本研究の目的は壬辰倭乱(文禄の役)の過程で起きた東萊城戦闘をめぐる記憶の語りが構築されていく過程と、忠烈祠という表象-空間が形成されていく過程とを重ねてみることにより、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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本研究の目的は壬辰倭乱(文禄の役)の過程で起きた東萊城戦闘をめぐる記憶の語りが構築されていく過程と、忠烈祠という表象-空間が形成されていく過程とを重ねてみることにより、互...
本研究の目的は壬辰倭乱(文禄の役)の過程で起きた東萊城戦闘をめぐる記憶の語りが構築されていく過程と、忠烈祠という表象-空間が形成されていく過程とを重ねてみることにより、互いに行き違い、微かなものであった個人のさまざまな記憶が、整頓と補完の過程を経て、強力な集団の記憶としてその場を占め、それが再び個個人に不動の事実として伝承される具体的な物質性を獲得していくことの分析におかれている。
東萊城戦闘への記憶の語りは、宋象賢という人物を(再)具現するところから始められた。宋象賢に関する記録/記憶は戦乱が終わった直後から、様々な事実が錯綜する状態として存在していたのだが、申欽は「宋東萊傳」を通して宋象賢が東萊城戦闘の当時、忠節を守ったものと確定した。それはまた「東国申続三綱行実図」に載せられるだけの忠烈の条件を十分に備えた語りの文法を備えるための過程でもあった。象徴的に縫合不可能な外傷(トラウマ)として残った壬辰倭乱への記憶を「三綱」というコード内に引き入れ、局面転換を図る脈絡のなかで、「敗軍の将」宋象賢は「忠烈」の典範としてその場を占めることができた。こうした過程を経て「忠烈」の典範になった宋象賢の名は、彼の祠宇を書院へと拡充する過程において、儒師として再び呼び出される。彼が再び呼び出されたのは書院に配享される人物は儒生らにとって模範となるだけの賢人としての面貌を備えねばならなかったからだ。そうした理由から、宋象賢は既存の記憶の語りには存在しなかった「斯文の道」をなした人物として浮彫りされ始めた。その先鞭は、当時の最高権力層であり文章家であった宋時烈によってつけられ、彼はこれを「泉谷宋公諡状」と「泉谷宋公神道碑銘」という文を通して具現した。すなわち宋象賢の史跡は各時代の最高の文章家であり権力層によって再構成されたのだ。
宋象賢の記憶の語りは、戦乱がある程度収拾され、社会が安定し始めた時期に至り、在地士族らの上昇欲と地方での支配力構築のため、という目的の下で再構成されるに至った。確固として構築された宋象賢に関する記憶の語りと、それを記念するための表象-空間が完成された後、次の作業は東萊城戦闘において殉節した府民へと拡大され始めたのもやはりこうした作業の一環だと言えるだろう。この過程に対し、当時の中央政界を牽引していた西人執権勢力と東萊在地士族とが積極的に協力し、東萊府使はこれら二つの集団を媒介しつつ核心的な役割を果たし、殉節府民の記録/記憶を細かに整え、これらを集団の記憶として記録した後、これを記念する東萊城南門碑と忠烈祠という独特な表象-空間を完成した。こうして忠烈祠は東萊府在地士族にとって、地域社会を引っぱっていく政治的空間として、中央執権勢力にとっては在地士族の協力を引き出す体制維持の空間として活用された。
また、このように長い過程を経て進められた記憶の語りと表象-空間の完成を永久に記念するため、『忠烈祠志』の編纂に至った。だが、この過程において論難の余地があったり、資料が曖昧な殉節者らの行跡を補完・修正といった補整過程を経ねばならなかった。梁潮漢、廬蓋邦、文徳謙、趙英圭の「遺事」と「傳」の作成がそれらである。そうして1767年(英祖43年)東萊府使の嚴璹により草稿が完成した『忠烈祠志』が、1808(純祖8年)東萊府使の呉翰源によって完成されるまで、費やされた四十年余りは東萊城戦闘に関する記憶の語りと表象-空間が最終的に確定されるために経ねばならなかった最後の陣痛の時期でもあった。
こうした『忠烈祠志』の編纂とともに東萊城戦闘という一つの事件もまた、完全な物語としての完成を見ることになるのだが、このとき完成された語りがこれまで伝えられつつ、東萊に「忠烈の地」というアイデンティティーを与えることが可能となったのだ。だがこれは考察したところのように、各々の記憶の主体が目的達成のために一定の語りの文法の下で再-構成した記録/記憶であり、その語り構築の目的が、被支配層を支配可能な領域へと包括するための一連の作業であったことは勘案してみれば、壬辰倭乱の当時、抗戦した「忠烈」の記憶の共有は、個個人に集団アイデンティティーを与えようとするものに過ぎず、「同質性」という名が、かえって個個人を抑圧する機制として働くことが確認できる。
このように記録/記憶の語り的構成を通して、現実を(再)構築しようとした動きは、東萊城戦闘という事件を構成することにのみ局限されるのではない。漢文散文領域の全般において、こうした作業は緻密かつ細心になされてきており、この過程において再構成された記憶の語りは長久な過程に耐え、不動の正史としてその位置を占めた。であるため、これを明らかにすることは容易ではない歩みとなるが、現実の鋳造可能性が確認された以上、それへの考察は単純な解体による無意味な作業にとどまってはならない。正史の殆んどが記憶の語りと命名できることを受け入れ、それに細かな分析を加え、記憶の語りを構築した地点での事態を正確に見つめるとき、そのなかにおいて現実を鋳造する権力網への克服可能性が開かれるだろうし、またそうした作業を通じて、そこから大きく抜け出ていない私達の現実もまた、省みることができるものと期待される。
본 연구는 壬辰倭亂 중 일어났던 東萊城戰鬪를 둘러싼 기억서사가 구축되어가는 과정과 忠烈祠라는 표상-공간이 형성되어가는 과정을 겹쳐봄으로써 엇갈리고 희미했던 개인의 기억들이 정...
본 연구는 壬辰倭亂 중 일어났던 東萊城戰鬪를 둘러싼 기억서사가 구축되어가는 과정과 忠烈祠라는 표상-공간이 형성되어가는 과정을 겹쳐봄으로써 엇갈리고 희미했던 개인의 기억들이 정돈과 보완의 과정을 거쳐 강력한 집단기억으로 자리 잡고, 그것이 다시 개개인에게 부동의 사실로 전승되어 구체적인 물질성을 획득한다는 사실을 분석하는데 목적을 두었다.
東萊城戰鬪에 대한 기억서사는 宋象賢이라는 인물을 (재)구현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송상현에 대한 기록/기억은 전란이 끝난 직후 여러 사실들이 엇갈리는 상태로 존재했었는데, 申欽은 「宋東萊傳」을 통해 宋象賢이 東萊城戰鬪 당시 忠節을 지켰다는 것으로 확정하였다. 이것은 또한 『東國新續三綱行實圖』에 실릴 만한 忠烈의 조건을 충분히 갖춘 서사문법을 갖추기 위한 과정이기도 했다. 상징적으로 봉합불가능한 外傷(trauma)으로 남은 壬辰倭亂에 대한 기억을 三綱의 코드 안으로 끌어들여 국면전환을 도모하는 맥락 안에서 ‘敗將’ 宋象賢은 ‘忠烈’의 전범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이와 같은 과정을 거쳐 ‘忠烈’의 전범이 된 宋象賢의 이름은 그의 祠宇를 書院으로 확충시키는 과정에서 儒師로서 다시 호출된다. 그가 다시 호출된 것은 書院에 配享되는 인물은 儒生들에게 모범이 될 만한 賢人의 면모를 갖춰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한 이유로 宋象賢은 기존의 기억서사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斯文의 道를 이룬 인물로 부각되기 시작했다. 그 先鞭은 당대 최고의 권력층이자 文章家인 宋時烈이 잡았으며, 그는 이를 「泉谷宋公諡狀」과 「泉谷宋公神道碑銘」이라는 글을 통해 구현했다. 즉 宋象賢의 사적은 각 시대 최고의 문장가이자 권력층에 의해 재구성되었던 것이다.
宋象賢의 기억서사는 전란이 어느 정도 수습되어 사회가 안정되기 시작한 시기에 이르러서는 在地士族들의 상승 욕망과 지방에서의 지배력 구축을 위한 목적 아래 재구성되기에 이르렀다. 확고하게 구축된 宋象賢에 대한 기억서사와 그를 기념하기 위한 표상-공간이 완성된 뒤, 다음 작업은 東萊城戰鬪에서 殉節한 府民으로 확대되기 시작한 것 역시 그러한 작업의 일환이라 할 수 있다. 이 과정에는 당시 중앙정계를 이끌었던 西人執權勢力과 東萊在地士族이 적극 협력했고, 東萊府使는 이들 두 집단을 매개하며 핵심적 역할을 수행했으며, 殉節府民의 기록/기억을 세밀하게 다듬어 이들의 집단기억으로 기록한 뒤 이를 기념하는 東萊城南門碑와 忠烈祠라는 독특한 표상-공간을 완성시켰다. 그리하여 忠烈祠는 東萊府 在地士族에게는 지역사회를 이끌어가는 정치적 공간으로, 중앙집권세력에게는 지방의 在地士族과 협력을 이끌어내는 체제 유지의 공간으로 활용되었다.
그리고 이처럼 긴 과정을 거쳐 진행된 기억서사와 표상-공간의 완성을 영구히 기념하기 위해 『忠烈祠志』를 편찬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논란의 여지가 있거나 자료가 부실한 殉節者들의 행적을 보완ㆍ수정하는 補整의 과정을 거쳐야만 했다. 梁潮漢ㆍ盧蓋邦ㆍ文德謙ㆍ趙英圭의 遺事와 傳의 작성이 그것이다. 그리하여 1767년(英祖 43) 東萊府使 嚴璹에 의해 초고가 완성된 『忠烈祠志』가 1808년(純祖 8) 東萊府使 吳翰源에 의해 간행되기까지 걸린 40여 년은 東萊城戰鬪에 대한 기억서사와 표상-공간이 최종 확정되기 위해 거쳐야 했던 마지막 진통의 시기이기도 했다.
이러한 『忠烈祠志』의 편찬과 함께 東萊城戰鬪라는 하나의 사건 역시 완전한 이야기로의 완성을 보게 되었는데, 이 때 완성된 서사가 지금까지 전해져 오면서 東萊에 ‘忠烈의 고장’이라는 정체성을 부여하는 일이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살펴본 바와 같이 각각의 기억주체들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일정한 서사문법 아래에서 재-구성해낸 기록/기억이었으며, 그 서사 구축의 목적이 피지배층을 지배 가능한 영역으로 포괄하기 위한 일련의 작업이었다는 것을 감안해 본다면, 壬辰倭亂 당시 맞서 싸웠던 ‘忠烈’의 기억에 대한 공유는 개개인에게 집단정체성을 부여하려는 일에 불과하며, ‘동질성’이라는 이름이 도리어 개개인을 억압하는 기제로 작용한다는 것이 확인 가능하다.
이처럼 기록/기억의 서사적 구성을 통해 현실을 (재)구축하려 한 움직임은 東萊城戰鬪라는 사건을 구성하는 일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한문산문영역의 전반에서 이와 같은 작업은 치밀하고 세심하게 이루어져 왔으며, 이 과정에서 재구성된 기억서사는 장구한 과정을 견디며 부동의 正史로 자리매김했다. 그렇기에 이를 밝혀보는 일은 쉽지 않은 걸음일 것이나 현실의 주조 가능성을 확인한 이상 이에 대한 고찰은 단순한 해체로 인한 무의미한 작업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正史의 대부분이 기억서사라 명명할 수 있다는 점을 받아들이고 그에 대한 세세한 분석이 곁들여져 기억서사를 구축한 지점의 사태를 정확하게 바라볼 때, 그 가운데에서 현실을 주조하는 권력 망에 대한 극복의 가능성이 열릴 것이며, 또한 그러한 작업을 통해 여기에서 크게 벗어나고 있지 않은 우리의 현실 역시 되돌아 볼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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