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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初期朝鮮国釜山開教

        다이토 사토시(大東仁),원영상 한국일본불교문화학회 2013 일본불교문화연구 Vol.- No.9

        일본근대사는 아시아 침략의 역사였다. 그것은 군사뿐만 아니라 정치ㆍ경제ㆍ사회ㆍ교육 등, 다양한 분야가 상호 보완하며 계속된 것이었다. 당연히 종교계도 예외는 아니다. 그러나 일본사연구의 현장에서는 근대일본종교와 아시아 침략에 관한 연구는 아직도 확산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불교의 해외진출은 1873년 7월 17일 淨土眞宗 大谷派 小栗栖香頂가 청나라 북경에 유학한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오구르스(小栗栖)는 청나라 승려 本然에게 사사하며, 일 년간 중국어를 배우고 있다 귀국 후인 1876년 5월에는 청나라 표교용 책자인 『眞宗敎旨』를 저술하였다. 오구르스에 의해 「開敎」 준비가 차근차근 준비되고 있었던 것이다. 1876년 5월 26일, 진종 대곡파는 오구르수를 비롯한 승려 4명에게 청나라 상해로의 출장을 명한다. 오구르스는 7월 13일 상해에 도착한다. 일본불교의 「朝鮮開敎」도 정토진종 대곡파에 의해 시작되고 있다. 조선의 경우 1877년 8월 16일, 오쿠무라 엔신(奥村円心)이 조선국 출장을 명령받면서 시작된다. 이는 1876년 내무경 太久保利通와 외무경 寺島宗則가 정토진종 대곡파 「法主」였던 厳如에게 조선개교를 요청한 것에 응답하는 것이었다. 또한 이는 같은 해 2월 26 일 일본과 조선간에 조인된 수호조규에 따른 구체적인 행동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타 종파보다도 앞선 외국 「開敎]의 경험이 인정된 것일 것이다. 즉, 청나라 개교가 오구르스의 의사에 기초한 것에 비해 조선의 경우 일본국가의 의사가 기초가 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차이는 오구르스가 현지의 언어를 배우고 포교책자를 준비한 것에 비해, 오쿠무라는 언어능력은 물론 포교책자도 오구르스의 『진종교지』를 지참했던 것에서도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선행연구에서는 「조선인의 전도를 가장 우선시 하고 있다」고 평가하고 있다 본 논문에서는 이러한 평가를 재점토하고자 한다. 본고에서는 일본불고(真宗大谷派)의 초기 부산개교에 한정한 것이지만, 그것은 개교지의 차이, 시간의 차이, 그리고 종파의 차이를 분명히 하고자하는 작업의 일환이라고 해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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