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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형주(Han Hyung-Ju) 역사실학회 2010 역사와실학 Vol.43 No.-
This study aims at looking over staged transition and characteristics of sacrificial rites related agriculture and sericulture from King S?ngjong to King Jungjong. Generally, The kings of early Chos?n dynasty seek symbol of national sacrificial rituals from royal ancestor-sacred rites of Jongmyo, Royal ancestors' shrine, Munsojeon, the Royal's private Ancestral Shrine, a Royal mausoleum, and so on, However, In the course of emphasising Ruling based upon King's Moral Doings, the sacrificial rites related the people´s livelihood was watched. Take advantage of this, King S?ngjong and King Jungjong pretend to king of practical mind of Ruling based upon King's Moral Doings. But there are differences between the two. King S?ngjong and practices ancestor worship about Sajik, gods for the soil and grain, S?nnong, god of agriculture and S?njam, god of silk. After this, he played Gunggyeongrye, rite of agricultural display. In the process of rites, the festival including the king and his people is held. However, when Y?nsan’gun, the eldest son of King S?ngjong, was on the throne, it is come to a crisis. He abrogate sacrificial rites for annoying merely. The situation took a turn for the better for Jungjong Coup D'etat. The sacrificial rites returned to S?ngjong Age. Later, King Jungjong Pursue new ritual ceremonies for political purpose, and then praying for rain is chosen. He pretend to ideal Confucian monarch sharing anxiety of the nation about poor harvest through praying for rain personally.
한형주(Han, Hyung-Ju) 한국역사민속학회 2010 역사민속학 Vol.- No.33
본고에서는 기존의 연구가 풍수?지리학과 미술사 등에 편중된 현상에서 벗어나 국가의례의 관점에서 조선초기 왕릉제사의 제도적 마련과 의식 정비, 종묘와의 차별성, 그리고 능행의 정치사적 의미 등을 천착함으로써 왕릉의 역사적 위치를 찾아보고자 하였다. 왕릉 제사는 태조 즉위년 추존 4대왕(비)과 신의왕후의 제릉이 조성된 후 陵直과 守護軍이 설정되고, 四孟月?朔望 節 등의 제사가 정해지면서 시작되었다. 능제는 태종 초반 신의왕후 한씨의 제릉에 친제가 거행되면서 정리되기 시작했다. 특히 동왕 8년 태조의 사망으로 健元陵이 조성되어 흉례가 시행되고, 2년 후 3년상이 끝나면서 본격적으로 제사의 시행 및 의식의 정비가 모색되었다. 왕릉 주변의 禁止설정, 능제의 재정 확보, 健元陵親祭儀와 攝行儀의 제정 등이 그 실례이다. 이후 세종즉위년에 정종, 동왕 2년에 태종비 원경왕후, 동왕 4년 태종이 잇달아 사망함으로써 후릉과 헌릉이 각각 조성되었다. 이 과정에서 흉례와 관련된 제반 의식들이 재검토되었고, 제사와 관련된 여러 세부사항들과 拜陵儀가 수정?보완되었다. 그 내용은 이후 부분적 수정을 거쳐 국조오례의」의 길례조와 흉례조에 수록되었다. 왕릉에서 시행된 제시는 사맹월의 시제와 삭망, 속절(정조, 한식, 단오, 추석, 동지, 납일) 등 다양한데, 당시 종묘 및 원묘인 문소전에서 시행된 것과 동일하였다. 이러한 방식은 고려 이래의 전통으로 四時祭가 능제에서 배제된 중국사의 경험과 달랐다. 그런데 조선의 능제는 국가 祀典에 大祀로 편입된 고려시대와 달리 俗祭라는 별도의 체계속에 포함시킴으로써 국가의 대사인 종묘와 구분되었다. 아울러 능제를 흉례의 체계에 附加시킨 중국과 달리 왕릉 관련 의식을 흉례와 길례로 각각 구분하여 편입시키는 독자성을 보였다. 왕릉의 제사 시기가 종묘 및 원묘와 동일하다는 사실은 왕의 친행이 종묘보다는 왕릉에 집중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태조~성종의 102년간 종묘의 국왕친제가 41회에 불과한 반면 왕릉에는 170회에 걸쳐 이루어졌고, 문소전에서는 85년간 99회의 친제가 진행되었다. 이러한 현상으로 원묘인 문소전의 폐지 및 왕릉에서의 사시제 폐지를 주장하는 여론은 조선전기 내내 끊임없이 제기되었다. 결국 임진왜란 과정에서 원묘인 문소전은 파괴되었지만 복구되지 못하였고, 왕릉의 사시제는 인조대에 이르러 폐지되기에 이르렀다. 이후 왕릉제사는 속절제(납일 제외)를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조선시대 제사에 왕이 참여한 사례는 예상외로 많지 않다. 대표적인 제사대상인 종묘의 경우에도 대략 2~3년에 한번씩 왕의 친행이 이루어졌을 뿐이었다. 반면에 왕릉의 친제는 매년 수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다. 누대의 선왕이 모여 있는 혼전(종묘)보다는 육신이 안치된 개별 능에 인간적인 친근감을 느끼고, 능행중에 원찰에의 행행이 쉬웠으며, 능제가 속제이기 때문에 제사과정이 간략하디는 이유 등이 결합되어 나타난 것이다. 장엄한 의장을 갖추어 진행된 능행은 일반 민에게 우리의 ‘왕’을 알리는 동시에 그들의 생활상을 왕이 직접 관찰하여 통치의 기반으로 삼았던 중요한 정치적 행위였다. 아울러 초기의 국왕들은 능행의 과정에서 講武, 大閱, 陣法등 군사훈련을 상시적으로 시행함으로써 그들의 군사통수권을 과시하는 정치 수단으로 이용하였다.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analyze and process of rites about sacrificial rites related Royal Mausoleums in early Joseon Dynasty, and to conclude, to review the position of Royal Mausoleums in the whole National Rites System. The sacrificial rites related Royal Mausoleums stared from building Royal Mausoleums of 8 persons-ancestors since King T"aejo"s great-great-grandparents, in 1392, founding Joseon Dynasty. In 1408, King T"aejo had died and his K?nw?nn?ng(建元陵) was builted in Yangju, Gyeonggi-do. Since then, after kings of many generations died, each of Royal Mausoleums was builted solemnlly. In the process of this, sacrificial rituals modified and supplemented, especially during the reign of king Sejong(1418~1450). After all, the sacrificial rites related Royal Mausoleums was settled in KukchoOrye?i(國朝五禮儀, Five State Rites) compiled during the reign of King S?ngjong. In process of Institutionalization of sacrificial rituals, the argument between king and vassals about four-seasons" ancestral rites was properly or not was occurred. That was because the memorial times of Royal Mausoleums overlaped Chongmyo"s and more important Chongmyo"s ancestral rites was neglected. But four-seasons" ancestral rites of Royal Mausoleums was continued until 17th century. Sacrificial rites related Royal Mausoleums as royal personal rites had simple processes compared to sacrificial rites of Chongmyo, upper-graded formal ancestral rites, under National Rites system. Justifying to served his parents with devotion, the kings in early Joseon Dynasty went to Royal Mausoleums 2-3 times annually. During coming and going, the show off his presence as king in power to his subjects through magnificent guard of honor. On the one hand, he met his subjects directly and acceded to various petition. Above all things, The king in early Joseon Dynasty emphasized his military power through military training, namely, hunting, disposition of troops, and so on.
한형주(Han, Hyung-Ju) 한국역사민속학회 2017 역사민속학 Vol.0 No.52
본 논문은 고려시대에 성립된 국가의례를 바탕으로 조선시대에 사용하였던 희생, 즉 소, 양, 돼지를 대상으로 그 사용과 운영을 천착해 본 것이다. 신라는 7세기 이후 당을 본받아 종묘를 비롯한 제사에서 희생을 소, 양, 돼지로 사용하였고, 이것이 고려시대에 이르러 국가적인 오례가 시행되면서 구체화되었다. 길례의 희생은 환구, 방택, 종묘, 선농 등에서 사용되었다. 이중 환구는 제사의 대상이 상제와 오제, 배위로 犢을 사용했는데, 5방의 색깔은 맞추기 힘들어 純色의 희생으로 대신하였다. 종묘의 희생은 예지에 나온 기록이 돼지만을 쓴다고 했지만 연대기에 국왕의 친제 기록이 보여 소를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사직과 방택은 신하의 섭제로 의식이 기록되었지만 실제로는 국왕이 친제한 경우가 있었고, 이때는 소를 희생으로 삼았다. 조선시대에는 고려시대에 소사 혹은 잡사의 부류에 있었던 제사가 중사 또는 소사로 확대되었다. 고려시대 풍사, 우사, 뇌신은 풍운뇌우로 합사되어 중사로 승격되었고, 우사와 악해독, 역대시조는 새로 사전에 중사로 편입시켰다. 아울러 둑제, 여제, 영성, 노인성 등이 소사에 포함되었다. 이때 사용된 희생은 소, 양, 돼지였다. 이중 소는 흑우로서 농사를 짓는 등의 노동을 하지 않았고, 제주에서 특별히 길러 제사의 수효를 맞추게 하였다. 희생을 담당한 기구는 고려시대에는 종 8품의 掌牲署에서 조선시대에 들어와 典廐署로, 다시 세조대 典牲暑로 개칭되어 『경국대전』에 실렸는데, 이때는 종6품이 장관이었다. 전생서에서는 싣기 어려운 소를 제외한 양과 돼지를 장치를 이용하여 바쳤고, 또 희생은 거세하여 길렀다. 이때의 양은 명에서 수입하였는데 초기의 경우 그 수효가 넉넉하였다. 희생을 기르던 목장은 고양현, 양화도, 수원의 양성현 등에 있었다. 일 년에 들어가는 제수의 수는 소의 경우 『국조오례의』까지는 14두 이상이었지만 성종대 이후 의경왕묘에 제사를 지내면서 15두 이상으로 늘어났고, 이 숫자는 점차 늘어나 조선후기에는 20마리 이상으로 늘어났다. 그런데 여기서 소의 빛깔을 맞추는 것이 논란이 되었다. 결국 종묘, 영녕전, 사직 등에는 흑우를 사용하였고, 문묘와 적전례, 문소전에는 황우를 사용하였다. 문묘는 騂牛를 사용해야 되지만 색깔이 비슷한 황우를, 적전례에는 靑牛를 써야 되지만 현실적으로 黃牛를 쓰고 다만 푸른 무명을 소에게 씌웠던 것이다. 그리고 희생인 소, 양, 돼지는 통째가 아닌 두 다리, 두 어깨, 두 갈비와 등허리를 합해 7체로 나누어 사용하였다. 임진 · 병자호란 이후와 또 현종 때에는 牛疫이 성행하여 희생을 대기가 힘들었고 이때 희생을 사육하는 방식에 약간의 변화가 있었다. 즉 제향에 쓰는 흑우는 제주에서 나오지만 이를 매년 충청도 등지에 분양하여 肥澤하게 키워 이를 전생서에 보낸 것이다. 전기에 경기도 일대에 농장을 둔 것과는 좀 다른 방식이었다. 흑우는 일반적인 황우와는 달리 살이 찌지 않았는데, 이는 제관들이 희생을 살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영조 21년 이후 왕이 직접 희생을 살피면서 이를 문책하고 제조를 파직하였다. 영조는 친경시 ‘靑牛가 없으면 황우로 대신 쓰고 청포의 보의를 뒤집어 씌운다’는 오례의의 해석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하고 흑우를 쓰는 것이 예제에 맞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大報壇의 제사에 희생을 사용했는데, 처음 대보단에 제사한 숙종은 희생을 마땅히 黑牛를 써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이에 반해 영조는 흑우로 쓰는 것이 마땅하다며 『대명집례』에 근거를 두었지만 결국 이것은 고치지 못하였다. During the Joseon Dynasty, various sacrifices were used in the national sacrifices. It was confirmed as cattle, sheep, and pigs in the Goryeo period when the national sacrifice was established. Sacrifice is a kind of offerings to God, which is of great importance in the country, but the research on this was unexpectedly conducted. In the Joseon Dynasty, the sacrifice was carried out by the Jeonsaengseo(전생서). The cattle that were used as sacrifices were black cattle, not yellow cattle used for farming. This black cattle is not recorded in the Goryeo Dynasty, but it was specifically raised in Jeju Island during the Chosun Dynasty. The cattle were brought to the barn without labor and raised under national interest. Also, the sheep was not produced in Korea but imported from China. The number of cattle was 14 in the Kukjoolyeui(국조오례의) which was created in the early days of Seongjong, but in the latter part of the Joseon Dynasty, the number of seedlings increased to more than 20. Especially, as the number of kings in the Jongmyo(종묘, royal ancestors’ shrine) has increased, the number of cows has increased accordingly. Particularly, sacrifices were made by using cattle, sheep, and pigs, which were divided into 7 groups, including two legs, two shoulders, two ribs. Sacrifices were made using black cattle in Jongmyo, Yongnyonjeon(영녕전), and Sajik(사직), on the other hand, yellow cattle was used before the Munmyo (문묘, tomb of confucius), Jeokjeonye(적전례) and Munsojeon(문소전) the personal shrine of royal family). The Munmyo uses yellow cattle which is similar in color, but the Jeokjeonye precedes the use of blue cattle, but in reality, it wears yellow cattle and the obscurity which is dyed in blue color. In the late Joseon Dynasty, Yeongjo insisted that Daebodan(대보단, Ceremony of the Ming Emperor) should use the black cattle, but eventually they did not win the opposition and used yellow cattle.
한형주(Han, Hyung-Ju) 한국역사민속학회 2007 역사민속학 Vol.- No.24
This study analyzed the process of establishing Wonmyo(the Royal’s private Ancestral Shrine) system and examined the characteristic of it, especially related to Munsojeon. Wonmyo was built to respect the late Kings as if they were alive. In the early Choson dynasty, Wonmyo was built separate one king from another. While the only one Munsojeon was established instead of plural Wonmyo during the reign of King Sejong, because it had trouble to build Wonmyo continuous. Spirit tablet were enshrined instead of portrait in Munsojeon, and Confician ceremony was done deviating from the Buddhist. Spirit tablets of Taejo and four generation ancestor of present king were enshrined in Munsojeon, and King Sejong strictly restricted the number of spirit tablets as 5. The system of Munsojeon was changed during the reign of King Seongjong. He became a king after death of his uncle Yejong. He bestowed the titled of King on his real father in the 7th year, and then Spirit tablet of his father was enshrined in Chongmyo(the Royal Ancestral Shrine). But Spirit tablet of his real father was enshrined in Yeoneunjeon, a kind of Wonmyo instead of Munsojeon, for he called Yejong his father. This is deviate from principle restricting direct 4 generations due to enshrining his uncle, not his father. Myongjong was younger brother of Injong, so he intended to enshrine his elder brother in Yeoneunjeon not in Munsojeon. But Sarim(Neo-Confucian literati) insisted Injong be enshrined in Munsojeon because Myongjong had to regard Injong as his father. They acclaimed it was defined not blood lineage but kingship lineage. At last Injong was enshrined in Yeoneunjeon due to powerful insistence of the King’s mother. This debate was continued during the reign of King Seonjo. At that time Sarim gained in power, they claimed kingship lineage was more important than blood lineage on the enshrinement. So Injong and Myongjong were enshrined in Munsojeon. As a result, Munsojeon system changed to enshrine spirit tablet from blood lineage to kingship lineage. But basically Sarim denied the system of Munsojeon, because of duplicity of Jongmyo and Munsojeon and too many sacrificial rites. So After Munsojeon was burned away during Imjinwaeran(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392), it was not rebuilt forever.
한형주(Han, Hyung-ju) 한국학중앙연구원 2018 장서각 Vol.0 No.40
이 글은 성종 대 초반 국왕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왕이 아니었던 친부 의경세자의 왕으로의 추봉 및 종묘와 연은전으로의 봉안과정을 『조선왕조실록』 및 『국조오례의』를 기반으로 살펴보아 그 의미를 정리하려는 목적으로 집필된 것이다. 의경세자 李暲(1438~1457)은 수양대군의 첫째 아들로 태어났지만 계유정난 이후 세조가 국왕이 되자 바로 세자가 되었다. 그는 세조에게 큰 기대를 안겨주었으나 나이 20살에 요절하였고, 그 뒤는 둘째인 해양대군에게 돌아가 세조의 뒤를 이어 예종으로 즉위하였다. 그러나 즉위한지 1년여 만에 사망하고 다시 왕위는 의경세자의 둘째 아들인 자을군에게 이어졌으니 이가 곧 성종이다. 성종은 즉위하자마자 아버지인 의경세자를 왕으로 추봉하는 작업으로 나갔고, 이는 의리상의 아버지인 예종의 부묘와 더불어 이루어졌다. 아버지 의경세자를 왕으로 추봉하자는 청을 명의 황제에게 하자는 말에서 힌트를 얻은 성종은 재위 5년에 이르러 이를 대신들에게 회의를 부쳤는데, 태조 대에 4조를 추봉했지만 명에 알리지 않았다는 신하들의 반대 의견을 누르고 결국 명에 사신을 파견하였다. 다음해 명으로부터 회간이라는 왕명을 받은 성종은 이를 계기로 아버지를 공식적으로 종묘에 부묘시키고자 하였다. 이에 원상들은 이미 예종에게 황고라 하였기 때문에 의경왕을 황백고로 봉사할 수 없다는 의견을 내었고, 상당수의 신하들이 私親을 종묘에 부묘할 수 없다는 의견을 내어 곤란에 빠졌지만 당시 청정을 하고 있던 대비에게 요청하여 대비의 의지로 의경왕을 승부한다는 결정을 이끌었고, 결국 의경왕을 덕종의 이름으로 종묘의 7실에 부묘하였다. 이때 문소전에 의경왕을 입부하려고 했지만 신하들의 반대가 거세 문소전에 올리는 대신 연은전이라는 별전을 지어 제사하도록 하였다. 이후 성종은 연은전의 친제에 18년 동안 26회에 이를 정도로 아버지 의경세자에 대한 추모의 정성은 컸다. 의경왕의 추모의식은 『국조오례의』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국조오례의』는 성종 5년에 편찬되어 연은전의 설립과정이 들어가 있지 않으나 ‘왕’이라는 상태를 보여주는 것이라 분석이 가능하였다. 의경묘는 문소전과 마찬가지로 大祀라는 등급이 아니라 왕실제사인 俗祭로 운영되었는데, 문소전과 달리 孝姪을 칭하였고, 일반적으로 희생을 설정하지 않았지만 왕의 친행대제에는 ‘양’과 ‘돼지’를 사용하지 않고 ‘소’를 희생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그리고 제사를 시행하는 과정에서 문소전의 제사와 달리 ‘晨祼禮’를 시행하였고, 태조 및 2소·2목을 제사하는 문소전과 달리 신위가 1위로 다르게 설정되어 있었다. 성종 사후 이후의 왕들은 연은전의 제사를 계속하였다. 아들인 연산군이 1505년 (연산군 11)에 會絲閣으로 이름을 고쳐 제사를 축소했지만 중종반정 후 다시 복구하였으며 계속 제사가 이루어졌다. 그런데 명종 대에 이르러 인종을 문소전에 부묘할 때 세종의 문소전 5실이라는 이름에 맞추어 고조의 안에 드는 세조의 신위를 옮기지 않고 인종을 연은전에 합사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이것은 선조 대에 이르러 큰 비판을 받았고, 결국 다시 인종의 신주와 위판을 명종과 더불어 문소전의 5실에 부묘하였던 것이다. This study analyzes the installation of Yeoneunjeon and the operation of the royal’s private ancestral shrine related to King Seongjong period. The Crown Prince Uigyeong is the first son of Suyangdaegun, but after Gyeyujeongnan, a coup d’état, in an attempt to usurp power in 1453, Suyangdaegyun became King Sejo, he became a Crown Prince. He was highly anticipated by King Sejo, but died at the age of 20, and then the throne returned to his second son, Haeyangdaegyun. However, King Yejong also died in a year and the throne again led to King Seongjong, son of the Crown Prince Uigyeong. King Seongjong, who believed that the Ming Dynasty emperor would appoint his father as king, sent an envoy to his reign in the fifth year of his reign. In the following year, King Seongjong, who received his name as ‘Hoegan’ from Ming Dynasty emperor, wanted to bring his father to the royal ancestor’s shine, Jongmyo, but the courtiers objected for various reasons. However, the will of King Seongjong was very strong, and in the name of his grandmother, Queen Junghee, he eventually became a member of seven rooms of Jongmyo in the name of Deokjong. At this time he tried to seal his father King Uigyeong to Munsojeon but failed because of the opposition of the scholars. Instead, a royal’s private ancestral shrine named Yeoneunjeon was built next to Munsojeon, where ceremonies were held. Since then, King Seongjong celebrated his memorial service to his father so that he would perform 26 sacrifices for 18 years. The memorial ceremony of King Uigyeong appears in the ‘ Gukjoolyeui’, which distinguishes between concrete rituals and enforcement stages. The kings after the King Seongjong continued to perform the sacrifices before Yeoneunjeon. However, by the time of King Myeongjong, his dead elder brother, King Injong, was brought to Yeoneunjon, not the Munsojeon, and caused a great problem. However, this was greatly criticized in the following Descendant King Seonjo period and eventually again King Injong and King Myeongjong were sealed in same Munsojeon’s fifth room.
한형주 ( Han Hyung-ju )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14 한국학연구 Vol.0 No.34
본고는 신라의 시조인 박혁거세의 사당인 숭덕전에 대한 설치 연원 및 그 제사에 대한 전체적인 이야기를 전개시켰다. 본문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조선 태종 14년(1414)에 단군, 기자, 고려시조에게 제사하는 의주를 상진하고 제사의 등급을 중사로 삼았다. 前代의 사실을 본받고자 하는 의식이 사전의 정비과정에서 이들을 중사에 편입시킨 것이다. 그런데 이때 삼국의 시조는 그 의식의 과정 속에 제대로 편입되지 않았다. 고구려, 백제, 신라의 시조가 편입되지 않은 반면에 고려시대의 경우 시조 뿐 아니라 혜왕, 현왕, 충경왕, 충열왕 등 4위의 왕에게 대해서 사전에 등재시켰던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세종대 중반에 제위전을 각각 3결씩 이들 삼국시조에게 설정했거나 지리지의 대상에 포함시켰던 것과는 다른 모습이며, 세조가 고구려의 시조에게 제사지내는 등의 조처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이러한 결과는 『세종실록』 오례에 반영되어 신라 시조에 대한 설명이 나오지 않지만 『국조오례의』 길례의식에는 분명하게 ‘신라시조 박혁거세’를 포함하는 ‘역대시조’였다. 이 상황은 경종대에 이르러 바뀌게 되었다. 경종은 경상감사 조태억의 상소를 바탕으로 신라의 시조묘에 ‘崇德’이라는 묘호를 내렸고, 예관을 보내어 치제하도록 명하였다. 뒤이은 영조는 그 제사를 활발하게 만들었는데, 李宗城이 좋은 여건을 만들었다. 영조는 朴弼正과 朴文秀의 숭덕전에 대한 상소를 받으면서 아애 숭덕전에 대한 명칭을 ‘신라시조왕’으로 하였고, 숭덕전에 설치한 殿監의 연한으로 그 관원을 승진시키며, 승지를 보내 신라 시조묘에 대하여 제사를 드리게 한 것이다. 이 조처는 기본적으로 중국에서 역대 帝王廟에 대한 존숭을 본받은 것으로 전조의 충신이 말세를 경계한 내용을 본받아 시행한 것이다. 한편 영조의 숭덕전 고사를 본받으면서 정조는 다름대로의 방향을 세워서 치제하였다. 그는 당시 전라도를 암행하고 있던 李晩秀에게 숭덕전에 대한 제사를 드리도록 명하면서, 아울러 제문을 본인이 쓰겠다고 의욕을 보였다. 게다가 경순왕의 제사를 신라 시조와 구분하여 2월과 8월이 아닌 立春과 立秋에 시행할 것과 숭덕전에서 8변, 8두의 제기를 쓰는 반면 경순왕은 7변, 7두를 쓰는 등 차이를 두었던 것은 양자의 차별을 드러내는 것이며, 이러한 차별을 넘어 자신이 직접 편액을 쓰겠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고종 대에 들어와서 숭덕전의 제사는 좀 더 발전되었다. 고종대에는 정조대 이후 수 십년 동안 숭덕전에 대하여 중앙정부가 신경을 쓰지 못한 것을 만회하듯이 재위 7~8년 동안에 그 무너진 재전을 재차 수리ㆍ보완하였다. 그리고 나머지 관련 사항, 즉 이전 단계에 언급되었던 숭덕전 관리들의 승진규정을 다시 살펴보고서 재조정하였다. 그리고 신라 시조의 3중성, 즉 박혁거세, 미추왕, 탈해왕 등 3인의 시조에 대하여 각각 치제를 하는 등의 조처를 보여주고 있었던 것이다. Sungdokjeon(崇德殿) is progenitor shrine of Silla Dynasty, Bakhyeokgeose. It was included to Dangun, Gija, Dongmyeowang in middle-level of Sajeon(祀典), but not Bakhyeokgeose. This status quo is same to Sejong sillok's Orye(世宗實錄 五禮). But 'Yeodaesijo', including Samguk and Goryeo dynasty kings, in Kukcho oryeŭi (國朝五禮儀, Five State Rites) of King Seongjong period, was contained and demonstrated the consciousness of succession during Joseon Dynasty. It was changed from nation to this shrine provide 'Sungdok'-title in the King Gyeongjong. Next generation, King Yeongjo established the Sungdokjeon's system and expressioned to pay respect to ancestral rites by private secretary. This content included former dynasty's loyal subject keep a lookout end of the world. Subsequently, King Jeongjo, succeed to the Royal line, established spring and autumn ancestral rite system and established utensils used in ancestral rites of eight Beon(邊)-eight Doo(豆) style in Sungdokjeon Rites. And finally, King Gojeong reestablished Sungdokjeon building during 7-8 years in his reign, and improved promotion system associated Sungdokjeon.
한형주(Hyung Ju Han),한자선(Ja Sun ) 한국부동산융복합학회 2023 부동산융복합연구 Vol.3 No.1
4차 산업혁명으로 인한 ICT 기술의 발전은 짧은 시간동안 사회의 다양한 분야를 변화 시켰다. 특히 최근 수 년간 지속된 COVID-19의 사회적 거리두기의 장기화는 비대면 일상화 기술을 더욱 발전시키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현실 속에서 부동산 산업과 ICT의 결합인 프롭테크 기술과 현황은 외국의 플렛폼과 비교할 때 부족한 실정이다. 프롭테크는 향후 부동산 산업이 변화하여야 할 모습으로 시장과 소비자, 공급자 모두에게 긍정적인 영향력을 미치고 부동산 시장과 산업이 가지고 있었던 정보 비대칭, 불투명성, 비효율성 같은 고질적 문제점을 해결하는 발판이 될 수 있다. 따라서 본 연구에서는 이용자들이 프롭테크 기술의 유용성을 인식하고 이를 수용하는 요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결론을 도출하였다. 첫째, 첫째, 부동산시장 소비자 전반이 4차 산업혁명으로 인한 변화로 나타난 프롭테크 서비스를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둘째, 성과기대와 노력기대의 수용 의사에 대한 정의 영향 관계는 부동산시장 소비자들이 프롭테크 기술을 손쉽게 익히고, 활용함으로써 과거의 일처리 방식보다 효율적이고, 개선된 성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가지고 긍정적 인식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셋째, 사회적 영향과 촉진 조건의 수용의사에 대한 정의 영향관계는 프롭테크 기술이 사회적으로 널리 확산되며, 이를 수용하여야 한다는 의식이 이미 널리 퍼져 있음과 기술 수용에 대한 지원이 사회적 확산력을 높여 줄 수 있음을 보여준다. ICT 발달로 인한 메타버스 기술 등과 COVID-19 이후 비대면 기술을 이미 경험하면서 부동산시장 소비자들은 프롭테크를 통해 효율성과 성과를 개선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기대감 가지게 되었다. 따라서 프롭테크를 쉽게 사용할 수 있다는 믿음을 주고, 사용 과정에서 사용자들이 겪게 되는 어려움이나 불편을 적극적으로 해결해줄 수 있는 체계적인 고객 지원 노력을 통해서 프롭테크 서비스에 대한 고객의 접근성과 사용의 용이성을 높이는 것이 프롭테크 활성화에 중요한 요인이 될 것으로 사료된다. The development of ICT technology due to the 4th industrial revolution has changed various fields of society in a short period of time. In particular, the prolonged social distancing of COVID-19 in recent years is further developing non-face-to-face everyday technology. However, in this reality, proptech technology and current status, which is a combination of the real estate industry and ICT, are insufficient compared to foreign platforms. Proptech is a form that the real estate industry should change in the future, and it can have a positive influence on the market, consumers, and suppliers, and can be a stepping stone to solving chronic problems such as information asymmetry, opacity, and inefficiency in the real estate market and industry. Therefore, in this study, the following conclusions were drawn about the factors that users recognize and accept the usefulness of proptech technology. First, it suggests that consumers in the real estate market in general are positive about accepting proptech services that have emerged as a result of the changes caused by the 4th industrial revolution. Second,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definition of the willingness to accept performance expectations and effort expectations is positive with the expectation that consumers in the real estate market will be able to obtain more efficient and improved performance than the past work processing method by easily learning and using proptech technology. Show that you have awareness. Third, the relationship between social influence and the definition of willingness to accept promotion conditions is that proptech technology is widely spread socially, and the awareness that it should be accepted is already widespread, and support for technology acceptance can increase social diffusion. shows Therefore, it is important to increase customer accessibility to and ease of use of Proptech services through systematic customer support efforts that give confidence that Proptech can be used easily and actively solve difficulties or inconveniences that users experience during use. It is thought to be an important factor in the activation of proptech.
상업용 부동산의 건물관리서비스 품질요인에 관한 연구 - Kano 모형과 고객만족계수를 이용하여 -
한형주(Hyung-ju Han),권대중(Dae-jung Kwan) 한국부동산융복합학회 2022 부동산융복합연구 Vol.2 No.1
최근 수 년간 지속된 낮은 경제성장률과 소비 둔화, 특히 COVID-19로 인한 사회적거리두기의 장기화는 상권침체와 상업용 부동산의 공실률 증가와 수익률 감소로 이어졌다. 상업용 부동산의 수익률 개선을 위해서는 신규 이용자를 유치하고 현재 이용자의 유지를 통한 영업전략과 함께 건물의 유지관리 비용을 절감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따라서 상업용 부동산의 FM은 운영 비용을 효율성을 달성하면서 고객 편이성을 훼손하지 않는 수준의 품질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본 연구에서는 Kano 모형과 Timko의 고객만족계수를 이용하여 FM의 품질요소들을 분석하여 다음과 같은 결론을 도출하였다. 첫째, 당연적 품질요소로 분류된 요소들에 대한 운영 목표는 서비스품질이 하락하지 않도록 지속적인 품질관리를 통한 이용 만족도의 유지라 할 것이다. 둘째, FM 제공자는 매력적 품질 요소인 직원 관리에 지속적인 투자를 통하여 직원 서비스품질을 높여 이용자에게 향상된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중요하다. 셋째, 무관심 품질 요소로 분류된 항목 중에서 ‘안전시설’ 항목은 Kano 모형에 따른 분류에서는 당연적 품질요소로 나타나 실제로 이용자의 안전에 대한 관심도가 높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FM 제공자는 이용자들의 시설물 안전에 대한 지속적인 홍보를 통한 이용자의 인식을 개선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The low economic growth rate and consumption slowdown in recent years, especially the prolonged social distancing due to COVID-19, has led to a stagnation in commercial districts, an increase in the vacancy rate in commercial real estate, and a decrease in yields. In order to improve the profitability of commercial real estate, it is necessary to attract new users and reduce the maintenance cost of the building along with a business strategy through retention of current users. Therefore, it is important for commercial real estate FM to achieve operational cost efficiencies while maintaining a level of quality that does not compromise customer convenience. In this study, the following conclusions were drawn by analyzing the quality factors of FM using the Kano model and Timko's customer satisfaction coefficient. First, the operational goal for elements classified as natural quality elements is to maintain user satisfaction through continuous quality control so that service quality does not deteriorate. Second, it is important for FM providers to provide improved services to users by improving employee service quality through continuous investment in employee management, which is an attractive quality factor. Third, among the items classified as indifferent quality factors, 'safety facilities' appears as a natural quality factor in the classification according to the Kano model, showing that users are actually interested in safety. Therefore, FM providers need to make efforts to improve users' awareness through continuous publicity about the safety of facilities.
한형주(Han, hyung-ju) 고려사학회 2015 한국사학보 Vol.- No.58
본고에서는 『국조오례의』 에 수록되어 있는 선잠제와 영조대의 친잠의궤 에 기록된 선잠제 및 친잠례를 상호 비교하여 선잠 의식의 조선전·후기의 변화를 검토하고 그 의미를 찾아보았다. 선잠제는 원래 왕의 친경이 끝난 후 왕비의 친잠을 통하여 농업과 잠업이 조선의 근본임을 보이고 백성들에게 勸桑을 강조하려는 의도로 시행되었다. 원래 고려시대에는 관료들이 선잠제를 시행했지만 친잠이라는 왕비가 직접 담당하는 의식은 없었다. 조선 성종 8년(1477)에 이르러 처음으로 왕비의 친잠이 이루어졌는데, 이는 왕이 친경을 행한 후 다음에 선잠에서의 왕비의 친잠이 모색되었다. 그런데 이때는 왕비가 창덕궁에서 친잠을 시행했고, 선잠단에서 시행되는 제사에 참여하지 않아 양자는 서로 분리되었고, 이것은 명종대까지 지속되었다. 영조 43년(1767)왕이 왕비의 친잠을 부활시키면서 그동안 거행되지 못하였던 선잠제를 같이 시행하였다. 이때는 창덕궁밖의 선잠단에 왕비가 직접 나가기보다는 경복궁의 근정전 부근에다 선잠단과 채상단을 동시에 마련하고 여기에서 왕비의 의례가 시행되었다. 이것은 의례상에서 큰 변화를 가져왔다. 조선전기에 분리되어 있던 선잠제와 친잠은 영조대의 친잠의궤 에서는 이를 혼합하여 왕비가 술잔을 올리는 제사를 친히 지냈고, 왕비가 경복궁으로 이동하는 과정은 거가출궁으로 표시되었다. 또한 친잠의 장소가 경복궁으로 바뀌는 동시에 왕실 여성들이 참여하였고, 끝난 후에는 왕과 왕비에 대한 축하의 말로 이어졌다. 이것은 이전의 의례가 변화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지만 제단의 규모가 국조오례의 단계보다 훨씬 축소되었다. 선잠단의 규모와 채상단의 규모가 과거의 것보다 1/3정도 작아진 것인데, 이것은 전체적인 규모에서도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아울러 제수는 국조오례의 의 경우 규모에 맞도록 설치되었지만 영조대의 경우 간단하게 왕비가 작헌한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었다. 이로써 전자가 제관의 3헌으로 술잔을 올렸다면 후자의 경우 간단하게 왕비의 1헌으로 끝났던 것이다. This paper compares Seonjamje(先蠶祭) and Chinjamley(親蠶禮) as recorded in GukjoOryeUi(國朝五禮儀) with those of Chinjamney ChinjamEugyei(親蠶儀軌) from Yeongjo Period of the Chosun Dynasty. Through this comparision, this paper examines the changes in Seonjam ceremonies from the former and the latter period of the Chosun Dynasty and explores its significance. Through the queen’s doing sericulture after the king’s having done farm work, Seonjam ceremonies were originally implemented with a view to showing people that agriculture and sericulture are fundamental to the Chosun Dynasty and to emphatically encouraging people to undertake sericulture. Orignially in the Koryo Dynasty, the government officials held Seonjamje and there was no ceremony like Chinjam where the queen directly oversaw the ceremony. By Seongjon 8thyear(1477) of the Chosun Dynasty, the first Chinjam the queen directly supervised took place. During this period, Chinjam by the queen was sought after the royal ploughing in person. The queen undertook Chinjam at Changdeokgung and did not participate in the rite held at Seonjamdan, with the two events having separated from each other until the Myeongjong period. At Yengjo 43rd year(1767), the king reinstated Chinjam by the queen, at the same time conducting Senjamje that had not been taken place. Instead of the queen’s going to Senjamdan placed outside the walls of Changedeokgung, Senjamdan and Chaesangdan were both built around Geunjengjen at the Gyeongbukgung where the queen gave rites. This brought about drastic changes in the ritual. Senjamje and Chinjam, separated from each other from the early period of the Chosun Dynasty, were merged in ChinjamEugye in the Yengjo period. The queen personally gave rites where she offered liquor before the altar. The process of the queen going to Gyeongbukgung was called geogachwulgung(車駕出宮). Due to the change of the venue to Gyeongbukgung, female members of the royal family also participated in the ritual. Participants prasied the king and the queen after the ritual. Though there were rituals that had not been changed, the altar was considerably downsized from that described in GukjoOryeUi. Senjamdan and Chaesangdan were a third of what they used to be, reflecting the downsized scope of the whole ritual. In GukjoOryeUi, the sacricial food for the ritual was scaled to the ritual, but in the Yeongjo period, the queen offered liquor to the altar once. Unlike GukjoOryeUi where the ritual official offered liquor to the altar three times but the queen offered liquor once in the Yeongjo perio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