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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世紀 朝鮮王朝 十六羅漢像 硏究 = A Study on Sixteen Arhat Sculptures in 17th Century, Choseon Dynas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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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kakao i 다국어 번역

      This study about the 16th arht in 17th century to ackonwledge stylistic aspects and distinguish the chronolic for them, were seemed to be worked, as search for the meaning on sculptural history, and I'm planning to give a word to study on Arahat in Buddhistic sculpture, specificational field.
      First, is called Araht as the direct disciple of Buddha, but they had been becoming a group of 16 Arhat and 18 Arhat or 500 Arhat, on behalf of increasing priest to get th phala of Arhat(阿羅漢果). in later centuries, specially, respectable priest and who is classified hig level priest is called Arhat.
      And 16 Arhat had been presented the sutra "Beobjuki" and after Buddha had died, they who called 16th priests got responsibility of saving people and keeping the law of Buddha.
      They are named that the first priest Pindola-Brarad vaja, second priest Kanaka-vatsa, third priest Kanakabharaduaja, fourth priest Subinda, fifth priest Nakula, sixth priest Bhadra, seventh priest Kalika, eighth priest Vajraputra, ninth priest Jivaka, tenth priest Pantaka, eleventh priest Rahula, twelfth priest Nagasena, thirteenth priest Angada, fourteeth priest vanavasi, fifteenth priest Ajita, sixteenth priest Cudapanthaka.
      Each of them has a interestion episode, was getting to familiar with people and was popular especially the iconography which had a view of free compare with defferent Buddistic sculptures.
      In China, there were expanded of trust in Arhat Buddha in dynasty of Tang(唐) and dynasty of Song(宋), since 5 Conturies. In Korea, there were becoming extreme on Arhat Buuddha in dynasty of Koryo(高麗), were held ceremony of Arhat or ceremony of 500 Araht.
      But present 16th Arhat sculpture left were, inth latter half of the Choseon(朝鮮) dynasty, were understood the consequence of popular Jenism and lively Buddhism's working after double ware and that was compulsoried Buddhism on social to got a sort of social event to make abig role to save terrible country war.
      They said that Buddhistic thought was able to popular one, and then, was presented strong about Buddhism Art.
      Especially, Because peole were interested in 16th Arhat and they were much popular to general people highly, regarding to priests, be sculpturing 16th Arhat a lot, as discipline the extreme themselves.
      Under centural back ground, had worked 16th Arhat sculpture in 17th century, and they were expecting to be seen aspect more getting hardening and diagrammatic out of free and actual skill in the early part of the 18th centu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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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is study about the 16th arht in 17th century to ackonwledge stylistic aspects and distinguish the chronolic for them, were seemed to be worked, as search for the meaning on sculptural history, and I'm planning to give a word to study on Arahat in Bu...

      This study about the 16th arht in 17th century to ackonwledge stylistic aspects and distinguish the chronolic for them, were seemed to be worked, as search for the meaning on sculptural history, and I'm planning to give a word to study on Arahat in Buddhistic sculpture, specificational field.
      First, is called Araht as the direct disciple of Buddha, but they had been becoming a group of 16 Arhat and 18 Arhat or 500 Arhat, on behalf of increasing priest to get th phala of Arhat(阿羅漢果). in later centuries, specially, respectable priest and who is classified hig level priest is called Arhat.
      And 16 Arhat had been presented the sutra "Beobjuki" and after Buddha had died, they who called 16th priests got responsibility of saving people and keeping the law of Buddha.
      They are named that the first priest Pindola-Brarad vaja, second priest Kanaka-vatsa, third priest Kanakabharaduaja, fourth priest Subinda, fifth priest Nakula, sixth priest Bhadra, seventh priest Kalika, eighth priest Vajraputra, ninth priest Jivaka, tenth priest Pantaka, eleventh priest Rahula, twelfth priest Nagasena, thirteenth priest Angada, fourteeth priest vanavasi, fifteenth priest Ajita, sixteenth priest Cudapanthaka.
      Each of them has a interestion episode, was getting to familiar with people and was popular especially the iconography which had a view of free compare with defferent Buddistic sculptures.
      In China, there were expanded of trust in Arhat Buddha in dynasty of Tang(唐) and dynasty of Song(宋), since 5 Conturies. In Korea, there were becoming extreme on Arhat Buuddha in dynasty of Koryo(高麗), were held ceremony of Arhat or ceremony of 500 Araht.
      But present 16th Arhat sculpture left were, inth latter half of the Choseon(朝鮮) dynasty, were understood the consequence of popular Jenism and lively Buddhism's working after double ware and that was compulsoried Buddhism on social to got a sort of social event to make abig role to save terrible country war.
      They said that Buddhistic thought was able to popular one, and then, was presented strong about Buddhism Art.
      Especially, Because peole were interested in 16th Arhat and they were much popular to general people highly, regarding to priests, be sculpturing 16th Arhat a lot, as discipline the extreme themselves.
      Under centural back ground, had worked 16th Arhat sculpture in 17th century, and they were expecting to be seen aspect more getting hardening and diagrammatic out of free and actual skill in the early part of the 18th centu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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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kakao i 다국어 번역

      본 논문은 조선후기 십육나한상 중에서 발원문이나 편액 등을 통해서 제작연대가 정확하게 밝혀진 17세기의 십육나한상을 연구대상으로 하였으며, 이들을 통해서 그간 불보살상에 비해서 소홀히 다루어진 조각승의 양식을 고찰하고자 하였다.
      십육나한은 주로 『법주기』에 근거하여 말하였지만 한역 『법주기』에 나오는 나한의 거주처나 권속의 수는 티베트본과 차이가 나는데 이러한 차이가 나는 것은 어디에 근거한 것인지는 모르나 번역상의 오류라고 생각된다. 물론 한국에서는 티베트본보다는 한역본이 유통되었기 때문에 실제로 티베트본을 따른 십육나한상은 없겠으나, 십육나한이 거주하는 곳이나 권속의 수가 절대적인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의 나한신앙은 고려시대와는 다른 양상을 보여주는데 고려시대에는 국가의 患難을 물리치기 위한 거국적인 소원이 많았던 것에 반해 조선시대로 들어서면 개인의 기복적인 신앙으로 바뀐다. 이는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중앙에서 불교를 대하는 태도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나한신앙이 본질적인 면이 변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또한 조선시대에 빈두로존자는 나반신앙의 모태 혹은 빈두로존자에 대한 신앙의 확대라고 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이것은 결국 나한신앙이 확대·발전된 한 형태로 볼 수 있으리라 생각하며, 조선시대에 나한신앙이 성행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조선후기 십육나한의 배치형식에서 주목할 점은 석가삼존불의 구성이 석가·문수·보현에서 석가·미륵·제화갈라로 바뀐 점이다. 이것은 『법화경』이 널리 유통된 것과 관련된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십육나한상을 봉안할 때 또 하나 주목할 점은 천인상이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기록상으로 천인상이 가장 먼저 등장하는 곳은 1633년 김제 귀신사이나 1624년 순천 송광사의 응진당에서도 천인상이 배치된 것을 알 수 있다. 천인상의 등장과 관련하여서는 어떤 기록도 현재 찾아볼 수 없으나 나한과 천인은 모두 불법을 보호하는 역할을 맡았기 때문에 이러한 공통점으로 인해 응진전에 등장하게 된 것이라고 본다.
      도상에 대해서는 주로 『삼재도회』와 같은 화보류의 영향으로 1624년 순천 송광사의 나한상이 제작되었으나 이곳의 도상을 그대로 모방하지 않고 제작자별로 조금씩 달라지는 양상을 보이며, 시간이 뒤로 갈수록 도식화되는 모습을 보인다. 예를 들어 포슬나한상의 경우 17세기 초반에는 무릎을 끌어 앉고 먼 곳을 응시하는 모습이었으나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초반에 이르면 한 쪽 무릎을 끌어 앉고 응시하는 지점이 가까워지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선후기에는 왜란과 호란으로 인해서 국토가 피폐해졌으며 이 과정에서 의승군의 활약으로 인해 수많은 불사가 진행된다. 많은 사찰이 재건되고 불상이 조성되었고 이 때 조성된 불상에서는 현재 많은 복장발원문이 발견되었으며, 조선후기 십육나한상의 경우에도 많은 복장발원문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양식을 연구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이전에 고려와 조선전기의 양식에서는 사실적인 경향의 나한상이 있었고, 주로 얼굴은 부각하면서 신체의 표현은 간략하게 하거나 누적적으로 표현하는 상이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양식 경향은 17세기 초반 사실적인 십육나한상의 제작에도 영향을 끼친 것으로 생각한다.
      17세기에는 응원과 인균, 무염, 승호, 경탄, 색난 등이 십육나한상을 제작하였는데 불사가 활발히 진행되는 기간이어서인지 도상도 다양하면서 그 조각 양식이 각각 개성이 넘쳤다. 응원과 인균의 십육나한상은 고요한 분위기를 자아내면서 사실적인 양감과 세부 표현이 두드러지며, 옷의 실물감이 느껴졌으며, 나한이 가지고 있는 수행하는 자로서의 본질을 충실하게 표현하였다고 본다.
      무염이 수화원으로 제작한 완주 송광사의 십육나한상의 경우는 도상에서 조선후기에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함이 있는데 이것은 완주 송광사를 재건하면서 많은 조각승들이 참여하였기 때문에 다양성과 독특함을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승호가 조성한 청도 덕사의 십육나한상은 비교적 밋밋한 양감과 괴체화된 몸의 표현을 볼 수 있으며, 도상적으로는 화보류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지 않으며, 이러한 양상은 달성 용연사, 남해 용문사, 김해 은하사 등의 십육나한상에서도 비슷한 경향을 보인다. 이것은 승호가 화보류의 도상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인지 그 인근 지역에 화보류가 도입되지 않았기 때문인지 알 수 없으나 김천 직지사, 예천 용문사 등의 십육나한상에서는 화보류의 도입을 유추할 수 있으므로 조성하는 사람이 도상을 사용하지 않은 것으로 추측한다.
      경탄의 부안 개암사의 십육나한상은 화보도형을 수용하였으며, 17세기 초의 십육나한상의 양식보다는 신체에 대한 조형감각이 사라지는 것으로 보인다.
      17세기 후반부터 활동했던 색난의 십육나한상은 방형의 얼굴 형태에 평평해진 양감의 표현, 암좌와 나한의 옷 사이에서 튀어나오는 동물의 형태, 복두의나 풍모의 착의를 한 나한상이 없다는 점과 선정나한상이 보이지 않는 점을 특징으로 삼을 수 있다. 색난의 작품을 보면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의 이행과정에서 납작해지고, 십육나한상의 크기가 작아지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이와 같은 경향은 초변의 영광 불갑사 십육나한상에서 더욱 잘 나타난다. 17세기의 전반적인 양식은 안정된 비례와 사실적인 조형감각에 있으나 이러한 경향은 경상도 일부 지역에서 활동했던 조각승과는 거리가 있는 것으로 전라도 지역에서 활동한 조각승과 경상도에서 활동한 조각승 간의 교류는 없었던 것으로 보이며, 조각양식상으로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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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논문은 조선후기 십육나한상 중에서 발원문이나 편액 등을 통해서 제작연대가 정확하게 밝혀진 17세기의 십육나한상을 연구대상으로 하였으며, 이들을 통해서 그간 불보살상에 비해서 ...

      본 논문은 조선후기 십육나한상 중에서 발원문이나 편액 등을 통해서 제작연대가 정확하게 밝혀진 17세기의 십육나한상을 연구대상으로 하였으며, 이들을 통해서 그간 불보살상에 비해서 소홀히 다루어진 조각승의 양식을 고찰하고자 하였다.
      십육나한은 주로 『법주기』에 근거하여 말하였지만 한역 『법주기』에 나오는 나한의 거주처나 권속의 수는 티베트본과 차이가 나는데 이러한 차이가 나는 것은 어디에 근거한 것인지는 모르나 번역상의 오류라고 생각된다. 물론 한국에서는 티베트본보다는 한역본이 유통되었기 때문에 실제로 티베트본을 따른 십육나한상은 없겠으나, 십육나한이 거주하는 곳이나 권속의 수가 절대적인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의 나한신앙은 고려시대와는 다른 양상을 보여주는데 고려시대에는 국가의 患難을 물리치기 위한 거국적인 소원이 많았던 것에 반해 조선시대로 들어서면 개인의 기복적인 신앙으로 바뀐다. 이는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중앙에서 불교를 대하는 태도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나한신앙이 본질적인 면이 변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또한 조선시대에 빈두로존자는 나반신앙의 모태 혹은 빈두로존자에 대한 신앙의 확대라고 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이것은 결국 나한신앙이 확대·발전된 한 형태로 볼 수 있으리라 생각하며, 조선시대에 나한신앙이 성행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조선후기 십육나한의 배치형식에서 주목할 점은 석가삼존불의 구성이 석가·문수·보현에서 석가·미륵·제화갈라로 바뀐 점이다. 이것은 『법화경』이 널리 유통된 것과 관련된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십육나한상을 봉안할 때 또 하나 주목할 점은 천인상이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기록상으로 천인상이 가장 먼저 등장하는 곳은 1633년 김제 귀신사이나 1624년 순천 송광사의 응진당에서도 천인상이 배치된 것을 알 수 있다. 천인상의 등장과 관련하여서는 어떤 기록도 현재 찾아볼 수 없으나 나한과 천인은 모두 불법을 보호하는 역할을 맡았기 때문에 이러한 공통점으로 인해 응진전에 등장하게 된 것이라고 본다.
      도상에 대해서는 주로 『삼재도회』와 같은 화보류의 영향으로 1624년 순천 송광사의 나한상이 제작되었으나 이곳의 도상을 그대로 모방하지 않고 제작자별로 조금씩 달라지는 양상을 보이며, 시간이 뒤로 갈수록 도식화되는 모습을 보인다. 예를 들어 포슬나한상의 경우 17세기 초반에는 무릎을 끌어 앉고 먼 곳을 응시하는 모습이었으나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초반에 이르면 한 쪽 무릎을 끌어 앉고 응시하는 지점이 가까워지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선후기에는 왜란과 호란으로 인해서 국토가 피폐해졌으며 이 과정에서 의승군의 활약으로 인해 수많은 불사가 진행된다. 많은 사찰이 재건되고 불상이 조성되었고 이 때 조성된 불상에서는 현재 많은 복장발원문이 발견되었으며, 조선후기 십육나한상의 경우에도 많은 복장발원문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양식을 연구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이전에 고려와 조선전기의 양식에서는 사실적인 경향의 나한상이 있었고, 주로 얼굴은 부각하면서 신체의 표현은 간략하게 하거나 누적적으로 표현하는 상이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양식 경향은 17세기 초반 사실적인 십육나한상의 제작에도 영향을 끼친 것으로 생각한다.
      17세기에는 응원과 인균, 무염, 승호, 경탄, 색난 등이 십육나한상을 제작하였는데 불사가 활발히 진행되는 기간이어서인지 도상도 다양하면서 그 조각 양식이 각각 개성이 넘쳤다. 응원과 인균의 십육나한상은 고요한 분위기를 자아내면서 사실적인 양감과 세부 표현이 두드러지며, 옷의 실물감이 느껴졌으며, 나한이 가지고 있는 수행하는 자로서의 본질을 충실하게 표현하였다고 본다.
      무염이 수화원으로 제작한 완주 송광사의 십육나한상의 경우는 도상에서 조선후기에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함이 있는데 이것은 완주 송광사를 재건하면서 많은 조각승들이 참여하였기 때문에 다양성과 독특함을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승호가 조성한 청도 덕사의 십육나한상은 비교적 밋밋한 양감과 괴체화된 몸의 표현을 볼 수 있으며, 도상적으로는 화보류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지 않으며, 이러한 양상은 달성 용연사, 남해 용문사, 김해 은하사 등의 십육나한상에서도 비슷한 경향을 보인다. 이것은 승호가 화보류의 도상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인지 그 인근 지역에 화보류가 도입되지 않았기 때문인지 알 수 없으나 김천 직지사, 예천 용문사 등의 십육나한상에서는 화보류의 도입을 유추할 수 있으므로 조성하는 사람이 도상을 사용하지 않은 것으로 추측한다.
      경탄의 부안 개암사의 십육나한상은 화보도형을 수용하였으며, 17세기 초의 십육나한상의 양식보다는 신체에 대한 조형감각이 사라지는 것으로 보인다.
      17세기 후반부터 활동했던 색난의 십육나한상은 방형의 얼굴 형태에 평평해진 양감의 표현, 암좌와 나한의 옷 사이에서 튀어나오는 동물의 형태, 복두의나 풍모의 착의를 한 나한상이 없다는 점과 선정나한상이 보이지 않는 점을 특징으로 삼을 수 있다. 색난의 작품을 보면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의 이행과정에서 납작해지고, 십육나한상의 크기가 작아지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이와 같은 경향은 초변의 영광 불갑사 십육나한상에서 더욱 잘 나타난다. 17세기의 전반적인 양식은 안정된 비례와 사실적인 조형감각에 있으나 이러한 경향은 경상도 일부 지역에서 활동했던 조각승과는 거리가 있는 것으로 전라도 지역에서 활동한 조각승과 경상도에서 활동한 조각승 간의 교류는 없었던 것으로 보이며, 조각양식상으로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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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차 (Table of Contents)

      • Ⅰ. 머리말 = 1
      • Ⅱ. 十六羅漢의 成立과 羅漢信仰 = 5
      • 1. 十六羅漢의 成立과 性格 = 5
      • 2. 羅漢信仰의 起源과 展開 = 10
      • 3. 朝鮮時代의 羅漢信仰 = 22
      • Ⅰ. 머리말 = 1
      • Ⅱ. 十六羅漢의 成立과 羅漢信仰 = 5
      • 1. 十六羅漢의 成立과 性格 = 5
      • 2. 羅漢信仰의 起源과 展開 = 10
      • 3. 朝鮮時代의 羅漢信仰 = 22
      • Ⅲ. 朝鮮後期 十六羅漢像의 配置形式과 圖像 = 30
      • 1. 朝鮮後期 十六羅漢像의 配置形式 = 30
      • 2. 朝鮮後期 十六羅漢像의 圖像 = 35
      • Ⅳ. 17世紀 十六羅漢像의 樣式 = 51
      • 1. 高麗·朝鮮前期 羅漢像의 樣式 = 51
      • 2. 17世紀 十六羅漢像의 樣式 = 57
      • 1) 紀年作 十六羅漢像의 樣式 = 58
      • 2) 紀年作 十六羅漢像의 樣式 比較 = 79
      • Ⅴ. 맺음말 = 87
      • 【表目錄】 = 90
      • 【圖版目錄】 = 91
      • 【參考文獻】 = 98
      • 【圖版】 = 107
      • 【Abstract】 = 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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