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연구는 우리나라 도작문화의 성격을 규명하기 위한 작업으로서 초기 도작의 형성과정 및 단계별 문화내용의 양상을 파악하고자 하였다. 최초의 도작은 중국 揚子江流域의 河姆渡遺蹟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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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 全南大學校, 2008
2008
한국어
911.01 판사항(4)
951.901 판사항(21)
광주
xii, 198 p. : 삽화(일부천연색) ; 30 cm
참고문헌: p. 151-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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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구는 우리나라 도작문화의 성격을 규명하기 위한 작업으로서 초기 도작의 형성과정 및 단계별 문화내용의 양상을 파악하고자 하였다. 최초의 도작은 중국 揚子江流域의 河姆渡遺蹟과 草鞋山遺蹟에서 조사된 바와 같이 야생벼를 재배하면서 시작되었다. 초기단계의 벼농사는 웅덩이식 논과 경작도구, 그리고 재배에서 수확에 이르는 기술이 유기적으로 결합된 水稻作체계로 확인된다. 이 水稻作이 淮河流域을 거쳐 山東半島에 이르고 다시 廟島群島와 遼東半島를 지나 한반도에 전파되었다. 의심할 여지없이 한반도에 수용된 도작체계는 水稻作이며 田作으로 대표되는 陸稻는 서력기원 전후한 시기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그 동안 도작에 대한 연구는 농학과 작물학, 식물학, 민속학 분야에서 비교적 오랫동안 이루어져 왔으며, 고고학 영역의 활동이 증가된 것은 근래의 일로 경작도구의 해석과 관련된 사회문화 연구의 필요성에 따른 것이다.
일반적으로 출토된 벼의 同定은 粒形分析을 통해 이루어졌지만, 최근에는 DNA분석이 이루어지면서 벼종의 동정이 장립형과 단립형 등 2구분에서 단립형을 다시 온대형과 열대형으로 세분하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온대형은 현재 중국과 한국, 일본에서 전통적으로 재배되고 있는 품종임에 비해 열대형은 한때 Javanica로 알려진 것으로 북회귀선 이남의 陸稻 재배지역에서 조방적으로 재배되는 벼 종류이다.
한편, 우리나라에서 벼 자료는 기원전 3,000年紀, 늦어도 기원전 2,000년대에는 출현하는 것으로 판단되는데, 대부분 토탄층 등의 자연퇴적층에서 채집된 것으로 자료적 가치가 반감되고 있음이 사실이다. 그러나 沃川 大川里遺蹟의 주거지에서 탄화미가 확인됨으로써, 신석기시대의 밭농사 단계에 새로운 작물로서 벼가 부가되었을 가능성을 열어놓게 되었다. 도작자료는 農所里貝塚 등의 plant-opal과 같이 신석기시대 후기유적에서 더욱 증가하며 청동기시대가 되면 한반도 북부를 제외한 전국 대부분 지역에서 확인되고 있다. 그 결과 새로운 문화변동의 동인으로서 청동기시대에 도작문화가 형성된다고 하겠다.
도작농경의 구체적인 자료는 충남지역과 영남지역을 중심으로 한 청동기시대의 유적에서 검출된 논이 대표적이다. 우리나라의 초기 논의 입지와 형태, 경영방식 등은 도작자료의 출현 이후 등장한 것으로 판단되며, 각 유적에서 검출된 논의 이용방식은 지역별 또는 지형적으로 적응되어 정착된 것으로 보인다. 지형에 따른 논의 입지를 종합하면 크게 谷底型과 沖積低地型, 丘陵地型으로 구분할 수 있지만, 지금까지 조사된 한반도의 논은 곡저형과 충적저지형으로 대별된다.
곡저형은 谷底, 開析谷地, 谷部 盆地型, 谷底型 등의 개념을 포함하며, 구릉의 말단 사면부에 인접하여 논이 조성되는 경향을 보인다. 대체로 곡간의 너비는 蔚山 玉峴遺蹟에서 알 수 있듯이 100m 정도이며, 谷頭에서 谷口로의 진행방향이 비교적 완경사인 골짜기에 입지한다. 論山 麻田里遺蹟, 保寧 寬倉里遺蹟, 扶餘 松鶴里遺蹟, 蔚山 無去洞 玉峴遺蹟, 蔚山 鉢里遺蹟의 논의 입지가 이에 해당된다. 곡부는 지형적으로 소하천이 위치하여 하천 범람의 피해로부터 비교적 안전하며, 토양 비옥도가 비교적 높은 편이고, 용수의 유입과 배수가 용이하다. 특히, 식물성 퇴적이 포함된 니질 토양 또는 흑니토로 이루어진 흑색 점질토를 기반토양으로 한 곡저형 논은 토양 비옥도가 논의 안정적인 경영을 좌우하는 척도가 된다.
충적저지형은 하천 범람원, 충적지의 배후습지, 평지형, 하천형 등으로 분류된다. 충적저지는 하천이 만든 범람원의 가장자리로 배후습지와 구분되며 습지가 육지화 된 평지를 포함한다. 대체로 논의 개전입지는 구릉하부에 연면하여 형성된 자연제방의 배후습지가 평탄화 과정을 거치면서 발달한 지형이나 微高地 연변의 저지가 해당된다. 일반적으로 자연제방에 의해 홍수로부터 보호되고 수원의 확보가 용이한 곳으로 지형적으로 안정된 조건을 갖추고 있다. 이러한 지형에서는 관개를 위한 수리시설의 완비와 함께 비교적 넓은 범위에 논이 조성될 수 있다. 扶餘 九鳳里․蘆花里遺蹟, 蔚州 南川遺蹟 그리고 密陽 琴川里遺蹟에서 검출된 논이 이에 해당된다. 한편, 충적저지형과 관련하여 배후습지를 이용한 논은 아직 한반도에서 확인되지 않았다. 기술적 측면에서 입지선택의 기준을 고려하면 곡저형에서 충적저지형으로 변화가 예견되나, 현 자료에 국한해서 보면 오히려 충적저지형이 일찍 등장한다. 이것은 곡저에서 충적저지에 이르기까지 단선적인 확대가 아니라 다양한 지형조건에 적응하여 두 유형의 논 조성방식이 적용된 때문으로 생각된다.
논은 벼를 재배하기 위해 구획된 경지이다. 따라서 일정한 깊이로 물을 유지하기 위한 논둑의 존재가 필수적이며, 논둑으로 구획된 평면의 형태적 속성에 근거하여 Ⅰ형과 Ⅱ형으로 구분할 수 있다. Ⅰ형은 방형계로 평면이 4각으로 구획되며 장방형 또는 세장방형을 포함한다. Ⅱ형은 부정형으로 방형계를 제외한 부채꼴을 비롯한 다양한 평면형태를 지칭한다. 논면의 면적에 근거한 구분인 소구획(a)과 대구획(b) 등은 都出比呂志에 의해 이미 彌生時代 논구획의 유형으로 개념화되었지만, 여기에서는 크기의 대소에 따라 ⅠaㆍⅠb, ⅡaㆍⅡb 등 평면형태의 유형을 규정하는 하위개념으로 세분한다.
Ⅰ형은 비교적 완만한 경사지의 토지를 이용한 방식으로 등고선의 방향과 평행하거나 직교하여 지형을 규칙적으로 분할하였다. 초기 논 유적인 부여 구봉리・노화리, 논산 마전리유적의 완경사면에 위치한 논, 울산지역의 옥현, 남천, 발리유적, 밀양 금천리유적의 논은 방형계 소구획인 Ⅰa형에 속한다. 이 가운데 면적이 알려진 논은 옥현유적 1~3평, 발리유적 1평 내외, 금천리유적 5~6평, 논산 마전리유적 5~22평 등으로 비교적 면적이 좁은 소구획이며 극소형도 발견된다. Ⅰb형은 하천의 충적대지 또는 곡간퇴적지의 평탄지에 입지하며, 지하수위가 비교적 높은 연약한 저습지를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논둑의 붕괴를 막기 위한 말뚝과 목판 등의 보강시설이 필수적이다. 아직 이러한 유형이 한반도에서는 발견되지 않았다.
Ⅱ형은 대체로 경사지에 조성되며 지면의 기복이 복잡하게 얽힌 곳에 조성되는 경우도 있다. 대표적인 예로는 논산 마전리유적 경사지에 위치한 논과 扶餘 松鶴里遺蹟의 논을 들 수 있는데, 면적은 기본적으로 소구획이다. 송학리유적은 등고선을 따라 평행하게 조성되고 있으나 단차를 가진 부정형으로 12면이 검출되었으며 면적은 4~5평으로 소구획이다. 한반도 도작 초기유적에서 확인된 부정형의 논 역시 모두 소구획에 한정된다. 한반도 초기 논의 면적이 소구획으로 등장하는 배경은 경작지에 있어서 수리문제와 함께 농구발달의 정도가 연동된 결과로 보이는데, 목제 농경구 등 도구와 토목기술의 발달이 아직 본격적인 궤도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한편, 논에는 용수를 위한 수원의 확보, 취수와 급수, 배수 등 논 경영을 위한 여러 시설이 부가되고 있다. 이것은 도작 초기단계에서도 비교적 발달된 관개시설이 완비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관개시설의 핵심은 수원으로부터 수로를 통해 물을 취수하여 공급하는 것인데, 이러한 수로에는 크게 세 가지 종류로 구분할 수 있다. Ⅰ형은 간선수로를 통해 수원으로부터 논구역으로 물을 도수한다. 이때 지선수로를 동반하기도 하며 규모는 대체로 관개하는 논의 연면적과 비례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Ⅱ형은 지선수로를 통해 간선수로에 접수하여 논구역으로 물을 도수하며, 직접 논면에 급수하거나 용수로에 접수되기도 한다. Ⅲ형은 용수로를 통해 간선과 지선에 접수하여 직접 논면으로 공급하는 방식이다. 때로는 지형에 대응하여 논면과 논면 사이에 짧은 용수로가 설치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논의 유형 사이에 단계화나 이른바 발전 추이를 살펴볼 수 있는 변천양상은 파악되지 않았다. 이것은 조사된 유적의 수가 적다는 자료의 원천적인 한계에 따른 것일 수도 있지만, 오히려 초기단계에 이미 微地形에 대응하여 경영이 이루어진 때문으로도 볼 수 있다. 실제 유구의 조사사례에서도 초기단계에서부터 논의 관개방식은 기술적인 진보를 가져온 상태로 확인되기 때문이다.
수원은 곡저지형의 경우 구릉의 하부와 논면의 사이에 위치하며 湧水와 雨水만으로 이루어지는 ‘自給型’과, 자연유로나 습지 등을 대상으로 하는 ‘取水型’으로 구분할 수 있다. 자급형은 울산 옥현유적과 논산 마전리유적, 부여 송학리유적 등에서 확인된 논의 수원이 이에 속한다. 취수형은 밀양 금천리유적과 보령 관창리유적의 논이 이에 속하며, 부여 구봉리・노화리유적 및 울산 발리유적도 이 범주에 들 가능성이 높다. 수원의 확보방식이 논조성의 기술발달과 깊은 관련이 있다고 할 때 자급형에서 취수형으로 순차적인 발전을 상정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 유적에서는 오히려 역전현상도 발견된다. 그것은 논의 조성에서 수원의 확보와 지형의 구조가 동시에 선택의 기준으로 작용한 때문으로 생각된다. 취수형 수원 가운데 가장 발전된 형태는 밀양 금천리유적과 보령 관창리유적에서 보고된 洑가 대표적이다. 그러나 자연유로를 가로질러 만든 보를 수원으로 이용하는 관개방식은 시기적으로 늦을 가능성이 많다.
당시 논의 생산성에 관련한 벼의 종자개량과 같은 재배기술은 그렇게 발달된 것 같지 않다. 늦은 시기의 자료이지만, 光州 新昌洞遺蹟에서는 미숙된 쭉정이가 다량 확인되었는데, 이것은 개화 후 수정되지 않았거나 아직 성숙하지 못한 벼로 밝혀졌다. 쭉정이의 발생은 저온현상에서 오는 짧은 개화 시기나 일조량의 부족, 병충해의 만연 등 생육에 있어서 부적절한 요소가 작용하는 환경, 즉 자연재해에 의한 결실의 방해와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대체로 일회성을 띤다. 그러나 신창동유적의 퇴적층을 살펴보면, 전시기에 걸쳐 이러한 쭉정이 현상이 지속적으로 발생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당시 벼 재배기술이 농구 등의 발달과 함께 기술적으로 상당히 진보했을 것이라는 추정에도 불구하고 이삭의 낟알은 결실과정에서 지속적으로 어떤 장애요인에 봉착하고 있었다는 증거이다. 그 이유는 자연조건의 문제보다는 당시의 벼가 품종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또한 彌生時代 논의 생산량을 통계적으로 분석한 결과는 소비량(1인당 1일 1.1合)의 3.3개월분에 해당되는 정도로 그리 높지 않은 상태이다. 이에 비해 도작이 상대적으로 빠른 단계의 한반도에서 도작생산량은 오히려 더 적었을 가능성이 많은 것이다. 따라서 쌀의 용도는 일반인이 상용하는 米食이 아니라 각종 의례수행을 위한 공헌과정을 통해서 소비되고 분배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도작과 관련된 농구는 크게 起耕具와 收穫具, 그리고 加工具로 구분할 수 있다. 공구에서는 목제 가공구의 세트화 및 재질 변화가 변천의 주체가 된다. 농구에서의 변천주체는 미미하지만, 수확구보다는 종류가 다양한 기경구에서 찾을 수 있다. 하지만 그 변화의 단계나 계보를 구체적으로 밝혀낼 수 있을 만큼의 양적인 조건이 갖추어진 것은 아니다. 공구의 변천은 석제→청동제→철제로의 재질 변화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목제 농구는 안동 저전리유적의 절구공이와 대구 동천동유적 및 논산 마전리유적의 목제부병, 그리고 김천 송죽리유적, 광주 동림동유적, 광주 대동유적, 광주 신창동유적과 무안 양장리유적에서 출토된 괭이류 등 다양한 종류가 있다.
농업이 중심이 된 사회구조 속에서 형성된 농경문화를 대표하는 것은 단연 농경의례일 것이다. 농경의례는 곡물생산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는 자연현상에 대한 제사의례로서 시작되었다. 당시의 의례는 수행의 목적과 상징성에 따라 내용에 차이가 있었으며, 실행과정에서 복합되거나 다면화되기도 했다. 도작이 확산된 청동기시대에 농경의례 자료가 등장하고 있는 것을 보면, 당시의 의례가 도작농경과 직접적으로 연결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즉, 도작농경의 바탕 위에서 생활양식과 생산기술, 세시풍속과 민속놀이, 혹은 신앙과 의례, 가치, 관념체계 등의 생활문화와 정신문화가 형성되었던 것이다. 광주 신창동유적에서 출토된 나무로 만든 새와 傳 대전 출토 농경문청동기, 󰡔三國志󰡕 東夷傳 기록, 그리고 청동기시대에 증가하는 각종 미니어처와 같은 제사용 유물 등은 당시 행해진 의례와 관련된 구체적인 증거이다.
이상에서 살펴 본 한국 초기도작문화의 전개양상은 크게 4단계로 구분할 수 있다. 제1단계는 벼 자료의 출현기로 신석기시대 밭농사중심체계에 새로이 벼 관련 자료가 나타나는 시기이다. 제2단계는 도작의 등장기로 청동기시대 전기후반에 충남과 영남지역에서 구체적인 논이 등장한다. Ⅰa형 및 Ⅱa형 등 논의 형태와 관개시설이 비교적 발달된 형태로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이전시기의 단계에 한국에서 논의 시원형식이 등장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3단계는 도작의 확산기로 이른바 송국리유형문화를 標識로 한 청동기시대 중기에서 철기유입 초기단계까지이다. 도작농경이 확산ㆍ발전된 시기로 도작관련 자료와 논 유적이 증가한다. 4단계는 도작 집약기로 기원전 3세기경 철기유입과 확산이 이루어지진 서력기원 전후까지의 시기이다. 철제농구와 공구의 보급으로 경지확대가 진척되고 사회적 역량이 도작생산으로 집중화되는 단계이다. 바로 이 시기에 최초로 陸稻가 시행된다.
한반도에서 정착된 이러한 도작문화는 제2단계에서 3단계에 걸치는 어느 시점에 일본으로 전파되어 彌生時代 농경사회를 발전시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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