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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항일운동가 김승빈 용사의 재조명

        단국대학교 정책과학연구소 단국대학교 정책과학연구소 2004 정책과학연구 Vol.14 No.1

        한민족이 주체적으로 국가관을 갖지 않는다면 언제나 나라 없는 집단으로서 다른 종족 또는 국가에게 예속되는 길 밖에 없을 것이다. 세계사의 여러 단면들은 그것을 웅변하고 있다. 주체성의 존속을 위해서는 한 부족이나 민족 집단의 단합된 힘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우리 한민족은 멀리 고대로부터 이웃에게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는 한족 또는 만몽족들로부터 많은 고난을 겪어 오면서 때로는 대항해서 자주적으로, 때로는 화해를통해 수 천년의 자립의 길을 걸어왔다. 그러나 삼한 이래 우리 한민족의 일부로서 삼한과 삼국의 세력변화과정에 서 신라로 반도 통일이 이룩되자 그 권내에 합해진 백제세가 잡다한 도래계 보를 통일해서 왕권을 학립한 것이 일본국이었다. 일본은 그들 나름대로 세력통일을 하면서 한반도를 거쳐 문화를 흡수 해가는 한편, 침입해 오는 예가 흔했다. 신라 이후 그들에 대한 남방 방비책은 국가의 국방으로서 큰 몫을 차지하고 있었으나 국내정세의 외세에 대한 느슨한 틈을 탄 대소왜구의 침입은 그칠새가 없었다. 이와 같은 사실은조선왕조건국초의 남방침입과 임란이 바로 그 예이다. 바다를 건너 최근세의 서양문명이 동양에로 휩쓸려 들어올 때 재빨리 거기에 적응해서 소위 개화된 일본세는 그때부터 그들의 본원지인 한국에 대한 끊임없는 침략야욕을 노출하고 말았다. 소위 명치유신체제로 국력을 근대화하는 한편 침략전을 일으키게 되었으니 청일로임의 양전으로 그 실력을 과시하면서 쇄국일변도에서 깨어난 조선왕조를 그들의 손아귀에 넣게 되었다. 봉건제도의 시달림에 견디지 못한 자각된 민중은 동학으로 그들의 의사 표시를 했을 때 그것을 계기로 정부의 보호자 구실을 한 것이 직접적인 화근이 되고 열강과의 경쟁에서 결국은 합병이란 민족적 치욕의 길을 걸었다. 이때에 몇몇 매국노들과 봉건왕권이 송두리째 국권을 팔아넘기게 되니 실권이 없는 국토의 실제 주인인 민중은 낭패를 자기들도 모르는 고통 속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그 일제의 질곡 밑에서 잠자던 민족의 대표들인 민중이 스스로의 의사를 표시하게 되어 3.1절 운동이 발기된 것이다. 이 운동이야 말로 민족전체의 자학이고 독립할 수 있는 능력의 표시가 아닐 수 없었다. 이것은 어떤 세력에 의지해서 기생독립을 원하는 것도 아닌 자기실력과 힘으로 스스로를 세우려는 투쟁이었다. 조선반도 각 지역에서 진행된 3.1운동에 수많은 애국자들이 민중의 선봉에서 독립과 건국을 위해 생명을 걸고 기여한 용사들 중 평안남도 성태지방에서 진행된 사천시위라고 불리는 독립운동에 참여한 김병주 (김승빈)의 항일전을 중심으로연구를 진행시켰다. 김승빈은 1895년에 부친 김경서씨와 모친 박씨사이에 3남 1녀 중 3남으로 평안남도 강서군 성태면 가장리에서 출생하였다. 이웃마을에서 사천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부모를 따라 농사일을 도우며 겨울에는 일본어와 중국어를스스로 깨달았다. 1915년부터1918년까지 조선 근위병에 근무하고 1919년 3월 3일 사천독립운동을 주도하였다. 그는 3월 4일에 대동군 김제면 원장리에서 독립만세를 부르고 사천 파출소에 수감되어 있는 동지들을 구출하기 위해 헌병과 보조원을 죽이고 갇혀있던 동지들을 구출해준 후 만주로 망명하였다. 그 후 만주에서 손차운을 만나 독립운동에 계속 참가하게 되었다. 이 때 이름을 김병주에서 김승빈으로 개명하였다. 동년 4월부터 12월까지 조선 소학교 교원으로 복무하는 동시에 신흥 무관학교지부 제 3연습부대 교관으로 피임되어 독립군 지도자를 훈련하였다. 1920년 5월 독립운동부대를 편성하고 부대장으로 봉오동 청산리 전투에 참여하였다. 1921년 1월에 러시아 연해주 이만지역 스워보드니시에 주둔하였다. 그해 3월 박 일리야 위수로 편성된 제2군 소속 개별여단의 대대장으로 임명 되었다. 1921년 6월에 독립군간 무장 충돌시 홍범도 장군을 구출하는데 성공 하였다. 그 해에 원동에서 조선독립군이 해산될 때까지 소대장, 중대장, 대대장, 또는 교관으로서 이만 전투 등에 참여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1923년부터1936년까지 연해주 우수리스크시 조선소학교 교원, 브리지보스토크시 꼴호즈 청년중학교교장을 역임하고 원동종합대학 외국어 야간전문학부에서 수업하였다. 1938년 소련군 장교로 복무하면서 7-8월에 하산호 지역에서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워 소련 적기훈장을 수훈하였다. 그 후 계속 소련군 장교로 대독 및 대일전투에 참가하였다. 김승빈은 평생을 조국의 독립과 해방을 위하여 이바지하였으며 후진 양성에 열과 정성을 다 바치고 망명중에도 고결하고 강직하며 겸양과 공평무사하고 정직한 인품을 높이 추앙받았던 애족 독립지사였다. 1958년 군에서 예편되어 하바로브스크에서 연금생활을 하다가 1981년에 향년 86세를 일기로 조국의 통일을 보지 못하고 타관에서 별세하였다. 장지는 하바로브스크시 공동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Thousands of Koreans took part in Civil War and War of Bolsheviks against foreign aimed intervention to the Russian Far East (1918-1922). They were the young patriots from Korea, Russia and Manchuria. Some of them considered Russia as their new Motherland and took actively part in the internal political life of the country. They accepted October revolution of 1917 and shared political views of Bolsheviks. Others considered the Russian Far Eastas the abroad Korean center of anti-Japanese liberation movement. But all of them were ready to give their lives for independence of Korea. Since 80 years has passed. None of the participants are alive. Here is the recollection of one of the participants. He was a patriot, a soldier, an educ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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