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4년(高宗 21) 甲申衣制改革은 閔泳翊이 미국과 유럽을 방문하고 조선에 돌아온 후 고종에게 건의하면서 시행되었다. 의제개혁으로 인해 軍服·官服·私服의 변화가 복식 간소화라는 방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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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 : 단국대학교 대학원, 2016
학위논문(석사) -- 단국대학교 대학원 , 사학과 한국사(조선시대사)전공 , 2016. 8
2016
한국어
경기도
The reform of dress regulation in Kapshin 1884
v, 62장 ; : 삽화,표 ; 30cm.
단국대학교 학위논문은 저작권에 의해 보호받습니다
지도교수 : 김문식
참고문헌 : 56-60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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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운로드1884년(高宗 21) 甲申衣制改革은 閔泳翊이 미국과 유럽을 방문하고 조선에 돌아온 후 고종에게 건의하면서 시행되었다. 의제개혁으로 인해 軍服·官服·私服의 변화가 복식 간소화라는 방향�...
1884년(高宗 21) 甲申衣制改革은 閔泳翊이 미국과 유럽을 방문하고 조선에 돌아온 후 고종에게 건의하면서 시행되었다. 의제개혁으로 인해 軍服·官服·私服의 변화가 복식 간소화라는 방향으로 추진되었다. 가장 먼저 군복은 淸 장교의 지휘 하에 훈련받던 親軍의 간소화된 복식이 전 부대로 확대되었다. 관복은 품계에 따른 차별화된 복색, 넓은 소매 대신 획일화된 흑색, 좁은 소매로 대체되었다. 마지막으로 사복은 넓은 소매의 포와 늘어뜨린 띠 대신 좁은 소매의 두루마기와 좁아진 띠 착용이 계급에 상관없이 일률적으로 적용되었다.
의제개혁은 조정 관료들과 의논 없이 민영익과 고종의 주도로 실시되었던 만큼 큰 논란으로 이어졌다. 武官 관료와 外署 관료들을 제외한 文官 관료, 재야유림 및 개화파 문관 관료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계층이 의제개혁에 거세게 이의를 제기했다. 1882년 <<朝鮮策略>>의 도입 이래로 조정에서는 가장 뜨거운 논쟁이 연일 벌어졌다. 고종은 반대파의 반발을 잠재우기 위해 상소문을 올린 각 계층의 대표되는 인물들을 처벌했지만, 도성에서 시작된 반발은 점차 지방으로까지 확산되었다.
고종과 의제개혁을 찬성한 소수의 관료들은 복식 간소화를 통해 簡便과 節用을 성취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고종은 時宜에 합당한 선택이라고 강조했고 의제개혁을 반대하는 관료들을 설득하기 위해 <<大典通編>>과 太祖·世祖의 御眞, 그리고 宣祖의 복식 교체 교령을 근거로 들었다. 의제개혁을 반대하는 부류는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위정척사파 문관 관료들과 재야유림은 朝鮮中華主義와 두드러진 上下貴賤 구분을 위해 전통복식을 고수하기를 원했다. 반면 개화파 문관 관료들은 洋服의 도입을 원했다.
조정과 민간에서는 간소화된 복식을 갖춰 입거나 전통복식을 그대로 입는 양상이 극대화되었다. 한양에서는 지방보다 훨씬 더 엄격하게 사복 절목을 지키도록 백성들을 강압했고, 이에 隱居하거나 집에만 머물거나 이동 중에 복식을 교체하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심지어 坡州에서는 文廟에서 齋任과 諸生이 간소화된 복식 차림으로 제사를 지내는 초유의 사건까지 벌어졌다. 조선에서는 점차 의제개혁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의제개혁은 10월 17일 발발한 甲申政變으로 인해 변화를 맞게 된다. 고종은 정변으로 어수선해진 民心을 살핀다는 목적으로 사복에 한해서 便宜대로 입도록 했다. 하지만 관복 黑團領의 착용은 더 이상 진척되지 못하다가 1894년(고종 31)에 이르러 재추진되었다. 군복의 경우 신식 군복과 전통 군복이 혼용되다가 1895년 勅令 제78호 陸軍服裝規則에 따라 비로소 서구식 군복이 도입되었다. 사복으로서 본래 하층민의 겉옷이었던 두루마기는 士大夫 사이에서 점차 확대되어, 1894년 두루마기 착용령을 반기는 사람도 있었다. 이처럼 갑신의제개혁은 향후 지속적으로 전개되는 의제개혁의 시발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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