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논문은 한국과 중국에 있어서 기독교 관계사를 고찰해 보는 것을 주요 목적으로 하였으며, 이를 위해 1900년 중국에서 발생한 의화단운동이 한국 기독교에 미친 영향에 대해 고찰해 보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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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 연세대학교 대학원, 2012
2012
한국어
의화단 ; 반기독교 운동 ; 신축년 제주교안 ; 도륙밀지사건 ; 만주 한인 기독교 ; 아서 브라운 ; 네비우스 ; 장로회신학교 ; 감리회 자립원칙 ; 정교분리론 ; the boxer uprising ; anti-christian movement ; the forged royal edict to annihilate all christians ; Dong-hak ; Hwalbin-dang ; Korean christianity in manchuria ; Arthur Brown ; nevius method ; self-government ; self-support ; church-state relation
서울
(A) historical study on the relation of Korean and Chinese christianity : the boxer uprising's impact on Korean christianity
vii, 275 p. : 삽화 ; 26 cm
지도교수: 이양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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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한국과 중국에 있어서 기독교 관계사를 고찰해 보는 것을 주요 목적으로 하였으며, 이를 위해 1900년 중국에서 발생한 의화단운동이 한국 기독교에 미친 영향에 대해 고찰해 보았다. 즉, 의화단운동이 당시 한국에서 일어난 반기독교 운동에 미친 영향과 의화단운동이 한국 기독교 선교현장 및 선교정책에 미친 영향에 대해 살펴보았고, 한국 기독교의 의화단운동에 대한 인식에 대해서 검토하였다.
이를 위해 우선 의화단운동이 일어나기 이전 시기에 중국과 한국에서 일어난 반기독교 운동에 대해 비교고찰 하였다. 중국에서는 1870년 <天津敎案>을 중심으로 이전에는 官紳 주도의 반기독교 운동이, 이후에는 민중 주도의 반기독교 운동이 일어났으며 그 가운데 민간종교결사가 민중들의 반기독교운동을 이끌었다. 한국에서는 1886년 <朝佛條約>을 전후로 정부주도의 반기독교운동과 민중주도의 반기독교운동으로 구분되며, 민중 가운데에서는 동학과 활빈당 등 민간종교결사 혹은 민간결사단체가 반기독교운동을 이끌었다.
둘째, 1900년에 한국에서 일어난 반기독교 운동을 분석하여 의화단운동과의 관계성에 대해 고찰하였다. 1900년에는 그 이전 및 이후 시기와 비교해 민중주도의 반기독교운동이 거세게 일어났으며, 동학과 활빈당 중심의 폭력적 반기독교, 반서양 운동이 일어났다. 동학과 활빈당은 의화단운동의 방법론과 목표 및 활동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으며, 자신들의 활동의 표본으로 삼았다. 그리고 1900년 11월에는 도륙밀지사건이 일어나 한국에서도 의화단운동을 모방한 대규모 반기독교 폭동이 실제로 계획돼 한국 선교사 사회를 긴장시켰고, 1901년 5월에는 제주교안이 발생하여 3백 명의 기독교인이 희생되었다.
셋째, 의화단운동이 한국 선교현장에 미친 영향에 대해 살펴보았다. 만주지역 한인기독교의 경우, 의화단의 직접적인 공격을 받고 많은 교회가 파괴되고 교인들이 살해되었다. 한국 성공회의 경우, 의료 선교사 4명이 열강 연합군 부상병 치료를 위해 중국으로 차출되어가 병원 3곳이 문을 닫았다. 그리고 한국으로 피난 온 수많은 중국선교사 및 중국교인들을 위해 한국 교회는 보호소, 음식, 여비 등을 마련해 주고, 파괴된 중국교회를 위한 연보를 걷어 중국에 전달하기도 하였다.
넷째, 한국기독교인들과 선교사들의 의화단 인식을 살펴보았다. 「대한그리스도인회보」를 통해 살펴본 결과 감리회의 경우 일반 언론과는 달리 의화단의 종교적 특성에 관심을 갖고 있었으며, 가톨릭보다는 개신교의 피해와 희생에 보도의 초점을 맞추고, 의화단전쟁이 한국 정세에 미칠 영향에 대해서는 함구하되 전쟁에 대한 한국 정부의 동향에만 관심을 갖고 있었다. 즉, 한국 선교활동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한국정부의 동향에만 관심을 갖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었다. 이와 달리 장로회의 「그리스도신문」은 의화단전쟁이 한반도에 미칠 영향 및 국제정세에 대해 보다 폭 넓은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한편, 한국 선교사들은 당시 의화단 운동을 반기독교 운동이라기보다는 반제국주의·반서양 운동으로 인식하고 있었으며, 특히 의화단 전쟁으로 인해 러일전쟁이 발발하여 한반도에 직접적인 영향, 즉 한국 개신교 선교에 직접적인 영향이 미칠지 모른다고 염려하고 있었다.
다섯째, 의화단전쟁이 끝난 이후 각국의 선교회들은 선교정책을 개정하는데, 이것이 한국 선교정책에 미친 영향을 고찰해 보았다. 미북장로회의 해외선교부 총무 아서 브라운의 경우 의화단운동으로 토착교회와 자치문제, 그리고 정교분리론을 강조하였는데, 브라운이 파괴된 중국 선교지를 보러가는 길에 한국에 들렀을 때 이 문제를 한국 선교사들과 논의하였고, 결국 장로회는 1901년에 신학교 설립을 결의하고, 정교분리정책을 선교정책으로 채택하였다. 또한 미감리회의 경우 1900년 이후부터 자립정책을 강조하고 선교정책으로 공식 채택한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결론적으로 이 논문은 의화단 운동이 한국의 반기독교 운동 및 한국 기독교 선교현장, 선교정책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음을 주장함으로써, 한국기독교사 연구를 위해서는 중국기독교사와의 관계사 연구도 병행되어야 함을 보여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