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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경직 목사의 국내선교 사역 평가 - 복음주의와 에큐메니칼을 아우르는 통전적 신학의 실천자
변창욱 장로회신학대학교 장로회신학대학교 2010 장신논단 Vol.0 No.38
한경직의 국내선교 사역은 전도, 교육, 봉사의 세 영역에서 균형을 이루어 왔다. 영락교회는 초기부터 국내외에 실향민 중심의 많은 교회를 설립했다. 개척한지 1년도 안되어 감리교 지역인 인천에 첫 장로교회인 인천제일교회를 세운 것은단지 하나의 개척교회를 세운 것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지역별 교파주의의 폐단을 허무는 전기를 마련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는 소달리티(sodality) 선교 구조인 여전도회 조직을 활용하여 많은 선교 사업을 추진해 나갔다. 또한 기독교 학교를 통해 개인의 변화와 사회 변혁까지 바라보았다. 그는 지성과 영성, 신앙과 학문, 과학과 학문을 소홀히 하지 않으면서 세상 지식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조화를 이루는 통전적 교육을 지향했다. 그는 사회봉사뿐 아니라, 교회 연합을 통한 선교 사역에도 많은 관심을 가졌다. 1960년대와 70년대 초반까지 복음주의자들은 영과 육, 개인과 사회, 교회와 세계, 이 세상과 저 세상으로 나누어 생각하는 경향이 강했다. 하지만 한경직에게서복음주의자들의 이분법적 사고를 찾아보기가 어렵다. 1966년 베를린에서 개최된세계복음화대회에서 그는 복음 전도가 교회의 첫째 사명이며, 개교회는 섬김의 구조로 변해야 하며, 섬기는 교회가 성장하며 교회가 사회적 관심을 가질 것을 강조했다. 그는 결코 교회 성장만을 목표로 삼는 편협한 생각에 사로 잡혀있지 않았고,사회봉사를 복음전도의 수단으로 간주하거나, 봉사를 교회의 수적 증가를 위한 전도의 수단으로 삼지도 않았다. 그는 사회봉사를 복음전도의 일부로 간주했다. 이처럼 그에게 있어 전도와 사회봉사가 분리되지 않는다. 한경직의 선교관은 복음주의적 성향에서 벗어나지 않지만, 그의 선교관은 개인의 영혼 구원에 그치지 않고 사회 변혁의 단계까지 확대되어 나간다. 교회의 봉사 사역이 일시적 구제에 머물지 않고, 사회 구조적 차원에서 이루어지도록 했다. ‘하나님-세상-교회’의 패러다임을 바탕으로 하는 한경직의 선교관은 영혼만 치유하는 것이 아니라 육체도 치유하고, 개인만 치유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도 치유하는 복음주의(전도)와 에큐메니칼(사회적 관심)을 아우르는 통전적이며 전인적인 봉사를 기반으로 한다.
변창욱 장로회신학대학교 기독교사상과문화연구원 2019 장신논단 Vol.51 No.4
This study provides a way to examine the role of biblical narratives in the independence movement of the Korean church during the Japanese occupation. From the outset, the Korean Christians under the leadership of western (mostly American) missionaries were educated not to participate in the socio-political situation. Despite the missionaries’ urges, these Christians staged the anti-Japanese movement for the sake of national independence. The Koreans applied the Bible stories directly to their context. For example, Korean Christians regarded Exodus as a powerful biblical account and equated Moses’ struggle against Pharaoh with that of their own against the Japanese. The Old Testament stories describing the deliverance of Israel engendered national consciousness and were taken to heart as promising the deliverance of Korea. This kind of liberating ethos is well expressed in the Tokripdan Tonggomun (Notification Statement of the Korean Independent League) of 1919. Christianity was the hope that gave the Koreans the strength to with stand Japanese hegemony. This resulted in Korean Christians being at the forefront of the independence mov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