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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공회 프란시스칸 원칙을 통해 본 제자도 연구

        유용숙 성공회대학교 신학대학원 2019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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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성공회는 일상에서 이웃과 창조된 세상을 통해서 하느님을 만나는 것을 제자의 길로 가르쳤다. 지역사회에서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지난 30여 년간 ‘나눔의 집’ 활동을 통해 선교적 노력도 하였다. 그런 노력에도 한국 성공회는 제자도 측면에서 커다란 선교적 결실을 맺지 못했다. 이 연구는 한국 성공회가 하느님나라를 위한 선교의 완성을 향해 참 제자의 삶을 실현하는 길에서 출발하였다. 특별히 프란시스칸 재속회가 2019년 2월에 첫 입회식을 갖는데 이들이 제자의 길에서 자신을 기쁘게 헌신하며 좀 더 깊은 신자의 생활로 나아가는 구체적 방안을 찾기 위해서다. 필자는 성공회의 ‘의도적(intentional)’ 제자도를 강조하는 신자생활을 성인 프란시스의 모본적인 삶과 프란시스칸 수도회의 원칙을 통해서 살펴보았다. 연구 방법으로는 성공회 공동체가 강조하는 ‘의도적인 제자도’와 ‘프란시스칸 영성이 강조하는 제자도’의 특징을 각각 분석하고, 이 두 제자직의 특징 속에 발견된 공통점과 차이점을 비교하였다. 그리고 프란시스칸 원칙에서 나타난 제자직의 표지 ‘겸손, 사랑, 기쁨’을 분석하여, 이를 구체적인 제자의 길로 제시해 보았다. 의도적인 제자직은 ‘선교 5대 지표’에서 완성하기를 요구하지만, 이 지표는 목표만이 천명되어 참으로 제자의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 지 모호한 점이 있다. 이를 보완하는 방법으로 프란시스칸 원칙에서 제시하는 ‘생활의 세 가지 방법’을 제자직에 접목하여, 참된 제자의 길에 더 가까이 다가설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였다. 제자도는 우리의 신앙을 전 생애를 걸쳐 겸손하게 표현하고 실천하는 노력이고, 그 길 위에서 사랑의 섬김과 기쁨으로 하느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프란시스칸 원칙에서 말하는 제자도이다. 핵심단어 ; 제자도, 성공회, 성 프란시스, 성공회 프란시스 수도회 원칙, 제 3회, 세 가지 표지 The Korean Anglican Church teaches in its statements that the way of discipleship is to meet God through one’s neighbors and in the created world in everyday life. Over the last thirty years, in order to share the love of Christ, the Church has made a missionary effort at the local community level in the establishment of ‘Houses of Sharing’. Despite these social welfare activities, the Korean Anglican Church has not been very successful at disciple-making.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find out how the first Korean members of the Third Order of St. Francis gladly devote themselves to the path of discipleship and move toward a deeper Christian life. I have explored the intentional discipleship emphasized by the Anglican Church through St. Francis’s lifestyle and the Principles of the Franciscan Order. I analyze the characteristics of the intentional discipleship of the Anglican Communion and Franciscan discipleship, and then compare the similarities and differences found between these two. I have analyzed the Three Notes of Humility, Love and Joy in the Franciscan Principles and presented them as practical ways of discipleship. As a result, I have researched the Three Ways of Life in the Franciscan Principles, and have explored ways of putting them into practice. The Five Marks of Mission call for the building of intentional discipleship, but it is unclear as to how to live the life of a disciple, because these Marks are just mission slogans in the Anglican Communion. Discipleship is the effort we humbly express and practice in our faith throughout our lives, serving God with joy, which is the nature of discipleship according to the Franciscan Principles. Key Words: Discipleship, Anglican Church St. Francis, Principles of the Society of St. Francis, Third Order, Three Notes.

      • 노정빈 선교사(魯貞彬, Agnes Josephine Roberts M.B.E.,1914~1998)의 삶과 사역에 대한 기초 자료 연구 : 구술 자료와 어머니회 회지, 신문 스크랩 자료를 중심으로

        채창완 성공회대학교 신학대학원 2019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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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정빈 선교사(魯貞彬, Agnes Josephine Roberts M.B.E., 1914~1998)는 1959년 ‘영국 어머니연합회(Mother’s Union)’ 파송 선교사로 한국에 와서 1984년 영국으로 귀환하기까지 25년 동안 한국성공회와 우리 민족을 위해 헌신과 사랑을 베푼 분이시다. 6·25 전쟁의 상흔으로 극심한 기아와 가난에 시달리던 우리나라와 한국성공회를 위해 ‘구호와 구제’, ‘어머니연합회 재건‘, ‘보건과 교육’, ‘주일학교 교육‘, ‘입양 프로모션’, ‘한국성공회와 한국 근현대사 자료 수집’ 등의 사역을 펼치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몸으로 직접 보여주셨다. 그녀가 베푼 ‘구호와 구제’ 사역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의 처지와 상황에 맞는 ‘맞춤형 복지의 원형’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즉 단순한 ‘퍼주기 식‘의 일방적인 도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활이 가능하도록 도움이 필요한 사람의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여 꼭 필요한 도움을 주는 방식이다. 그녀의 도움으로 많은 사람들이 불치의 병에서 벗어났으며, 교육과 자활의 기회를 가졌다. 특히 전후에 와해된 어머니연합회를 재건하는 사역을 통해 한국성공회 여성들의 교회와 사회적 입지를 더욱 세우고 확대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는 오늘날 한국성공회의 가정과 교회에서 지대한 영향을 미친 어머니연합회 사역의 기틀을 마련한 것이었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에게 선교와 후원 편지를 쓰고, 고통 받는 이웃을 찾아 전국을 돌아다니며, 각 성공회교회들의 어머니연합회를 재건하고 교육시키는 사역을 하면서 좀처럼 쉴 수 없었던 노선교사의 사역은 바로 그녀 안에서 쏫아 나는 ‘감출 수 없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그 동력이었다. 또한 그녀는 “할 가치가 있는 모든 것은 부족하더라도 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체스터턴(Chesterton)의 말을 몸으로 실천한 사람이었다. ‘할 가치가 있는 일’에는 성직자나 평신도의 구분이나 전문성과 비전문성의 차이가 있을 수가 없다. 오직 ‘행함’ 만이 가치 있는 것이다. 그녀는 평신도 사역자로서 자신의 사역을 존 데일리 주교, 리차드 러트 주교, 배두환 주교 등과의 협력관계 속에서 성공적으로 완수할 수 있었다. 노정빈 선교사는 자신의 업적을 결코 자랑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 동안 그녀에 대한 평가나 연구가 한국성공회에서 미진한 상태였다. 또한 현재 영국 버밍엄 대학교 중앙도서관에 있는 그녀의 자료들이 오랫동안 비공개 상태에 놓여 있어 더 정확한 정보에 접근이 어려운 실태이다. 그래서 이 논문은 현재 그녀를 기억하고 있는 증인들과 한국에 남아 있는 자료들을 중심으로 그녀의 삶과 사역을 재구성하는 ‘기초 자료 연구’이다. 이를 통해 그녀의 삶과 사역을 선교사적 지평 위에 복원하고, 그녀의 삶과 사역을 통해 오늘날 한국성공회에서 관심이 높아가는 평신도 사역자들의 역할을 재고해보고자 한다. Agnes Josephine Roberts M.B.E.(魯貞彬, Noh, Jeong-bin, 1914~1998) was an Anglican lay missionary who spent 25 years(1959-1984) of her life in Korea. Sent by the Mothers' Union in England, she dedicated her life in sharing the love of Christ with people in Korea suffering from poverty and starvation in the aftermath of the Korean War, by bringing aid and relief, primary healthcare and education to those in need. She also helped building the Mothers' Union and Sunday Schools, finding homes for many war orphans, and collecting data related to the Anglican Church of Korea as well as Korea's modern history. Her approach to providing aid and relief can be regarded as a precursor to what is now known as 'customized welfare' in Korea : rather than simply providing standardized relief programs, she focused on identifying and meeting specific needs of each individual and helping their journeys to self-reliance. As a result, many were saved from deadly diseases, given access to education and opportunities to rebuild their lives from the ashes of the war. In particular, she played a seminal role in the development of the Mothers' Union in Korea, which then existed only in name. Under her guidance and supports, the Mothers' Union grew as a grassroots organization within Anglican churches in Korea, empowering women, strengthening families and communities, which in turn laid the groundwork for the growth of today's Anglican Church of Korea. She ceaselessly travelled across the war-ravaged nation, reaching out to people in need, writing countless letters for fund-raising, helping local churches to re-build the Mothers' Union, providing necessary training and education. The secret behind her tireless works was her “ill-concealed love” in Christ and her belief that “anything worth doing is worth doing badly” as Chesterton said: when it comes to 'a thing worth doing,' there is no point of separating the lay and the ordained, the professional and the unprofessional, for what matters most after all, is putting one's faith into 'action'. Being a lay missionary, she was always ready to put her faith into action, thereby serving the Body of Christ in successful partnerships with the ordained clergy, including Bishop John Daly, Bishop Richard Rutt and Bishop Bae, Doo-Hwan. That said, she was not into publicizing her works, and many of her own writings which are archived in the University of Birmingham's library have remained inaccessible to the general public, which explains why there has not been much studies about her life and works to date. Hence, this study is intended as a primary research to collect and compile data with regards to her life and works, mainly based on face-to-face interviews with those who have memories of her while she worked in the mission field as well as on data currently available in Korea. In so doing, it attempts to shed light on her life and works as a lay missionary, which will offer valuable and timely insights as to the role of lay ministry which is becoming increasingly important in the Anglican Church of Korea.

      • 대한성공회 성직자 복식에 관한 연구 : 대한성공회 성직자 복식의 토착화와 디자인 제안

        김대성 성공회대학교 신학전문대학원 2017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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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논문은 유럽의 가톨릭교회와 영국성공회의 역사와 문화의 영향 아래 한국에 정착된 대한성공회의 전례 복식을 한국적 맥락 안에서 토착화 할 수 있도록 그 가능성을 제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전례적인 교회에서 고려되는 많은 요소들 가운데 복식 또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전례 공간과 전례 안에서 사용되는 많은 전례적 도구들은 상징적인 의미를 외형적 디자인을 통하여 전달하는 기능을 담당한다. 전례의 복식 또한 이러한 기능을 지니는 바, 전례 안에서 또는 생활 속에서 성직자의 삶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데 일조한다. 그러나 오늘날 대한성공회가 사용하고 있는 성직자의 복식은 서방교회의 영향 아래 그 연장선상에 있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비록 신학적인 의미는 갖추고 있을지라도 그 이면에는 서양문화의 색채가 남아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한국이라는 상황에 놓여 있는 대한성공회가 한국만의 지역적 신앙색채를 상징적으로 충분히 드러내기에는 현재 성직자의 복식이 한계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따라서 대한성공회가 서양의 그리스도교가 아니라 한국의 그리스도교 신앙을 충분히 드러내기 위해서는 한국적 상황을 고려한 새로운 성직자 복식에 대해 논의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 서방교회의 복식의 흐름을 살피고, 이와 함께 한국의 전통복식, 특히 근대 이전 조선시대의 복식을 연구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러한 틀 안에서 대한성공회는 서방교회의 전통과 한국의 전통적 요소를 결합한 새로운 성직자 복식을 제안할 수 있을 것이다.

      • 성공회 첫 우리말 성서 《죠만민광》(照萬民光)의 성격과 의의

        남우희 성공회대학교 2018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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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bstract A Linguistic and Theological Analysis of Chyomanmingwang, The Earlist Korean Bible of the Anglican Church of Korea Nahm, Woo whee Department of Theology Graduate School of Theology Sungkonghoe University Christians are “People of the Book.” Christianity inherited the Jewish scriptures and added 27 new books to make its canonical books, the Holy Bible. Since the early Christianity, the faith has been passed down through the Bible, which makes the Bible as the heart of the religious life. The Bible has been transcribed and studied by numerous saints over the past 2,000 years, but it was not easy for the laity to access the Bible because books, especially the bibles were scarce due to the scarcity of papers. It was 15th century when the Bible began to be mass-produced using modern technology and widely distributed to the public in the Western Europe. Yet, the Bible was translated and published in Asia much later. This study examines the earliest Bible of the Anglican Church of Korea, which was published in 1894 with the title of “Chyomanmingwang (A Light to Lighten the Gentiles).” In September 1890, Bishop Charles John Corfe, the first Bishop of the Anglican Church of Korea, arrived at Chemulpo Port. Soon after he realized that it was necessary to have the Bible in Korean language in order to spread the gospel among Koreans. Consequently, Bishop Corfe brought in printing machines from England in 1891 and began to translate the Bible into Korean from 1893. When he published Chyomanmingwang in 1894, it had three different versions, one in diglot of Chinese and Korean, another in Korean, and the other in English. While compiled with nearly 400 verses from the New Testament, Chyomanmingwang was structured as a narrative consisting of the life, death, resurrection, and ascension of Jesus, the descent of the Holy Spirit, and the establishment of the Church through the acts of Apostles. It was designed as a kind of gospel. This study looks into the Korean part of the diglot version of Chyomanmingwang and analyzes it through linguistic approach and theological approach. There is no difference in the body text between the Korean version and the Korean part of the diglot version of Chyomanmigwang. However, since the table of contents and explanatory notes from the diglot version seems more elaborate, I take the Korean part of the diglot version as my text for analysis. Chyomanmingwang was published in the year of the Political Reform in Choseon Dynasty, thus its usage of Korean reflected Korean as it was written in the transition period between premodern and modern. In terms of spelling system, the initial glottal sounds were written by Gemination Clusters in the body text, while being written by Consonant Clusters in the explanatory notes. The vowel ‘ㆍ’ was used frequently, and seven consonants were used for final sounds as in previous era, but some of the Consonant Clusters, such as ‘ㄺ,’ ‘ㄼ,’ and ‘ㄻ,’ were also used. In general, it showed the tendency of expansion of syllabification, but not consistently. In terms of grammar, Chyomanmingwang also shows a transitional characteristic. For subjective particles, ‘이,’ ‘ㅣ,’ ‘가,’ and ‘∅’ were all used. The subject particle ‘이’ was used after a consonant, but both ‘ㅣ’ or ‘가’ was used after a vowel, although ‘ㅣ’ was used a little bit more frequently. For pronouns, neither the honorific(reverent) first person singular ‘저’ nor the honorific second person singular ‘당신’ was used. No matter who to whom, ‘나’ was used for the first person singular and ‘너’ for the second person singular. Exceptions were made to avoid using ‘너’ only when the disciples called Jesus by using ‘스승’ and Jesus prayed to God the Father by not using any pronouns. Characters used in Chyomanmingwang were all Korean, so that it could be easily read by Korean readers. For those who were more familiar with Chinese characters, it had a separate part written in Chinese rather than mixing Korean and Chinese characters in one sentence. Other bibles translated into Korean at that time, such as the Presbyterian Bible, “Yesusyǒnggyojyǒnsyǒ (all New Testament Books)” by J. Ross or the Catholic Bible, “Sǒnggyǒngjikhae (Literal Translated Bible)” by J. Choi, were also written in only Korean. From the theological perspective, Chyomanmingwang was a book for the Church. It was used as a lexionary, that is, a lesson delivered to the congregation who gathered for service and prayer. It was also used as a textbook for religious education. After all, it was the Bible corresponding to the need of the Church. Chyomanmingwang comprised 13 chapters including introduction and conclusion. Stories about the life, death, and resurrection of Jesus were drawn from the Synoptic Gospels, and stories about the deeds of Apostles, the descent of the Holy Sprit, and the establishment of the Church were drawn from the Acts of Apostles. Among the deeds of Jesus, stories like healing the sick or performing miracles did not appear on Chyomanmingwang. Metaphorical descriptions of heaven did not appear, either. It tried to focus on the essence of faith and only the contents related to the Apostles’ Creed were selected and included. Verses from the three Synoptic Gospels were mainly selected for the book, but the theology of the John’s Gospel was reflected in the title. “Chyomanmingwang” means “a light to lighten all the Gentiles,” which represents the theology of light proclaimed in the Gospel of John. The original text used for translation of Chyomanmingwang was Delegates Version published in 1850 in China, but many parts had been changed. Most of the proper nouns such as anthroponyms or toponyms had been changed in order to be easily read in Korean, then translated into Chinese characters afterwards. It was the Korean version that came first before the Chinese version. As mentioned before, the pronouns had also been changed to fit Korean speakers. It seems that Korean Bibles published earlier, such as “Yesusyǒnggyojyǒnsyǒ (all New Testament Books)” and “Sǒnggyǒngjikhae (Literal Translated Bible),” were used as good guides to write Chyomanmingwang, particularly in terms of translation. Both of them were used as reference materials to find the proper Korean words in translating, but the latter seems to be used more when it comes to anthroponyms or toponyms. Similar sentences were found in three different bibles, but they had their own colors and characteristics. For theologial terms, Chyomanmingwang stood out from the two other bibles by using the word “기도하다 (to pray)” instead of “빌다 (to beg)” or the word “뉘우쳐 고치다 (to reflect and correct)” instead of “회개하다 (to repent).” A book is a good bridge to carry out an important mission. The Bible is the book of books for Christians. It is a bridge between God and people, between Christians and Christians. Chyomanmingwang, the first Anglican Bible in Korean published 124 years ago, the Bible called “a light to enlighten all the people on earth,” is a bridge between the early Christians and us who believe in Jesus, a bridge between English over there and Koreans over here, and most of all, the first well of water for the Anglican Church of Korea. Key words: Chyomanmingwang (A light to lighten the Gentiles), Lumen Ad Revelationem Gentium, the Anglican Church of Korea, the Korean Bible, the earliest Bible, a diglot version of the Bible in Korean and Chinese, history of bible translation 논문 개요 그리스도인들은 책의 사람들이다. 그리스도교는 유대교의 경전을 물려받아서는 그 위에 새로이 27권의 문서를 보태어 표준 문서 곧 정경(正經)으로 삼았다. 초대 교회 이래로 책을 통해 신앙을 전수해 왔으니, 책 곧 경전은 종교 생활의 심장과도 같다. 성서는 지난 2천년 동안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성인들에 의해 필사되고 연구되어 왔다. 하지만 종이는 귀하고 모든 책이 귀하며 성서는 더더욱 귀하니, 보통 사람이 성서에 접근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서유럽에서는 15세기부터 성서가 근대적으로 대량 생산되기 시작해서, 근래 2백년 동안 폭발적으로 보급되었다. 이제 원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성서를 제 손에 넣을 수 있는 세상이 열렸다. 이 논문은 대한 성공회의 초기 성서의 모습을 알고자 하는 동기에서 시작되었다. 1890년 9월 초대 주교 존 코프가 제물포항에 발을 디뎠다. 코프 주교는 한국인에게 복음을 전파하려면 한국어 성서가 필요하다고 보아, 영국에서부터 문서 선교에 관한 계획을 세웠다. 1891년에 인쇄기계를 들여왔고, 1893년부터 성서 번역에 들어가 1894년에 《죠만민광照萬民光》을 출판하였다. 모두 세 가지 판본으로 펴냈는데, ‘한문-한글 병용본’, ‘한글본’, ‘영문본’이다. 신약성서에서 400절 가까이 뽑아내서 엮되, 주로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부활과 승천, 성령강림, 그리고 사도들의 실천으로 교회가 탄생하기까지를 하나의 서사 구조로 꿰어냈으니, 또하나의 복음서라고 할 수 있다. 이 논문은 《죠만민광》의 우리말 부분을 읽으면서 국어학적으로 연구하고 신학적으로 연구하여 문서의 의의를 밝히고자 하였다. 병용본의 한글 부분과 순한글본의 본문이 아무런 차이가 없으나, 목차와 범례의 경우 병용본이 좀더 공들여 편집한 것으로 보이므로, 병용본을 대본으로 하였다. 《죠만민광》은 갑오경장이 있던 해에 출간되었는데, 한국어 쓰임새를 살펴보니, 현대 한국어 태동기 곧 개화기 국어의 과도기적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표기법의 특징으로는 초성의 경음을 각자병서한 것이 눈에 뜨이지만, 본문만 그러하고, 주석에서는 합용병서를 함으로써, 같은 낱말이라 해도 본문이냐 주석이냐에 따라 서로 다르게 적었음을 볼 수 있다. ‘ㆍ’ 모음은 빈번하게 사용되고 있으며, 종성 표기는 전시대 문헌처럼 7가지 자음만 쓰지만 ‘ㄺ, ㄼ, ㄻ’ 같은 겹받침도 출현한다. 대체로 분철하여 적는 표기를 하려고 애썼으나, 일관되지는 못하고 혼란상을 보인다. 통사와 문법 관련해서도 역시 과도기적이다. 주격조사는 ‘이’, ‘ㅣ’, ‘가’, ‘∅’가 다 보인다. 자음 뒤에서는 ‘이’이지만, 모음 뒤에서는 ‘ㅣ’와 ‘가’가 다 보인다. ‘ㅣ’가 조금 더 많을 뿐 그 차이가 크지 않다. 대명사는, 1인칭 겸양의 ‘저’ 형태도 보이지 않고 2인칭 존경의 ‘당신’도 보이지 않는다. 누가 되었든 누구 앞에서든 ‘나’라고 하고, 2인칭은 서로가 서로더러 ‘너’라고 한다. 다만 예수의 제자가 예수한테 말할 때는 ‘스승’ 같은 명사를 쓰고 있으며, 예수가 성부를 향해 기도할 때에는 대명사를 생략하는 식으로 해서 ‘너’를 피하고 있다. 《죠만민광》에 쓰인 문자 체계는 우리 글자이다. 뿐만 아니라, 내용도 우리말이다. 술술 잘 읽히는 우리 문장이다. 한문 독자를 위해서는 따로이 자리를 두었지, 한문과 한글을 섞어 쓰지 않았다. 로스가 주도한 《예수셩교젼셔》나 천주교의 《성경직ᄒᆡ》나 성공회의 《죠만민광》이나 다 순우리말 성서의 계보에 들어 있다. 신학적으로 살펴볼 때, 이 책은 교회의 책이다. 전례 독서, 곧 공동체가 예배드리고 기도할 때 온 회중이 함께 듣는 성서이며, 신앙 교육의 교재로 사용되었다. 교회의 필요에 부응하는 성서이다. 서(序)와 결(結)을 포함하여 모두 13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공관복음서에서 예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의 기사를 뽑았고,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의 행적과 성령 강림, 교회 설립에 관한 기사를 뽑았다. 예수 생애의 활동 중 병자를 고치는 행적도 하늘나라에 관한 비유담도 실리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기적을 일으키는 이야기도 전혀 실리지 않았다. 신앙의 핵심에만 집중하려고 한 것으로 보이며, 편집의 가장 큰 원칙은 ‘사도신경’과의 관련성을 기준으로 내용을 선별한 것으로 보인다. 공관복음서 세 문서에서 주로 글을 골랐으되, 요한복음의 신학은 책 제목에 담아냈다. ‘조만민광照萬民光’이란, ‘만민을 비추는 빛’이라는 뜻으로 요한복음이 선포한 ‘빛의 신학’이다. 이 책의 저본은 1850년에 중국에서 생산된 위판역본(흔히는 ‘대표자 역본’이라 함)이지만, 많은 부분을 바꾸었다. 인명과 지명 등 고유명사는 대부분이 달라졌는데, 우리말로 확정하고 나서 그것을 한자로 옮겼다. 한글화가 먼저이고 한역화(漢譯化)가 나중이라는 말이다. 대명사 쓰임새도 한국어 언중을 고려하여, 예수와 제자 사이나 예수와 성부 사이에서는 2인칭 대명사를 피하거나 명사로 바꾸었다. 우리 땅에 먼저 있었던 《예수셩교젼셔》와 《셩경직ᄒᆡ》들과의 관련성은 여러 면에서 매우 높아 보인다. 번역어를 고를 때에 양쪽을 다 참고했지만 인명과 지명은 특히나 《셩경직ᄒᆡ》에서 꽤 많이 끌어왔다. 문장은 비슷한 대목도 있지만, 세 가지 성서가 저마다 자기 빛깔을 드러내었다. 종교 어휘를 살펴보면, 《죠만민광》은 “빌다”가 아니라 “기도하다”라는 말을 쓴 것과 “회개하다” 대신 “뉘우쳐 고치다”라는 말을 쓴 것 등이 돋보인다. 책은 중대한 임무를 감당하는 지극히 선한 다리이다. 성서는 그리스도인에게는 책 중의 책이다. 하느님과 사람을 이어주는 다리이며, 그리스도인과 그리스도인을 이어주는 위대한 다리이다. 124년 전에 나온 성공회 첫 성서 《죠만민광照萬民光》, 세상 모든 겨레 모든 사람을 골고루 비추는 빛, ‘照萬民光’이라는 이름의 성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초대교인들과 우리들, 지구 저쪽 영국인과 이곳 한국인을 이어주는 다리일 뿐 아니라, 오늘날 한국 성공회 신앙의 첫 번째 샘물이다. 주요어 : 성공회, 聖公會, 종고성교회(宗古聖敎會), 영국 성교회, 한글 성서, 한글 성경, 초기 성서, 한문-한글 병용본, 성서 번역사, 조만민광, 照萬民光

      • 성공회 병천교회의 3·1 아우내 만세운동에 대한 기여

        전해주 성공회대학교 신학전문대학원 2006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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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으로 3·1 아우내 만세운동에 대한 시대적, 지역적, 사회적 배경과 그 운동이 왜 다른 지역에서의 만세운동에 비해 조직적이고 크게 일어날 수 있었던 이유와 또 당시 만세운동 상황과 성공회 병천교회와 진명학교가 그 운동에 어떻게 기여했는지, 그리고 그것이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 살펴 보았다. 병천(아우내)은 조선 중기 이후부터 장이 서기 시작한 역사가 깊은 장터이다. 그러하다 보니 다른 지역에 비해 정보가 빠르고 선진 외래문물을 받아들이는데 자연스러웠다. 그래서 타 지역에 비해 기독교가 빨리 들어와 정착했으며 면 단위 시골인데도 불구하고 근대식 교육기관이 설립되어 자녀들에게 근대식 교육을 시키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당시 정치적 상황으로 보아 민족정신을 고취시키는 교육이 큰 비중을 차지했을 것이며 이는 아우내 만세운동의 큰 밑거름이 된다. 이 지역이 장터라는 데서 오는 또 하나의 특징은 작은 시골임에도 불구하고 거부들이 많았다는 것이다. 이들은 타 지역의 유교사상으로 무장된 기득권층 보수세력과는 달리 외래 선진문물에 대해 호의적 반응을 보였으며 거의 모두 기독교를 받아들여 초기 기독교가 이 지역에 뿌리를 내리는데 큰 역할을 담당한다. 특히 성공회 병천교회와 진명학교는 이들의 도움으로 초창기 선교가 비교적 수월했으며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다. 또한 이들은 아우내 만세운동을 음으로 양으로 도왔으며 이 만세운동 후에 자칫 패닉 현상으로 빠질 수 있었던 지역의 안정과 재건에 크게 기여하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아우내 만세운동에 있어서 그 운동이 일어나게끔 한 산실은 진명학교이다. 성공회 병천교회 교인들에 의해서 세워진 이 근대식 교육기관은 지역의 발전을 위해 많은 지역 내 지도자들을 양성했으며, 우리 성공회의 두 명의 사제를 배출하기도 했다. 이렇게 쌓여진 힘은 아우내 만세운동을 통해 여실히 나타났으며 특히 이 학교 교사였던 김구응선생이 그 대표적 인물인데, 우리는 민족적 영웅으로 그를 기억해야 할 것이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이러한 역사적 사실들이 미흡한 자료와 유관순 열사의 대대적 민족영웅 홍보에 가려 묻혀가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한번 강조하건데, 아우내 만세운동에 있어서 이를 준비하고 가장 앞장서 투쟁한 분은 진명학교 교사였던 김구응 선생이었다. 또한 이 운동을 사전에 준비하고 참여했던 많은 성공회 병천교회 교인들과 교회내 소모임이었던 기독청년회 회원들, 그리고 진명학교 교사, 학생들 모두가 이 운동의 주인공이고, 역사의 주인공인 것이다. 이 만세운동이 끝나고 성공회 병천교회와 진명학교는 이 지역을 이끌어 나가는 선도적 위치를 확고하게 잡았으며 교인수도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등 중흥기를 맞게 된다. 또한 진명학교의 경우에는 학생 수가 늘어 여학생을 위한 별도의 교사를 증축해야만 했으며 인근 봉황리에도 진명학교가 신축, 개교되는 등 활발한 지역 선교가 이루어지기도 한다. 또 이를 계기로 하여 지역의 많은 인재를 양성하고 선진 문화를 보급하는 지역 중심의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끝으로 이 민족적 거사인 3·1 아우내 만세운동에서 성공회 병천교회와 진명학교가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는 새로운 사실이 이와 같이 밝혀짐으로써 이에 대한 새로운 역사적 평가가 요구되는 바이다. 이 졸고를 탈고하면서 우리 성공회 관련 역사자료들에 대한 정리 및 보관과 할용에 관한 제언을 하고자 한다. 이는 현재 100년 이상 된 교회들이 계속 나오고 있는 이 시점에서 역사자료에 대한 귀중함과 또 그것을 활용하는 기술적 문제들을 한번쯤은 짚고 넘어가야 할 시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첫째, 각 교회에서 해당 관련 역사자료들을 체계적으로 정리, 보관할 수 있는 매뉴얼이 시급하다. 물론 각 교회마다 조금씩 다른 나름대로의 특성을 가지고 있어 한 가지의 통일된 매뉴얼에 적용시켜 자료를 다룬다는 것은 무리가 있겠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현재와 같이 그 어떤 모범적 대안이 없어 귀중한 역사자료들이 교회 창고에서 정리가 되지 않은 채 방치되고 있는 현실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은 각 개인이 보관하고 있는 자료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둘째, 교회에서 보관하고 있는 자료들에 대해서 일정 기간이 지난 것은 역사자료관과 같은 전문적 문헌정보관리를 하는 곳에서-이는 교구별로 만들든지 아니면 현재의 역사자료관을 이용하든지 간에-통합 관리하도록 시스템을 만드는 것도 고려해봐야 한다. 문헌을 정리, 보관하는 것도 전문 기술을 요하는 작업임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것을 갖추지 못한 각 교회에서 정리, 보관하다보니 귀중한 자료들이 곰팡이 등으로 훼손되고, 또는 너무 잘 보관되어 아무도 찾지 못할 정도로 묻혀버리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현재 역사자료관에서 개인이나 교회에서 소장하고 있는 및 자료들을 수집하기 위한 '역사자료 공모전'은 매우 바람직한 일이라 할 수 있겠다. 셋째, 현재 역사자료관에 보관되어 있는 자료들은 거의 대부분이 원시자료들이다. 그것을 활용하기 위해서는 가공하는 작업과 아울러 전산화 작업이 필수적이다. 옛 글에 대한 윤문작업과 영문에 대한 번역작업이 바로 그것인데, 모두는 아니더라도 현재 나와 있는 초록에 덧붙여 어느 정도의 요약 정리된 내용이 첨가되어져야 만이 필요한 사람이 그 필요에 따라 그 필요를 충족시킬 수 있을 것이다. 또 현재 진행 중인 전산화작업도 그것이 단지 보관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활용하기 위한 것인지 부터 따져서 효율적 작업이 되었으면 한다. 단지 보관만을 위한 것이라면 몰라도 그렇지 않다면 해상도가 너무 떨어져 알아볼 수 없는 것을 굳이 스캔작업을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보다는 영문에 대한 번역작업과 분류, 가공하여 활용도를 높이는 작업이 훨씬 효과적일 수 있다. 역사는 그 잘 보관된 자료 위에 후세인들의 사관으로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상기하면서, 또 지금의 하찮아 보이는 자료가 100년후엔 귀중한 역사 자료가 됨을 생각하면서 그것의 대한 체계적인 정리와 보관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다.

      • 교회일치를 위한 교부문헌 연구 : 2세기 교회 교부문헌과 종교개혁시대의 성공회 교회 이해를 중심으로

        이민우 성공회대학교 신학전문대학원 2005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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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느님을 아버지로, 같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같은 신앙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외형적인 요소들과 저마다의 교리와 교회 이해가 다름으로 인해 많은 교파들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 교회의 현실이다. 신약성서에서도 찾아 볼 수 있듯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이들이 하나가 될 것을 바라셨음(요한 17,11)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분열을 거듭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20세기에 접어들면서 일치를 향한 움직임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세계교회협의회(WCC)는 1948년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창립총회에서 "교회의 분열은 그리스도의 뜻에 명백히 어긋나며, 세상에서 걸림돌이 되고,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하여야 할 지극히 거룩한 대의를 손상시키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또한 로마가톨릭교회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회기 중 1964년 11월 21일에 발표한 '일치의 회복(Unitatis Redintegratio)' 이라는 제목의 교령에서 "교회의 분열은 그리스도의 뜻에 명백히 어긋나며, 세상에서 걸림돌이 되고,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선포해야 할 지극히 거룩한 대의를 손상시키고 있다"고 했다. 이러한 세계교회의 일치에 대한 노력과 아울러 한국교회에서도 일치를 위한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다. 1967년 1월 18일 이래로 가톨릭의 교회일치위원회와 한국기독교협의회가 주관하여 '교회일치 기도주간'을 지키기 시작했으며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성서의 공동번역 작업(1977년 발간)을 추진했다. 또한 학자들 간의 신학적 대화 모임도 개최되어 1979년에 서강대학교 신학연구소와 한국신학연구소가 공동으로 '하나인 믿음:새로운 공동신앙고백서' 를 출간하기도 했다. 이와 같은 노력들은 그동안 오랜 세월 반목과 대립으로 일관하던 모습에서 벗어나 화해를 이루어 가시적 일치를 위한 움직임이었다는 점에서 매우 고무적인 일이라 할 수 있다. 필자가 본 논문을 작성하게 된 동기는 세계교회의 일치에 대한 노력들의 중심에 성공회가 있었다는 점을 주목한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저명한 성공회 주교 월리엄 템플이 세계교회협의회의 발족에 기여한 바가 컸었다는 사실, 즉 세계 교회에서 일치의 중심에 성공회가 있었다는 것이 직접적인 동기로, 성공회의 관용적이고 포괄적인 태도가 세계교회 뿐만 아니라 한국교회에서도 일치를 위한 중요한 중재자 역할을 감당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간접적인 동기로 작용했다. 그러한 가운데 교회 일치에 있어서의 관심은 초대교회의 연구가 공통 분모로 작용할 수 있으리라는 것으로 확장되었고. 가시적인 일치를 이루었던 초대교회와 오늘날 세계교회 안에서 일치를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성공회의 교회 이해가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지에 대해 알아보고 싶었다. 말하자면 초대교회와 성공회의 교회 이해에 대한 연속성에 대한 발견이 교회 일치에 대한 전망에서 유용하리라는 생각이 본 논문의 동기로 모아진 것이다. 초대교회는 사도행전에서 볼 수 있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 이후 성령강림 사건으로부터 시작되었다(사도 2). 오순절에 성령을 받은 사람들 가운데는 실제로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직접 목격한 사람들도 있었다. 이와 같은 이유로 해서 당시 초대교회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기억과 그의 가르침을 생생하게 간직할 수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시작된 하느님 나라의 선포는 초대교회의 시작과 함께 예수와 함께 한 사도들과 그의 후계자들에 의해서 구체화되고 계승되기 시작하였다. 이와 같이 가르침과 전통들에 있어서 그 중심에 위치했던 사도 이후의 인물들을 우리는 통상 '교부' 라 부르며 그들은 교회사 속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왜냐하면 교부들은 "성서에 대한 가장 탁월한 주석가들이며, 교회 전통에 있어서 타당한 대표자인 동시에 증인"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서의 올바른 이해와 전통의 지식을 위해서는 교부들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 이와 같은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눈을 그 시대로 돌려 그 시대에 존경할 만한 문헌들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교부들의 정신과 그들의 살아 숨쉬는 신앙, 그리스도와 교회를 위해 그들이 몸소 보여준 제적들을 살피려는 노력과 함께 교부학적 지식도 함께 요구된다. 이와 같은 교부학적 연구와 성공회 교회 이해를 어떻게 연결지을 수 있겠는가? 종교개혁 시대 영국성공회에서 가장 중요한 문헌으로 공도문(the Book of Common Prayer)과 39개 신조를 꼽는다. 이 문헌들은 성공회가 가진 정체성을 잘 보여주고 있는 문헌으로 꼽을 수 있으며, 이 문헌들에 따르면 성공회는 "하나이요, 거룩하고, 보편성을 가졌으며,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이다. 또한 이와 같은 성공회의 정체성은 19세기 영국에서 발흥했던 성공회의 고교회파들이 주류를 이루었던 옥스퍼드 운동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옥스퍼드 운동의 지지자들은 사도적 계승과 교부시대의 교의를 중요시 하면서 성사생활과 엄격한 신앙 규율의 회복을 갈망하였다. 그리고 이 시기에는 희랍 교부들의 저작이 영어로 번역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소개되면서 교부시대의 가톨릭 전통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키기도 하였다. 옥스퍼드 운동가들의 표현을 빌자면 성공회는 초대교회로부터 지금까지 "단절됨 없이 같은 전통을 계승해 오고 있는 교회" 이다. 그들은 첫 5세기 동안의 교회가 "교리적 일치에 기초를 둔 통일된 초대교회"에 관심하였다. 초대교회에 대한 옥스퍼드 운동가들의 관심과 함께 교부들은 그들에게 살아 있는 현실로 다가올 수 있었고, 그들은 "교부들에 대한 연구로 교회가 주장하는 교리의 중심으로 삼고자"했다. 그러므로 초대교회의 교회 이해, 특별히 당시에 활동한 교부들의 문헌을 통해 그들의 교회 이해를 알아보는 것은 옥스퍼드 운동 이후의 성공회가 추구하는 교회 이해와의 연속성을 확보하는 것에 유용하다. 본 논문의 방향은 지금까지 언급한 바와 같이 옥스퍼드 운동가들이 주장했던 "초대교회를 계승한다" 는 말에 착안하여, 과연 초대교회가 어떤 교회였는지, 성공회는 어떤 교회 이해를 추구하고 있는지, 그리고 양자가 그 맥을 같이 하고 있는 부분은 어떤 것인지를 비교하여 밝혀 보기로 한다. 궁극적으로 시도하려는 바는 물론 일치를 위한 공통분모로서의 교부들의 교회 이해에 대한 연구가 될 것이며 또한 일치를 위한 우리의 관심을 어떤 방향으로 설정해야 할지를 고민해 보려는데 그 목적을 둘 것이다.

      • 교회법으로 보는 성공회 교회론 : 영국 성공회와 대한성공회의 헌장과 법규, 공동기도서를 비교 분석하면서

        이혜선 성공회대학교 신학대학원 2023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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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공회 신학자 폴 에이비스는 “성공회적”인 교회론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성공회가 가진 믿음과 교리를 말하는 ‘신앙’, 성공회의 실천, 구조, 사목, 권위와 관련된 ‘직제’를 검토해야 한다고 말한다. 본 논문은 에이비스가 말한 ‘신앙과 직제’의 실제적 표현이 ‘교회법’에서 나타나고 있음을 확인하고, 이를 근거로 교회법을 통하여 성공회 교회론을 연구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Ⅱ장에서는 교회법의 의미와 목적을 살피고, 성공회 안에서의 교회법 이해와, 성공회의 교회법이 어떻게 교회론과 연결되는지 검토하고자 한다. 먼저 교회법은 교회의 선교를 위한 수단이며, 교회의 실질적인 표현과 연결되어 있음을 확인한다. 이후 성공회의 교회론과 교회법 이해를 살피고, 그 중 ‘직제’, 특별히 ‘역사적 삼품성직’이 성공회 교회론의 독특한 특징임을 확인하고자 한다. 그리고 잉글랜드 성공회의 『The Canon of the Church of England』와 『The Book of Common Prayer(1662)』, 대한성공회의 『대한성공회 헌장 및 법규』와 『성공회 기도서 2004』 중 ‘신앙과 직제’, 특별히 ‘역사적 삼품성직’과 관련된 부분을 분석하여 신앙과 직제에 실제적 이해를 살핀다. 이후 앞서서 분석한 잉글랜드 성공회와 대한성공회의 헌장과 법규, 공동기도서의 내용을 비교 연구하여 각 교회가 ‘신앙과 직제’를 교회법 속에서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살피고자 한다. 그 안에서의 발견되는 잉글랜드 성공회와 대한성공회의 ‘신앙과 직제’에 대한 이해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발견한다. 마지막 Ⅲ장에서는 본 논문을 요약하고, 헌장과 법규, 공동기도서에 나타난 잉글랜드 성공회와 대한성공회의 교회론을 살핀다. 그리고 더 나아가 대한성공회의 ‘역사적 삼품성직’에 대한 교회법적인 이해에 보충할 부분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 대한성공회 복음전도의 활성화를 위한 진단과 연구 : 존 스토트를 중심으로

        정기용 성공회대학교 신학전문대학원 2015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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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논문은 먼저 세계성공회 복음주의의 역사와 배경을 명확히 파악하여 성공회가 지향해 온 복음주의란 무엇인지 올바로 이해하는데 목적을 두고 있다. 세부적으로 성공회 공동체 안에서 복음주의를 이끌었던 존 스토트의 복음주의를 연구함으로써, 소위 한국 개신교가 인지하고 있는 한국식 복음주의와의 차이점을 밝히는 것을 1차 목표로 한다. 또한 본 논문은 존 스토트가 제시한 성공회 복음주의 안에서 복음전도란 무엇인지 연구한다. 존 스토트의 복음전도를 연구함으로써 대한성공회의 복음전도를 진단하고 존 스토트가 제시하는 복음전도의 성과와 한계를 명확히 제시한다. 본 논문은 존 스토트의 복음주의와 복음전도에 관한 연구 성과를 토대로 대한성공회 복음전도를 진단하고 발전방향을 파악하고자 한다. 하지만 존 스토트의 주장이 한국의 문화적 맥락을 반영하지 못한다는 점을 감안하여 대한성공회 서울교구 사목 진단에 관한 보고서를 통해 병행 분석하였다. 본 연구는 앞선 연구들의 대한 발전방향을 존 스토트의 복음주의적 견해와 세계성공회 복음주의의 현대적 복음전도 동향에 맞추어 제시하고자 하였다. 지금까지 성공회 복음주의를 연구한 논문이 극히 부족하였고, 몇 개의 논문마저도 복음 선포의 차원을 벗어나지 못한 것에 비한다면 본 연구는 차별화 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대한성공회의 복음주의를 오해하고 있는 내 외부의 교인들에게 성공회 공동체의 복음주의를 일깨워주는 실천적인 최초의 논문이라는 중요한 의의를 지니고 있다.

      • 한국성공회 영남권 교회의 초기 선교 역사에서의 일제(日帝)의 영향 : 부산, 대구, 상주 성공회 초기 선교 역사를 중심으로

        박용성 성공회대학교 신학대학원 2019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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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논문은 일제시대의 부산성공회, 대구성공회, 상주성공회의 개별 교회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일본성공회 선교사의 영향을 많이 받은 부산성공회, 대구 성공회의 역사와 영국성공회 선교사의 영향을 많이 받은 상주성공회의 역사를 비 교 분석하고 있다. 특히 일제시대 일본성공회의 한국성공회 합병에 대한 영국 선교사와 일본 선교 사의 인식의 차이를 소개하고 있다. 이는 한국성공회가 일본성공회에 적극적인 지 원을 요청할 수 없었던 이유였고, 일본성공회가 한국에 선교사의 파견과 재정적인 지원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지 못했던 이유이다. 또한 한국성공회 소속이었지만 일본 선교사의 영향을 받았던 부산성공회와 대구 성공회의 선교 역량이 도시 규모와 인구에 비례해서 높지 못했던 근본적인 이유 였다. 이러한 선교 역량의 부족은 일본인에서 한국인으로 선교 대상을 확대할 수 도 없었고, 부산과 대구를 넘어 기타 영남권 도시로 선교 영역을 확장할 수도 없 었다. This paper records the history of individual churches of the Busan sungkonghoe, Daegu sungkonghoe, and Sangju Sungkonghoe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And I am comparing and analyzing the history of Busan sungkonghoe, Daegu sungkonghoe which was greatly influenced by missionaries of the Japanese Anglican Church, and the Sangju sungkonghoe which was greatly influenced by missionaries of the British Anglican Church. In particular, it introduces the differences between British and Japanese missionaries perception of the annexation of Korea Anglican Church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This was the reason why the Korea Anglican Church could not ask for active support from the Japanese Anglican Church, and why the Japanese Anglican Church failed to actively promote the dispatch of missionaries and financial support to Korea. It was also a fundamental reason why the missionary capacity of the Busan sungkonghoe and Daegu sungkonghoe, which were influenced by Japanese missionaries, was not high in proportion to the size and population of cities. This lack of mission capability could not expand the scope of the mission from Japanese to Koreans, nor could it expand the scope of the mission beyond Busan and Daegu to other cities in the Gyeongsang provinces.

      • 일제 말 한국 기독교의 수난과 대응 : 일제에 의한 한국교회와 대한성공회 탄압을 중심으로

        조종필 성공회대학교 신학전문대학원 2006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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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까지 우리는 일제 말 식민지 조선의 기독교 정책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본론을 간단하게 요약을 해 보겠다. Ⅱ장에서는 일제 기독교 정책의 변화를 시기별로 구분해 보고 신사참배 강요와 종교단체법의 추진에 대해 살펴보았다. 우선 1절에서는 구체적으로 기독교정책의 각 시대별 특징들을 고찰해 보았고, 더불어 각 시기별 선교사들에 대한 정책의 변화도 살펴보았다. 일제의 기독교 정책은 한마디로 식민지 경영의 부속물로써 규정되었다. 선교초기 일제는 자국의 식민지 경영에 특별히 거슬리지 않는다면 종교문제에 개의치 않으려는 이른바 '정교분리' 노선을 폈으며, 선교사들 또한 마찬가지 경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일제 후기로 가면서 대(對) 기독교 정책은 '종교보국'의 기치로 선교사와 교회를 철저히 탄압하는 정책을 편다. 2절에서는 신사참배의 강요를 시대적 배경과 함께 서술하였다. 신사참배는 1930년대 들어 대륙침략을 본격적으로 재개하면서 일제의 '국체'사상에 기초한 황민화 운동의 주요 수단으로써 강요되었다. 3절에서는 종교단체법을 통과시켜 전시체제에 적극적으로 부합할 수 있고 기존의 교파적 교회체제를 일본적 교회체계로 대체시켜 철저히 천황제 중심의 종교보국으로써의 교회 정체성을 확립하려는 일제의 만행에 대해 서술하였다. Ⅲ장에서는 신사참배에 대한 각국 선교사들의 대응과 교회의 대응을 알아보고 신사참배 수용 이후의 교회의 변질과 종교단체법을 시발로 한 교회의 통합을 통해 일제 말 한국 교회가 격어야 했던 고통과 인내의 시기를 알아본다. 1절에서 우리는 기독교계 학교를 시작으로 철저히 강요되는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를 보게 된다. 또 이에 따른 각국 선교부는 순응과 반발의 과정을 겪으며 나름대로의 신학적 견해와 정치적 입장으로 신사참배에 대한 대응을 달리한다. 일찍부터 신사참배를 저들의 입장에 따라 국가적 행사로 받아들인 천주교와 감리교를 비롯해서 1938년 장로교가 마지막으로 신사참배를 모든 교단이 형식적으로 수용하기 까지 많은 저항에 부딪치게 된다. 이들의 저항은 개인적 저항을 비롯하여 선교부에 의한 학교의 폐쇄도 불사하였으며 한국의 교회는 많은 희생을 감내하여야 했다. 결국 신사참배를 수용한 교회는 일제에 의해 통합의 수순을 밟으며 변질되어 간다. 그러나 이러한 때에도 개인적인 저항은 계속되어 기독교 세력도 항일 운동의 한 줄기를 형성하며 일제의 만행에 저항하게 된다. 2절에서는 전시체제 식민지 병참기지화를 목표로 '종교보국'의 기치에 맞는 교회를 만들고자 종교단체법을 이용하여 일본교파와의 통합을 시작으로 '일본기독교 조선교단'의 결성까지 일제에 의해 강요된 부일협력과 교회 수난을 알아보았다. 일제는 종교를 국가의 통치하에 두고 종교통제를 보다 효율적으로 하고자 하였다. 이에 방해세력이었던 선교사를 1941년 전면 추방하였고, 교파적 특징인 '재림사상', '종말사상'등을 이유로 회유가 어렵다고 생각된 성결교, 동아기독교회(침례교), 안식교, 여호와의 증인 등을 일방적으로 해산해 버린다. 3절에서는 선교초기부터 사회사업 등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던 대한성공회 선교사들의 가치관과 신앙관을 살펴보고 신사참배에 대한 대응을 알아보았다 대한성공회는 일제 말기 영국선교부와의 관계로 인해 모든 선교사가 추방되는 아픔을 겪었지만 선교시기 내내 중용의 정신을 바탕으로 다른 개신교등과 같은 부일협력을 하지는 않았다. 특히 선교사들에 의해 운영되어지던 학교와 병원과 고아원, 보육원, 교회가 1941년 선교사 추방을 기점으로 큰 타격을 받았고 일본인 주교의 섭정으로 고난을 견뎌내야 했지만 대한성공회는 이렇듯 혹독한 시련을 견디어 냈다. 일제는 처음부터 기독교를 좋은 눈으로 보지 않았다. 일제의 식민지 경영의 근간인 '천황중심의 사상'과 근본부터 상충했기 때문이었다. 그러하기에 교회는 처음부터 관리의 대상이었고, 이후로 갈수록 통제와 억압의 대상이었다. 특히 1930년대 후반 일제의 집요하고 강압적인 황민화 정책으로 민족 자체가 말살될 위기에 처하였을 때, 교회 역시 기독교 순수 신앙이 왜곡되고 변절을 강요받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식민지 초기 일제는 '정교분리' 원칙을 강조하며 교회의 정치적 행동을 봉쇄하고 식민통치에 대한 저항을 막으려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한국 교회가 받아들일 수 없었고, 이후 일제는 교회의 계속되는 저항에 부딪치게 된다. 즉, 교회가 지향하는 하느님 나라는 세상 저편에 동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울부짖는 백성들 가운데 있는 것이기에 '교회와 국가', '신앙과 정치'는 상호 보완, 책임의 관계가 있는 것이다. 이후 일제의 종교탄압은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동시에 진행된다. 하나는 신사참배 강요이고, 다른 하나는 종교단체법을 통해 이미 국가에 종속되어있는 일본기독교로의 흡수와 교파 통합이었다. 이 둘은 한국의 기독교를 식민지 상황에 맞도록 국가에 복속시켜 '황국신민화'와 '식민지 병참기지화'에 합당하게 되도록 개량하고 천황을 신으로 받드는 일제의 근간사상에 종교를 유용하게 쓰기 위함이었다. 즉 일제는 기독교라는 자체는 인정하지만 기독교는 반드시 국가 체제 내에 속해야하고 국가의 이익에 복무하여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이러한 주장은 일제가 식민지 초기부터 제기해 왔던 종교관으로 일제가 강요했던 신사참배와 종교단체법도 이러한 그들의 사상을 관철시키기 위한 수단이었다. 결국 일제는 표면적으로는 그들의 정책에 한국의 교회를 꿰어 맞추는 성과를 얻는다. 즉, 일제의 강압과 회유에 굴복하거나 편승해서 친일을 하거나 부일협력을 했던 대다수의 교회 지도급 인사들과 제도권교회와 기관들이 그것이다. 그들은 일제가 주장하는 것처럼 신사참배와 종교통합을 신앙의 관점이 아닌 국가 체제로 받아 들였다 즉, 교회가 신사참배를 하고 각 교단을 통폐합하여 일본기독교에 복속 시키는 것을 종교적인 관점이 아니라 일제의 주장대로 단지 국가체제에 대한 순응 내지는 제도화의 한 과정으로 보았던 것이다. 그러하기에 친일을 하거나 부일 협력을 하였던 많은 제도권 교회는 나름대로의 당위성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주류를 이루었던 기독교 인사들이 변절의 길을 걸을 때 소위 '무명'의 신앙인들은 목숨을 걸고 조직적으로 대응하며 투쟁하게 된다. 이들은 순교를 각오하고 일제의 신사참배를 거부하였으며, 그 결과 일제 강점기 신사참배를 거부해 투옥된 이가 대략 2천명에 달하고, 200여 교회가 폐쇄되었으며, 50여명이 순교하게 된다. 결국 역사의 흐름은 억압받는 민중이 만들어가는 것이고, 일제의 광폭한 탄압도 기독교 저항세력을 막을 수는 없었다. 특히나 대한성공회는 열악한 조건 속에서 선교부 선교사의 전원 추방 등 가혹한 탄압을 받았다. 이러한 탄압은 일제가 영국과 맺은 영일동맹이 파기되면서 가해진 정치적 보복의 성격이 짙다고 할 수 있다. 즉, 대한성공회는 그 모태가 영국성공회이기 때문에 자신들의 대륙침략을 비난하는 영국과 영국성공회에 대한 간접 보복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당시의 선교사들은 교회를 지키기 위하여 선교부가 퇴진한 것이다. 대한성공회는 선교 초기부터 이 땅의 소외 받는 민중들을 찾아 복음의 터전을 넓힌 성공회였기에 교단의 성장보다는 병원, 고아원, 보육원, 학교등등의 사회복지 시설로 민족의 자립과 자활을 위해 노력하였고, 그러하기에 일본의 신사참배 강요에 유연하게 대처하며, 드러나는 부일협력을 통한 매국행위를 피해갈 수 있었던 것이다. 특히 교회를 책임지던 선교사들이 모두 쫓겨나서 모든 시설들과 일부 교회가 문을 닫아야 할 때에도 돈이 끊겨 굶어 죽을 지라도 교회를 지켜 내셨던 선조들의 신앙의 유산을 오늘날에도 이어나가고 있다. 즉, 대한성공회는 세계성공회와의 제도적 연대로 성공회로서의 정체성을 굳건히 지켜나갔던 것이다. 결국, 기독교계의 이러한 투쟁은 단순한 신앙수호에 국한된 투쟁이 아니었다. 혹독한 겨울에 꽁꽁 얼어붙은 시냇물 아래로 봄을 알리는 물이 흐르듯이 교회는 겨울을 이겨냈으며 이것은 일제에 의해 수탈당하고 억압당하던 식민지 조선의 거대한 항일 투쟁의 한 지류였던 것이다. 신사참배와 동방요배의 강요, 황국신민서사 제장, 창씨개명, 일본어상용등의 민족말살정책은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패망으로 막을 내기게 되지만 해방 직후, 흔적도 없이 사라졌던 교회의 제도가 빠르게 복구되고 회복되었던 것은 이러한 교회의 정신이 온전히 이어갔기 때문이다. 결국 일제의 종교정책은 그들의 바람과는 다르게 실패한 것이다. 이제 해방을 맞이한 지도 60년이 되었다. 한국과 일본은 2002년 월드컵을 공동 유치해 성공적으로 개최하는 등, 가장 가깝고도 먼 나라로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날로 좁아지는 양국의 관계에 비해 일본이 보이고 있는 전쟁 등에 대한 반성은 아시아 주면나라에 많은 실망을 남기고 있다. 특히 근래 들어 일본 매스컴이 벌이고 있는 중국 난징 대학살에 대한 조작설 제기는 과연 일본이 과거 전쟁에 대한 진심어린 반성을 하고 있는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을 하게한다. 또한 해마다 제기되는 야스쿠니 신사참배 문제와 침략국으로서의 반성을 외면한 일본 각료들의 계속되는 망언들을 봤을 때, 그 실망은 더욱 깊어져 간다. 많은 사람들은 과연 일본이 아시아 속에서 우리의 우방인가라는 질문을 하고 있다. 우방, 곧 이웃이란 옆에 살거나 일정한 관계를 갖는다고 이웃이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서로 사랑과 신뢰를 주고 받을 때 진정한 이웃이자 우방으로 거듭날 수 있는 것이다. 특히 일본의 과거사 문제는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 전후세대에게 많은 시사점을 주고 있다 과거는 과거로써 묻히는 것이 아니라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삶을 살아가는 나침반으로써의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기독교는 용서와 화해의 종교이다. 양국 간에 넘지 못할 벽이 있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나 1910년대 일본조합교회가 조선의 선교를 목적으로 일본 기독교를 전파하려 조선에 들어와서 활동한지 근 100년이 되어가는 시점에서 대한 성공회가 일본 성공회의 요청으로 선교사를 파송하는 것은 대단히 큰 의미가 있겠다. 신앙적 교류가 작은 줄기를 이루고, 그것이 나중에 큰 강물을 이룬다면 동북아에서의 평화와 안정에 기독교가 큰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두 민족 간의 진정한 화해를 이루는데 기독교가 교두보 역할을 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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