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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 강점기 衡平運動의 지역적 전개 = Regional development of the Hyeongpyeong movement during the Japanese occupational peri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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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kakao i 다국어 번역

    본 논문은 형평사의 실질적 기반인 지·분사의 활동을 주목하고, 이를 통해서 각 지역별·권역별 형평운동의 특징을 밝히고자 하는 데에 목적을 두고 있다. 또한, 각 지·분사에 참여하거나 후원하였던 인물들의 계층과 성향을 밝히고자 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이는 본사와 분사가 과연 동질성을 유지하고 있었겠느냐 하는 의문에서 출발한 것이다. 본시 운동이란 지역의 실정에 따라 얼마든지 운동의 양상이 다르게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지·분사 차원의 작업은 이전의 연구 성과를 구체화시킬 뿐만 아니라 연구 영역을 보다 확장시키는 의의가 있을 것이다. 또한, 기존에 미진했던 지역 연구에도 보탬이 될 것이다.
    필자가 1920년대 이후 발간된 일제 측의 정보 자료와 한국 측의 잡지 그리고 일간지에 보도된 형평운동 관련 자료를 분석한 결과, 형평사 각 지·분사의 활동을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특징으로 정리할 수 있었다.
    영남에서는 사회 운동과 형평운동이 활발한 지역이 대체로 일치하였다. 형평 운동에서는 주로 인권 투쟁과 경제적 권익수호 운동에 적극적이었다. 경남 부산은 차별 철폐를 위한 인권 투쟁을 운동의 기본 목표로 삼고 있으면서도, 건피장과 세금 문제, 무산 사원 보호, 산업부 설치 등 경제 문제에 많은 비중을 두고 있었다. 경북 김천은 우피의 집산지로, 지례면은 번식이 뛰어나고 맛이 좋은 지례돈으로 전국적으로 유명한 지역이었다. 이에 따라 사원들의 숙원 사업인 ‘피혁 조합’을 설립하고자 한 노력이 돋보인다. 전체적으로 볼 때 경남·북 지역에 설치된 지·분사 수에 큰 차이가 나지 않으면서도 경북은 활동이 부진하였다. 이는 창립만 했지 경남과 달리 활동을 뒷받침할 만한 인물이 없었기 때문이다.
    지역적으로 볼 때 발상지인 진주를 비롯한 부산과 마산, 대구, 안동이 활발하였다. 이들 지역은 대부분 사회 단체와 긴밀한 유대 관계를 맺으면서 연대 활동을 조직적으로 전개하고자 하였다. 특히, 형평운동에 간여했던 사회 운동가들은 여러 단체에 중복 가입하여 연대 활동에 중추적 역할을 하였다. 이는 사회 운동이 미약하였던 호서 지방과 확연히 구별되는 점이다.
    주도 인물을 살펴보면, 진주의 강상호·신현수, 고성의 천두상과 전갑봉, 거창의 황태성과 주남재, 김해의 김종범·정우영·인동철, 대구의 정운해·이상훈, 안동의 김남수와 이준태, 김천의 홍보용 등은 지역 내 사회 운동의 핵심 인물들이었으며 이들 중 상당수가 신문 지국장 겸 기자였으며 사회주의자였다. 일제가 조선을 통치하는데 걸림돌이 되었던 것이 사회주의를 수용한 이들 지식인들이었다. 영남은 바로 이들 사회주의자들이 형평사 지·분사에 투입되어 형평운동을 주도하거나 후원하였다는 특징이 있다. 한편, 지·분사에 참여하였던 일부 인사 가운데 조우제·천석구가 보천교도의 신분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호서 지방은 대체로 사회 운동이 부진했던 까닭에 형평운동도 부진한 편이었으며, 형평운동과 사회 운동 단체의 연대 활동 또한 없었다. 이는 분사 조직에 고문이 없었다는 데서도 잘 알 수 있는 일이다. 또, 지역 내 각종 사회 운동 단체나 사회주의 성향의 운동가들은 형평 분사 창립식에 거의 참여하지 않았다. 형평사가 본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회 운동 단체와의 제휴 문제는 아주 절실한 것이었다. 이는 형평운동을 방해하는 세력을 배척하기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다. 또, 사회 운동 단체의 입장에서도 형평사를 이용하는 것이 운동의 주도권 장악이라는 측면에서도 유리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러한 사회 운동 단체의 지지나 제휴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이는 사회 운동이 활발하였던 영남 지방이나 호남 지방과 다른 호서 지방의 지역적 특성을 반영해주는 결과로 보인다. 주로 교육 운동과 일제의 경제 침탈에 대응하기 위해 '형평산업주식회사'와 '온천산업주식회사' 설립에 지·분사의 역량이 집중되었다.
    전체적으로 충남이 충북보다 활발했으며, 충남은 특히 내포 지역이 아주 활발하였다. 충남에서는 차령 이남의 공주 문화권이 호서 유림의 본거지로서 양반과 유학 세력이 강력한 곳이었던 반면에, 내포 지역은 일부 양반과 유학 세력이 있었지만 상대적으로 차령 이남보다 세력이 약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민에 대한 지배층의 통제가 다소 이완된 곳이었다고 할 수 있다. 충북은 충남보다 양반 세력이 더 강해 상대적으로 보수성이 더 강하였다. 따라서 활동이 침체될 수밖에 없었다. 충북은 도 연합회 설립 문제가 1931년 9월에 와서 논의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도 그러하다.
    호남에서는 사회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지만, 형평운동은 미약하였다. 호남의 형평운동은 생존권 수호운동에 중점을 두고 있었으며, 사회 운동 단체와의 연계를 통해서 ‘계급 해방’에도 관심을 갖고 있었다.
    주도 인물을 살펴보면, 일부는 사회주의자로서 노동 운동이나 농민 운동을 주도하거나, 기독교 신자이면서도 사회주의 사상을 수용했던 인물들이었으며, 동아일보나 조선일보의 기자 신분을 가지고 언론 활동을 전개했던 지식인들이었다.
    참여 인물 가운데 전북은 농민 운동의 이력을 가진 인물이 없으나, 전남은 노동 운동뿐만 아니라 농민 운동, 청년 운동에 가담하고 있는 인물들이 형평운동에 간여하고 있다는 특징이 있다. 이들의 주된 활동은 형평운동의 자문 역할 뿐만 아니라 형평사 창립 시 내빈으로 참석하여 축사를 하거나, 형평운동과 사회 운동을 연결해주는 것으로서 고문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한편, 언론인들은 형평 운동의 취지와 실상을 일반인들에게 널리 알리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 가운데 이리의 김병수, 정읍의 최중진, 남원의 이두용, 광주의 서정희 등은 지식인들로서 형평운동 사상 호남 지방에서 선구자적 의미를 가진다. 특히, 김병수와 이두용, 서정희는 항일 운동의 전력이 있는 인물들이었다.
    지역적으로 볼 때 전북은 이리와 전주, 군산 분사에서 활동이 활발하였으며 이들 지역 모두 외곽 단체인 형평 청년회가 조직되었다. 전남은 광주와 순천 지역이 비교적 활발하였다. 이들 지역 역시 형평 청년회가 조직되었다. 광주는 형평 청년회 창립식에 인근의 사회 운동 12단체가 참석하여 직접적인 지지를 표명하였다. 이는 호남 지방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경우이다. 순천은 관내 지역은 물론 인근 지역의 각종 노동 단체, 청년 단체, 농민 단체와 긴밀한 협조 관계를 맺음으로써 분사 활동을 활성화시키고자 하였다. 이로보아 전남은 백정들의 신분 해방과 함께 ‘계급 해방’에도 관심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전북은 백정들에 대한 차별 대우를 절멸하려는 인권 운동보다 수육 판매 문제나 이윤이 많은 건피에 일찍부터 관심을 보이는 등 경제 활동에 치중하고 있었다. 이는 운동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활동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서라도 필요한 투쟁이었다. 당시 호남 지방의 백정들은 주로 노동자인 도부나 피혁 관계 노동자 또는 竹·柳細工으로 가난한 백정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차별 철폐를 위한 인권 운동보다 생존권 수호를 위한 경제 투쟁이 우선시되었을 것이다.
    다음은 형평운동에 맞서 일어난 ‘반형평 사건’에 관한 내용이다. 반형평 사건 가운데 가장 많은 건수를 기록하고 있는 유형이 바로 일반민과 백정의 충돌이다. 그런데 일반민과 백정 충돌의 경우, 중립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시종 방관하는 태도로 일관했던 일제로 인해 결국은 폭동까지 가게 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반형평 사건에 대한 권역별 특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반형평 사건은 영남은 진주와 울산에서, 호서는 홍성과 제천에서, 호남은 군산과 목포에서 가장 먼저 시작되었다. 이 가운데 진주와 제천에서 창립식 방해 사건이 있었다. 둘째, 수 백 명 이상 일반인들이 동원되어 형평 사원과 대치했던 반형평 사건의 대표적인 사건은, 영남은 진주를 위시로 김해·예천·현풍에서, 호서는 논산·입장·예산에서, 호남은 정읍·함열·이리에서 발생하였다. 이 가운데 충돌 사건의 규모가 가장 컸던 것은 김해였으며, 가장 오랫동안 지속된 사건은 예천이었다. 셋째, 호서 지방에서는 음주와 흡연으로 발생된 ‘계급전’이 있었다. 이는 호서 지방이 영남 지방 못지않은 뿌리 깊은 신분 의식을 가지고 있음을 뒷받침하는 것이다. 반형평 사건은 창립식을 방해하거나 일반민들의 반말과 모욕적인 언사로 말미암아 빚어진 사건들이 대부분이었다. 넷째, 호남 지방 반형평 사건에 대한 대처 방안으로 가장 두드러지는 것이 바로 항의 방문과 대책 요구로 이러한 활동이 어느 정도 가시적인 성과를 나타내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영남의 예천 사건과 달리 인근 지역의 사회 단체나 사상 단체와 연대하는 활동이 거의 없었다고 하는 점도 지역적인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이상과 같은 연구를 통해서 형평운동을 민족해방운동으로 볼 수 있느냐 하는 의문이 제기된다. 지금까지 형평운동은 청년운동, 노동운동, 농민운동, 학생운동, 여성운동과 함께 민족해방운동의 한 부문으로 인식되고 평가되어 왔다. 구체적으로 형평 사원 자녀들의 입학을 권유하는 순회위원 파견, 사원 자녀 교육 지원 기금 조성, 형평학교 설립 추진, 신문·잡지의 구독을 통해 실력 양성을 강조했다는 시각이다. 또, 필자의 시각으로 봐도 형평사 지·분사 가운데 일부는 민족주의적 색채가 있는 지역도 있었고, 일부는 사회주의적 색채가 농후한 지역도 있었다. 또한, 호서 지방에서는 일제의 경제 침탈에 대응하고자 했던 점이 엿보이기도 하며, 천안, 대구, 영산 등지에서는 일제의 ‘野犬 撲殺’ 지시를 정면으로 거부하는 등 형평사에서 벌인 민족 운동에 대한 경향성을 부정하기 어려운 측면도 보인다. 특히, 경남 합천 삼가에서 있었던 반형평 사건 진압 과정에서 벌어진 일본인과의 충돌은 주목할 만하다. 경찰의 불공평한 처사에 사원들이 분개하여 합천·진주·경성 등지에 후원을 요청하고, 연대 활동을 도모하면서 조직적으로 대응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형평사에서 지속적으로 추진했던 ‘피혁회사’나 ‘주식회사’의 설립은 결과적으로 실패하였다. 여기에는 회사 설립에 필요한 자금 문제 뿐 아니라 근대적인 회사 경영 능력 등 많은 문제가 내포되어 있을 것이다. 또, 야견 박살은 일제의 철저한 비호 아래 실시된 측면도 없지 않았다. 또한, 형평운동은 정치 투쟁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지만, 결국은 정치 운동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경제 투쟁으로 국한되고 말았다. 이는 조선이 일본으로부터 독립된다 하더라도 조선의 독립 자체가 천민들에 대한 차별과 멸시, 신분 해방, 인간 해방을 가져다 줄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민족 운동은 2차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형평사가 일제 강점 기간 동안 가장 오랫동안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일제가 형평사를 정치 단체가 아닌 사회 단체로 보았기 때문이다. 일제는 1920년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형평 단체를 사회주의 색채가 있는 결사로 분류하여 감시하고 있었으나, 사상 단체와는 궤를 달리하는 것으로 판단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형평 운동은 봉건적 유제를 타파하고자 한 사회 개혁 운동으로, 또 백정들의 신분 차별 철폐를 부르짖었던 인권 운동이자 권익 신장 운동으로서 충분한 가치와 역사적 의의를 가진다. 그러나 대동사로 개칭되어 이해 관계가 동일한 자들의 친목 단체, 경제적 이익 단체로 전락하였다. 이에 따라 인권 운동을 표방했던 형평 운동의 본래 목적마저 변질되어 그 의의를 잃게 되면서 대동사는 해체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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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논문은 형평사의 실질적 기반인 지·분사의 활동을 주목하고, 이를 통해서 각 지역별·권역별 형평운동의 특징을 밝히고자 하는 데에 목적을 두고 있다. 또한, 각 지·분사에 참여하거나 ...

    본 논문은 형평사의 실질적 기반인 지·분사의 활동을 주목하고, 이를 통해서 각 지역별·권역별 형평운동의 특징을 밝히고자 하는 데에 목적을 두고 있다. 또한, 각 지·분사에 참여하거나 후원하였던 인물들의 계층과 성향을 밝히고자 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이는 본사와 분사가 과연 동질성을 유지하고 있었겠느냐 하는 의문에서 출발한 것이다. 본시 운동이란 지역의 실정에 따라 얼마든지 운동의 양상이 다르게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지·분사 차원의 작업은 이전의 연구 성과를 구체화시킬 뿐만 아니라 연구 영역을 보다 확장시키는 의의가 있을 것이다. 또한, 기존에 미진했던 지역 연구에도 보탬이 될 것이다.
    필자가 1920년대 이후 발간된 일제 측의 정보 자료와 한국 측의 잡지 그리고 일간지에 보도된 형평운동 관련 자료를 분석한 결과, 형평사 각 지·분사의 활동을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특징으로 정리할 수 있었다.
    영남에서는 사회 운동과 형평운동이 활발한 지역이 대체로 일치하였다. 형평 운동에서는 주로 인권 투쟁과 경제적 권익수호 운동에 적극적이었다. 경남 부산은 차별 철폐를 위한 인권 투쟁을 운동의 기본 목표로 삼고 있으면서도, 건피장과 세금 문제, 무산 사원 보호, 산업부 설치 등 경제 문제에 많은 비중을 두고 있었다. 경북 김천은 우피의 집산지로, 지례면은 번식이 뛰어나고 맛이 좋은 지례돈으로 전국적으로 유명한 지역이었다. 이에 따라 사원들의 숙원 사업인 ‘피혁 조합’을 설립하고자 한 노력이 돋보인다. 전체적으로 볼 때 경남·북 지역에 설치된 지·분사 수에 큰 차이가 나지 않으면서도 경북은 활동이 부진하였다. 이는 창립만 했지 경남과 달리 활동을 뒷받침할 만한 인물이 없었기 때문이다.
    지역적으로 볼 때 발상지인 진주를 비롯한 부산과 마산, 대구, 안동이 활발하였다. 이들 지역은 대부분 사회 단체와 긴밀한 유대 관계를 맺으면서 연대 활동을 조직적으로 전개하고자 하였다. 특히, 형평운동에 간여했던 사회 운동가들은 여러 단체에 중복 가입하여 연대 활동에 중추적 역할을 하였다. 이는 사회 운동이 미약하였던 호서 지방과 확연히 구별되는 점이다.
    주도 인물을 살펴보면, 진주의 강상호·신현수, 고성의 천두상과 전갑봉, 거창의 황태성과 주남재, 김해의 김종범·정우영·인동철, 대구의 정운해·이상훈, 안동의 김남수와 이준태, 김천의 홍보용 등은 지역 내 사회 운동의 핵심 인물들이었으며 이들 중 상당수가 신문 지국장 겸 기자였으며 사회주의자였다. 일제가 조선을 통치하는데 걸림돌이 되었던 것이 사회주의를 수용한 이들 지식인들이었다. 영남은 바로 이들 사회주의자들이 형평사 지·분사에 투입되어 형평운동을 주도하거나 후원하였다는 특징이 있다. 한편, 지·분사에 참여하였던 일부 인사 가운데 조우제·천석구가 보천교도의 신분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호서 지방은 대체로 사회 운동이 부진했던 까닭에 형평운동도 부진한 편이었으며, 형평운동과 사회 운동 단체의 연대 활동 또한 없었다. 이는 분사 조직에 고문이 없었다는 데서도 잘 알 수 있는 일이다. 또, 지역 내 각종 사회 운동 단체나 사회주의 성향의 운동가들은 형평 분사 창립식에 거의 참여하지 않았다. 형평사가 본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회 운동 단체와의 제휴 문제는 아주 절실한 것이었다. 이는 형평운동을 방해하는 세력을 배척하기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다. 또, 사회 운동 단체의 입장에서도 형평사를 이용하는 것이 운동의 주도권 장악이라는 측면에서도 유리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러한 사회 운동 단체의 지지나 제휴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이는 사회 운동이 활발하였던 영남 지방이나 호남 지방과 다른 호서 지방의 지역적 특성을 반영해주는 결과로 보인다. 주로 교육 운동과 일제의 경제 침탈에 대응하기 위해 '형평산업주식회사'와 '온천산업주식회사' 설립에 지·분사의 역량이 집중되었다.
    전체적으로 충남이 충북보다 활발했으며, 충남은 특히 내포 지역이 아주 활발하였다. 충남에서는 차령 이남의 공주 문화권이 호서 유림의 본거지로서 양반과 유학 세력이 강력한 곳이었던 반면에, 내포 지역은 일부 양반과 유학 세력이 있었지만 상대적으로 차령 이남보다 세력이 약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민에 대한 지배층의 통제가 다소 이완된 곳이었다고 할 수 있다. 충북은 충남보다 양반 세력이 더 강해 상대적으로 보수성이 더 강하였다. 따라서 활동이 침체될 수밖에 없었다. 충북은 도 연합회 설립 문제가 1931년 9월에 와서 논의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도 그러하다.
    호남에서는 사회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지만, 형평운동은 미약하였다. 호남의 형평운동은 생존권 수호운동에 중점을 두고 있었으며, 사회 운동 단체와의 연계를 통해서 ‘계급 해방’에도 관심을 갖고 있었다.
    주도 인물을 살펴보면, 일부는 사회주의자로서 노동 운동이나 농민 운동을 주도하거나, 기독교 신자이면서도 사회주의 사상을 수용했던 인물들이었으며, 동아일보나 조선일보의 기자 신분을 가지고 언론 활동을 전개했던 지식인들이었다.
    참여 인물 가운데 전북은 농민 운동의 이력을 가진 인물이 없으나, 전남은 노동 운동뿐만 아니라 농민 운동, 청년 운동에 가담하고 있는 인물들이 형평운동에 간여하고 있다는 특징이 있다. 이들의 주된 활동은 형평운동의 자문 역할 뿐만 아니라 형평사 창립 시 내빈으로 참석하여 축사를 하거나, 형평운동과 사회 운동을 연결해주는 것으로서 고문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한편, 언론인들은 형평 운동의 취지와 실상을 일반인들에게 널리 알리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 가운데 이리의 김병수, 정읍의 최중진, 남원의 이두용, 광주의 서정희 등은 지식인들로서 형평운동 사상 호남 지방에서 선구자적 의미를 가진다. 특히, 김병수와 이두용, 서정희는 항일 운동의 전력이 있는 인물들이었다.
    지역적으로 볼 때 전북은 이리와 전주, 군산 분사에서 활동이 활발하였으며 이들 지역 모두 외곽 단체인 형평 청년회가 조직되었다. 전남은 광주와 순천 지역이 비교적 활발하였다. 이들 지역 역시 형평 청년회가 조직되었다. 광주는 형평 청년회 창립식에 인근의 사회 운동 12단체가 참석하여 직접적인 지지를 표명하였다. 이는 호남 지방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경우이다. 순천은 관내 지역은 물론 인근 지역의 각종 노동 단체, 청년 단체, 농민 단체와 긴밀한 협조 관계를 맺음으로써 분사 활동을 활성화시키고자 하였다. 이로보아 전남은 백정들의 신분 해방과 함께 ‘계급 해방’에도 관심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전북은 백정들에 대한 차별 대우를 절멸하려는 인권 운동보다 수육 판매 문제나 이윤이 많은 건피에 일찍부터 관심을 보이는 등 경제 활동에 치중하고 있었다. 이는 운동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활동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서라도 필요한 투쟁이었다. 당시 호남 지방의 백정들은 주로 노동자인 도부나 피혁 관계 노동자 또는 竹·柳細工으로 가난한 백정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차별 철폐를 위한 인권 운동보다 생존권 수호를 위한 경제 투쟁이 우선시되었을 것이다.
    다음은 형평운동에 맞서 일어난 ‘반형평 사건’에 관한 내용이다. 반형평 사건 가운데 가장 많은 건수를 기록하고 있는 유형이 바로 일반민과 백정의 충돌이다. 그런데 일반민과 백정 충돌의 경우, 중립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시종 방관하는 태도로 일관했던 일제로 인해 결국은 폭동까지 가게 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반형평 사건에 대한 권역별 특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반형평 사건은 영남은 진주와 울산에서, 호서는 홍성과 제천에서, 호남은 군산과 목포에서 가장 먼저 시작되었다. 이 가운데 진주와 제천에서 창립식 방해 사건이 있었다. 둘째, 수 백 명 이상 일반인들이 동원되어 형평 사원과 대치했던 반형평 사건의 대표적인 사건은, 영남은 진주를 위시로 김해·예천·현풍에서, 호서는 논산·입장·예산에서, 호남은 정읍·함열·이리에서 발생하였다. 이 가운데 충돌 사건의 규모가 가장 컸던 것은 김해였으며, 가장 오랫동안 지속된 사건은 예천이었다. 셋째, 호서 지방에서는 음주와 흡연으로 발생된 ‘계급전’이 있었다. 이는 호서 지방이 영남 지방 못지않은 뿌리 깊은 신분 의식을 가지고 있음을 뒷받침하는 것이다. 반형평 사건은 창립식을 방해하거나 일반민들의 반말과 모욕적인 언사로 말미암아 빚어진 사건들이 대부분이었다. 넷째, 호남 지방 반형평 사건에 대한 대처 방안으로 가장 두드러지는 것이 바로 항의 방문과 대책 요구로 이러한 활동이 어느 정도 가시적인 성과를 나타내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영남의 예천 사건과 달리 인근 지역의 사회 단체나 사상 단체와 연대하는 활동이 거의 없었다고 하는 점도 지역적인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이상과 같은 연구를 통해서 형평운동을 민족해방운동으로 볼 수 있느냐 하는 의문이 제기된다. 지금까지 형평운동은 청년운동, 노동운동, 농민운동, 학생운동, 여성운동과 함께 민족해방운동의 한 부문으로 인식되고 평가되어 왔다. 구체적으로 형평 사원 자녀들의 입학을 권유하는 순회위원 파견, 사원 자녀 교육 지원 기금 조성, 형평학교 설립 추진, 신문·잡지의 구독을 통해 실력 양성을 강조했다는 시각이다. 또, 필자의 시각으로 봐도 형평사 지·분사 가운데 일부는 민족주의적 색채가 있는 지역도 있었고, 일부는 사회주의적 색채가 농후한 지역도 있었다. 또한, 호서 지방에서는 일제의 경제 침탈에 대응하고자 했던 점이 엿보이기도 하며, 천안, 대구, 영산 등지에서는 일제의 ‘野犬 撲殺’ 지시를 정면으로 거부하는 등 형평사에서 벌인 민족 운동에 대한 경향성을 부정하기 어려운 측면도 보인다. 특히, 경남 합천 삼가에서 있었던 반형평 사건 진압 과정에서 벌어진 일본인과의 충돌은 주목할 만하다. 경찰의 불공평한 처사에 사원들이 분개하여 합천·진주·경성 등지에 후원을 요청하고, 연대 활동을 도모하면서 조직적으로 대응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형평사에서 지속적으로 추진했던 ‘피혁회사’나 ‘주식회사’의 설립은 결과적으로 실패하였다. 여기에는 회사 설립에 필요한 자금 문제 뿐 아니라 근대적인 회사 경영 능력 등 많은 문제가 내포되어 있을 것이다. 또, 야견 박살은 일제의 철저한 비호 아래 실시된 측면도 없지 않았다. 또한, 형평운동은 정치 투쟁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지만, 결국은 정치 운동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경제 투쟁으로 국한되고 말았다. 이는 조선이 일본으로부터 독립된다 하더라도 조선의 독립 자체가 천민들에 대한 차별과 멸시, 신분 해방, 인간 해방을 가져다 줄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민족 운동은 2차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형평사가 일제 강점 기간 동안 가장 오랫동안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일제가 형평사를 정치 단체가 아닌 사회 단체로 보았기 때문이다. 일제는 1920년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형평 단체를 사회주의 색채가 있는 결사로 분류하여 감시하고 있었으나, 사상 단체와는 궤를 달리하는 것으로 판단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형평 운동은 봉건적 유제를 타파하고자 한 사회 개혁 운동으로, 또 백정들의 신분 차별 철폐를 부르짖었던 인권 운동이자 권익 신장 운동으로서 충분한 가치와 역사적 의의를 가진다. 그러나 대동사로 개칭되어 이해 관계가 동일한 자들의 친목 단체, 경제적 이익 단체로 전락하였다. 이에 따라 인권 운동을 표방했던 형평 운동의 본래 목적마저 변질되어 그 의의를 잃게 되면서 대동사는 해체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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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차 (Table of Contents)

    • I. 머리말 1
    • 1. 연구의 필요성과 목적 1
    • 2. 연구의 현황과 과제 5
    • 3. 연구 자료 검토 8
    • Ⅱ. 형평운동의 배경과 전개 과정 14
    • I. 머리말 1
    • 1. 연구의 필요성과 목적 1
    • 2. 연구의 현황과 과제 5
    • 3. 연구 자료 검토 8
    • Ⅱ. 형평운동의 배경과 전개 과정 14
    • 1. 근대 이후 백정의 생활과 사회적 지위 14
    • 2. 형평사 창립의 사회·경제적 배경 27
    • 3. 형평사의 창립과 지·분사의 결성 37
    • 4. 형평사의 노선 갈등과 외곽 조직의 결성 46
    • 5. 일제의 탄압과 형평사의 해체 50
    • Ⅲ. 영남 지방 지·분사의 활동 59
    • 1. 영남 지방 형평운동의 배경 59
    • 2. 형평사 지·분사의 설립 63
    • 3. 지·분사의 활동 71
    • 1) 경남 지역 주요 지·분사의 활동 72
    • 2) 경북 지역 주요 지·분사의 활동 92
    • 4. 지·분사 활동의 특징: 인권 투쟁과 경제적 권익 수호 운동 102
    • Ⅳ. 호서 지방 지·분사의 활동 108
    • 1. 호서 지방 형평운동의 배경 108
    • 2. 형평사 지·분사 설립 112
    • 3. 지·분사의 활동 119
    • 1) 충남 지역 주요 지·분사의 활동 119
    • 2) 충북 지역 주요 지·분사의 활동 131
    • 4. 지·분사 활동의 특징: 교육 운동과 일제의 경제 침탈에 대한 대응 133
    • Ⅴ. 호남 지방 지·분사의 활동 137
    • 1. 호남 지방 형평운동의 배경 137
    • 2. 형평사 지·분사의 설립 139
    • 3. 지·분사의 활동 150
    • 1) 전북 지역 주요 지·분사의 활동 151
    • 2) 전남 지역 주요 지·분사의 활동 178
    • 4. 지·분사 활동의 특징: 생존권 수호 운동과 사회 운동과의 연계 184
    • Ⅵ. 반‘형평운동’ 사건(반형평 사건)과 각 지·분사의 대응 189
    • 1. 반형평 사건의 발생 원인과 충돌 건 수 189
    • 2. 반형평 사건 사례와 각 지·분사의 대응 199
    • 1) 영남 지방의 반형평 사건과 지·분사의 대응 200
    • 2) 호서 지방의 반형평 사건과 지·분사의 대응 217
    • 3) 호남 지방의 반형평 사건과 지·분사의 대응 230
    • 3. 반형평 사건에 대한 언론과 일제의 시각 241
    • Ⅶ. 맺음말 250
    • 참고문헌 262
    • Abstract 2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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