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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세기 忠淸道 沃川 資風書堂의 운영과 인적구성

        고수연(Ko Soo-yeon) 역사문화학회 2021 지방사와 지방문화 Vol.24 No.2

        資風書堂은 조선 초기인 정종~태종 연간(1398~1418)에 창건되었다. 그동안의 서당연구가 경상도 지역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忠淸道 沃川郡에 위치한 자풍서당의 검토는 다양한 지역의 서당연구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자풍서당원의 科擧 급제자 명단인 『書堂連桂案』에는 28명이 등재되어 있는데, 그중에 6명이 임진왜란 이전에 급제된 인물이었다. 1636년에 작성된 자풍서당의 堂憲인 <齋中約條>에도 과거급제 관련 조항이 남아있다. 이를 통하여 자풍서당은 科業교육을 담당한 조선전기 향촌서당의 한 사례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 <재중약조> 31개조 분석을 통해서 17세기 자풍서당의 임원구성, 재정운영, 서당 입학과정, 거접규칙, 과거급제시 포상 등 서당운영과 교육규칙에 대하여 알 수 있었다. 자풍서당의 인적구성을 살펴보기 위하여 서당에 소장된 儒案인 『서당연계안』을 검토한 결과 서당임에도 불구하고 1426년부터 1894년까지 28명의 과거 급제자를 꾸준히 배출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또, 유안인 『資風書堂仙案』과 『서당연계안』을 함께 검토한 결과 300여 명에 가까운 당원이 기록되어 있었는데, 17세기에 태어난 옥천인물들이 많았다. 따라서 이 시기가 자풍서당의 전성기였으며, 서당에서 주로 옥천인물들이 교육받았음을 알 수 있었다. 서당원들은 본관별로 인천이씨·옥천전씨·함양여씨 등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는데, 이들 가문은 南人계 성향을 보이면서 옥천지역 西人-老論계 사족과 대립하며, 書院을 이용한 鄕戰도 불사하였다. 그러나 결국 조선후기 중앙정계에서 서인-노론이 패권을 잡으면서 자풍서당 당원들은 옥천이라는 향촌사회에서조차 힘이 약해진다. 이를 통하여 서원뿐만 아니라 지역에 위치한 서당 역시 조선후기 당쟁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Japung Seodang was built during the reign of King Jeongjong~King Taejong (1398~1418) in early Joseon. As previous Seodang studies have mainly focused on the Gyeongsang Province, a review of Japung Seodang located in Okcheon-gun, Chungcheong Province will have significance in promoting the study of Seodangs in various areas. The study of Japung Seodang is also significant in that it examines the cases of Seodangs offering education for the State Exam during the former part of Joseon as there are fewer studies on Seodangs from that period than from the latter part of Joseon. In Seodangryeongyean, which is a list of people who passed the State Exam housed at the Japung Seodang, there are records of 28 people, six of whom passed the exam before Imjinwaeran. Jaejungyakjo, which was written to establish the rules of Japung Seodang in 1636, holds three provisions about passing the State Exam. These findings indicate that Japung Seodang was in the early form of Hyangchon Seodang, whose nature was similar to that of Seojae in charge of education for the State Exam. The 31 articles of Jaejungyakjo show that Japung Seodang was actively managed with a set of detailed rules in the early 17th century. The study also reviewed the Seodangryeongyean, which is a list of Confucian scholars that studied at the Seodang and were housed there, to examine its human composition. Although it was a Seodang, Japung Seodang produced as many as 28 people that passed the State Exam throughout Joseon from 1426 to 1894. Another list of Confucian scholars, the Japungseodangseonan, was also reviewed along with Seodangryeongyean. The records show that nearly 300 people were registered on these lists, and they were usually born in Okcheon in the 17th century, which witnessed the prime years of Japung Seodang. The main family clans were the Lee family of Incheon, the Jeon family of Okcheon, and the Yeo family of Hamyang. These families had the Namin line propensity, confronted the Seoin-Noron line Sajoks in the Okcheon area, and did not shy away from Hyangjeon using a Seowon. After the Seoin-Noron line seized supreme power in central politics during the latter part of Joseon, however, the members of Japung Seodang grew weak in their power in the Hyangchon community of Okcheon. These results show that Seodangs as well as Seowons were under the influence of party strife during the latter part of Joseon.

      • 오페라 투란도트와 뮤지컬 투란도트 비교분석

        고수연 ( Sooyoun Ko ) 전남대학교 예술연구소 2018 藝術論集 Vol.19 No.-

        음악과 극이 결합된 형태인 음악극은 고대 그리스 비극에서도 그 자취를 찾아 볼 수 있을 만큼 오래된 역사를 갖고 있으며 여러 나라에서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다. 그 중 16세기 이후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성행되어진 오페라는 현재까지 활발히 연주되어지고 그 변화를 거듭하고 있다. 오페라와 더불어 음악극을 대표하는 장르로 자리 잡은 뮤지컬은 본래 20세기 초 오페라에서 파생되었지만 뮤지컬은 오페라보다 짧은 시간 안에 대중의 호응을 얻으며 국내 외 무대공연 장르에서 인기를 얻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두 장르의 차이점에 기인한 것인데 극적, 음악적, 시각적 요소에서 살펴 볼 수 있다. 뮤지컬은 이러한 요소들을 사용함에 있어 영상, 조명, 의상, 안무, 기계적 음향 효과 등을 통해 적극적으로 개입을 하여 관객은 보다 쉽게 극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렇듯 극음악 장르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오페라와 뮤지컬은 장르의 특성상 관객은 필수 불가결한 요소이다. 그러므로 공연의 내용이 관객에게 어떻게 받음악과 극이 결합된 형태인 음악극은 고대 그리스 비극에서도 그 자취를 찾아 볼 수 있을 만큼 오래된 역사를 갖고 있으며 여러 나라에서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다. 그 중 16세기 이후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성행되어진 오페라는 현재까지 활발히 연주되어 지고 그 변화를 거듭하고 있다. 오페라와 더불어 음악극을 대표하는 장르로 자리 잡은 뮤지컬은 본래 20세기 초 오페라에서 파생되었지만 뮤지컬은 오페라보다 짧은 시간 안에 대중의 호응을 얻으며 국내 외 무대공연 장르에서 인기를 얻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두 장르의 차이점에 기인한 것인데 극적, 음악적, 시각적 요소에서 살펴 볼 수 있다. 뮤지컬은 이러한 요소들을 사용함에 있어 영상, 조명, 의상, 안무, 기계적 음향 효과 등을 통해 적극적으로 개입을 하여 관객은 보다 쉽게 극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렇듯 극음악 장르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오페라와 뮤지컬은 장르의 특성상 관객은 필수 불가결한 요소이다. 그러므로 공연의 내용이 관객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지는가는 매우 중요한 일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해 오페라와 뮤지컬의 극, 음악, 시각의 어떤 요소들이 대중성과 결부되어 있는지를 푸치니의 오페라 투란도트와 오페라의 스토리 라인을 사용하여 대구 뮤지컬 페스티벌(DIMF)이 자체 제작한 창작 뮤지컬 투란도트를 비교함으로써 두 장르가 각각 관객에게 어떻게 다가가는지를 살펴볼 수 있다. Theatre Music that combines music and theatre has a long history of finding a trace in ancient Greek tragedy. Since ancient times, various forms of music theatre have appeared in several countries. Of them, the opera that became popular around Italy after the sixteenth century has been actively played and changed. Musical that becomes a representative genre of music theatre with opera originally derived from opera early in the twentieth century. However, it has won the public’s response in shorter time than opera and has been popular in a performance genre at home and abroad. Although opera has longer history and more excellent artistry than musical, its audience response has decreased compared with musical. It may be associated with the lack of popularity. Opera has made several attempts for popularization including translation in Korean, adapting for a little theater or children, and reinterpretation in a modern style. But, first, the correct theoretical ground for judgment should be provided by active scientific research. From this critical view, it is necessary to compare and analyze that which theatrical, visual, and musical elements were associated with popularity in opera and musical. This study compared and analyzed Opera Turandot by Puccini with Korean musical Turandot created by Daegu International Musical Festival(DIMF) to examine that how musical has made an appeal to the public. By applying the successful elements of musical to opera, this study will contribute to the popularization of opera.

      • KCI등재

        청소년의 자기애가 학교폭력 가해행동에 미치는 영향: 타인인정요구의 조절효과를 중심으로

        고수연 ( Ko Su Yeon ) 한국청소년학회 2023 청소년학연구 Vol.30 No.2

        본 연구의 목적은 청소년의 자기애 특성이 학교폭력 가해행동에 미치는 영향을 알아보고 타인인정욕구의 조절효과를 검증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중학생을 대상으로 하여 수도권을 중심으로 오프라인과 온라인 설문을 병행하여 진행하였다. 수집된 자료는 SPSS 22.0을 이용하여 기술통계, 상관분석, 위계적 회귀분석을 실시하였고, 연구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외현적 및 내현적자기애는 오프라인과 온라인 학교폭력 가해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나타났다. 둘째, 외현적자기애는 비난과 거절 회피욕구와 상호작용하여 오프라인 학교폭력 가해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나타났다. 셋째, 내현적자기애는 칭찬과 인정욕구 및 비난과 거절 회피욕구 모두와 상호작용하여 오프라인과 온라인 학교폭력 가해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나타났다. 넷째, 내현적자기애와 비난과 거절 회피욕구의 상호작용효과는 온라인 학교폭력 가해행동에 더 큰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나타났다. 본 연구를 통해,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내현적자기애의 폭력성을 학교폭력연구에서 확인하였으며, 청소년기 칭찬과 인정욕구와 비난과 거절 회피욕구가 학교폭력 가해행동을 증감시킬 수 있다는 것을 검증하였다. 본 연구는 학교폭력 예방교육 및 상담 현장에 청소년기 자기애 및 타인인정욕구의 특성에 대한 자료를 제공한 측면에서 의의가 있다.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verified the effect of adolescent’s narcissism on the school violence behavior and the moderating effects of need for approval. To this end, offline and online surveys were conducted simultaneously for middle school students in the metropolitan area. For the collected data, descriptive statistics, correlation analysis, and hierarchical regression analysis were conducted using SPSS 22.0. The research results are as follows. First, Overt and covert narcissism had an effect on offline and online school violence. Second, Overt narcissism effects offline school violence behavior by interacting with need to avoid criticism and rejection. Third, Covert narcissism interacting with both need for praise and approval and need to avoid criticism, and influenced offline and online school violence. Fourth, The interaction effect between covert narcissism and the need to avoid criticism and rejection had a greater effect on the behavior of online school violence. This study is significant in that it provides data of adolescence's narcissism to school violence prevention education and counseling si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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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戊申逆獄推安』에 기록된 戊申亂 叛亂軍의 성격

        고수연(Ko, Soo-yeon) 호서사학회 2017 역사와 담론 Vol.0 No.82

        『戊申逆獄推案』에는 1728년(영조 4)에 일어난 무신란에 가담했던 반란군의 供草가 모두 실려 있어 사료적 가치가 높다. 따라서『무신역옥추안』에 실린 반란군 291명의 공초를 분석한다면 무신란 반란군이 士族 중심이었는지, 아니면 軍官 · 奴婢 등 하층민이 반란군으로 큰 역할을 했는지를 검토할 수 있다. 이러한 작업이 이루어진다면 기존에 혼용되어 쓰이던 무신란의 성격, 즉 무신란을 붕당정치 차원에서 파악할 것인가,민중운동의 일환으로 볼 것인가에 대한 시각을 분명히 할 수 있다. 이러한 연구목적을 가지고『무신역옥추안』을 분석한 결과,첫째,『무신역옥추안』에 기록된 반란군의 職役을 보면 291명 중 미상 86명을 제외하면 사족이 173명으로 압도적으로 많다. 따라서 무신란 당시 사족이 주도적으로 가담했다고 한 연구시각, 즉, 무신란을 붕당정치 차원에서 파악한 연구시각은 맞다고 할 수 있다. 둘째, 사족 외의 직역으로는 군관 6명, 중인 10명, 양인 4명, 노비는 12명에 불과하다. 더구나 노비는 대개 주인인 사족의 단순심부름을 하였다. 따라서 하층민이 반란전개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고는 한 연구시각, 즉 무신란을 민중운동의 일환으로 파악한 연구시각은 재고될 필요가 있다. 셋째,『무신역옥추안』에 기록된 반란군이 많이 살았던 지역인 여주 · 용인 · 충주 지역을 검토해 본 결과 그 지역의 반 노론계 2~3가문의 친척이 같은 당파와 인척으로 연합하여 반란에 가담하는 양상을 볼 수 있었다. 넷째,『무신역옥추안』에 실린 본관이 같은 가문으로는 淳昌趙氏, 驪興閔氏, 羅州羅氏, 泗川睦氏, 全州李氏, 潘南朴氏 순이었다. 당색으로 보자면 순창조씨 · 여흥민씨 · 나주나씨 · 전주이씨는 南人계, 사천목씨 · 반남박씨는 少論 峻少 계열의 가문이었다. 그리고 남인인 순창 조씨와 여흥민씨, 나주나씨와 전주이씨는 인척지간이었다. 특히, 기존 연구에서 주목하지 않았던 지역에 세거하던 남인 사족이 가장 많은 수의 친척을 동원하고 있었다. 이것은 1727년 丁未換局으로 서울의 소론 준소계열의 반란동력이 약화되면서, 자연스럽게 지방 세거 남인 사족들이 가장 많은 친척을 동원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요컨대, 무신란의 전개에 하층민의 가담을 인정할 수는 있지만, 이것을 확대 해석하여 무신란을 민중운동으로 규정하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된다. 무신란은 사족, 특히 남인과 소론 준소계열 사족이 중심이 되었으며, 그 중에서도 지역에 세거한 남인들이 인척으로 강하게 결속되어 있었고, 가장 많은 수의 친척을 동원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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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老論系 文臣 李秀彥의 활동과 黨派적 성격

        고수연(Ko, Soo Yeon) 역사실학회 2020 역사와실학 Vol.72 No.-

        李秀彦(1636~1697)은 17세기 후반 老少分裂과 換局이 절정이던 시기 지역에 물러나 있지 않고 중앙 정치의 최전방에서 노론계 文臣으로 활동한 인물이었다. 본고에서는 먼저 노론계인 문신 이수언의 正體性에 대하여 주목하여 이수언의 가문과 교유관계를 검토하였다. 그 결과 이수언의 출신지역인 충청도 청주지역은 송시열의 문인이 가장 많이 분포되어 있었던 군현이었고, 문인 중에서도 韓山李氏가 가장 많았다. 이수언은 예조판서까지 오르게 되면서 청주지역 한산이씨 문인 중에서도 대표적인 인물로 자리잡았다. 또한 이수언은 송시열의 문인과 매우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끊임없이 교유하고 있었다. 과거 급제 후 중앙 관직에 나아간 이수언은 老論의 영수인 스승 송시열의 변호에 힘을 쏟았다. 이수언은 1674년(숙종 원)에 甲寅禮訟의 연장선상에서 송시열이 현종 지문 짓는 것을 반대한 南人郭世楗을 논척하다가 체직되었다. 노소분열이 한창이던 1687년(숙종 13)에는 懷尼是非의 연장선상에 있던 少論羅良佐의 상소에 대하여 논척하여, 나양좌가 유배를 가기도 하였다. 이수언은 노론계 문신의 변호도 도맡아 하였다. 사헌부 대사헌을 역임하는 등 주로 간관에 있었기 때문에 간언을 했겠지만, 그 방향은 언제나 철저하게 자파인 노론의 당론 관철과 노론 관료들의 변호였다. 이수언은 노론계 문신이자 송시열의 문인이었던 李徵明·閔鎭周·李選·李翔등을 구명하는 상소를 올렸고, 이로 인하여 1689년 己巳換局때 유배되기에 이른다. 甲戌換局으로 다시 관직에 올랐으나, 소론 吳道一을 논척하다가 또 좌천되었다. 이수언은 유배나 체직으로 지역에 물러나 있을 때에도 스승 송시열 제향서원 건립 및 추배, 문집 필사 등 스승의 추숭활동에 큰 역할을 하였다. 특히 1694년 수원 梅谷書院건립, 1695년 정읍 考巖書院건립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고, 1696년에는 양주 道峯書院에 송시열을 추향하고, 청주 華陽書院을 건립하는 것에도 힘을 쏟는다. 이러한 송시열 제향 및 추향서원의 건립과 활동은 스승의 추숭뿐아니라 노론의 지역세력 확대에도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이수언은 중앙 관직에 나아가서나 유배나 체직으로 지역에 물러나 있을 때도 모두 스승 송시열과 정치적 궤를 함께했다. 즉, 이수언은 송시열의 문인으로 관직에 나아가 예송, 노소분열, 환국이 있을 때마다 노론계 문신으로 적극 활약하였고, 관직에서 물러나서는 송시열의 추숭활동에 몰두한 17세기 후반 노론계 문신의 典型을 보여준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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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17세기 李潛ㆍ李得胤 父子의 講學活動과 門人의 動向

        고수연(Ko, Soo-yeon) 호서사학회 2015 역사와 담론 Vol.0 No.73

        조선시대 청주지역은 서인 - 노론계의 宗匠인 尤庵 宋時烈이 학문적 • 정치적 활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했던 지역으로 그가 세상을 떠난 직후 인근에 華陽書院과 萬東廟가 건립되어 노론의 상징적 장소가 되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노론계 세력확대에 반대하는 청주지역 남인 • 소론계 사족에 의해 鄕戰이 일어났고, 1728년에는 남인 • 소론 사족이 중심이 된 무신란 반란군에 의하여 청주성 점령까지 이루어진 지역이다. 이러한 청주지역 사족의 모습은 이른바 17세기 후반∼18세기의 2세대 사림의 활동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에 앞선 16∼17세기 전반 청주지역 1세대 사림은 2세대 사림과는 다르게 다양한 학풍을 수용하였고, 사족간의 다양한 학문적 교류가 이루어진다. 그리고 그 중심에 李潛․ 李得胤 부자가 있었다. 이잠과 이득윤 부자의 학풍과 강학활동과 문인 양성은 첫째, 琅城八賢이라는 청주의 걸출한 학자군을 완성하게 했으며, 둘째 湖西左道에서 두 번째로 莘巷書院을 건립하게 했으며, 셋째 이득윤과 이잠의 청주 출신 문인 51명을 과거에 입격시켰던 것이다. 즉, 이잠과 이득윤 부자는 청주지역에 1세대 사림의 인물과 그 활동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강학활동을 전개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강학활동은 청주사림의 학문적 수준을 한 단계 높인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이득윤 사후 17세기 후반에 이르면 중앙의 정계에서 불어 닥친 당쟁의 영향으로 이잠과 이득윤 문인들은 分岐한다. 그리고 그 움직임에는 이득윤의 수제자인 李德洙와 송시열이 개입되어 있다. 즉, 노론의 신항서원 운영주도권 확보 노력, 각 당파의 서원 건립․ 추향경쟁, 각종 향전으로 문인들이 대립한 것이다. 그리하여 17세기 후반에 이득윤의 문인과 그 후손은 철저히 당색으로 나뉘고, 이후 1728년 영조대 戊申亂이라는 격한 대립을 보여준 것이다. 그러나 무신란이 평정되면서 청주 지역의 학문, 사상사적 위상은 노론계가 중심이 되어 더욱 강화되고 경직된 모습을 보여주게 된다. In Joseon, the Cheongju area(淸州地域) was where Wooam Song, Shi-yeol(宋時烈), who was the head of the Seoin-Noron line, actively developed his academic and political activities. Hwayangseowon and Mandongmyo were built in its surrounding area right after he passed away, becoming the symbolic places of Noron. On the other hand, there was Hyangjeon by the Namin and Soron line Sajok of the area that opposed the expansion of the Noron line force. In 1728, the Cheongju Fortress was occupied by the rebel forces of Mushinran mainly comprised of the Namin and Soron Sajok. The aspects of Sajok in the Cheongju area can be understood through the activities of the second-generation Sarim from the latter half of the 17th century to the 18th century. The first-generation Sarim of the Cheongju area in the 16th and the early 17th century accepted a variety of academic traditions and had various academic exchanges among the Sajoks unlike the second-generation Sarim. There were Lee, Jam(李潛), the father, and Lee, Deuk-yun(李得胤), the son, at the center of it. Their academic traditions, activities to pursue study, and cultivation of literary figures made the outstanding group of scholars called Nangseongpalhyeon(琅城八賢) active in the Cheongju area, resulted in the construction of the second Shinhangseowon in the Hoseojwado, and helped 51 literary figures from Cheongju pass the state exam. In other words, the father and the son developed activities to pursue study that could combine the first-generation Sarim figures and their activities into one. It seems clear that their activities to pursue study raised the academic level of Cheongju Sarim by a notch. Under the influence of the party strife from the central political circles in the second half of the 17th century after the death of Lee, Deuk-yun, the literary figures in the circle of the father and the son rose to action. The movement was assisted by the best pupils of Lee, Deuk-yun, Lee, Deok-su and Song, Shi-yeol. That is, the literary figures confronted one another due to the efforts to seize the leadership in the operation of Shinhangseowon by Noron, the competition to build a seowon and hold a memorial service in it among the parties, and all kinds of Hyangjeon. In the second half of the 17th century, the literary figures in the circle of Lee, Deuk-yun and their descendents were thoroughly divided by the partisan colors with an intense confrontation of Mushinran(戊申亂) in 1728 during the reign of King, Yeong-jo. The confrontation, however, was sorted out in the Noron color after Mushinran was put dow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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