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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세기 말 한국에서의 ‘外交’ 용어의 활용 양상 = The Use of the Term ‘外交(외교;Wegyo)’ in the Late 19th Century of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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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kakao i 다국어 번역

      The origin of the word ‘diplomacy’, meaning ‘外交(외교; Wegyo)’ in the West, is the Greek word ‘diploma’ meaning ‘folding’, used as the word indicating a pass or an official document. And the term ‘negotiation’ originally meant ‘diplomacy’, substituted for after the Napoleonic Wars. ‘外交’ in China, after its first appearance in the form of the sentence “人臣無外交(A retainer cannot do diplomacy)” in 『禮記』, has been used as a taboo meaning the private act of diplomatic envoys. Unlike this, it started to be used as an abbreviation of ‘外國交際’ in Japan from about 1870 on the occasion of the establishment of the Ministry of Foreign Affairs.
      ‘外交’ in pre-modern Korea meant the taboo of “人臣無外交” same as China, which gradually disintegrated in the field of diplomacy with China. Instead, this was later used as a reason to reject the Western Powers’ demands for trade in 19th century. In this process the meaning of ‘外交’ changed a little bit, from personal deviation in the diplomacy within East Asian world order into trading with Western Powers at the level of the nation. However, it was still taboo in Korean till the end of 1870s.
      Meanwhile, China has set a policy of recommending Korea the conclusion of treaties with Western Powers since the mid-1870s. Therefore the meaning of ‘外交’ turned from the taboo of “人臣無外交” into an urgent task to be undertaken by Korea. This made China use the word ‘外交’ as the meaning of establishing diplomatic relations with Western countries by its subject state Korea. Also in Korea, ‘外交’ became less taboo after the decision for establishing diplomatic ties with the Western states. But It was still difficult for this word to be formally used as indicating general foreign relations.
      The reference to the effect that Korea was the tributary state of China, but does ‘內治(domestic administration)’ and ‘外交’ independently was sent to the President of U.S.A. in the name of Korean King after the conclusion of treaty between Korea and U.S. in 1882. ‘外交’ was formally defined as something Korea did independently consequently, and its meaning became similar as the modern that of ‘diplomacy’, general foreign relations with the member states of international law world order.
      However, its meaning didn’t contain Korean relationship with China as long as the traditional East Asian world order was lasting. And China also could’t use ‘外交’ as diplomacy of itself because it meant diplomacy of its subject country. This situation changed as the traditional East Asian world order collapsed after Sino-Japanese War in 1894, making ‘外交’ same as the modern meaning of diplomacy in both countries, and used in the government system and regulation of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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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e origin of the word ‘diplomacy’, meaning ‘外交(외교; Wegyo)’ in the West, is the Greek word ‘diploma’ meaning ‘folding’, used as the word indicating a pass or an official document. And the term ‘negotiation’ originally meant...

      The origin of the word ‘diplomacy’, meaning ‘外交(외교; Wegyo)’ in the West, is the Greek word ‘diploma’ meaning ‘folding’, used as the word indicating a pass or an official document. And the term ‘negotiation’ originally meant ‘diplomacy’, substituted for after the Napoleonic Wars. ‘外交’ in China, after its first appearance in the form of the sentence “人臣無外交(A retainer cannot do diplomacy)” in 『禮記』, has been used as a taboo meaning the private act of diplomatic envoys. Unlike this, it started to be used as an abbreviation of ‘外國交際’ in Japan from about 1870 on the occasion of the establishment of the Ministry of Foreign Affairs.
      ‘外交’ in pre-modern Korea meant the taboo of “人臣無外交” same as China, which gradually disintegrated in the field of diplomacy with China. Instead, this was later used as a reason to reject the Western Powers’ demands for trade in 19th century. In this process the meaning of ‘外交’ changed a little bit, from personal deviation in the diplomacy within East Asian world order into trading with Western Powers at the level of the nation. However, it was still taboo in Korean till the end of 1870s.
      Meanwhile, China has set a policy of recommending Korea the conclusion of treaties with Western Powers since the mid-1870s. Therefore the meaning of ‘外交’ turned from the taboo of “人臣無外交” into an urgent task to be undertaken by Korea. This made China use the word ‘外交’ as the meaning of establishing diplomatic relations with Western countries by its subject state Korea. Also in Korea, ‘外交’ became less taboo after the decision for establishing diplomatic ties with the Western states. But It was still difficult for this word to be formally used as indicating general foreign relations.
      The reference to the effect that Korea was the tributary state of China, but does ‘內治(domestic administration)’ and ‘外交’ independently was sent to the President of U.S.A. in the name of Korean King after the conclusion of treaty between Korea and U.S. in 1882. ‘外交’ was formally defined as something Korea did independently consequently, and its meaning became similar as the modern that of ‘diplomacy’, general foreign relations with the member states of international law world order.
      However, its meaning didn’t contain Korean relationship with China as long as the traditional East Asian world order was lasting. And China also could’t use ‘外交’ as diplomacy of itself because it meant diplomacy of its subject country. This situation changed as the traditional East Asian world order collapsed after Sino-Japanese War in 1894, making ‘外交’ same as the modern meaning of diplomacy in both countries, and used in the government system and regulation of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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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kakao i 다국어 번역

      서양에서 ‘外交’의 의미를 지니는 ‘diplomacy’의 어원은 ‘접는다.’라는 의미를 가진 그리스어 ‘diploma’로, 통행증이나 공문서 등의 의미로 쓰였으며 ‘diplomacy’의 의미에 해당되는 용어는 ‘negotiation’이었다. 그러다가 나폴레옹 전쟁 이후에 비로소 오늘날과 같은 ‘외교’의 뜻으로 사용되었다. 한편 중국에서의 ‘외교’는 『禮記』에서 ‘人臣無外交’, 곧 “남의 신하된 자는 외교를 할 수 없다.”는 뜻으로 첫 등장한 이후 외교사절의 사적인 행위를 뜻하는 금기적 개념으로 쓰였으며, 일본의 경우 이와는 별개로 ‘外國交際’의 줄임말로서 外務省 설립을 계기로 1870년경부터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조선에서의 ‘외교’ 역시 ‘인신무외교’ 관념에 따른 예물수수 등 외교사절의 금지된 사적 행동을 의미했는데, 대중국 외교의 현장에서 점차 이 금기 개념은 현실상으로는 해체되어 갔다. 대신에 이 ‘인신무외교’ 개념은 19세기에 들어 서구열강들의 통상요구가 거세지면서 이를 거부하는 명분으로 활용되었고, 이 과정에서 ‘외교’는 기존 사대질서 내의 국가들과의 관계시 일어나는 개인의 일탈행위라는 기존의 것과는 의미가 조금 변경되어 사대질서 밖의 서양과 국가 차원에서 통상하는 행위를 뜻하게 되었다. 그러나 터부의 대상임은 여전했으며 조․일수호조규 체결 이후 1870년대까지 조선에서는 이러한 인식이 이어진다.
      한편 1870년대 중반 이후 청은 조선을 서구 제국주의 열강으로부터의 완충재로 삼기 위해 서양 제국들과의 조약 체결을 권고하는 방침을 정한다. 이에 따라 ‘외교’는 기존 ‘인신무외교’ 개념의 금지 대상이 아니라 조선이 해야 할 당면 과제로 설정되게 되어 청측에서는 외교를 조공국 조선이 서양과 관계를 맺는 필요한 행위의 의미로 사용하게 된다. 조선 역시 『朝鮮策略』의 전래 이후 서양과의 수교 방침을 정하면서 ‘외교’는 앞의 ‘인신무’라는 전제가 삭제되어 터부적 의미가 많이 약화되지만, 서양과의 관계 수립이 현실화되기 이전에 이 용어가 일반적인 대외관계를 뜻하는 용어로 공식 사용되기는 힘들었다.
      이후 1882년에 조․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면서 “조선이 중국의 屬邦이지만 內治와 外交는 자주”라는 내용의 속방조회가 高宗 명의로 미국 대통령에게 발송되었다. 이로서 ‘외교’는 ‘조선이 자주적으로 하는 것’으로 공식 규정되었으며, 만국공법 체제 하 구성원들과 가지는 관계 일반을 뜻하는 근대적인 의미와 유사한 뜻을 지니게 되었다. 그리고 조약 체결 이후 상소문 등에서 활용되기 시작하면서 점차 시민권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청국과의 사대질서가 온존하는 이상 청을 제외한 국가들과의 관계를 의미한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었으며, 청 역시 조공국의 대외관계를 뜻하는 ‘외교’ 용어의 사용을 기피하여 이를 자신들의 그것을 의미하는 뜻으로 사용하지 못했다. 이런 상황은 청일전쟁 이후 사대질서가 청산되면서 변화하였다. 곧 ‘외교’가 양국 모두에서 근대적인 ‘diplomacy’의 번역어와 등치되는 대외관계 일반을 지칭하는 용어로 확립되었고, 한국에서는 관제와 규정에 이 단어가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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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양에서 ‘外交’의 의미를 지니는 ‘diplomacy’의 어원은 ‘접는다.’라는 의미를 가진 그리스어 ‘diploma’로, 통행증이나 공문서 등의 의미로 쓰였으며 ‘diplomacy’의 의미에 해당되는 용...

      서양에서 ‘外交’의 의미를 지니는 ‘diplomacy’의 어원은 ‘접는다.’라는 의미를 가진 그리스어 ‘diploma’로, 통행증이나 공문서 등의 의미로 쓰였으며 ‘diplomacy’의 의미에 해당되는 용어는 ‘negotiation’이었다. 그러다가 나폴레옹 전쟁 이후에 비로소 오늘날과 같은 ‘외교’의 뜻으로 사용되었다. 한편 중국에서의 ‘외교’는 『禮記』에서 ‘人臣無外交’, 곧 “남의 신하된 자는 외교를 할 수 없다.”는 뜻으로 첫 등장한 이후 외교사절의 사적인 행위를 뜻하는 금기적 개념으로 쓰였으며, 일본의 경우 이와는 별개로 ‘外國交際’의 줄임말로서 外務省 설립을 계기로 1870년경부터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조선에서의 ‘외교’ 역시 ‘인신무외교’ 관념에 따른 예물수수 등 외교사절의 금지된 사적 행동을 의미했는데, 대중국 외교의 현장에서 점차 이 금기 개념은 현실상으로는 해체되어 갔다. 대신에 이 ‘인신무외교’ 개념은 19세기에 들어 서구열강들의 통상요구가 거세지면서 이를 거부하는 명분으로 활용되었고, 이 과정에서 ‘외교’는 기존 사대질서 내의 국가들과의 관계시 일어나는 개인의 일탈행위라는 기존의 것과는 의미가 조금 변경되어 사대질서 밖의 서양과 국가 차원에서 통상하는 행위를 뜻하게 되었다. 그러나 터부의 대상임은 여전했으며 조․일수호조규 체결 이후 1870년대까지 조선에서는 이러한 인식이 이어진다.
      한편 1870년대 중반 이후 청은 조선을 서구 제국주의 열강으로부터의 완충재로 삼기 위해 서양 제국들과의 조약 체결을 권고하는 방침을 정한다. 이에 따라 ‘외교’는 기존 ‘인신무외교’ 개념의 금지 대상이 아니라 조선이 해야 할 당면 과제로 설정되게 되어 청측에서는 외교를 조공국 조선이 서양과 관계를 맺는 필요한 행위의 의미로 사용하게 된다. 조선 역시 『朝鮮策略』의 전래 이후 서양과의 수교 방침을 정하면서 ‘외교’는 앞의 ‘인신무’라는 전제가 삭제되어 터부적 의미가 많이 약화되지만, 서양과의 관계 수립이 현실화되기 이전에 이 용어가 일반적인 대외관계를 뜻하는 용어로 공식 사용되기는 힘들었다.
      이후 1882년에 조․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면서 “조선이 중국의 屬邦이지만 內治와 外交는 자주”라는 내용의 속방조회가 高宗 명의로 미국 대통령에게 발송되었다. 이로서 ‘외교’는 ‘조선이 자주적으로 하는 것’으로 공식 규정되었으며, 만국공법 체제 하 구성원들과 가지는 관계 일반을 뜻하는 근대적인 의미와 유사한 뜻을 지니게 되었다. 그리고 조약 체결 이후 상소문 등에서 활용되기 시작하면서 점차 시민권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청국과의 사대질서가 온존하는 이상 청을 제외한 국가들과의 관계를 의미한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었으며, 청 역시 조공국의 대외관계를 뜻하는 ‘외교’ 용어의 사용을 기피하여 이를 자신들의 그것을 의미하는 뜻으로 사용하지 못했다. 이런 상황은 청일전쟁 이후 사대질서가 청산되면서 변화하였다. 곧 ‘외교’가 양국 모두에서 근대적인 ‘diplomacy’의 번역어와 등치되는 대외관계 일반을 지칭하는 용어로 확립되었고, 한국에서는 관제와 규정에 이 단어가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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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Reference)

      1 권혁수, "한중관계의 근대적 전환과정에서 나타난 비밀 외교채널: 李鴻章과 李裕元의 往復書信을 중심으로" 37 : 2003

      2 金容九, "학술원논문집" 2011

      3 김종학, "조일수호조규 체결과정에서의 오경석의 막후활동: 개화당 기원의 재검토" 한국정치외교사학회 38 (38): 5-40, 2016

      4 김성배, "유교적 사유와 근대 국제정치의 상상력 : 구한말 김윤식의 유교적 근대 수용" 창비 2009

      5 申櫶, "심행일기 : 조선이 기록한 강화도조약" 푸른역사 2010

      6 존 베일리스, "세계정치론" 을유문화사 2006

      7 김용구, "세계관 충돌과 한말 외교사, 1866~1882" 문학과지성사 2001

      8 김수암, "근대한국의 사회과학개념 형성사 2" 창비 2012

      9 국립중앙도서관, "고문서해제 X: 외교문서류" 2013

      10 宋炳基, "駐日淸國公使 何如璋의 「主持朝鮮外交議」에 대하여" 11 : 1981

      1 권혁수, "한중관계의 근대적 전환과정에서 나타난 비밀 외교채널: 李鴻章과 李裕元의 往復書信을 중심으로" 37 : 2003

      2 金容九, "학술원논문집" 2011

      3 김종학, "조일수호조규 체결과정에서의 오경석의 막후활동: 개화당 기원의 재검토" 한국정치외교사학회 38 (38): 5-40, 2016

      4 김성배, "유교적 사유와 근대 국제정치의 상상력 : 구한말 김윤식의 유교적 근대 수용" 창비 2009

      5 申櫶, "심행일기 : 조선이 기록한 강화도조약" 푸른역사 2010

      6 존 베일리스, "세계정치론" 을유문화사 2006

      7 김용구, "세계관 충돌과 한말 외교사, 1866~1882" 문학과지성사 2001

      8 김수암, "근대한국의 사회과학개념 형성사 2" 창비 2012

      9 국립중앙도서관, "고문서해제 X: 외교문서류" 2013

      10 宋炳基, "駐日淸國公使 何如璋의 「主持朝鮮外交議」에 대하여" 11 : 1981

      11 朴日槿, "近代韓美外交史" 博友社 1968

      12 근대한국외교문서편찬위원회, "近代韓國外交文書 제4권: 조미수호통상조약" 동북아역사재단 2012

      13 高麗大學校 亞細亞問題硏究所, "舊韓國外交文書 10(美案 1)" 高麗大學校 出版部 1967

      14 朴日槿, "美國의 開國政策과 韓美外交關係" 一潮閣 1981

      15 "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章程(奎 15323․15324)"

      16 權錫奉, "淸末 對朝鮮政策史硏究" 一潮閣 1986

      17 "淸季中日韓關係史料"

      18 權五榮, "東道西器論의 構造와 그 展開" 7 : 1990

      19 董德模, "東洋에 있어서의 傳統外交의 槪念: 韓國의 傳統外交를 중심으로" 8 (8): 1984

      20 "朝鮮王朝實錄"

      21 許東賢, "朝士視察團關係資料集" 7 (7): 2007

      22 南基顯, "春秋穀梁傳" 자유문고 2005

      23 咸東珠, "明治初期(1868~1875)일본 외무성의 조선침략론과 그 성격" 54 : 1997

      24 "日本外交文書"

      25 "承政院日記"

      26 國史編纂委員會, "從政年表․陰晴史" 1958

      27 李瑄根, "庚辰修信使 金弘集과 黃遵憲 朝鮮策略 에 對한 再檢討: 金弘集 自筆 寫本 「朝鮮策略」을 보며" 1 : 1963

      28 "宣宗成皇帝實錄"

      29 "官報(奎 16025)"

      30 "太宗文皇帝實錄"

      31 外務省百年史編纂委員會, "外務省の百年(上)" 1969

      32 "國照會謄錄(古 5710-11)"

      33 國史編纂委員會, "同文彙考 Ⅰ~Ⅳ" 1978

      34 "出來咨文(經古 327.51052-J255)"

      35 韓國學文憲硏究所, "公法會通" 亞細亞文化社 1980

      36 國史編纂委員會, "修信使記錄" 1958

      37 宋炳基, "19세기말의 聯美論 序說: 李鴻章의 密函을 중심으로" 9 : 1975

      38 유바다, "19세기 후반 조선의 국제법적 지위에 관한 연구" 고려대학교 2017

      39 김창수, "19세기 후반 대외위기와 조선 사신의 교섭 양상" 고려사학회 (65) : 345-377, 2016

      40 金昌洙, "19세기 朝鮮․淸 관계와 使臣外交" 서울시립대학교 2016

      41 윤현숙, "1881년 조사시찰단(朝士視察團)문견 기록의 글쓰기 양상" 열상고전연구회 (66) : 5-30, 2018

      42 陳澔, "(譯註)禮記集說大全: 郊特生①" 學古房 2013

      43 민족문화추진회, "(國譯) 海行摠載 11" 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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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재인증) KCI등재
      2018-01-01 평가 등재학술지 선정 (계속평가) KCI등재
      2017-01-01 평가 등재후보학술지 유지 (계속평가) KCI등재후보
      2016-01-01 평가 등재후보학술지 유지 (계속평가) KCI등재후보
      2015-12-01 평가 등재후보로 하락 (기타) KCI등재후보
      2011-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09-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06-01-01 평가 등재학술지 선정 (등재후보2차) KCI등재
      2005-01-01 평가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KCI등재후보
      2004-01-01 평가 등재후보학술지 유지 (등재후보1차) KCI등재후보
      2003-01-01 평가 등재후보학술지 유지 (등재후보1차) KCI등재후보
      2002-01-01 평가 등재후보학술지 유지 (등재후보1차) KCI등재후보
      1999-07-01 평가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KCI등재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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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술지 인용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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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준연도 WOS-KCI 통합IF(2년) KCIF(2년) KCIF(3년)
      2016 1.07 1.07 1.11
      KCIF(4년) KCIF(5년) 중심성지수(3년) 즉시성지수
      1.07 1.02 2.456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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