정치기 時務改革 세력의 동향과 興宣大院君의 집권 18
    • 1. 19세기 전반 시무개혁 세력의 동향과 현실인식 18
    • 1) 순조대〜헌종대 北學派 계열 시무개혁 세력의 형성 18
    • (1) 순조‧익종대 국왕의 정국주도권 확보 시도와 시무개혁 세력의
    • 등장 18
    • (2) 헌종대 국왕권 강화 노력과 시무개혁 세력의 성장 25
    • 2) 철종대 시무개혁 세력의 시무책과 현실인식 42
    • (1) 철종대 시무개혁 세력의 지방관 경력을 통한 사회모순의 대면 42
    • (2) 경상좌도 암행어사 朴珪壽의 보수적 상황인식 44
    • 2. 1862년 농민항쟁의 발발과 보수 집권층의 현실개혁 방안 52
    • 1) 농민항쟁의 발발과 현실개혁 요구 52
    • (1) 진주 봉기에 대한 철종대 집권세력의 인식과 대응 52
    • (2) 按覈使 朴珪壽의 파견을 통한 대응책 마련 58
    • 2) 집권세력의 개혁방안 마련과 시무개혁 세력의 현실 개혁안 64
    • (1) 시무개혁 세력의 현실 개혁안 특징 : 應旨三政疏를 중심으로 64
    • (2) 집권세력(豐壤趙氏, 安東金氏, 鄭元容‧趙斗淳 등 신료집단)의
    • 대응 양상 77
    • 3. 대원군의 정권교체와 집권세력의 성격 90
    • 1) 대원군 집권 핵심 세력의 성격 90
    • (1) 기존 집권세력과 시무개혁 세력의 연합 90
    • (2) 국왕권을 상징하는 대원군의 복합적 이미지 97
    • 2) 고종 즉위 직후 집권세력의 지향 104
    • (1) 法善圖와 人心道心圖의 제작 104
    • (2) 경복궁 중건사업과 집권세력의 지향점 107
    • Ⅱ. 고종 친정 과정과 친정 주도세력의 개방 정책 116
    • 1. 대원군의 개혁노선 이탈과 실각 116
    • 1) 대원군의 단독권력 확보를 위한 시도 116
    • (1) 丙寅邪獄 이전 집권층의 천주교 대응 양상 116
    • (2) 대원군의 척사론 주창과 여론의 지지기반 확보 125
    • 2) 개혁노선 이탈과 척사정책에 대한 관료집단의 부정적 여론 137
    • 2. 고종의 친정과 핵심 주도세력의 성격 143
    • 1) 반대원군 세력의 연합을 통한 고종의 친정 143
    • (1) 병인사옥 이후 정권교체 세력별 동향 143
    • (2) 반대원군 세력의 연합과 국왕의 친정 선포 147
    • 2) 친정 주도세력의 구성과 성격 161
    • (1) 왕실 친인척 세력(李最應, 驪興閔氏, 豐壤趙氏) 161
    • (2) 세도정치기 집권관료 세력(李裕元) 169
    • (3) 시무개혁 세력(朴珪壽) 178
    • 3. 친정 주도세력의 지향과 개방 정책의 추진 184
    • 1) 일본과 국교재개를 둘러싼 친정 주도세력의 입장 184
    • (1) 친정 세력의 일본서계 접수 논의 184
    • (2) 박규수의 대원군 설득 작업을 통한 친정 세력의 입장 189
    • 2) 조일수호조규 체결과 개국 정책의 목표 193
    • (1) 무력충돌 방지책을 중심으로 한 교섭의 추진 193
    • (2) 실무형 무관 申櫶의 조약 교섭 과정과 목표 199
    • Ⅲ. 개항 이후 정책 주도세력의 변화와 근대화 정책의 추진 209
    • 1. 친정 이후 신진 관료집단의 형성과 성장 209
    • 1) 신진 관료집단의 계열별 형성 209
    • (1) 武衛所 출신 인물군의 등장 209
    • (2) 驪興閔氏와 豐壤趙氏의 연합 214
    • (3) 실무적 신진 관료집단의 등장 215
    • 2) 암행어사 출신 실무형 관료집단의 형성과 성장 221
    • 2. 실무 관료집단의 대외업무 담당과 근대화 정책의 방향 238
    • 1) 실무 관료집단의 대외적 업무 담당 238
    • (1) 統理機務衙門의 인적 구성과 의미 238
    • (2) 朝士視察團 파견과 암행어사 직무의 변용 248
    • 2) 개항 이후 조선정부의 ‘富國强兵’ 개념 설정과 근대화정책의 지향 252
    • (1) 일본의 ‘부국강병’ 방책 강요와 조선의 지향 252
    • (2) 근대화정책 실무 관료의 ‘부국강병’ 개념 계승 263
    • 3. 개항 이후 근대화정책의 단계별 특징과 발전 양상 268
    • 1) 전통적 개혁방안을 기반으로 한 재정・통상책의 모색 268
    • (1) 1877년 암행어사의 조세제도 개혁방안 268
    • (2) 1881년 조사시찰단의 재정정비 방안과 통상‧산업진흥책 모색 279
    • 2) 산업 진흥을 통한 재정 확보와 개혁의 추진 303
    • (1) 1882년 減省廳의 개혁기조 303
    • (2) 신진 관료집단의 계열 간 공조와 근대화정책의 추진 313
    • 결론 319
    • 참고문헌 327
    • Abstract 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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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Refer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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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7. 〈화양서원과 만동묘에 대한 일연구〉《역사와 담론》 18, 전용우, 호서사학회, , 1990

    108. 〈19세기 정조의 잔영과 그에 대한 기억〉《역사비평》 116, 노대환, 역사비평사, , 2016

    109. 〈開港期修信使行에 관한 一硏究〉《한일관계사연구》 10, 하우봉, 한일관계사학회, , 1999

    110. 〈철종조의 응지삼정소와 삼정이정책〉《한국사연구》 10, 김용섭, 한국사연구회, , 1974

    111. 〈통리기무아문 설치의 경위에 대하여〉《역사학보》17 18, 전해종, 역사학회, , 1962

    112. 〈18, 19세기 전결세의 수취제도와 그 운영〉《한국사 론》22, 정선남,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 1990

    113. 〈1881년 조사시찰단의 활동에 관한 연구〉《국사관논 총》66, 허동현, 국사편찬위원회, , 1995

    114. 《橘山李裕元의 學問性向과 類書・筆記編纂에 관한 硏 究》, 권진옥,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박사학위 논문, , 2015

    115. 〈1808년 『만기요람』의 편찬과 그 의미〉《역사와현 실》107, 문광균, 한국역사연구회, , 2018

    116. 〈1862년 삼정이정청의 구성과 삼정이정책〉《한국사학 보》49, 김용섭, 고려사학회, , 2012

    117. 〈1862년 삼정이정청의 구성과 삼정이정책〉《한국사학 보》49, 송찬섭, 고려사학회, , 2012

    118. 〈갑신정변 이전의 국내 정치세력의 동향〉《국사관논 총》93, 연갑수, 국사편찬위원회, , 2000

    119. 〈김수신사일행의 도일과 그 의의〉《근대조선외교사연 구》, 신국주, 탐구당, , 1965

    120. 〈총론 : 조선후기 중앙 군문의 재정운영〉《역사와현 실》102, 송기중, 한국역사연구회, , 2016

    121. 〈조선후기 금위영의 재정운영과 그 성격〉《역사와현 실》102, 유현재, 한국역사연구회, , 2016

    122. 〈1862년 농민항쟁기 파견관리 이삼현의 활동〉《역사교 육》109, 송찬섭, 역사교육연구회, , 2009

    123. 〈19세기 전반 궁방전(宮房田) 운영과 의미〉《역사와현 실》107, 엄기석, 한국역사연구회, , 2018

    124. 〈고종 즉위 초기 군주관 형성과 그 내용〉《이화사학연 구》42, 김성혜, 이화사학연구소, , 2011

    125. 〈조일수호조규는 포함외교의 산물이었는가〉《역사비 평》114, 김종학, 역사비펑사, , 2016

    126. 〈19세기 중반 남병철의 학문과 현실 인식〉《이화사학연 구》40, 노대환, 이화사학연구소, , 2010

    127. 《瓛齋集》,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2017, 《환재 집》, 박규수, 성균관대학교 출판부), , 2016

    128. 〈효명세자, 헌종대 궁궐 영건의 정치사적 의의〉《한국 사론》54, 이민아,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 2008

    129. 〈19세기 ‘국제법’의 성격과 조일수호조규(1876) 《역사비 평》114, 안종철, 역사비평사, , 2016

    130. 〈金奎植의 부친 金鏞元의 가계와 생애〉《한국근현대사 연구》73, 정병준, 한국근현대사학회, , 2015

    131. 〈고종대 만동묘와 서원 훼철 논의의 전개〉《교육사상연 구》30-1, 김대식, 한국교육사상연구회, , 2016

    132. 〈김윤식의 외교론에 대한 국제법적 검토〉《한국인물사 연구》24, 유바다, 한국인물사연구회, , 2015

    133. 〈19세기 神貞王后趙氏의 생애와 垂簾聽政〉《한국인물 사연구》10, 임혜련, 한국인물사연구회, , 2008

    134. 〈대원군집정기 인사정책과 지배세력의 성격〉《동양고전 연구》1, 안외순, 동양고전학회, , 1993

    135. 〈제1차 수신사(1876) 김기수의 일본인식과 그 의의〉 《사학연구》84, 한철호, 한국사학회, , 2006

    136. 〈고종연간 민씨세력의 정치적 동향과 과거등용〉《인문 학연구》32, 박진철, 조선대 인문학연구소, , 2004

    137. 〈개화파의 성립과정과 정치 사상적 동향〉《1894년 농민 전쟁연구》3, 주진오, 역사비평사, , 1991

    138. 〈고종대의 서원 철폐와 양반 유림의 대응〉《한국근현대 사연구》10, 윤희면, 한국근현대사학회, , 1999

    139. 〈고종친정 이후 정치체제 개혁과 정치세력의 동향〉《한 국사론》40, 은정태,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 1998

    140. 〈장용영 내영의 향색제조 역할과 재정확보 과정〉《역사 와현실》102, 박 범, 한국역사연구회, , 2016

    141. 〈1873년 고종의 통치권 장악 과정에 대한 일고찰〉《대 동문화연구》72, 김성혜,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 2010

    142. 〈박규수와고종의 정치적 관계 연구〉《한국동양정치사 상사연구》11-1, 강상규, 한국동양정치사상사학회, , 2012

    143. 〈종산 이삼현(1807〜1872)의 삶과 글쓰기의 지향점〉 《한문교육연구》48, 김용태, 한국한문교육학회, , 2017

    144. 〈高宗親政初期軍令權의 推移와 軍制改編(1873〜1884)〉 《사학연구》58 59, 장영숙, 한국사학회, , 1999

    145. 〈18세기 景福宮遺址의 행사와 의례-영조대를 중심으 로〉《서울학연구》25, 윤 정, 서울학연구소, , 2005

    146. 〈19세기 수렴청정의 특징- 제도적 측면을 중심으로〉 《조선시대사학보》48, 임혜련, 조선시대사학회, , 2009

    147. 〈개화사상과 개화운동의 역사적 변화〉《한국근대 개화 사상과 개화운동》, 하원호, 신서원, , 1998

    148. 〈균역법 시행 전후 훈련도감(訓鍊都監)의 재원확보 양 상〉《역사와현실》102, 최주희, 한국역사연구회, , 2016

    149. 〈고종의 서구 근대 국제법적 대외관계 수용 과정 분석〉 《동북아역사논총》32, 구선희, 동북아역사재단, , 2011

    150. 〈이서구의 인물과 설화에 대한 연구〉《韓國思想史-釋 山韓鍾萬博士華甲紀念》, 최삼용, 원광대학교 출판국, , 1991

    151. 〈흥선대원군 李昰應(1820〜1898)의 불교 후원과 그 정치 적 의미〉《역사와 담론》73, 이정주, 호서사학회, , 2015

    152. 〈大院君執政期高宗의 對外認識; 遣淸回還使召見을 중 심으로〉《동양고전연구》3, 안외순, 동양고전학회, , 1994

    153. 《한국근대의 온건개화파 연구-김윤식 김홍집 어윤중의 사상과 활동을 중심으로-》, 최진식, 영남대학교 사학과 박사학위논문, , 1990

    154. 〈1826년 『예식통고(例式通攷)』의 편찬과 왕실재정의 정 비 노력〉《역사와현실》107, 최주희, 한국역사연구회, , 2018

    155. 〈고종 친정 초(1874) 암행어사 파견과 그 활동-지방관 징 치를 중심으로〉《사학지》31, 한철호, 단국사학회, , 1998

    156. 〈고종의 대내외 정세인식과 대한제국 외교의 배경〉《한 국동양정치사상사연구》4-2, 강상규, 한국동양정치사상사학회, , 2005

    157. 〈1894〜5년 지방제도 개혁의 방향 – 향회의 법제화 시도 를 중심으로〉《진단학보》67, 이상찬, 진단학회, , 1989

    158. 〈19세기 농민 저항의 정치-1862년 농민항쟁, 관민 관계 위기와 법 담론〉《역사연구》16, 김선경, 역사학연구소, , 2006

    159. 〈곤경에서의 탈출:조일수호조규의 체결 과정〉《조일수 호조규, 근대의 의미를 묻다》, 김종학, 청아출판사, , 2017

    160. 〈19세기 한국의 국제법 수용과 중국과의 전통적 관계 청 산을 위한 투쟁〉《역사학보》181, 이태진, 역사학회, , 2004

    161. 〈실학과 개화사상의 관련양상-철종시대 박규수의 활동과 연암의 영향-〉《대동문화연구》36, 김명호,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 구원, , 2000

    162. 〈제9장 총설: 조선후기 경제사 연구의 새로운 동향과 과 제 〉《수량경제사로 본 조선후기》, 이영훈, 〈제9장 총설: 조선후기 경제사 연구의 새로운 동향과 과 제 〉《수량경제사로 본 조선후기》서울대출판부, , 2004

    163. 〈高宗의 初期(1864-1873) 對外認識變化와 親政-遣淸回還 使召見을 중심으로-〉《한국정치학회보》30, 안외순, 한국정치학회, , 1996

    164. 〈대원군 천주교 탄압에 대한 정치학적 고찰–전환기 한반 도의 리더십 분석-〉《정신문화연구》106, 강상규, 한국학중앙연구원, , 2007

    165. 〈오늘날의 역사학, 정조 연간 탕평정치 그리고 19세기 세 도정치의 삼각대화〉《정조와 정조이후》, 오수창, 역사비평사, , 2017

    166. 〈19세기 동아시아의 패러다임 변환과 한반도-‘예의’와 ‘부 강’의 상극적 긴장〉《사회와 역사》71, 강상규, 한국사회사학회, , 2006

    167. 〈명성왕후와 대원군의 정치적 관계 연구-왕실내 정치적 긴장관계의 구조와 과정〉《한국정치학회보》40-2, 강상규, 한국정치 학회, , 2006

    168. 〈일본의 유구병합과 동아시아 질서의 변동-한반도와의 정치적 관계를 중심으로〉《지방사와 지방문화》10-1, 강상규, 역사문 화학회, ,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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