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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태안지역(泰安地域)의 대표적(代表的) 무속인(巫俗人)인 이내황(李來晃) 소고(小考)

        신상구 ( Shang-koo Shin ) 충남연구원 2010 충남연구 Vol.3 No.2

        고 농취(濃翠) 이내황(李來晃, 1919-2003) 법사는 1919년에 태안군 근흥면 마금리(磨金里)의 전주이씨(全州李氏) 문중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무속인으로 활동한 아버지 이상순(李翔純)과 여산송씨(礪山宋氏) 사이의 5남 1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7세 때부터 16세 때까지 조모인 담양전씨(潭陽田氏)로부터 「천자문(千字文)」을 배우고, 동네 서당의 여러 훈장으로부터 한문과 주역을 배웠으며, 부친인 이상순(李翔純)으로부터는 여러 경문(經文)을 배웠다. 그의 가족은 그가 17세 때에 마금리(磨金里)에서 그 부친이 태어난 마을인 안기리(安基里) 1구 율현동(栗峴洞) 870번지로 다시 이사를 와서 농사를 지으며 살았으나 가뭄으로 흉년이 계속되어 고통만 따를 뿐 가난을 면하기 어려웠다. 22세 때인 경진년(庚辰年) 음력 11월 27일에 소원면 모항리(茅項里) 2구에 사는 18세의 정단분(鄭丹分, 80세)과 결혼하여 슬하에 2남 3녀를 두었다. 그는 일제시대에 두 번이나 끌려가 강제노동에 시달려야만 했다. 24세 때에는 강원도 화천의 수력전기공사장과 철원의 철도공사장으로 끌려가고, 27세 때에는 함경도 북청의 철산공장과 흥남 비행장으로 끌려가 강제노동에 시달렸다. 해방 후 그는 논 10마지기와 밭 1800평을 소유하고 77세까지 농업에 종사했다. 그런데 그는 한학(漢學)에 정통하고 경(經)에 밝아, 농사를 지으면서도 42세부 터 59세까지 근흥면 안기리 1구 율현동 870번지에 위치한 자기 집 사랑방에서 서당을 운영해 이효성(李孝星), 이성희(李星喜) 등 수많은 제자를 양성했다. 한편 그는 26세 때에 아무런 까닭 없이 몸이 초췌(憔悴)해 지자 그 병을 고칠 목적으로 불경(佛經)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 후 9년 간 불경을 익혀 어느 정도 자신감이 생기자 그는 부친에게 자기도 법사가 되겠다고 했다. 그러자 부친은 이내황(李來晃) 법사에게 신명(神明) 없이 법사 노릇을 하기는 어려우니 우선 먼저 신이 통하는지 살펴보자고 했다. 그리고 그의 부친은 그에게 대를 잡고 통신주문(通神呪文)을 21번 외우면 몸에 신이 내린다고 하니 그렇게 한 번 해보라고 했다. 그래서 그가 대를 잡고 통신주문(通神呪文)을 외우기 시작했는데, 7번 쯤 외우자 놀랍게도 신이 내려 곧바로 법사로 활동하게 되었다. 그 후 1952년에 부친이 세상을 떠나자 그는 부친의 신당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그러나 그는 법사로 활동하면서도 신명(神明)에 대한 믿음은 적은 편이였다. 그리고 그의 신당에 옥수(玉水) 한 잔 바칠 줄을 몰랐다. 그래서 그런지 그는 40대 후반에 큰 병이 나서 자리에 누웠다. 그래서 점괘(占卦)를 보니 신당에 탈이 났으므로 새로 방 한 칸을 내어 새로 신당을 모시고 지극정성으로 신을 모시 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의 제자인 서아지(徐牙只)와 정해남(丁海男)을 불러 내림긋을 하고 자택의 왼편 방 한 칸을 내어 신당을 새로 차린 다음, 35세부터 50세까지 15년 동안 세습무(世襲巫)로 활동했다. 그가 무업(巫業)을 하는 동안 짝패를 이루며 같이 활동한 무속인으로는 안기리(安基里) 2구의 박용채(朴龍彩, 朴壽天 부), 마금리(磨金里)의 김성태(金成泰)·송영노(宋榮魯), 두야리(斗也里) 1구의 문봉위(文奉緯) 등을 들 수 있다. 그는 이미 2000년 5월 단오날에 작고한 조부원(趙富元) 법사의 어머니 서아지 (徐牙只)를 비롯해 지금 태안지역에서 중견 무속인으로 활동하고 있는 박수천 (朴壽天, 71세), 정종호(鄭鍾鎬, 79세), 정해남(丁海男, 기세), 조부원(趙富元, 60세), 김종일(金鍾一, 63세), 최순희(崔順姬, 74세) 등 많은 제자를 양성하여 태안지역 무속인들 사이에는 널리 알려져 있다. 그리고 그는 점도 쳤는데, 육효점(六爻占)과 단시점(短時占)을 많이 쳤다고 한다. 특히 그는 병경을 의뢰하러 오는 사람 앞에서 산통으로 점을 쳤는데, 점치기에 앞서 먼저 축원을 한 후에 그가 산통에서 쇠침으로 된 괘를 세 번 뽑아 보아 점괘를 종합해 보았다고 한다. 복채는 가족점을 보는 데는 1000~2000원을 받았고, 굿을 하는 데는 일당 3 만원을 받았다고 한다. 그 후 51세부터 최근까지는 독학으로 습득한 풍수지리학(風水地理學) 지식을 활용하여 틈틈이 지관 노릇을 해왔는더ᅵ, 보통 묘자리 하나 잡아주는 데 20만원을 받았다고 한다. 그는 말년에 안기리 1구 율현동의 지방도 603호변에 살았는데, 결국 노환으로 시달리다가 2003년 9월 18일(음력 8월 5일) 타계해 마금리 선산에 묻혔다. 그가 유품으로 남긴 단행본은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무상대경전집(無上大經全書)」을 비롯해 36권에 달했다. 그리고 그의 사후 4년 만인 2007년 4월에는 그의 수제자인 정해남(丁海男), 김종일(金鍾一), 조부원(趙富元) 등이 이내황 법사 가 일평생 수집해 읽은 경문을 수집 정리하고, 십시일반으로 출판비를 마련하여 『경문대요(經文大要)』을 간행해 보급함으로써 태안지역 무속문화 발전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Nongchwi Lee rae-hwang was bom as the second son of Lee shang-soon who was farming at Mageumri in Geunheungmyeon of Taean country in 1919. His father served as shaman or the teacher of Seodang(village school) or geomancer as a side job. He learned Chinese character and the book of changes(周易) from the ages of 7 to 16 years old from his grandmother and teacher of seodang in his native village. His family moved back to Angiri from Mageumrieseo when he was 17 years old Angiri is a village which his father was bom. His family lasted only pain from famine and poverty because of drought. When he was 22 years old, he married with 18-year-old Jeongdanbun who lived at Mohang in Sowonmyeon. He had two sons and three daughters at home. He had been suffering from forced labor twice in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Really he suffered from forced labor at Hwacheon hydro-electric construction and Cheorwon railway construction in Gangwondo when he was 24 years. And he suffered from forced labor at Heungnam airfield and Bukcheong iron factory in Hamgyeongdo when he was 27 years. After Korea's liberation from Japan, he was engaged in agriculture with paddy field 10 majigi and field 1,800 Pyeong until he was 77 years old. When he was 26 years old, his body became inexplicbly weakened. So he learned many kinds of Buddhist scriptures to heal his sickness for nine years. And when he chanted communication mantra 7 times to become a shaman, he could memorize God's body. After that, As soon as his father passed away in 1952, he took over his father's shrine. However, His belief in spirits was a small shift. So he were seized with the spiritual sickness in late 40s. He received naerimgut(an invocatory rite) from Seo oa-ji and Jeong hae-nam who he had taught for a long time. And after he redid new spiritual shrine in his house, he served as a hereditary shaman with Bak yeong-chae, Song yeong-no, Mun bong-wi Bupsa for 15 years from the age of 35 to 50 years old. In this time, he nurturedd many disciples such as Seo oa-ji, Jo bu-won, Jeong hae-nam, Bak su-cheon, Kim jong-il, Jeong jong-ho, Choi sun-hui and so on. On the other hand, he operated Seodang(village school) for residents who reside in Angiri, Yongsin-ri, Dohwangri, Mageumri in his house for 17 years from 42 to 59 years old and trained many leading disciples such as Lee hyo-seong, Lee seong-hui and so on. At times he played an important role as a fortuneteller through Dansijeom(短時占). So he is widely known as hereditary shaman and a teacher of seodang among residents in Taean long ago. In his later years, he was living in farming houses near the local rout passing through Angiri in Geunheungmyeon. Finally he died of old age on September 18, 2003 (lunar August 5) and was buried in mageumri seonsan(family graveyard). He left 36 kinds of books that inherited from the parents. After four years, his disciples collected all of his scritures and published 『KyeongMunDaeyo(經文大要)』. The supply of 『KyeongMunDaeyo(經文大要)』 are making significant contributions to the development of shamanistic culture in Ta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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