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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몽골 고고학연구

        데·체벤도르지,이평래 옮김 한국고고미술연구소 1997 고고학지 Vol.8 No.-

        몽골은 먼 옛날부터 사람들이 살아온 아시아 대륙의 중심이다. 그 때문에 구석기시대에서 17세기에 이르는 수 만년에 걸쳐 축적된 풍부한 고고학 자료가 남아있다. 이런 몽골 지역에서 고고학연구의 시작은 러시아 학자 야드린체프가 오르홍 강 유역에서 판독되지 않은 돌궐비문(突厥碑文)을 발견하고 몽골 제국의 수도 카라코룸 도시 터의 답사와 이에 대한 학술보고서를 발표하면서 시작되었다. 이후 여러 나라의 고고학자들과 러시아 학자들이 몽골로 들어와 조사활동을 통해 새로운 유적·유물을 발견했다. 1921년에는 오늘날 몽골과학아카데미의 전신(前身)인 자료연구소 산하 역사연구실이 신설되었으며 1922년부터 몽골학자들이 독자적으로 또는 소련학자들의 도움으로 고고학 연구를 시작하였다. 이 글은 몽골에서 고고학 연구가 시작되는 시점부터 1990년대 초까지의 몽골 고고학의 연구 성과를 유적과 함께 소개하였다.

      • 1950년대 국립박물관 관시(館是)에 대한 고찰

        장상훈 한국고고미술연구소 2016 동원학술논문집 Vol.17 No.-

        조선총독부박물관을 접수하여 1945년 12월 3일 개관한 국립박물관은 국립 문화기관으로서 신생 독립국가의 문화 정체성을 확보하고 대중을 계몽하기 위해 각종 사업을 전개했다. 이 글에서는 국립박물관이 1950년대에 제정한 관시의 내용을 중심으로 제정 배경과 경과를 살핌으로써 개관 초기 국립박물관의 과제 인식과 지향점에 대해 살펴보았다. 1950년대의 국립박물관 관시는 1945년 개관 이래 축적했던 국립박물관의 사업성과를 토대로, 신생국가 대한민국의 국립박물관으로서 그 임무를 정확히 규정함으로써, 한국전쟁이라는 참화를 딛고 국가를 재건해야 하는 상황에서 국립박물관의 역할과 비전을 천명하기 위해 제정된 것으로 평가된다. 이러한 자주적인 한국 고고학·미술 연구, 대중 계몽, 문화 창달 등 세 가지 목표는 광복 직후의 국립박물관이 식민지배하 조선총독부박물관이 규정한 한국 문화의 식민지적 정체성을 부정하고, 독립국가의 정체성을 자주적으로 모색하는 동시에 일제하 박물관의 권위주의적 운영을 타파하여 국민을 계몽하고 문화 발전에 이바지한다는 목표를 설정한 것이었다. The National Museum of Korea established its museum mission in the 1950s to serve as the national museum of the newborn country of the Republic of Korea, based on the operational achievements of the museum since its foundation in 1945, and to declare the role and vision of a national museum at a time when the Korean people had to overcome the ravages of the Korean War and rebuild their country. The three goals stated in the mission, consisting of independent research in Korean archeology and arts; enlightenment of the public; and promotion of cultures, were established for the National Museum of Korea in the immediate aftermath of independence in order to reject the colonized identity of Korean culture as previously propagated under colonial rule by the Museum of Japanese Government General of Korea, while independently pursuing Korea’s own identity as a sovereign nation and at the same time, breaking down the authoritarian operation of museums under Japanese rule, thereby serving to enlighten the public and contribute to the nation’s cultural development. The establishment of the mission and the suggestion of goals and tasks for the national museum are assessed as an attempt to compartmentalize and realize the issues set forward by Director-General Kim Jae-won in a comment made in February 1947, “The museum is determined to move forward in contributing to the development of the cultural field at the very least.” The mission was finally included in the Current State of the National Museum of Korea written in January 1962, and does not seem to appear in official documents since then.

      • 한국식동검의 조립식 구조에 대하여

        이건무 한국고고미술연구소 1995 고고학지 Vol.7 No.-

        우리나라 청동기시대에서 원삼국시대 초기에 걸쳐 사용된 무기류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한국식동검임은 주지하는 바이다. 이 한국식동검은 발견 예가 많은 편이나 출토상황을 정확하게 알 수 있는 것은 극히 적고 대다수는 검신(檢身)만이 유리(遊離)되어 단독으로 출토되는 경우가 많다. 한국식동검은 중국식동검이나 오르도스식동검과는 달리 검파(劍把)와 검파두식(劍把頭飾)을 따로 만들어 조립하도록 되어있다. 검파는 청동제품도 있지만 대부분 나무로 만들었기 때문에 썩어서 남지 않았다. 검파두식은 석(石)·철광석(鐵鑛石)·청동·목(木)·토(土) 등으로 제작되어 검신과 함께 출토되기도 하지만 그 조립방법에 대해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은 한국식동검의 조립식 구조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어렵게 하고 있다. 이 동검의 조립식 구조를 이해하는 작업은 한국식동검문화의 기원문제와 관련해서도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다행하게도 수년 전에 조사된 다호리 원삼국 초기 목관묘 유적에서는 검초(劍鞘)를 비롯해 한국식동검에 관한 양호한 자료가 다수 발견되었기 때문에 이제는 그 전체 구조를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이에 본고에서는 다호리 유적 출토 자료를 중심으로 한국식동검의 검초, 검파 및 부속구의 조립식 구조와 쓰임새가 어떠하였는지 고찰하고 시안(試案)으로 동검 각 부분에 대한 명칭을 제시하고자 하였다.

      • 국립중앙박물관 남산분관품(南山分館品)과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의 감식안(鑑識眼) :  

        김울림 국립중앙박물관·한국고고미술연구소 2005 동원학술논문집 Vol.7 No.-

        국립중앙박물관에는 남산분관품으로 분류되는 소장품이 4천1백여 점 소장되어 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이 유물들은 근대 일본의 저명한 종교철학자이자 민예운동가인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 1889-1961)가 설립한 조선민족미술관의 수장품으로 출발하여, 한국민속학의 선구자인 석남(石南) 송석하(宋錫夏, 1905-1948)의 국립민족박물관을 거쳐 한국전쟁의 와중에 국립중앙박물관 남산분관품으로 접수이관된 것이다. 이 남산품은 크게 송석하의 문화민족주의를 실증하는 콜렉션으로, 일본에서는 야나기 무네요시의 민예사상의 형성과 전개과정을 증명하는 조선민족미술관 콜렉션으로 인식하는 두 가지 방향에서 학계에서 그 존재가 언급되어 왔다. 남산품은 그 현재적 의의와 민감성에도 불구하고 실제적 성격규명을 위한 노력이 적극적으로 경주되지 않았다. 이에 본고에서는 남산품의 성격규명을 위해 이관품 목록을 통해 밝혀진 현존유물뿐만 아니라 망실품 및 결번품 그리고 이관이전 타 박물관 대여품 등의 계량적 규모를 파악하고 이에 대한 물질 분류를 시도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남산품 전체에 대한 실체적 자료를 도출하며, 기존에 발표된 문헌자료들과의 대조를 통하여 원 콜렉터에 대한 추정과 이에 따른 성격분류를 수행하고자 하였다. 아울러, 남산품이 전시 및 출판을 통해 어떠한 모습으로 공개되었으며 근현대 한국 및 일본의 미술운동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를 살펴봄으로써 이들 유물의 역사적, 현재적 의미를 되새겨보았다.

      • 신석기시대 토기 연구 성과와 과제

        양성혁 한국고고미술연구소 2015 고고학지 Vol.21 No.-

        우리나라 신석기시대 유적이 처음 알려진 지 근 100년이 되고 있다. 그동안 신석기시대 연구는 괄목상대한 성과를 이루었다. 특히 토기 분야 연구는 신석기문화 연구의 중심으로 확고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우리나라 신석기시대 연구 성과에 대한 평가는 여러 연구자들에 의해 진행되어 왔다. 본고는 그간 연구사에서 논의 되었던 토기 연구 성과의 검토를 통해 지난 100년 간 신석기시대 토기 연구의 성과를 1) 즐문토기에 대한 시대 인식의 변화, 2) 즐문토기의 지역권 설정과 편년체계 수립 3) 토기 형식 및 양식 설정에 두고 정리하였다. 일제강점기에 선후관계에 대한 고찰 없이 막연히 석기시대의 유물로 평가받았던 즐문토기에 대한 시대 인식은 광복 후 남북한 여러 학자들의 노력으로 ‘신석기시대=즐문토기’, ‘청동기시대=무문토기’라는 성과를 얻었다. 이후 즐문토기 연구는 1970년대 이후 각 지역별 유적조사의 증가와 함께 즐문토기에 대한 지역권이 설정되었으며, 지역권별로 세부 편년 작업이 활발히 진행되었다. 이 과정 속에서 토기의 형식과 양식이 설정되면서 토기 연구의 이론적 토대가 마련되었다. 이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한반도 신석기시대의 시간적·공간적 위치가 확정되고, 문화 양상의 실체가 파악되고 있다. 이는 선학들이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한반도 신석기문화의 보편성과 특수성을 밝히려는 노력의 결과이다. 그러나 토기 연구가 형식학적 방법에 의한 편년 연구에 치중되고, 그 검증 절차 역시 논리성이 부족하다는 점 등 아직 많은 부분에 있어 미진한 것 또한 사실이다. 이는 연구의 논증 절차 강화와 연구 주제의 다양화를 통해 우리가 앞으로 극복해야 할 과제이다. It has been about a hundred years since sites dating from the Neolithic Age on the Korean Peninsula were first known. Research on the Neolithic Age, particularly on earthenware, has made a noticeable achievement. In the Peninsula, evaluation of research on the Neolithic Age has been made by numerous researchers. This paper has divided the results of the research conducted on Neolithic pottery, which had been practiced for over 100 hundred years, as follows: 1) Change in the period identification of comb-patterned pottery; 2) Designation of comb-patterned pottery’s regional sphere and establishment of a dating system; and 3) Establishment of pottery types and patterns. Thanks to the efforts made by researchers of the two Koreas after the country’s liberation in 1945, the period identification of comb-patterned pottery, which were vaguely said to be artifacts dating from the Stone Age during the colonial period, came to be arranged as follows: comb-patterned pottery dating from the Neolithic Age and plain pottery dating from the Bronze Age. In the 1970s and thereafter, the regional sphere of comb-patterned pottery was established amid an increase in the surveys of local historic sites, and the work focused on the detailed dating of artifacts was briskly carried out by region. In the process, the pottery’s types and patterns came to be identified and a theoretical basis of pottery research was provided. Based on such results, the temporal and spatial locations of the Neolithic Age on the Korean Peninsula were fixed, along with an accurate status of the culture. These are the results of the efforts made by researchers to shed light on the universality and specificity of the Neolithic culture on the Korean Peninsula. Nonetheless, pottery-related research still has a long way to go. Many studies solely focused on dating research based on a typological method, and the relevant verification procedure lacks logic. We must get over the problems by reinforcing the procedure for verification of the research and diversifying the research subjects.

      • 한반도남부 철기문화의 파동 : 초기철기‧원삼국기 철기의 계보와 획기

        이동관 한국고고미술연구소 2017 고고학지 Vol.23 No.-

        In the Eastern South area of Korean peninsula, the diversity of types and overwhelming amount of ironwares led to advance in the study of the adoption of Iron age culture, the development and change of each type. Some surveying research provided an outline of the incipient Iron age culture. This study was designed to make it clear that Wolseong-dong type is the instance of the incipient ironware assemblage in the Eastern South area, by building a time axis for the composition of ironwares like iron weeder-plows in relation with change of pottery. It was also ascertained that there was a rapid change in the ironware composition from the Wolseong-dong I stage to the Wolseong-dong IIa stage. It led to the conclusion that the first landmark in the iron age culture was in 1st century BC in the Eastern South area. Yet it was not a distinct phenomenon in the Eastern South area, but is also connected with the diminishing Iron age culture in the West Southern and Central area of Korean peninsula. This research is also significant in that it proved that the single-bladed flat iron axe is a different type from the flat iron axe, which previous research classified as the same and so kept from discerning the incipient period of the iron age which Wolseong-dong type represents. In addition, it verified that type C of casted iron axe like one from Yesan-Ri Tomb No.1 has its origin in Nangnang province. Typological analysis showed that Type C of casted iron axe spread into the Central region of Korean peninsula in the late 2nd century and then was modified and settled. 동남부지역의 경우 타 지역과 비교할 때 다양한 기종과 압도적 수량을 바탕으로 철기 문화의 수용과 개별 기종의 전개, 변천양상에 있어 상당한 연구의 진전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초현기 철기문화에 대한 전반적 검토가 몇몇 연구자에 의해 다루어짐에 따라 그 대략적 양상도 밝혀지고 있다. 본고에서는 따비를 비롯한 철기유물의 조합과 구성, 토기의 변화양상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시간 축을 설정함으로서 동남부지역 초현기 철기구성의 실체가 월성동유형임을 명백히 하였다. 그리고 월성동유형 Ⅰ단계에서 Ⅱa단계의 철기조합과 구성에 급격한 변동이 있음을 확인함으로서 기원전 1세기경 동남부지역의 철기문화에 제1획기가 있다고 보았으며 이러한 획기는 동남부지역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서남부지역, 중부지역의 철기문화의 쇠퇴와 연동된 현상으로 설명하였다. 이전까지 연구에서 동남부지역 초현기 철기문화의 실체를 파악하는데 있어 우리의 눈을 가려왔던 것은 본문의 편평편인석부와 판상철부를 동일 형식으로 연속선상에서 파악하는 뿌리깊은 일반론과 월성동유형에 대한 명확한 인식의 부재였음을 본고의 검토로서 증명했다는 것에 의의가 있다 할 것이다. 또 예산리 1호에서 출토된 것과 같은 주조철부c류의 기원이 낙랑지역에 있으며 이것이 2세기후반 중부지방으로 파급되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점차 변용, 정착한다는 것을 형식학적으로 검증하였다.

      • 백제 개배의 양상과 변천

        김종만 한국고고미술연구소 2002 고고학지 Vol.13 No.-

        백제토기는 주변지역의 토기보다 기종이 다양하지만, 백제 전기부터 후기에 이르기까지 양상과 변천을 살펴볼 수 있는 기종은 약간에 불과하다. 그러한 기종 가운데 하나로 개배를 들 수 있다. 한강유역에서 발견되고 있는 개배의 형태는 중국에서 직접적인 수용도 생각해볼 수 있으나 한강유역의 고배, 삼족토기의 배신(杯身) 형태와 관련하여 매우 흡사한 형태를 띠고 있으므로 개배는 한강유역에서 백제식으로 발전시켜 개발되었을 수도 있다. 이후 개배는 남부지방으로 영토확장을 실시한 백제세력에 의해 전개되었다. 본고에서는 이 개배에 대한 형식분류와 그에 따른 분포도를 작성하고 개배가 시기적으로 어떠한 양상으로 변천하고 있는지 살펴보았다.

      • 금산지역 출토 가야토기

        박경도 한국고고미술연구소 2002 고고학지 Vol.13 No.-

        금산군은 행정구역상 충청남도에 속하며 금산읍 일대는 노령산맥의 험준한 지맥들에 의해 둘러싸여 분지를 이루고 있는데, 높은 봉우리들이 둘러싸고 있어 주위와 단절되어 폐쇄된 듯한 구조를 하고 있다. 그러나 침식계곡을 따라 흐르는 하천과 비교적 낮은 고개를 이용하여 각 방면으로 교통로가 발달되어 있다. 이 지역은 교통의 요지로 지정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으로 인식되고 있으나, 아직 고고학적인 조사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이다. 본고에서는 앞으로의 연구에 있어 기초자료로 활용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금산 창평리와 음지리에서 출토된 가야토기를 소개하고자 하였다.

      • 신라 수지형대관(樹枝形帶冠)의 퇴화형식 설정 : 동원선생 기증품을 중심으로

        함순섭 한국고고미술연구소 2000 동원학술논문집 Vol.3 No.-

        신라 수지형대관(樹枝形帶冠)은 흔히 출자형관(出子形冠)으로 알려져 있는 관(冠)이다. 이 형식의 관은 1920년 양산 부부총과 1921년 경주 금관총 조사결과를 통해 알려졌다. 이 가운데 금관총에서 우연히 발견된 금관은, 무덤 이름으로까지 반영된 바와 같이 국제적으로 상당한 주목의 대상이 되었다. 무덤에서 금관이 출토된 사실은 너무나 획기적이었기에 일제강점기뿐만 아니라 광복 이후 1970년대까지 순수한 학문적 의의를 넘어서는 관심을 이끌기에 충분하였다. 금관에 대한 관심이 경주지역에서 고총고분의 발굴을 촉진시켰고, 그 결과물은 신라 고고학 연구의 모태가 되었다 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러나 지난 80년간의 연구사를 되돌아보면, 수지형대관에 대한 연구는 높은 관심에 비해 성과가 다소 빈약하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다른 금속공예품에 비해 제작기법이 조략(粗略)하고 의장(意匠)이 단순하므로, 다양한 형식학적 계량 분석을 투영해 보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또한 연구 주제도 다변화되지 못했다. 초기 연구에서 다루었던 상징과 계통에 대한 검토가 지속되지 못한 것이 그 단적인 예이다. 이 글은 신라 수지형대관에 대한 기존 연구성과를 검토하는 과정에서 도출된 형식학적 문제를 부각시키고자 하였다. 분석대상으로 동원선생 기증유물을 선택한 이유는 표준형식과 퇴형형식의 연결고리를 설명할 수 있는 속성을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원형을 알 수 없던 일부 금동관을 복원하여 추론할 수 있는 형태이기 때문이다. 특히 신라 수지형대관의 연구에서 그간 미지의 부분으로 남아 있던 표준형식(標準型式)에서 퇴화형식(退化型式)으로의 전환문제를 다루어보고자 하였다.

      • 다호리유적에 보이는 중국계 요소 : 토기를 중심으로

        정인성 한국고고미술연구소 2009 고고학지 Vol.- No.특집호

        본고에서는 다호리유적에서 확인되는 중국계 요소를 정리하였다. 지금까지의 관련 연구는 낙랑군을 중심에 둔 교섭관계를 다루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고고학이 다루는 실물자료의 수준에서 생각하면 초기철기시대에서 원삼국시대로의 전환기에 나타나는 많은 물질문화의 변동을 낙랑군과의 관련으로 설명하는 것과 통한다. 이는 이 시기에 대한 고고학적 연구에서는 대단히 중요한 전제로 이 시기 물질자료에서 확인되는 변화의 상한이 낙랑군의 설치를 거슬러 올라갈 수 없게 묶이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런 맥락에서 다호리 1호에서 출토된 성운문경과 오수전, 조양동 38호에서 출토된 이체자명대문경과 같은 중국계 유물은 영남지역에서 원삼국시대의 시작이 낙랑군과 관련된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가장 핵심적인 절대연대 추정자료로 취급되었다. 그러나 낙동강유역권에서 확인되는 토기를 포함한 이 시기 여러 문화변동의 시작은 낙랑군 설치가 아니라 그 이전으로 소급될 것으로 판단되며 이에 대한 자료를 제시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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