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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세기 연행록에 드러난 홍경래의 난과그 토양 ‘서북’ = The Hong Kyongnae Rebellion in 19th Century's Yeonhaengnok(燕行錄); remember Seobuk area(西北地域) as Battlefie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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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kakao i 다국어 번역

      Hong Kyungnae Nan(洪景來亂), a major event representing the nineteenth century, is still a rebellion caused by the history created by the local climate, or a failed revolution caused by a hero formed by the unique atmosphere and energy of the region. It is a case where there is much room for reconsideration. This article is to examine how the 19th-century YeonHangnok(燕行錄) writers who had no choice but to go to the field of warfare explained the way and how to understand the region.
      First of all, there is a diary named YooYeonRok(遊燕錄), that left the experience of those days after returning to Korea in April 1812, when Hong Kyung-rae's crisis was taking place. It mainly deals with the question of who and how acts in controversy.
      Maintaining the structure of 'presentation of the person-the testimony of the person around-the citation of the record of the person's activity, it emphasize Jung-si(鄭蓍) and Cho-Jong young(趙鐘永), the people who expressed the virtues of Loyalty as local government. Locals come out only as witnesses. For example, Yeonhong(蓮紅) and Kim Hyundae(金鉉大).
      We can also see the interest in space and the features that describe it. The north-western region in the Hong Kyung Rae that they draw is a space of ruin that has been devastated in a short time, and it is a space that feels more terrible because it is familiar with the existence of the thriving past. However, if this is where Gwan-Gun's response to the “Banran(變亂)” is held, it can be remembered as an image of the battlefield.
      Two of the above concerns can be seen in the subsequent history of the 19th century YeonHangRok(燕行錄) reference to the region. The most representative persons related to Hong Kyung Raenan are still mentioning Jung-si(鄭蓍) and Cho-Jong young(趙鐘永). However, it is clear that the approach that reminds people related to Hong Kyung Raenan is not through testimony, but through the historical monument. As such, they are not provided with information in a variety of possible interpretations, but also have the adverse effect of limiting the direction to be respected.
      The problem is whether the space being drawn is also a space of 'ruin'. However, the same “recovery statue” is also shown in the space description, suggesting that the war in the area is not a progressive event but a kind that can be summoned into memory. The place to bring out the episode related to the “Hang Kyung Raenan” to be summoned by the war in memory is concentrated in Zhengzhou(定州), especially the Seobukjangdae(西北將臺).
      Because the area had many sacrifices, but in the end it was a battlefield that defeated the traitor Hong Kyung Rae. It is settled as an “old battlefield [古戰場]” that does not bring about the loss and pain of the pres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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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ong Kyungnae Nan(洪景來亂), a major event representing the nineteenth century, is still a rebellion caused by the history created by the local climate, or a failed revolution caused by a hero formed by the unique atmosphere and energy of the regi...

      Hong Kyungnae Nan(洪景來亂), a major event representing the nineteenth century, is still a rebellion caused by the history created by the local climate, or a failed revolution caused by a hero formed by the unique atmosphere and energy of the region. It is a case where there is much room for reconsideration. This article is to examine how the 19th-century YeonHangnok(燕行錄) writers who had no choice but to go to the field of warfare explained the way and how to understand the region.
      First of all, there is a diary named YooYeonRok(遊燕錄), that left the experience of those days after returning to Korea in April 1812, when Hong Kyung-rae's crisis was taking place. It mainly deals with the question of who and how acts in controversy.
      Maintaining the structure of 'presentation of the person-the testimony of the person around-the citation of the record of the person's activity, it emphasize Jung-si(鄭蓍) and Cho-Jong young(趙鐘永), the people who expressed the virtues of Loyalty as local government. Locals come out only as witnesses. For example, Yeonhong(蓮紅) and Kim Hyundae(金鉉大).
      We can also see the interest in space and the features that describe it. The north-western region in the Hong Kyung Rae that they draw is a space of ruin that has been devastated in a short time, and it is a space that feels more terrible because it is familiar with the existence of the thriving past. However, if this is where Gwan-Gun's response to the “Banran(變亂)” is held, it can be remembered as an image of the battlefield.
      Two of the above concerns can be seen in the subsequent history of the 19th century YeonHangRok(燕行錄) reference to the region. The most representative persons related to Hong Kyung Raenan are still mentioning Jung-si(鄭蓍) and Cho-Jong young(趙鐘永). However, it is clear that the approach that reminds people related to Hong Kyung Raenan is not through testimony, but through the historical monument. As such, they are not provided with information in a variety of possible interpretations, but also have the adverse effect of limiting the direction to be respected.
      The problem is whether the space being drawn is also a space of 'ruin'. However, the same “recovery statue” is also shown in the space description, suggesting that the war in the area is not a progressive event but a kind that can be summoned into memory. The place to bring out the episode related to the “Hang Kyung Raenan” to be summoned by the war in memory is concentrated in Zhengzhou(定州), especially the Seobukjangdae(西北將臺).
      Because the area had many sacrifices, but in the end it was a battlefield that defeated the traitor Hong Kyung Rae. It is settled as an “old battlefield [古戰場]” that does not bring about the loss and pain of the pres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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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kakao i 다국어 번역

      19세기를 대표하는 일대 사건인 ‘홍경래의 난’은 아직도 지역의 풍토가 만들어낸 逆賊에 의한 반란인지, 혹은 지역의 독특한 풍정과 기운으로 형성된 英雄이 일으킨 실패한 혁명인지 재再構하고 再考할 여지가 많은 사건이다. 이 글은 19세기에 ‘안주-(가산-정주-곽산-선천-철산-용천)-의주’라는 사건의 현장을 지나가면서 追體驗할 수 밖에 없었던 (개인) 연행록의 저자들이 이 사건을 어떻게 이해하고 서술하게 되는가를 살폈다.
      일단, 홍경래의 난이 일어나고 있던 1812년 4월에 귀국하여 그 당시의 현장을 겪은 체험을 일기체로 남긴 연행록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李鼎受의 󰡔遊燕錄󰡕(1811-12)이다. 그곳에서는 ‘누가’ 變亂 중에서 어떠한 행동을 하는가의 문제를 주로 다룬다. 그 방법으로 ‘인물의 제시-직접 경험 인물의 증언-인물의 행적 관련 기록 인용’의 구조를 유지하면서, 의병인 김견신과 허항을 잠깐 소개하다가 본격적으로 지방관으로서 忠과 義의 덕목을 발현한 가산군수 정시, 안주목사 조종영을 부각시킴을 알 수 있다. 이들의 행적을 더욱 생생하게 해 주는 증언자로서만 현지인 기생 연홍, 현지인인 김현대가 등장한다.
      또한 지나가야만 했던 공간에 대한 관심과 그를 서술하는 특징도 볼 수 있다. 그들이 그려내는 홍경래란 속의 서북 지역은 짧은 사이에 초토화가 된 폐허의 공간이며, 번성했던 과거의 존재를 익히 알고 있기에 더욱 참담함을 느끼게 되는 공간이다. 그러나 이것이 ‘變亂’을 치리하기 위한 관군의 대응이 있는 곳이라면 ‘戰場’의 이미지로도 기억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이고 있다.
      전술한 두 가지의 관심사가 이후 19세기 이 지역을 언급한 연행록에서도 지속적으로 다루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홍경래의 난 관련한 인물로서 가장 대표적인 사람은 여전히 가산군수 ‘鄭蓍’와 안주목사 ‘趙鍾永’이 언급되지만, 홍경래난 관련 인물들을 환기하는 접근 방식은 ‘증언’을 통한 것이 아니라 ‘기념비’라는 사적(史蹟)을 통한다는 변화 양상을 단적으로 알 수 있다. 그렇기에 그들은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상태로 정보가 제공되는 것이 아니고 기려져야 하는 방향이 제한되는 역효과도 지닌다.
      이후 연행록에서 그려지는 공간 역시 ‘폐허’의 공간인가 아닌가 하는 것들이 문제가 된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은 ‘회복상’도 공간 묘사상 함께 보여주어, 이제 그 지역의 전란은 현재 진행형인 사건이 아니라 기억으로 소환될 종류임을 시사한다. 기억 속의 전쟁으로 소환될 ‘홍경래의 난’과 관련된 화소(話素)를 꺼내는 장소는 정주, 특히 서북장대로 집중되는데, 그 지역은 많은 희생은 있었지만 결국 역도(逆徒)인 홍경래를 치리하는 승전장(勝戰場)이기 때문에 현재의 상실과 아픔만을 불러내지 않는 ‘옛 전장[古戰場]’으로 자리잡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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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세기를 대표하는 일대 사건인 ‘홍경래의 난’은 아직도 지역의 풍토가 만들어낸 逆賊에 의한 반란인지, 혹은 지역의 독특한 풍정과 기운으로 형성된 英雄이 일으킨 실패한 혁명인지 재再...

      19세기를 대표하는 일대 사건인 ‘홍경래의 난’은 아직도 지역의 풍토가 만들어낸 逆賊에 의한 반란인지, 혹은 지역의 독특한 풍정과 기운으로 형성된 英雄이 일으킨 실패한 혁명인지 재再構하고 再考할 여지가 많은 사건이다. 이 글은 19세기에 ‘안주-(가산-정주-곽산-선천-철산-용천)-의주’라는 사건의 현장을 지나가면서 追體驗할 수 밖에 없었던 (개인) 연행록의 저자들이 이 사건을 어떻게 이해하고 서술하게 되는가를 살폈다.
      일단, 홍경래의 난이 일어나고 있던 1812년 4월에 귀국하여 그 당시의 현장을 겪은 체험을 일기체로 남긴 연행록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李鼎受의 󰡔遊燕錄󰡕(1811-12)이다. 그곳에서는 ‘누가’ 變亂 중에서 어떠한 행동을 하는가의 문제를 주로 다룬다. 그 방법으로 ‘인물의 제시-직접 경험 인물의 증언-인물의 행적 관련 기록 인용’의 구조를 유지하면서, 의병인 김견신과 허항을 잠깐 소개하다가 본격적으로 지방관으로서 忠과 義의 덕목을 발현한 가산군수 정시, 안주목사 조종영을 부각시킴을 알 수 있다. 이들의 행적을 더욱 생생하게 해 주는 증언자로서만 현지인 기생 연홍, 현지인인 김현대가 등장한다.
      또한 지나가야만 했던 공간에 대한 관심과 그를 서술하는 특징도 볼 수 있다. 그들이 그려내는 홍경래란 속의 서북 지역은 짧은 사이에 초토화가 된 폐허의 공간이며, 번성했던 과거의 존재를 익히 알고 있기에 더욱 참담함을 느끼게 되는 공간이다. 그러나 이것이 ‘變亂’을 치리하기 위한 관군의 대응이 있는 곳이라면 ‘戰場’의 이미지로도 기억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이고 있다.
      전술한 두 가지의 관심사가 이후 19세기 이 지역을 언급한 연행록에서도 지속적으로 다루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홍경래의 난 관련한 인물로서 가장 대표적인 사람은 여전히 가산군수 ‘鄭蓍’와 안주목사 ‘趙鍾永’이 언급되지만, 홍경래난 관련 인물들을 환기하는 접근 방식은 ‘증언’을 통한 것이 아니라 ‘기념비’라는 사적(史蹟)을 통한다는 변화 양상을 단적으로 알 수 있다. 그렇기에 그들은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상태로 정보가 제공되는 것이 아니고 기려져야 하는 방향이 제한되는 역효과도 지닌다.
      이후 연행록에서 그려지는 공간 역시 ‘폐허’의 공간인가 아닌가 하는 것들이 문제가 된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은 ‘회복상’도 공간 묘사상 함께 보여주어, 이제 그 지역의 전란은 현재 진행형인 사건이 아니라 기억으로 소환될 종류임을 시사한다. 기억 속의 전쟁으로 소환될 ‘홍경래의 난’과 관련된 화소(話素)를 꺼내는 장소는 정주, 특히 서북장대로 집중되는데, 그 지역은 많은 희생은 있었지만 결국 역도(逆徒)인 홍경래를 치리하는 승전장(勝戰場)이기 때문에 현재의 상실과 아픔만을 불러내지 않는 ‘옛 전장[古戰場]’으로 자리잡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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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Reference)

      1 오수창, "홍경래의 난, 폭넓은 시각과 수많은 논쟁거리 ―『Marginality and Subversion in Korea: The Hong Kyŏngnae Rebellion of 1812』(Sun Joo Kim, The University of Washington Press, 2007)" 역사문제연구소 (83) : 424-431, 2008

      2 정석종, "홍경래란의 성격" 한국사연구회 7 : 519-576, 1972

      3 송하준, "홍경래란의 기억과 문학적 형상화" 인문과학연구소 (50) : 79-103, 2017

      4 정환국, "홍경래란을 바라보는 시선" 동악어문학회 (55) : 5-38, 2010

      5 박현모, "홍경래난을 통해서 본 19세기 조선정치" 한국동양정치사상학회 4 (4): 131-148, 2005

      6 성아사, "홍경래난을 소재로 한 상업출판물 연구 : 방각본 『신미록』을 중심으로" 연세대학교 대학원 2011

      7 신춘호, "지도 : 홍경래의 난 발생지도(상; encyber.com)/조-청 연행노정도 책문 전 지도"

      8 오수창, "조선후기 평안도 사회발전 연구" 일조각 2002

      9 정석종, "외대" 한국외국어대학 학도호국단 210-224, 1984

      10 張伯偉, "연행사와 통신사" 박문사 2014

      1 오수창, "홍경래의 난, 폭넓은 시각과 수많은 논쟁거리 ―『Marginality and Subversion in Korea: The Hong Kyŏngnae Rebellion of 1812』(Sun Joo Kim, The University of Washington Press, 2007)" 역사문제연구소 (83) : 424-431, 2008

      2 정석종, "홍경래란의 성격" 한국사연구회 7 : 519-576, 1972

      3 송하준, "홍경래란의 기억과 문학적 형상화" 인문과학연구소 (50) : 79-103, 2017

      4 정환국, "홍경래란을 바라보는 시선" 동악어문학회 (55) : 5-38, 2010

      5 박현모, "홍경래난을 통해서 본 19세기 조선정치" 한국동양정치사상학회 4 (4): 131-148, 2005

      6 성아사, "홍경래난을 소재로 한 상업출판물 연구 : 방각본 『신미록』을 중심으로" 연세대학교 대학원 2011

      7 신춘호, "지도 : 홍경래의 난 발생지도(상; encyber.com)/조-청 연행노정도 책문 전 지도"

      8 오수창, "조선후기 평안도 사회발전 연구" 일조각 2002

      9 정석종, "외대" 한국외국어대학 학도호국단 210-224, 1984

      10 張伯偉, "연행사와 통신사" 박문사 2014

      11 이상은, "연행록 총간"

      12 김영죽, "연행, 그 이면의 풍경 - 18,19세기 연행록에 나타난 방기(房妓)와 마두배(馬頭輩)의 실상을 중심으로 -" 한국문학연구소 (52) : 151-185, 2016

      13 김영죽, "연행 體驗 기록의 慣行과 그 매커니즘" 한국한문고전학회 34 (34): 265-304, 2017

      14 김수연, "분노의 시대, 미완의 공분 -한문단편「홍경래」를 중심으로-" 민족문학사학회 (57) : 39-62, 2015

      15 임옥규, "북한 역사소설의 문제" 65-78, 2006

      16 남상권, "북한 역사소설 <홍경래>와 서북" 반교어문학회 (18) : 183-221, 2005

      17 권혁래, "문학지리학 연구의 정체성과 연구방법론 고찰" 우리문학회 (51) : 167-197, 2016

      18 임백연, "경오유연일록"

      19 한필교, "隨槎錄"

      20 이정수, "遊燕錄"

      21 小田省吾, "辛未洪景來亂" 小田先生頌壽紀念會 1934

      22 강시영, "輶軒續錄"

      23 강시영, "輶軒三錄"

      24 조수삼, "秋齋集"

      25 김경선, "燕轅直指"

      26 이영득, "燕行錄"

      27 박사호, "燕薊紀程"

      28 김직연, "燕槎日錄"

      29 "往還日記"

      30 "備邊司謄錄"

      31 정영문, "‘홍경래’와 ‘항우’의 문학적 형상화에 관한 비교연구" 한민족어문학회 (60) : 35-58, 2012

      32 민현기, "‘홍경래’ 소재(素材) 남?북한 역사소설 비교 연구" 한국어문학회 78 : 285-311, 2002

      33 Sun Joo Kim, "Marginality and Subversion in Korea : The Hong Kyongnae Rebellion of 1812" University of Washington Press 2007

      34 이지영, "20세기 미주 이민 서북인의 홍경래란에 대한 기억 : 전낙청의 <홍경래전>에 대한 고찰" 한국학중앙연구원 41 (41): 275-303,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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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월일 이력구분 이력상세 등재구분
      2027 평가 재인증평가 신청대상 (재인증)
      2021-01-01 등재 등재학술지 유지 (재인증) KCI등재
      2018-01-01 등재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17-10-30 학회명변경 영문명 : 미등록 -> Society for Korean Literature in Classical Chinese KCI등재
      2017-10-12 학술지명변경 외국어명 : Journal of Korean literature in Hanmun -> Journal of Korean Literature in Classical Chinese KCI등재
      2015-01-01 등재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11-01-01 등재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09-01-01 등재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07-01-01 등재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04-01-01 등재 등재학술지 선정 (등재후보2차) KCI등재
      2003-01-01 등재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KCI등재후보
      2002-01-01 등재 등재후보학술지 유지 (등재후보1차) KCI등재후보
      1999-07-01 등재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KCI등재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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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술지 인용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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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준연도 WOS-KCI 통합IF(2년) KCIF(2년) KCIF(3년)
      2016 0.77 0.77 0.79
      KCIF(4년) KCIF(5년) 중심성지수(3년) 즉시성지수
      0.9 0.86 1.77 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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