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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대학교 민속학과 안동대학교 민속학과 1998 민속학연구 Vol.4 No.1
경상북도 울진군 기성면 사동리는 울진군에서는 남쪽에 있으며 기성면사무소에서 약 4km 떨어진 곳에 있다. 2, 3리를 합쳐 약 1.3km 정도 동해를 바라보며 길게 늘어선 모양이며 사동리는 上沙銅과 下沙銅으로, 현재는 행정구역 1리(上沙銅)와 2,3리(下沙銅)로 나누어져 있다. 沙銅이라는 마을 명칭은 예로부터 모래가 있는 골 근처는 金, 銀, 銅 등 광물질이 있다고 구전되어 불리게 된 이름이다(慶尙北道 地名由來總覽).
안동대학교 민속학과 안동대학교 민속학과 1999 민속학연구 Vol.5 No.1
이번 답사에서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지경1리라는 마을내의 작은 갈등관계였었고 이러한 점을 감안하여 글을 서술하고자 노력하였다. 각각의 영역별로 서술한 것에서 살펴볼 수 있었듯이 지경1리는 생업기술에서나 생업기술을 기반으로 생겨나는 사회조직에서, 또는 마을의 신앙체계 속에서 작은 갈등들을 살펴볼 수 있었다.
안동대학교 민속학과 안동대학교 민속학과 1998 민속학연구 Vol.4 No.1
이제까지의 조사되어져 온 답사보고서는 대부분 한 사회를 민속학의 각 파트별로 단락 짓고, 이를 조사하여 그 결과물을 통하여 전체를 보고자 하였었다. 그러나 이러한 조사방법에 대하여는 이미 많은 한계점이 드러나고 있다. 그리하여 본 오산1리의 답사보고서에서는 이러한 기존의 양식을 탈피하여 한 마을 사회의 일정 부분을 통하여 그것과 연관되어져 있는 마을 전체를 보는 새로운 시도를 하고자 하였다.
안동대학교 민속학과 안동대학교 민속학과 2000 민속학연구 Vol.6 No.1
습례라는 지명(地名)은 '모름지기 사람이라면 반드시 예절을 익혀야 한다'는 뜻이라고 한다. 1914년 행정구역 통ㆍ폐합에 따라 개령군 무송면의 월유동 일부를 병합하여 현재의 습례라고 했다. 이에 관한 전설로는 '조선초기(1435년경) 손씨(孫氏)라는 사람이 어질고 덕(德)이 있는 사람을 골라 수련당(修練堂)을 짓고 이곳에서 마을 사람들의 덕을 닦게 하였다'고 전한다. "수련당"은 약 250년 전에 소실되었다고 전하며, 그 이후 많은 덕망이 있는 인물이 배출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습례2리에는 2개소의 자연지명이 있는데 하나는 배터이고 또 다른 하나는 대발골이다. 배터는 오래 전에 마을 앞까지 배가 들어 왔다 하여 유래된 명칭이며, 대발골은 뒷산 밑에 대나무 밭이 여기저기 많아 붙여진 명칭이라 한다. 또 한 본 배터와 500m 떨어져 있는 대발골은 동쪽에 위치해 있다.
안동대학교 민속학과 안동대학교 민속학과 2000 민속학연구 Vol.6 No.1
조선시대 선산(善山)도호부였던 그 당시 선산읍 4개 동에 북문, 동문, 남문, 서문의 사대문이 있었다. 또 산은 북에는 비봉산(飛鳳山). 동에는 냉산(冷山), 남에는 금오산(金烏山), 서에는 월류산(月流山)이었다. 선산 서문(면문)에서 보면 달이 서편 높은 산으로 흘러 기운다 하여 그 산명을 월류산이라 불렀다. 산세가 아홉 개 봉(峯)으로 되어 있는데 능선마다 이름하여 동편부터 성주골, 족제비골, 너북골, 여더래골, 큰골, 제피골, 물방골, 통시골, 모과나무골이다. 이렇게 뒷산 이름 월류와 마을을 중심으로 부챗살같이 퍼져 있는 골을 합쳐서 월류(月流)골이라 하게 되었다
안동대학교 민속학과 안동대학교 민속학과 2000 민속학연구 Vol.6 No.1
소재리가 속해 있는 구미시의 동북부에 위치하여 서북쪽으로는 무을면과 옥성면, 서쪽으로는 김천시 감문면, 남쪽으로는 고아읍, 동쪽으로는 낙동강을 접하고 있다. 선산읍은 신라시대에는 일선주 숭선군으로, 고려시대에는 선주부로 조선시대에는 일선현, 선산군 등 조선시조 태종 13년이래 580여 년 동안 군청 소재지로 이어져왔다. 일선현, 선산군으로 개칭되는 동안에 동내방(東內防), 독동방(禿東防), 서내방(西內防) 무래방(舞來坊)방 등 4개방(個坊)을 통합하여 선산면으로 불리어지다가 1979넌 5월 1일 대통령령 제9409호에 의거 읍(邑)으로 승격하였다. 그 후 1983년 2월 15일 행정구역 조정(대통령령 제1027호)에 의해 옥성면의 봉곡리,포상리와 금릉군 감문면의 소재리, 봉남리가 편입되어 현재 27개가 리가 되었다.
평택 임씨와 타성들의 조화를 이룬 웃무실 : 봉곡 1 리
안동대학교 민속학과 안동대학교 민속학과 2000 민속학연구 Vol.6 No.1
현대의 농촌사회는 대중매체, 교통, 통신 등의 발달 하에 이전과는 달리 정보의 수용과 대체가 빨라졌다. 또한 기술의 발달로 농업의 생산성이 향상되고, 농기계를 사용하는 경작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따라서 지금의 농촌은 예전과는 비교 할 수 없을 만큼 도시화가 진행되었으며, 이는 농촌사회 구성원들의 사고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급속한 발달에도 불고하고 현대의 농촌에는 여전히 예전의 문화 요소들이 존재하고 있다. 이것은 현재의 농촌문화가 새로운 문화와 전통문화라는 두 가지의 문화가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음을 의미한다. 봉곡1리 또한 한국 농촌의 한 마을이기에 이러한 문화적인 성격을 그대로 지니고 있었다.
안동대학교 민속학과 안동대학교 민속학과 1998 민속학연구 Vol.4 No.1
오산2리(초산)은 농업에서 어업으로의 전향이라는 생업적 특성과 함께 수자원의 부족에 늘 고심해 왔던 세월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바다와 인접한 어촌이면서도 농사를 지으며 양반의식으로 생활해 왔던 과거 오산3리에서 소작을 하던 이들 중 상당수가 오산2리로 이주해 왔다. 따라서 오산2리 사람들은 자신들의 전력에 대해 상대적으로 열등감을 가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으나, 당연히 직접적인 표현은 삼가는 눈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