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연구의 목적은 통신사행을 통해 생성된 사행문학을 고찰하는 것이다. 사행문학을 ‘통신사 사행을 매개로 이루어지는 직접체험과 상호접촉의 문학적 표현물’로 정의하여, 연구대상에 ...
본 연구의 목적은 통신사행을 통해 생성된 사행문학을 고찰하는 것이다. 사행문학을 ‘통신사 사행을 매개로 이루어지는 직접체험과 상호접촉의 문학적 표현물’로 정의하여, 연구대상에 조선의 사행록과 일본 쪽의 필담창수집을 모두 포괄하였고, 표본의 객관성을 위해 최다종의 기록물이 남아있는 11차 계미사행으로 시기를 한정하였다.조선쪽 기록물인 사행록의 형식을 유형화하기 위해 대표형식과 부수형식으로 나누어 조합 형태를 살펴보니, ① 대표형식이 일기인 것, ② 대표형식이 운문인 것, ③ 부수형식이 독립된 것으로 나눌 수 있었다. 사행록의 작가는 기본적으로 사행에서 각자 맡은 임무가 있었기 때문에, 작가의 신분에 따라 서술 태도가 달라진다.작가가 동일하거나 작가의 친연성이 분명한 두 종의 사행록을 각각 묶어 대조함으로써, 작가들의 사행기록에 대한 의식을 살펴볼 수 있다. 첫째, 조엄의 해사일기와 이것의 축약본인 해행일기는 저자와 편자가 상이한 경우이다. 정사의 기록인 해사일기는 외교임무를 가장 잘 보여주는 글이기 때문에, 사행단 중 누구라도 개인적인 기록이 없는 경우 적절히 변형에서 자기의 기록으로 만들 수 있음을 보여준다. 둘째, 김인겸의 일동장유가와 실전된 동사록처럼 한 작가가 문자와 형식을 달리해 기재하는 경우가 있다. 이는 작가가 상정하고 있는 독자가 다른 데 기인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남옥의 일관시초와 일관창수처럼 부수형식으로 이루어진 사행록이 2종으로 엮어진 경우가 있다. 자발적으로 여행의 경험과 감상을 읊은 것은 일관시초에, 일본문사의 시에 의무적으로 창수한 시는 일관창수에 엮어 넣은 것을 통해 조선 문사들이 기계적으로 쓰는 창수시를 문학작품으로 취급하지 않는 태도를 엿볼 수 있었다.반면 이들과 접촉한 일본 문사들은 남옥의 명단에 근거해 500명 가량 되었다. 이들의 신분을 살펴보면 江戶까지의 호행을 담당했던 호행원, 國學과 각 藩에서 접대를 담당했던 유관, 幕府 소속의 의관, 승려, 동자와 민간인이라 할 수 있는 일반문사 등 다양했다. 계미사행 때 이루어진 필담창수집 가운데 대상이 된 28종의 작가를 살펴보면 이상의 신분에서 벗어나지 않는다.수창을 통해 만난 일본문사들은 계층별로 특징을 보여준다. 양국 문사들의 공식적인 수창이라 할 수 있는 林家文人들과는 통제된 상황 속에서 기본적인 우호의식을 바탕으로 시재를 겨루는 측면이 강했다. 각 藩의 유관들은 幕府의 명에 따라 藩의 체면을 걸고 통신사를 접대했으므로, 문사들과의 필담, 수창도 정중함으로 일관되었다. 반면 江戶의 의관들은 의술 면에서 전수를 받는 입장으로서 자유롭게 학술적인 질문을 하였을 뿐 아니라 자신의 의견도 솔직히 드러내는 등 매우 개방적이고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승려를 포함한 일반 문사들은 강한 호기심을 가지고 사행단에 접근한 것이었고 사행단 쪽에서도 일본의 실정을 알 수 있는 기회였으므로 쌍방향으로 정보의 교환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수창 지역이나 외부 조건이 필담과 창수의 심도에 영향을 미쳤다.필담창수집의 주된 요소는 필담, 창화시, 서신으로 볼 수 있다. 대부분은 필담과 시가 함께 기재되는데, 의관처럼 의술이라는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 만나는 경우는 필담이 주가 되고, 순수한 문학적 교류에 목적이 있는 경우는 시가 중심이 된다. 직접 대면이 없었던 경우에는 서신이 주가 된 南宮先生講餘獨覽과 관찰기인 朝鮮聘使館浪華記의 형태도 있다. 필담창수집에 드러난 일본문사는 전반적으로 자신을 평가받는 존재로 자리매김하여 조선문사의 평가를 원한다. 일본인의 눈에 자신이 어떻게 비치는지 관심이 없는 사행록에 비해 독특한 점이라 할 수 있다.대부분의 필담창수집은 자기의 필담을 주축으로 하여 조선문사들과 나눈 사소한 말과 한 편의 시까지 빠짐없이 기록하려 한다. 朝鮮聘使館浪華記처럼 관찰기의 형태로 남는 경우는 사행이라는 이벤트가 가져다준 구경거리를 기록하는 정도였고, 이차적으로 작성된 韓館應酬錄의 예처럼 필담창수집은 독자의 조선 취미를 반영하거나 조선적인 것에 대한 환상과 흥미를 채워주는 대체물이 된다. 상당수의 필담창수집은 내용상 큰 의미가 없는 것들이다. 단지 이를 통해 당시 일본인들에게 사행의 의미가 선린우호에 있는 것이 아닌 幕府가 제공해주는 사행이라는 이벤트를 즐기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사행을 전후로 조선적인 것이 붐이 되어 각계각층에 영향을 주었듯이 필담창수집은 식자층 일본인들이 가진 고상한 조선취미를 반영하는 것이다.엄밀한 의미에서 문학교류라는 것은 높은 수준에 도달한 몇몇 문사들만이 가능했었다. 계미사행의 시기 일본은 徂徠學派가 정점에 달해 있었고 이에 반대하는 反徂徠派의 기운이 감지되는 때였다. 사행단의 문사들이 접했던 일본문사들 가운데는 일본의 학계를 대표하는 학자들이 끼어있었다. 이들을 사상적 경향에 따라 크게 朱子學과 折衷學을 포괄한 宋學派와 徂徠學派의 두 갈래로 유형화할 수 있다. 조선 문사는 徂徠學의 강렬함에 현혹되어 南宮大湫로 대표되는 절충학파의 차이점을 깨닫지 못했고, 같은 주자학자인 柴邦彦의 시에 노출된 일본적 역사의식의 이질성에 대해서도 감지하지 못했다. 일본 유학이 융통성 있게 변모한 것처럼 앞으로 유학의 세계에서 벗어나게 되리라는 징조였으나, 조선 문사들은 사행이라는 한계와 기존의 우월의식 때문에 그 신호를 적절히 잡아내지 못했던 것이다. 한편 경학 뿐 아니라 시론의 면에서 왕성한 세력을 자랑하던 徂徠學派와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각 국 문사가 상대국 문사 가운데 누구를 높이 평가했는지를 통해 엿볼 수 있다. 조선 문사들은 사상적인 차이에도 龜井魯를 선택하였고, 龜井魯는 조선 문사들의 평가에 힘입어 전국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다. 이는 學詩의 시대를 거쳐 독자적인 시론을 구축한 조선이 고문사를 모방하며 아직도 학시 단계에 있던 徂徠學派보다 감식안의 수준이 높았을 뿐 아니라 시론의 대립을 넘어서 일본 쪽의 호응을 이끌어냈음을 보여준다. 반면 王世貞을 숭상한다는 이유만으로 이언진에 열광하는 徂徠學派의 모습을 통해, 고문사의 경학적 응용을 정주학보다 발전된 것으로 자부하면서도 조선에 인정을 받고 싶어 하는 그들의 의식을 엿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