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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출토 고대 문자자료

        三上喜孝,오택현(번역자) 한국목간학회 2015 목간과 문자 Vol.0 No.14

        본고에서는 최근 일본에서 발견된 고대 문자자료 중 가장 주목되는 것을 선택해 그 내용과 의의를 소개하고자 한다. 이번에는 매우 귀중한 사례로 작년(2014년) 宮城? 仙台市의 鍛治屋敷 A遺跡에서 출토된 刻書砥石을 소개한다. 刻書砥石이란 철제의 칼 등을 갈아서 砥石에 문자를 새긴 것이고, 일본에서는 지금까지 群馬?의 유적에서 2건이 발견되었다. 지난해 宮城? 仙台市에서 발견된 刻書砥石은 그것에 이어 3번째 사례로, 연대는 9세기 무렵으로 추정된다. 刻書砥石에는 砥石으로서 사용되었던 4면 가운데 3면에 문자가 새겨져 있다. 그중의 1면에는 고대의 上申 문서인 「解」의 문서양식이 쓰여져 있다. 이것은 「講解 申請?事」라고 해독되며, ?의 申請으로 알려진 「解」의 문서를 표현했던 것이다. 그 「解」의 문서는 砥石의 기능과는 직접 관련되지 않은 내용이지만, 紙에 쓰여진 解의 양식에 충실히 입각하여 글쓰기를 하는 것을 보면 「解」의 문서양식에 관한 지식이 있는 자가 刻書했던 것이 확실하다. 일반적으로 砥石에 刻書하는 것은 대장장이라고 하는 공인이 하는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에 공인들 사이에서도 解의 문서양식에 관한 지식이 널리 알려졌을 가능성이 있다. 이것은 解의 문서양식이 고대의 지방사회에 널리 알려져 있던 것을 의미한다. 또한 정형화되었던 문서양식이 널리 알려지고 있었기 때문에 공인들에 의해 刻書도 행해지게 된 것이다. 더욱이 신청물을 「稻」로 쓰고 있는 것도 고대의 지방사회에서 작성되었던 解의 문서 중에서 벼를 신청하는 내용의 것이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가장 전형적인 신청내용이 砥石에 쓰여지게 된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이다. 벼의 대여와 지급은 고대 지방사회에 있어서 자주 행해지고 있던 것이다. 그것이 벼의 신청을 가장 전형적인 사례인 것으로서 인식시켰을 가능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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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木簡硏究 現場에서의 2가지 試圖

        馬場基,오택현(번역자) 한국목간학회 2011 목간과 문자 Vol.8 No.-

        일본에서 출토문자자료연구의 최신사정ㆍ최첨단 성과에 관한 2개의 화제를 소개하고자 한다. 첫 번째 화제는 디지털기술과 목간연구에 관한 것이다. 나라문화재연구소(이하 奈文硏으로 약칭)에 서는 과학연구비보조금의 지원을 받아 적극적으로 디지털 기술을 활용한 업무의 효율화와 데이터베이스郡의 구축화 공개로 더욱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우선 출토된 방대한 削屑을 디지털 사진을 축으로 한 アノテ?ションツ?ル(Annotation Tool)에 의해 효율적으로 정리하는 방법에 대해 소개한다. 다음으로 木簡 畵像 DBㆍ木簡字典을 기초로 해서 개발된DB郡의 소개, 東京大學 使料編纂所와의 제휴 등으로 DB개발에 의해 가능하게 된 공동연구의 사례, 또 이러한 성과를 활용한 디지털 처리된 연구사례로서 목간 위의 어떤 부분에 어떤 의미 있는 내용이 기재되어 있는 것이 많은데, 그렇다고 할 때 기재된 표기 패턴 추출과 관련된 연구를 소개하고자 한다. 두 번째 화제는 목간을 어떠한 관점에서 다루어 연구하는가에 대한 방법론적인 것이다. 이번에 제시 하고 싶은 것은 「목간의 작법론」 이라고 하는 시점ㆍ사고방식이다. 「목간의 작법론」은 「목간은 사람이 사용했던 도구」라고 하는 것에서 「사람」과 목간의 관계를 중시한다. 목간이 도구로 활용되기 위해서는 작성자와 수신측, 혹은 사회전체에 다양한 공통이해와 규칙이 필요했을 것이다. 「목간의 작법론」 은 이러한 사고방식에서 구체적인 場面에 따라 목간을 분석하여 목간의 사회적 존재상황, 그러한 라이프 사이클(Life cycle)의 의의, 목간문화를 생각해 목간의 자료적 특성을 파악하고, 또 목간이 지니고 있는 역사정보를 보다 깊숙이 끌어내어 입체적인 사회양상을 검토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된다. 몇 개의 사례 소개도 섞어가며 이 견해를 소개하고 싶다. 「목간의 작법론」 은 최신연구 상황이라기보다 보고자의 개인적 최신고찰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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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출토 고대 목간 - 고대 지역 사회에서의 농업경영과 불교활동 -

        三上喜孝(Mikami Yoshitaka),오택현(번역자) 한국목간학회 2020 목간과 문자 Vol.0 No.24

        본고에서는 鳥取県 青谷横木 유적에서 출토된 농업경영과 불교활동이 기록된 木簡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青谷横木 유적은 鳥取県 青谷 평야에 있으며, 고대 官道인 山陰道 유적과 条里制 구조, 많은 목제 제사 용구가 출토되어 주목되는 유적이다. 水陸 교통의 연결 지점이기 때문에 대규모 율령제적 제사가 행해지는 한편 농업경영 및 조세 수취와 관련된 말단 관아가 존재했다고 추정된다. 유적에서는 농업경영과 관련된 木簡이 다수 출토되었다. 먼저 주목할 것은 다양한 종류의 쌀 품종명이 기록된 꼬리표 木簡으로 소위 種子札 木簡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10세기 후반~11세기 전반에 제작된 것으로 생각되는 다수의 種子札이 확인되고 있다. 이들 木簡에서는 「須流女」 「長比子」 「赤稲」 「赤尾木」 「黒稲」 「嶋丸子」 「伊□子」라는 품종명이 확인되며, 이 중에는 다른 지역 유적에서 출토되었던 種子札에서 확인되는 동일한 품종명도 확인되어, 동일한 쌀 품종이 각지에 전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주목되는 것은 농업 노동 편성에 관한 木簡이다. 다양한 품종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농업 노동력을 관리해야 했는데, 그 기록이 木簡에 남아 있다. 그중에서 모내기 노동력이 중요시되고 있으며, 최근에는 각지에서 모내기 노동력을 기록한 木簡이 출토되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이 木簡에서 남녀를 나눠 기록하고 있다. 특히 9세기 말 이후가 되면 모내기 노동에 있어서 여성의 비율이 남성에 비해 높게 나타난다는 점이 주목된다. 마지막으로 불교 활동에 관련된 木簡이다. 経典을 서사한 木簡이 출토되고 있는데, 経典을 서사했던 주체가 「宅」이라는 경영 거점을 가진 남녀였던 것도 木簡을 통해 알 수 있다. 농업경영의 거점을 가진 사람들이 그 번영을 기원하는 의미로 불교 활동에 적극적으로 관여하고 있었던 양상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In this article, I would like to talk about mokkan on agriculture and Buddhist activities. Many mokkans have been found in the Ruins of aoyayokogi(青谷横木) that describe agricultural management. First, a label mokkan with various kinds of rice variety names was found, and second, a label mokkan related to agricultural labor formation was found. Third, mokkan involved in Buddhist activities was also discovered. Thus, it has been confirmed through mokkan that the Ruins of Aoyayokogi(青谷横木) is a site of diverse charac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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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7세기 목간에 보이는 한국목간

        市大樹(Ichi Hiroki),오택현(번역자) 한국목간학회 2019 목간과 문자 Vol.0 No.22

        본고는 일본의 7세기 목간을 여러 차례 살펴본 경험을 토대로 한국의 성산산성 출토 荷札木簡, 월성 해자 출토 前白木簡에 대해 약간의 문제 제기를 시도해 본 글이다. Ⅱ장에서는 성산산성 출토 荷札木簡을 살펴보았다. 1절에서는 목간의 연대를 문제 삼았다. 이제까지 신라 外位의 표기 등을 주된 근거로 삼아 성산산성 목간의 연대를 6세기 중엽으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목간의 표기에는 정도의 폭이 있다는 것을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지적했다. 최근 출토된 「壬午年」 목간은 592년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기 때문에 다른 목간의 연대도 6세기 말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2절에서는 성산산성 荷札의 서식을 살펴보았는데, 「地名+人名+物品名」을 기본으로 하면서도 다양한 형식이 존재함을 확인했다. 일본의 사례를 참고하면 이러한 서식은 오래 전부터 사용된 특징이 아닐까 생각된다. 3절에서는 수량이 많은 仇利伐의 荷札木簡을 살펴보았다. 특히 「人名A+奴(人)+人名B+負」의 표기를 중심으로 고찰했다. 「奴(人)」는 從者 정도의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천민 신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또 「負」는 「荷物」을 의미하는 명사가 아니라 「負担하다」의 의미를 지닌 동사라고 생각된다. 이것과 관련해 「発」도 「発送하다」의 의미인 동사로 보인다. 4절에서는 조금 특수한 사례로서 「◯城下」의 荷札木簡을 살펴보았다. 이러한 타입은 「◯城下」의 真下에서 물품명이 기재되었다는 점이 특이하고, 품목과 麦 · 米로 少数派인 것을 확인했다. 또 「◯城下」가 州·郡 중 어디인지를 생각했을 때, 郡에 가깝다고 결론 내렸다. Ⅲ장에서는 월성 해자 출토 前白木簡을 살펴보았다. 1절에서는 「大烏知郎」으로 시작되는 4면 묵서 목간을 살펴보면서 일본의 前白木簡과의 공동점이 많다고 소개하였다. 그 후 중국 漢簡과의 비교를 시도한 김병준의 견해에 대해서도 약간의 의견을 덧붙였다. 2절에서는 2017년에 공개된 월성 해자 출토 前白木簡 3점을 살펴보았다. 여기서는 그 서식에 주목하면서 검토를 진행했다. 지금까지 알려진 한국의 前白木簡과 달리 3점 모두 날짜가 적혀 있지 않으며, 2점은 첫머리에 행선지(상신처)가 기록되어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것들은 일본에서 출토된 대부분의 前白木簡과 공통된다. 또 이 3점을 포함해 한국의 前白木簡을 살펴보면 행선지가 地位 · 尊称 · 官職으로 기록되는 것, 差出이 생략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은 일본과도 공통되는 부분이다. 일본의 前白木簡의 직접적인 기원이 조선반도에 있었다고 하는 추론은 이미 제기되었지만, 보다 명료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Based on Japan’s experiences in the 7th century, this thesis attempts to raise some questions about 荷札木簡, which was excavated from Seongsan Fortress(城山山城), and 前白木簡, which was excavated at the moat of the Wolseong palace(月城垓字) in Gyeongju. In Chapter II looked at the excavated at Seongsan Fortress(城山山城) wooden tablets on tag attached to the luggage(荷札木簡). The first verse took issue with the wooden solidarity. In the second verse, we looked at the wooden documents standard form of Seongsan Fortress(城山山城). In section 3, we looked at the high volume of Guribeol(仇利伐). In section 4, we looked at 「◯城下」 of wooden tablets on tag attached to the luggage(荷札木簡) as a rather special example. Chapter III looked excavated at the moat of the Wolseong palace(月城垓字). The first verse confirmed that there were many joint points with Japanese wooden docunents to compare in korea wooden documents. In the second verse, we looked at three pieces of the Wolseong moat(月城垓字), which were released in 2017. The reasoning that the direct origin of Japan’s wooden documents of front writing ‘前’(前白木簡) was found in the ancient korea has already been raised, but is appearing in a clearer for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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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日本 初期 石碑의 형태에 대한 검토

        前澤和之(Maezawa kazuyuki),오택현(번역자) 한국목간학회 2017 목간과 문자 Vol.0 No.18

        日本의 渡来文化의 하나인 초기 石碑에 대해 현존하는 18점 중 3점이 모여있는 群馬県 高崎市의 山上碑(681年) · 多胡碑(711年頃) · 金井沢碑(726年)의 형태 · 비문을 중심으로 그 <전파-수용-전개> 양상을 검토하고자 한다. 현지의 승려와 불교신앙자가 건립한 山上碑과 金井沢碑는 그 지역의 安山岩인 自然石을 그대로 사용했으며, 형태는 신라의 대구 塢作碑 · 南山新城碑 제1비와 유사하다. 그리고 이 지역에 새로운 郡이 성립된 사정을 기록한 多胡碑는 지역에서 생산되는 砂岩을 가공해 笠石 · 碑身 · 台石으로 구성된 정돈되어진 형태로 신라의 진흥왕순수비인 磨雲嶺碑 · 北漢山碑와 유사하다. 이들 형태를 비교해보면 석비는 7세기 후기부터 8세기 전기에 이 지역에 도래했던 신라의 사람들이 가지고 온 정보를 이 지역의 유력자가 수용해 받아들이고, 石材와 형태 등 碑文의 표기와 刻字 방법에 창작력을 가미해 건립했다고 보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続日本紀』에 이 시기 僧 · 官人을 포함한 다수의 신라에서 사람들이 주변지역에 이주했다는 기사가 있다는 것에서 증명된다고 생각된다. 이것들 石碑가 건립되었던 지역은 5세기 후기에 말의 사육 기술과 함께 한반도에서 사람들이 가져온 이주된 유적이며, 6세기 후기~말기의 고분의 부장품에서도 중국·한반도에서 가지고 온 다수의 문물을 살펴 볼 수 있다. 또 오래 전에 성립되었던 韓級이라는 지명과 도래인이 창건했다고 하는 辛科神社가 현존해 있다. 더욱이 『続日本紀』의 기사와 출토문자 자료에 의해 신라에서 도래한 사람들의 후예인 子氏가 다수 거주하고 있던 것이 판명되었다. 즉 여기는 일본 열도에서 초기 석비의 문화가 수용된 보기 드문 지역 중 하나이며,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오래 전부터 다른 민족과 공생하는 사회가 만들어져 있었기 때문에 도래해 온 새로운 문화의 가치를 일찍부터 이해하는 것이 가능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이들 3 사례에서 보는 것같이 일본열도에서 초기 석비의 수용은 한반도 특히 신라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중국의 풍습을 받아들인 것은 多賀城碑(762)와 浄水寺의 石碑群(790~1064)에 불과하고, 螭首 · 亀趺를 동반하는 형식의 석비가 만들어졌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그 영향은 한정적이여서 일본열도에서 중국풍 석비의 건립 보급에는 이르지 못했다. 이렇게 동아시아 각지의 초기석비의 양상을 비교검토하면 사람과 문화의 교류 실태를 보다 精緻하게 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This study aims to investigate into the 〈propagation-acceptance-development〉 pattern shown in Yamanoue Stela(681), Tago Stela(around 711), and Kanaizawa Stela(726) located in Takasaki-si, Gunma-ken Prefecture. These three Stelas only exist among 18 in total as part of Ancient Immigrants culture of Japan. Yamanoue Stela and Kanaizawa Stela erected by local Buddhist monks and adherents of Buddhism used the natural intact stones as produced in the region and were similar to the first monument of Daegu Ojakbi and Namsan Sinseongbi of Shilla. And Tago Stela, a record of the process that a new county was formed in the region is composed of menhir, body of monument, and moss-grown stone by processing the sandstones produced in the region. This is similar to Maunryeongbi and Bukhansanbi, the monuments commemorating King Jinheung’s tour. To compare the shapes, it can be seen that the stone monument was built when local influential people accepted the information that the people of Shilla, who came to this region from late 7<SUP>th</SUP> century to early 8<SUP>th</SUP> century brought with and added their creativity to stone monument, marks on epitaph, and inscription method. This is also proven by an article in 『Shoku Nihongi』 that a great number of people of Shilla including Buddhist monks and officials emigrated to the neighboring areas during this period. These stone Stelas were built in historic sites where people emigrated from the Korean peninsula with horse breeding method in late 5<SUP>th</SUP> century. And in burial goods of ancient tomb from the late 6<SUP>th</SUP> century to the end of 6th century, multiple products from China and Korean peninsula were observed. Also, the place name Hangeup which was named a long ago and Shingwa shrine which was known to have been founded by the people who came to this region are still existent. Furthermore, it turns out that people whose family name is ko(子), many descendants of the people who came from Shilla had lived here, according to an article in 『Shoku Nihongi』 and excavated texts. This is one of the rare places where the culture of initial stone monuments was accepted by the Japanese Archipelago. What made this possible is probably that already, a symbiotic culture with other nations was formed a long ago, which made it possible to understand the value of new emerging culture early on. As shown in these three examples, the initial acceptance of stone Stela in Japanese Archipelago was influenced a lot by the Korean peninsula, especially Shilla. Dahaseongbi (762) and Seokbigun of Jeongsusa Temple (790~1064) only accepted the Chinese custom, and the traces of stone monument accompanied with Isu and Guibu are not seen. As the influence was limited, it could not lead to the establishment and propagation of Chinse stone monuments into Japanese Archipelago. Like this, I’d like to stress that if we compare the patterns of initial stone monuments from every corner of the East Asia, it will be possible to elaborate the actual condition of cultural exchange between huma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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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트남의 10세기 이전 石碑에 대하여

        Ph?m Le Huy,오택현(번역자) 한국목간학회 2017 목간과 문자 Vol.0 No.18

        최근에 10세기 이전의 역사에 대한 문헌자료의 극복을 위해 베트남의 역사가들은 고대에 작성된 비문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연구는 비문에 새겨진 글자뿐만 아니라 역사적인 배경도 살펴보게 된다. 또 비석이 만들어질 때 어떠한 기법이 사용되었는지, 멀리 떨어진 지역 사회에서 나타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도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 고대 비석에 대한 관심은 2013년에 발견된 陶璜廟碑에 의해 더욱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3세기 후반 吳(三國)~晉代의 交州刺史였던 陶璜는 삼국시기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비석은 앞면(314년)과 뒷면(450)에 새겨져 있으며, 모두 베트남에서 가장 오래된 석비로 알려져 있다. 본고를 통해 첫째로 필자는 陶璜廟碑를 고찰하고 이를 설명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 비석의 형태를 동아시아에서 발견된 다른 비석들과 비교·검토하는 작업을 행할 것이다. 이러한 작업은 4세기 초의 비석건립과 지역사회에서 활동하던 인물들의 상관관계를 밝힐 수 있을 것이라 기대되기 때문이다. In recent years, to overcome the limitations of historical documents about pre-tenth-century history, the Vietnamese historians have paid attention onother historical sources, notably the ancient steles. Our studies focused on not only the inscriptions which were engraved on the steles themselves, but also on the historical background, as well as the way that the steles were created, including engraving techniques, and the way they have been conserved by the local communities so far. Our knowledge about ancient steles was promoted by the discovering of the stele of Tao Huang Shrine in the year of 2013. During the second half of the third century, as a General of the Wu Dynasty and then the Head of Jiaozhou of the Jin Dynasty, Tao Huang was playing a very important role in the end of Three Kingdoms period. Located at the south of Jiaozhou citadel, the stele has two inscriptions on the front (dated 314 CE) and the back (dated 450 CE), both are identified to be the oldest stele inscriptions in Vietnam. In this paper, at first, the author will firstly provide an overview of the studies on ancient steles in Vietnam, and then introduce the newest interpretation of the stele inscription of Tao Huang Shrine. The author will also compare the shape of this stele with other steles which have been discovered in East Asia, and clarify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construction of this stele and the activities of local powers in Jiaozhou at the beginning of the fourth centu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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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출토 고대 문자자료 - 秋田県 秋田城跡 111次 調査 出土 具注暦 기재 漆紙文書-

        三上喜孝(Mikami Yoshitaka),오택현(번역자) 한국목간학회 2019 목간과 문자 Vol.0 No.22

        본고는 매년 최근 일본에서 출토된 목간 중 주목되는 것을 선택해 소개했지만, 이번에는 작년에 이어서 필자가 조사에 관여한 漆紙文書의 출토 사례를 소개하고자 한다. 秋田城이란 秋田県 秋田市에 있는 고대 城柵으로 山形県 庄内地方에 있던 出羽柵을 733년(天平5)에 이동시킨 것이다. 8세기 후반에는 出羽国府를 두었다고 하는 견해가 있다. 秋田市 教育委員会에 의해 발굴조사가 진행되었고, 최근 조사에서 漆紙文書, 木簡, 墨書土器와 같은 유물에서 문자자료가 대량으로 확인되었다. 2018년 111차 조사에서는 秋田城의 西門 유적지 부근에서 발굴된 토기에 부착되었던 漆紙文書가 출토되었다. 적외선 카메라를 사용해 조사해 보니 고대 具注曆의 일부가 확인되었다. 具注暦이란 지금의 달력인데, 暦日을 표시한 것 이외에도 日의 干支, 納音, 十二直, 節気, 七十二候, 吉凶과 禍福 등의 暦注를 적어 놓은 暦이었던 것이다. 고대 일본에서는 具注暦이 매년 중앙정부의 陰陽寮에서 작성되어 中務省을 거쳐 諸司·諸国에게 배포되었다. 그러나 頒暦의 실태는 諸国에서 雑掌들이 都에 가서 서사해 가지고 왔다고 생각된다. 国府에 준비된 具注暦은 다시 동일하게 서사되어 国府 내의 기관과 国分寺 그리고 郡家 등에도 구비되었을 것이다. 具注暦의 서식은 일반적으로 상 · 중 · 하 3단으로 되어 있다. 상단에는 日付 · 干支 · 納音 · 十二直, 중단에는 24절기와 七十二候, 하단에는 暦注와 吉事注 등을 기재했다. 고대의 具注暦은 각지에서 漆紙文書의 형태로 출토되고 있다. 正倉院 文書에서 전래된 3개의 사례를 포함해 具注曆은 이제까지 15건 정도 확인되고 있다. 이번에 출토된 秋田城 111차 조사 출토 漆紙文書는 남겨진 문자 정보에서 宝亀 9년(778) 具注暦으로 4월 30일~5월 3일 부분일 가능성이 높다. 이것은 漆紙文書가 부착되어 있던 토기의 연대와도 일치하는 연대관이다. 秋田城跡에서는 天平宝字 3년(759)의 具注暦 漆紙文書가 발견되었고, 기록된 具注暦은 儀鳳暦이다. 하지만 이번에 발견된 778년 暦은 大衍暦이여서 하나의 유적에서 儀鳳暦에서 大衍暦까지의 具注暦의 변화를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귀중한 자료라고 생각된다. 또 잘못 서사되었다고 생각되는 부분도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秋田城이라는 官司에서 具注暦이 2차로 서사되었을 가능성도 엿볼 수 있다. Akita Castle(秋田城) is an ancient a fortress and a palisade(城柵) in Akita, Akita Prefecture(秋田県), and an excavation was conducted by the Akita City Education Committee(秋田市教育委員会). In the 111th survey in 2018, Lacquered documents(漆紙文書) were unearthed near the west gate of Akita Castle(秋田城). An infrared(赤外線) camera showed that some of the ancient Juzhuli(具注曆, annotated calendar) were identified. The form of the sphere force is generally in three stages: top, middle, and bottom. The 111st Akita Castle(秋田城) 111th investigation of the Lacquer Paper document is highly likely to be the part of the calendar from April 30 to May 3. The 778-year-old calendar, which was discovered this time, is a valuable reference to the transition from the Giho calendar(儀鳳暦) to the Taisho calendar(大衍暦) in one si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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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日本 古代史의 研究와 木簡

        森公章(Mori, Kimiyuki),오택현(번역자) 한국목간학회 2016 목간과 문자 Vol.0 No.17

        본고는 일본 고중세사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木簡(나무에 쓰여진 문서)의 중요성에 대해 서술한 글이다. 일본에서는 2015년 말에 43만 점의 木簡이 발견되었으며, 그중 平安時代 말기(1185)의 木簡은 약 32만 점 발굴되었다. 먼저 木簡이 발견된 장소를 살펴보면 都城과 地方官衙 2가지로 나눌 수 있다. 수도 平城宮 에서는 24만 점의 木簡이 출토되었는데 이를 통해서 당시 사회상을 엿볼 수 있었다. 또 지방과 관련해서는 東大寺의 大佛 건설과 관련된 木簡이 출토되었는데, 이를 통해서도 지방에 대한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地方官衙 木簡은 약 1만 5천여점으로 추정되며 모두 지방사회를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자료群이다. 일본의 木簡學會에서는 매년 奈良市에서 총회를 개최하고 있으며, 1994년부터 4년마다 특별 연구회도 개최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활동은 목간연구의 확산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목간 연구는 지금까지 약 40여년 동안 이루어졌기 때문에 여러 가지 연구 방법을 확립했고, 그 결과 많은 서적과 논문이 양산되었다. 최근에는 이러한 것을 바탕으로 6세기 한국목간과의 비교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중국 목간 문헌 연구자들과의 공동 연구를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는 동아시아 규모의 목간문화를 연구할 수 있는 상황에 이르게 된 것이다. 우리는 일본고대사를 이해할 때 목간이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그리고 이를 통해 주변국과의 국제관계를 파악할 수도 있고, 문서행정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에 대해서도 알 수 있게 되었다. 이점은 일본고중세사를 이해하는데 큰 의의를 갖는다고 볼 수 있다. In this report I’ll tell you how important the wooden writing tablets(wooden documents) are for the study of Japanese Antique Age History. In Japan at the end of the year 2015 more than 430,000 tablets were excavated, especially about 320,000 are concerning to the Antique Age(to the end of the Heian Period i.e. 1185A.D.). First we see what sorts of the sites the tablets were excavated. We divide them in two categories, the Capital Cities and the Local Government offices. In the Capitals Heijo Capital Site of the Nara Period is most inportant, because we excavated 240,000 tablets and though the examination we can consider the real figue of the Risturyo System at that time and everyday lives of the noble bureaucrat or citizens which were difficult to reveal only by the historical materials handed down. In Todaiji Temple Site we excavated the tablets concerning to the construction of Great Buddha and at the same time we also excavated the tablets in Naganobori Site of Yamaguchi Prefecture which exported coppers to Nara.This is the case of reconstructing History from many different points of view thanks to the tablets. The number of the tablets excavated from the Local Government offices is considered to be 15,000 totally. But they are very important sources for the research on the local affairs. The Japanese Society for the Study of Wooden Documents hold the general meeting and reserch assembly yearly in Nara City only for the members, but from the year 1994 on we also hold the special research assembly every 4 years in the place where a lot of and meaningful tablets were excavated. These research assemblies are opended to the undergraduate and postgaraduate students of universities or researchers who are not members of the Society. Though these ivents we are trying to expand the trend for the study of wooden documents. Talking about the tendency of the research, owing to about 40 years work of our Society, we have already established the researching methods of the wooden writing tablets, so the books and academic papers in this field are accumulating well.If we say the new trend Korean wooden documents which include the materials about the 6th century are very important and useful for the study of the 7th century’s History of Japan. Not only with the Korean studies we also conduct joint research with the Chinese wooden documents researchers. I hope this trend will be the evolution for the study of wooden documents in the scale of East Asia. If I have enough time, I"ll tell my own studies how I used wooden documents for considering Japanese Antique Age History. The one is the case of international relationship between Japan and Silla, and the other is concerning to the couty or its branch government offi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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