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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0~70년대 원주교구의 지역 신협운동 : 진광 협동교육연구소와 진광신협의 활동을 중심으로

        방성찬 강릉원주대학교 교육대학원 2017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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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논문은 진광 협동교육연구소와 진광신협의 활동사례를 통해 1960~70년대 원주지역 신협운동을 살펴보고자 한다. 1950~60년대 농가경제는 한국전쟁으로 인한 국토의 황폐화와 살인적인 인플레이션, 미국의 잉여농산물 원조 등으로 심한 타격을 입었다. 농민들은 생계를 이어나가기 위해 사채를 빌려 쓰기 시작하였고, 농민들의 부채가 증가하면서 농어촌고리채문제는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었다. 1961년 5월 16일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박정희 정권은 농가부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농어촌고리채정리사업’을 진행하였다. 그러나 당시 농촌사회에서 채무자와 채권자가 한 마을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농민들이 고리채를 신고하는 것이 어려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농민들에게 강제적으로 신고하도록 했지만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이에 일부지역에서는 농가경제의 경제적 자립과 지역 주민들의 생활개선을 위해 민간 주도의 협동조합 운동이 전개되었다. 1965년 천주교 원주교구 초대 교구장으로 취임한 지학순 주교(池學淳, 1921~1993)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의 영향을 받아 가톨릭교회의 현실참여와 그리스도의 생활실천에 앞장섰다. 지학순 주교는 가난한 원주지역 주민들의 생활개선과 농가경제의 자립을 위해 교육사업과 신협운동을 전개하였다. 지학순 주교는 낙후된 원주지역을 개발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인재를 양성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이에 지학순 주교는 지역사회에서 문맹퇴치운동과 청소년 자활대 합숙소 건립, 진광학원 설립 등 여러 가지 교육사업을 추진하였다. 한편 지학순 주교는 원주지역 농민들의 상부상조하는 사회건설과 농민들의 경제적 자립을 위해 신협운동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지학순 주교는 원주교구만으로 신협운동을 전개하기 어렵다고 생각하였고, 이에 신협운동을 함께 추진할 인물을 모색하였다. 이때 지학순 주교는 원주 출신의 사회운동가 장일순(張壹淳, 1928~1994)을 만나게 되면서 원주지역 신협운동을 전개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1966년 지학순 주교는 원동성당 신자들을 중심으로 원주신협을 창립하였고, 이사장으로 장일순을 선출했다. 그러나 당시 원주교구는 신협을 운영해본 경험이 미숙하였고, 신협 조합원들에 대한 체계적인 교육이 부족했기 때문에 원주신협의 운영이 어려웠다. 원주신협 창립 이후 지학순 주교와 장일순은 원주지역 사회운동가들과 1960년대 학생운동을 주도하였던 김영일(김지하) 등의 인사들을 규합하여 ‘원주캠프’를 조직하였다. 원주캠프는 한국 신협연합회의 지원을 받아 조합원 및 임원 강습회를 개최하였고, 이를 통해 원주지역 신협운동의 활성화를 모색하였다. 그리고 4일간의 강습회(1969.1.15~1.18)에서 원주캠프는 강원지역만이 지구평의회와 주재지도역이 부재하여 신협운동이 발전하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이에 지학순 주교는 1969년 10월 13일 진광학원 내에 ‘진광 협동교육연구소’를 설치하여 신협운동을 전개하였다. 진광 협동교육연구소는 원주지역에서 성인교육과 학생교육을 병행하면서 신협 창립 및 경영을 지도하였다. 1970년대 진광 협동교육연구소의 활동 이후 신협조직은 원주지역에서 강원지역으로 확대되었다. 그 결과 1972년 6월 17일 도내 신협들이 진광학원에 모여 강원지구평의회를 창립하였다. 강원지구평의회 창립 이후 강원지역은 체계적으로 신협을 운영할 수 있게 되었다. 진광 협동교육연구소의 활동은 도내최초의 학교신협인 진광신협 창립에도 영향을 주었다. 진광신협은 1970년 5월 15일 진광학원의 학생ㆍ학부모ㆍ교사 등이 공동으로 창립하였다. 진광신협은 가난한 학생ㆍ학부모ㆍ교사 등을 대상으로 신용사업과 공동 구매ㆍ소비사업을 운영하였다. 또한 학생들에게는 저축활동을 장려함으로써 금융활동과 저축의 필요성을 가르쳤다. 이렇게 지학순 주교는 학교교육에 신협운동을 접목시켜 학생들 스스로 신협의 필요성을 느끼게 하였다. 가난한 농촌집안의 학생들은 신협을 긍정적으로 인식하였고, 이러한 신협에 대한 인식은 원주지역으로 확대되었다. 당시 원주지역 농촌마을의 학부모와 청년 지식인들은 진광신협을 견학하였다. 그리고 이를 체험한 농촌마을의 학부모와 청년 지식인들은 마을 곳곳에 협동조합을 조직하게 되었다. 1960~70년대 원주지역에서 전개된 지학순 주교의 교육사업과 신협운동은 농민들의 생활개선 뿐 만 아니라 사회운동의 성격도 강했다. 진광 협동교육연구소와 진광신협의 활동을 통해 당시 지역 주민들과 학생들은 농촌 빈곤의 구조적 문제를 인식할 수 있었다. 이에 지역사회 주민들은 지역 곳곳에서 신협을 창립하여 조합원으로 활동하였다. 이렇게 1960~70년대 국가 주도의 경제정책과는 별개로 원주지역에서 전개된 민간 주도의 신협운동은 지역 주민들 스스로가 빈곤퇴치와 생활개선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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