쿨룬 부이르에서 동북만주에 이르는 지역은 비옥한 만주와 몽골 스텝을 연결하는 중심지역으로 흉노 이래 대부분의 동북아 고대 유목국가들의 태반이 되는 핵심 요충지대다. 본 연구는 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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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 : 강원대학교, 2006
학위논문(박사) -- 강원대학교 일반대학원 , 사학과 , 2006. 8
2006
한국어
강원특별자치도
The Otchigins, Rule over the East-North Manchuria in the Age of Mongol-Y?an Empire : Focus on the change of relation with the Central Government
270p. 26cm
지도교수:주채혁
참고문헌 :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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쿨룬 부이르에서 동북만주에 이르는 지역은 비옥한 만주와 몽골 스텝을 연결하는 중심지역으로 흉노 이래 대부분의 동북아 고대 유목국가들의 태반이 되는 핵심 요충지대다. 본 연구는 이 지역을 분봉 받은 옷치긴家가 중앙정부와의 관계에서 분권적 경향을 확대하는 과정을 통해 蒙?元제국의 권력 구조를 구명하고, 그것이 차기 현지 정권 창출에 미치는 직?간접적인 영향을 살피는데 목적을 두고 있다.
동방왕가의 수장인 옷치긴家의 기반이 되는 쿨룬 부이르에서 동북 만주에 이르는 지역은 半건조의 스텝 초원지대에서 습윤한 수렵지대, 초원과 산림이 교차하는 목?농지대, 온대의 농업지대 등을 포함하는 다양한 지리적 경제적 환경을 가진 곳이다. 이러한 기반을 배경으로 옷치긴家에는 유목?목농?농업 등의 다양한 경제 형태가 혼재돼 있었기 때문에, 蒙?元제국 제왕들 중 최고의 경제력을 소유할 수 있었다. 또한 옷치긴家가 소유한 군대는 서북부 만주의, 기마사술에 능숙한 기병은 물론 동북부 만주의 삼림전투 및 동남북 만주의 산악전투에 익숙한 인력이 두루 포괄 돼 있었다. 이러한 옷치긴家의 경제적?군사적 배경은 옷치긴家가 황금씨족 최고의 권위를 유지하면서, 세력을 강화시킴은 물론이고, 蒙?元 중앙정부에 대항해 대규모 반란을 일으킬 수 있는 중요한 기반을 제공했다.
칭기스칸이 분봉을 단행했을 때 말제였던 옷치긴에게 다른 형제나 아들들보다 많은 분봉 호를 분배한 것은 칭기스칸의 옷치긴에 대한 특별한 애정뿐만 아니라 금을 공격하기 위한 치밀한 정치적 계산이 그 밑바탕에 깔려 있다. 따라서 칭기스칸은 처음부터 동방경략의 창구를 옷치긴으로 생각했고, 이러한 정치적 계산 하에 耶律留哥와 군사동맹을 맺게 하기 위해 옷치긴을 요동지역에 파견했다. 이후 요동에 대한 우선권이 옷치긴家에 주어졌으며 옷치긴家는 이를 발판으로 동북만주 지역으로 세력을 날로 확장해 갈 수 있었다. 옷치긴은 야율유가와 만나 동맹을 맺어서 몽골제국 요동 공략의 포석을 다졌으며, 칭기스칸의 1차 금국 원정에 직접 참가했다. 또한 1231년 2차 금국 원정에서도 칭기스칸의 1차 금국 원정에서와 마찬가지로 좌익군의 수장으로 참전했다.
옷치긴家는 3차례에 걸친 대규모의 반란을 주도하는 등 蒙?元 帝國史 격변의 한 중심에서의 그 물꼬를 그 당시 나름으로 터 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해냈다. 옷치긴家가 일으킨 반란은 옷치긴의 군사행동, 나얀반란과 兩都內戰 등이다. 옷치긴의 군사행동은 구육의 신속한 도착으로 실속없이 종결됐지만, 이후 옷치긴家의 군사력은 몽골제국 격동기 정치사의 큰 물꼬를 틀 때마다 중요한 변수로 작용하게 됐다. 이러한 옷치긴家의 군사력은 쿠빌라이와 아릭부케 간의 칸위 쟁탈전에서도 중요한 변수로 작용하였다. 아릭부케가 대다수 황금씨족의 지지 속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는 상황에서 쿠빌라이가 의지하고 있던 유일한 것이며, 쿠빌라이가 대칸이 될 수 있었던 결정적인 힘은 동방왕가들과 그들의 군사력이라고 할 수 있다. 쿠빌라이와 아릭부케 간의 칸위쟁탈 전쟁에서의 쿠빌라이의 승리는 바로 타가차르의 승리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해서, 타가차르는 쿠빌라이정권 최대의 수혜자가 됐다. 이러한 배경에서 쿠빌라이 카안 정권 초기 옷치긴家는 그들의 정치적 위상을 높이고 세력을 極盛化 시킬 수 있었다. 나얀반란은 쿠빌라이 카안이 주도하는 중앙집권적 지배에 반기를 들고 일어나 동?서 제왕의 군사력을 결집시켜 감히 직접 몸소 군사력을 이용해 칸이 되려했던 점에서 蒙?元제국사에서 점하는 위치가 남다르다고 하겠다. 나얀이 대규모의 반란을 일으킬 수 있었던 원동력은 중앙집권화에 반대하는 서방왕가들의 반란, 일체성이 강한 동방왕가들의 강한 호응과 더불어 동북만주 지역이 가지고 있는 경제적?지리적?인적 요소들이 그 역사적 배경과 더불어 복합적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1315년(延祐 2)에 톡타는 遼王의 일자왕호를 하사 받은 뒤, 태정제 시기에는 나얀반란 이전 수준으로 자기들의 세력을 회복했다. 동북만주의 지리적?경제적 토대를 계승한 톡타 역시 1328년(天曆 1)에 兩都內戰을 주도해 태정제의 아들 아리기바를 대칸으로 옹립했다. 양도내전에서 실패한 후에도 옷치긴家의 야나스리가 遼王이 돼 울루스를 통치할 정도로 옷치긴家는 국가의 중앙권력이 제어할 수 없는 막강한 독립 역량을 끝내 보유하고 있었다.
또한 옷치긴家가 蒙?元 제국과 고려를 연결하는 중간지점에 위치하는 지정학적 특수성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칭기스칸 서방 원정기간 옷치긴은 고려에 사신을 파견해 대규모의 공물을 징수했고, 이후 세력을 동쪽으로 확장한 옷치긴家는 고려에 직?간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쿠빌라이 카안에게 옷치긴家는 가장 강력한 우방인 동시에 두려움의 대상이 됐을 수도 있다. 따라서 옷치긴家를 견제하려는 목적으로 고려를 부마국으로 삼았고, 이후 칸들은 忠宣王을 瀋王으로 삼아 옷치긴家의 남하를 방지하고 날로 확대되는 옷치긴家를 고려와 분리해 견제하려 했다. 또한 만주지역을 장악했던 무칼리家의 나가추와 옷치긴家의 아자스리의 행동은 원말 명초 東아시아에서 중요한 변수가 됐다. 朱元璋은 다분히 나가추 세력을 염두에 두고 고려에 대해 강경책과 유화정책을 병행했다. 결국 1387년(洪武 20)에 나가추가 투항하자 明은 고려에게 鐵嶺衛 설치를 통보했고 고려는 요동정벌로 맞서려 했지만, 만주지역 정세를 소상히 꿰뚫어 보고 있던 옷치긴家 고려계 몽골군벌 李成桂의 위화도 회군으로 고려의 요동정벌은 좌절됐다. 나가추의 투항 후 쿨룬 부이르에서 동북만주에 이르는 지역에 설치된 우량카이 3위의 수장 옷치긴家의 아자스리는 동?서 몽골과 여진?고려를 연결할 수 있는 지정학적 특수성을 이용해 明정권으로 부터 관직을 수여 받아서 賜與를 획득하거나 馬市를 통해 필요한 물자를 충당하는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는 한편, 동?서 몽골세력과는 혼인정책을 통해 긴밀한 우호관계를 유지?강화하며 明初 자신들의 울루스를 그들 나름으로 경영했다.
조선을 개국한 이성계의 5대조 李安社는 開元路 산하 오동으로 이주해 옷치긴家에 南京等處 五千戶所의 首千戶 겸 다루가치가 될 수 있었다. 이후에 옷치긴家 고려계 몽골군벌 이성계家는 옷치긴家를 모태로 삼아 성장해 당시로서는 세계적 차원의 선진적인 동북만주의 인적 자원을 기반으로 朝鮮朝를 창업했다.
주제어 : 옷치긴家, 옷치긴, 타가차르, 나얀, 遼王 톡타, 아자스리, 쿠빌라이 카안, 나가추, 李成桂, 朱元璋, 쿨룬 부이르, 동북만주, 우량카이 3衛, 開元路, 오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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