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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 말 한국 기독교의 수난과 대응 : 일제에 의한 한국교회와 대한성공회 탄압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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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kakao i 다국어 번역

    지금까지 우리는 일제 말 식민지 조선의 기독교 정책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본론을 간단하게 요약을 해 보겠다.
    Ⅱ장에서는 일제 기독교 정책의 변화를 시기별로 구분해 보고 신사참배 강요와 종교단체법의 추진에 대해 살펴보았다. 우선 1절에서는 구체적으로 기독교정책의 각 시대별 특징들을 고찰해 보았고, 더불어 각 시기별 선교사들에 대한 정책의 변화도 살펴보았다. 일제의 기독교 정책은 한마디로 식민지 경영의 부속물로써 규정되었다. 선교초기 일제는 자국의 식민지 경영에 특별히 거슬리지 않는다면 종교문제에 개의치 않으려는 이른바 '정교분리' 노선을 폈으며, 선교사들 또한 마찬가지 경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일제 후기로 가면서 대(對) 기독교 정책은 '종교보국'의 기치로 선교사와 교회를 철저히 탄압하는 정책을 편다.
    2절에서는 신사참배의 강요를 시대적 배경과 함께 서술하였다. 신사참배는 1930년대 들어 대륙침략을 본격적으로 재개하면서 일제의 '국체'사상에 기초한 황민화 운동의 주요 수단으로써 강요되었다.
    3절에서는 종교단체법을 통과시켜 전시체제에 적극적으로 부합할 수 있고 기존의 교파적 교회체제를 일본적 교회체계로 대체시켜 철저히 천황제 중심의 종교보국으로써의 교회 정체성을 확립하려는 일제의 만행에 대해 서술하였다.
    Ⅲ장에서는 신사참배에 대한 각국 선교사들의 대응과 교회의 대응을 알아보고 신사참배 수용 이후의 교회의 변질과 종교단체법을 시발로 한 교회의 통합을 통해 일제 말 한국 교회가 격어야 했던 고통과 인내의 시기를 알아본다. 1절에서 우리는 기독교계 학교를 시작으로 철저히 강요되는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를 보게 된다. 또 이에 따른 각국 선교부는 순응과 반발의 과정을 겪으며 나름대로의 신학적 견해와 정치적 입장으로 신사참배에 대한 대응을 달리한다. 일찍부터 신사참배를 저들의 입장에 따라 국가적 행사로 받아들인 천주교와 감리교를 비롯해서 1938년 장로교가 마지막으로 신사참배를 모든 교단이 형식적으로 수용하기 까지 많은 저항에 부딪치게 된다. 이들의 저항은 개인적 저항을 비롯하여 선교부에 의한 학교의 폐쇄도 불사하였으며 한국의 교회는 많은 희생을 감내하여야 했다.
    결국 신사참배를 수용한 교회는 일제에 의해 통합의 수순을 밟으며 변질되어 간다. 그러나 이러한 때에도 개인적인 저항은 계속되어 기독교 세력도 항일 운동의 한 줄기를 형성하며 일제의 만행에 저항하게 된다.
    2절에서는 전시체제 식민지 병참기지화를 목표로 '종교보국'의 기치에 맞는 교회를 만들고자 종교단체법을 이용하여 일본교파와의 통합을 시작으로 '일본기독교 조선교단'의 결성까지 일제에 의해 강요된 부일협력과 교회 수난을 알아보았다. 일제는 종교를 국가의 통치하에 두고 종교통제를 보다 효율적으로 하고자 하였다. 이에 방해세력이었던 선교사를 1941년 전면 추방하였고, 교파적 특징인 '재림사상', '종말사상'등을 이유로 회유가 어렵다고 생각된 성결교, 동아기독교회(침례교), 안식교, 여호와의 증인 등을 일방적으로 해산해 버린다.
    3절에서는 선교초기부터 사회사업 등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던 대한성공회 선교사들의 가치관과 신앙관을 살펴보고 신사참배에 대한 대응을 알아보았다 대한성공회는 일제 말기 영국선교부와의 관계로 인해 모든 선교사가 추방되는 아픔을 겪었지만 선교시기 내내 중용의 정신을 바탕으로 다른 개신교등과 같은 부일협력을 하지는 않았다. 특히 선교사들에 의해 운영되어지던 학교와 병원과 고아원, 보육원, 교회가 1941년 선교사 추방을 기점으로 큰 타격을 받았고 일본인 주교의 섭정으로 고난을 견뎌내야 했지만 대한성공회는 이렇듯 혹독한 시련을 견디어 냈다.
    일제는 처음부터 기독교를 좋은 눈으로 보지 않았다. 일제의 식민지 경영의 근간인 '천황중심의 사상'과 근본부터 상충했기 때문이었다. 그러하기에 교회는 처음부터 관리의 대상이었고, 이후로 갈수록 통제와 억압의 대상이었다. 특히 1930년대 후반 일제의 집요하고 강압적인 황민화 정책으로 민족 자체가 말살될 위기에 처하였을 때, 교회 역시 기독교 순수 신앙이 왜곡되고 변절을 강요받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식민지 초기 일제는 '정교분리' 원칙을 강조하며 교회의 정치적 행동을 봉쇄하고 식민통치에 대한 저항을 막으려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한국 교회가 받아들일 수 없었고, 이후 일제는 교회의 계속되는 저항에 부딪치게 된다. 즉, 교회가 지향하는 하느님 나라는 세상 저편에 동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울부짖는 백성들 가운데 있는 것이기에 '교회와 국가', '신앙과 정치'는 상호 보완, 책임의 관계가 있는 것이다.
    이후 일제의 종교탄압은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동시에 진행된다. 하나는 신사참배 강요이고, 다른 하나는 종교단체법을 통해 이미 국가에 종속되어있는 일본기독교로의 흡수와 교파 통합이었다. 이 둘은 한국의 기독교를 식민지 상황에 맞도록 국가에 복속시켜 '황국신민화'와 '식민지 병참기지화'에 합당하게 되도록 개량하고 천황을 신으로 받드는 일제의 근간사상에 종교를 유용하게 쓰기 위함이었다. 즉 일제는 기독교라는 자체는 인정하지만 기독교는 반드시 국가 체제 내에 속해야하고 국가의 이익에 복무하여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이러한 주장은 일제가 식민지 초기부터 제기해 왔던 종교관으로 일제가 강요했던 신사참배와 종교단체법도 이러한 그들의 사상을 관철시키기 위한 수단이었다.
    결국 일제는 표면적으로는 그들의 정책에 한국의 교회를 꿰어 맞추는 성과를 얻는다. 즉, 일제의 강압과 회유에 굴복하거나 편승해서 친일을 하거나 부일협력을 했던 대다수의 교회 지도급 인사들과 제도권교회와 기관들이 그것이다. 그들은 일제가 주장하는 것처럼 신사참배와 종교통합을 신앙의 관점이 아닌 국가 체제로 받아 들였다 즉, 교회가 신사참배를 하고 각 교단을 통폐합하여 일본기독교에 복속 시키는 것을 종교적인 관점이 아니라 일제의 주장대로 단지 국가체제에 대한 순응 내지는 제도화의 한 과정으로 보았던 것이다. 그러하기에 친일을 하거나 부일 협력을 하였던 많은 제도권 교회는 나름대로의 당위성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주류를 이루었던 기독교 인사들이 변절의 길을 걸을 때 소위 '무명'의 신앙인들은 목숨을 걸고 조직적으로 대응하며 투쟁하게 된다. 이들은 순교를 각오하고 일제의 신사참배를 거부하였으며, 그 결과 일제 강점기 신사참배를 거부해 투옥된 이가 대략 2천명에 달하고, 200여 교회가 폐쇄되었으며, 50여명이 순교하게 된다. 결국 역사의 흐름은 억압받는 민중이 만들어가는 것이고, 일제의 광폭한 탄압도 기독교 저항세력을 막을 수는 없었다.
    특히나 대한성공회는 열악한 조건 속에서 선교부 선교사의 전원 추방 등 가혹한 탄압을 받았다. 이러한 탄압은 일제가 영국과 맺은 영일동맹이 파기되면서 가해진 정치적 보복의 성격이 짙다고 할 수 있다. 즉, 대한성공회는 그 모태가 영국성공회이기 때문에 자신들의 대륙침략을 비난하는 영국과 영국성공회에 대한 간접 보복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당시의 선교사들은 교회를 지키기 위하여 선교부가 퇴진한 것이다.
    대한성공회는 선교 초기부터 이 땅의 소외 받는 민중들을 찾아 복음의 터전을 넓힌 성공회였기에 교단의 성장보다는 병원, 고아원, 보육원, 학교등등의 사회복지 시설로 민족의 자립과 자활을 위해 노력하였고, 그러하기에 일본의 신사참배 강요에 유연하게 대처하며, 드러나는 부일협력을 통한 매국행위를 피해갈 수 있었던 것이다. 특히 교회를 책임지던 선교사들이 모두 쫓겨나서 모든 시설들과 일부 교회가 문을 닫아야 할 때에도 돈이 끊겨 굶어 죽을 지라도 교회를 지켜 내셨던 선조들의 신앙의 유산을 오늘날에도 이어나가고 있다. 즉, 대한성공회는 세계성공회와의 제도적 연대로 성공회로서의 정체성을 굳건히 지켜나갔던 것이다.
    결국, 기독교계의 이러한 투쟁은 단순한 신앙수호에 국한된 투쟁이 아니었다. 혹독한 겨울에 꽁꽁 얼어붙은 시냇물 아래로 봄을 알리는 물이 흐르듯이 교회는 겨울을 이겨냈으며 이것은 일제에 의해 수탈당하고 억압당하던 식민지 조선의 거대한 항일 투쟁의 한 지류였던 것이다.
    신사참배와 동방요배의 강요, 황국신민서사 제장, 창씨개명, 일본어상용등의 민족말살정책은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패망으로 막을 내기게 되지만 해방 직후, 흔적도 없이 사라졌던 교회의 제도가 빠르게 복구되고 회복되었던 것은 이러한 교회의 정신이 온전히 이어갔기 때문이다. 결국 일제의 종교정책은 그들의 바람과는 다르게 실패한 것이다.
    이제 해방을 맞이한 지도 60년이 되었다. 한국과 일본은 2002년 월드컵을 공동 유치해 성공적으로 개최하는 등, 가장 가깝고도 먼 나라로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날로 좁아지는 양국의 관계에 비해 일본이 보이고 있는 전쟁 등에 대한 반성은 아시아 주면나라에 많은 실망을 남기고 있다. 특히 근래 들어 일본 매스컴이 벌이고 있는 중국 난징 대학살에 대한 조작설 제기는 과연 일본이 과거 전쟁에 대한 진심어린 반성을 하고 있는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을 하게한다. 또한 해마다 제기되는 야스쿠니 신사참배 문제와 침략국으로서의 반성을 외면한 일본 각료들의 계속되는 망언들을 봤을 때, 그 실망은 더욱 깊어져 간다.
    많은 사람들은 과연 일본이 아시아 속에서 우리의 우방인가라는 질문을 하고 있다. 우방, 곧 이웃이란 옆에 살거나 일정한 관계를 갖는다고 이웃이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서로 사랑과 신뢰를 주고 받을 때 진정한 이웃이자 우방으로 거듭날 수 있는 것이다. 특히 일본의 과거사 문제는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 전후세대에게 많은 시사점을 주고 있다 과거는 과거로써 묻히는 것이 아니라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삶을 살아가는 나침반으로써의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기독교는 용서와 화해의 종교이다. 양국 간에 넘지 못할 벽이 있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나 1910년대 일본조합교회가 조선의 선교를 목적으로 일본 기독교를 전파하려 조선에 들어와서 활동한지 근 100년이 되어가는 시점에서 대한 성공회가 일본 성공회의 요청으로 선교사를 파송하는 것은 대단히 큰 의미가 있겠다. 신앙적 교류가 작은 줄기를 이루고, 그것이 나중에 큰 강물을 이룬다면 동북아에서의 평화와 안정에 기독교가 큰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두 민족 간의 진정한 화해를 이루는데 기독교가 교두보 역할을 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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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까지 우리는 일제 말 식민지 조선의 기독교 정책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본론을 간단하게 요약을 해 보겠다. Ⅱ장에서는 일제 기독교 정책의 변화를 시기별로 구분해 보고 신사참배 강...

    지금까지 우리는 일제 말 식민지 조선의 기독교 정책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본론을 간단하게 요약을 해 보겠다.
    Ⅱ장에서는 일제 기독교 정책의 변화를 시기별로 구분해 보고 신사참배 강요와 종교단체법의 추진에 대해 살펴보았다. 우선 1절에서는 구체적으로 기독교정책의 각 시대별 특징들을 고찰해 보았고, 더불어 각 시기별 선교사들에 대한 정책의 변화도 살펴보았다. 일제의 기독교 정책은 한마디로 식민지 경영의 부속물로써 규정되었다. 선교초기 일제는 자국의 식민지 경영에 특별히 거슬리지 않는다면 종교문제에 개의치 않으려는 이른바 '정교분리' 노선을 폈으며, 선교사들 또한 마찬가지 경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일제 후기로 가면서 대(對) 기독교 정책은 '종교보국'의 기치로 선교사와 교회를 철저히 탄압하는 정책을 편다.
    2절에서는 신사참배의 강요를 시대적 배경과 함께 서술하였다. 신사참배는 1930년대 들어 대륙침략을 본격적으로 재개하면서 일제의 '국체'사상에 기초한 황민화 운동의 주요 수단으로써 강요되었다.
    3절에서는 종교단체법을 통과시켜 전시체제에 적극적으로 부합할 수 있고 기존의 교파적 교회체제를 일본적 교회체계로 대체시켜 철저히 천황제 중심의 종교보국으로써의 교회 정체성을 확립하려는 일제의 만행에 대해 서술하였다.
    Ⅲ장에서는 신사참배에 대한 각국 선교사들의 대응과 교회의 대응을 알아보고 신사참배 수용 이후의 교회의 변질과 종교단체법을 시발로 한 교회의 통합을 통해 일제 말 한국 교회가 격어야 했던 고통과 인내의 시기를 알아본다. 1절에서 우리는 기독교계 학교를 시작으로 철저히 강요되는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를 보게 된다. 또 이에 따른 각국 선교부는 순응과 반발의 과정을 겪으며 나름대로의 신학적 견해와 정치적 입장으로 신사참배에 대한 대응을 달리한다. 일찍부터 신사참배를 저들의 입장에 따라 국가적 행사로 받아들인 천주교와 감리교를 비롯해서 1938년 장로교가 마지막으로 신사참배를 모든 교단이 형식적으로 수용하기 까지 많은 저항에 부딪치게 된다. 이들의 저항은 개인적 저항을 비롯하여 선교부에 의한 학교의 폐쇄도 불사하였으며 한국의 교회는 많은 희생을 감내하여야 했다.
    결국 신사참배를 수용한 교회는 일제에 의해 통합의 수순을 밟으며 변질되어 간다. 그러나 이러한 때에도 개인적인 저항은 계속되어 기독교 세력도 항일 운동의 한 줄기를 형성하며 일제의 만행에 저항하게 된다.
    2절에서는 전시체제 식민지 병참기지화를 목표로 '종교보국'의 기치에 맞는 교회를 만들고자 종교단체법을 이용하여 일본교파와의 통합을 시작으로 '일본기독교 조선교단'의 결성까지 일제에 의해 강요된 부일협력과 교회 수난을 알아보았다. 일제는 종교를 국가의 통치하에 두고 종교통제를 보다 효율적으로 하고자 하였다. 이에 방해세력이었던 선교사를 1941년 전면 추방하였고, 교파적 특징인 '재림사상', '종말사상'등을 이유로 회유가 어렵다고 생각된 성결교, 동아기독교회(침례교), 안식교, 여호와의 증인 등을 일방적으로 해산해 버린다.
    3절에서는 선교초기부터 사회사업 등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던 대한성공회 선교사들의 가치관과 신앙관을 살펴보고 신사참배에 대한 대응을 알아보았다 대한성공회는 일제 말기 영국선교부와의 관계로 인해 모든 선교사가 추방되는 아픔을 겪었지만 선교시기 내내 중용의 정신을 바탕으로 다른 개신교등과 같은 부일협력을 하지는 않았다. 특히 선교사들에 의해 운영되어지던 학교와 병원과 고아원, 보육원, 교회가 1941년 선교사 추방을 기점으로 큰 타격을 받았고 일본인 주교의 섭정으로 고난을 견뎌내야 했지만 대한성공회는 이렇듯 혹독한 시련을 견디어 냈다.
    일제는 처음부터 기독교를 좋은 눈으로 보지 않았다. 일제의 식민지 경영의 근간인 '천황중심의 사상'과 근본부터 상충했기 때문이었다. 그러하기에 교회는 처음부터 관리의 대상이었고, 이후로 갈수록 통제와 억압의 대상이었다. 특히 1930년대 후반 일제의 집요하고 강압적인 황민화 정책으로 민족 자체가 말살될 위기에 처하였을 때, 교회 역시 기독교 순수 신앙이 왜곡되고 변절을 강요받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식민지 초기 일제는 '정교분리' 원칙을 강조하며 교회의 정치적 행동을 봉쇄하고 식민통치에 대한 저항을 막으려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한국 교회가 받아들일 수 없었고, 이후 일제는 교회의 계속되는 저항에 부딪치게 된다. 즉, 교회가 지향하는 하느님 나라는 세상 저편에 동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울부짖는 백성들 가운데 있는 것이기에 '교회와 국가', '신앙과 정치'는 상호 보완, 책임의 관계가 있는 것이다.
    이후 일제의 종교탄압은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동시에 진행된다. 하나는 신사참배 강요이고, 다른 하나는 종교단체법을 통해 이미 국가에 종속되어있는 일본기독교로의 흡수와 교파 통합이었다. 이 둘은 한국의 기독교를 식민지 상황에 맞도록 국가에 복속시켜 '황국신민화'와 '식민지 병참기지화'에 합당하게 되도록 개량하고 천황을 신으로 받드는 일제의 근간사상에 종교를 유용하게 쓰기 위함이었다. 즉 일제는 기독교라는 자체는 인정하지만 기독교는 반드시 국가 체제 내에 속해야하고 국가의 이익에 복무하여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이러한 주장은 일제가 식민지 초기부터 제기해 왔던 종교관으로 일제가 강요했던 신사참배와 종교단체법도 이러한 그들의 사상을 관철시키기 위한 수단이었다.
    결국 일제는 표면적으로는 그들의 정책에 한국의 교회를 꿰어 맞추는 성과를 얻는다. 즉, 일제의 강압과 회유에 굴복하거나 편승해서 친일을 하거나 부일협력을 했던 대다수의 교회 지도급 인사들과 제도권교회와 기관들이 그것이다. 그들은 일제가 주장하는 것처럼 신사참배와 종교통합을 신앙의 관점이 아닌 국가 체제로 받아 들였다 즉, 교회가 신사참배를 하고 각 교단을 통폐합하여 일본기독교에 복속 시키는 것을 종교적인 관점이 아니라 일제의 주장대로 단지 국가체제에 대한 순응 내지는 제도화의 한 과정으로 보았던 것이다. 그러하기에 친일을 하거나 부일 협력을 하였던 많은 제도권 교회는 나름대로의 당위성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주류를 이루었던 기독교 인사들이 변절의 길을 걸을 때 소위 '무명'의 신앙인들은 목숨을 걸고 조직적으로 대응하며 투쟁하게 된다. 이들은 순교를 각오하고 일제의 신사참배를 거부하였으며, 그 결과 일제 강점기 신사참배를 거부해 투옥된 이가 대략 2천명에 달하고, 200여 교회가 폐쇄되었으며, 50여명이 순교하게 된다. 결국 역사의 흐름은 억압받는 민중이 만들어가는 것이고, 일제의 광폭한 탄압도 기독교 저항세력을 막을 수는 없었다.
    특히나 대한성공회는 열악한 조건 속에서 선교부 선교사의 전원 추방 등 가혹한 탄압을 받았다. 이러한 탄압은 일제가 영국과 맺은 영일동맹이 파기되면서 가해진 정치적 보복의 성격이 짙다고 할 수 있다. 즉, 대한성공회는 그 모태가 영국성공회이기 때문에 자신들의 대륙침략을 비난하는 영국과 영국성공회에 대한 간접 보복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당시의 선교사들은 교회를 지키기 위하여 선교부가 퇴진한 것이다.
    대한성공회는 선교 초기부터 이 땅의 소외 받는 민중들을 찾아 복음의 터전을 넓힌 성공회였기에 교단의 성장보다는 병원, 고아원, 보육원, 학교등등의 사회복지 시설로 민족의 자립과 자활을 위해 노력하였고, 그러하기에 일본의 신사참배 강요에 유연하게 대처하며, 드러나는 부일협력을 통한 매국행위를 피해갈 수 있었던 것이다. 특히 교회를 책임지던 선교사들이 모두 쫓겨나서 모든 시설들과 일부 교회가 문을 닫아야 할 때에도 돈이 끊겨 굶어 죽을 지라도 교회를 지켜 내셨던 선조들의 신앙의 유산을 오늘날에도 이어나가고 있다. 즉, 대한성공회는 세계성공회와의 제도적 연대로 성공회로서의 정체성을 굳건히 지켜나갔던 것이다.
    결국, 기독교계의 이러한 투쟁은 단순한 신앙수호에 국한된 투쟁이 아니었다. 혹독한 겨울에 꽁꽁 얼어붙은 시냇물 아래로 봄을 알리는 물이 흐르듯이 교회는 겨울을 이겨냈으며 이것은 일제에 의해 수탈당하고 억압당하던 식민지 조선의 거대한 항일 투쟁의 한 지류였던 것이다.
    신사참배와 동방요배의 강요, 황국신민서사 제장, 창씨개명, 일본어상용등의 민족말살정책은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패망으로 막을 내기게 되지만 해방 직후, 흔적도 없이 사라졌던 교회의 제도가 빠르게 복구되고 회복되었던 것은 이러한 교회의 정신이 온전히 이어갔기 때문이다. 결국 일제의 종교정책은 그들의 바람과는 다르게 실패한 것이다.
    이제 해방을 맞이한 지도 60년이 되었다. 한국과 일본은 2002년 월드컵을 공동 유치해 성공적으로 개최하는 등, 가장 가깝고도 먼 나라로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날로 좁아지는 양국의 관계에 비해 일본이 보이고 있는 전쟁 등에 대한 반성은 아시아 주면나라에 많은 실망을 남기고 있다. 특히 근래 들어 일본 매스컴이 벌이고 있는 중국 난징 대학살에 대한 조작설 제기는 과연 일본이 과거 전쟁에 대한 진심어린 반성을 하고 있는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을 하게한다. 또한 해마다 제기되는 야스쿠니 신사참배 문제와 침략국으로서의 반성을 외면한 일본 각료들의 계속되는 망언들을 봤을 때, 그 실망은 더욱 깊어져 간다.
    많은 사람들은 과연 일본이 아시아 속에서 우리의 우방인가라는 질문을 하고 있다. 우방, 곧 이웃이란 옆에 살거나 일정한 관계를 갖는다고 이웃이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서로 사랑과 신뢰를 주고 받을 때 진정한 이웃이자 우방으로 거듭날 수 있는 것이다. 특히 일본의 과거사 문제는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 전후세대에게 많은 시사점을 주고 있다 과거는 과거로써 묻히는 것이 아니라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삶을 살아가는 나침반으로써의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기독교는 용서와 화해의 종교이다. 양국 간에 넘지 못할 벽이 있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나 1910년대 일본조합교회가 조선의 선교를 목적으로 일본 기독교를 전파하려 조선에 들어와서 활동한지 근 100년이 되어가는 시점에서 대한 성공회가 일본 성공회의 요청으로 선교사를 파송하는 것은 대단히 큰 의미가 있겠다. 신앙적 교류가 작은 줄기를 이루고, 그것이 나중에 큰 강물을 이룬다면 동북아에서의 평화와 안정에 기독교가 큰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두 민족 간의 진정한 화해를 이루는데 기독교가 교두보 역할을 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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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차 (Table of Contents)

    • 목차
    • Ⅰ. 서론 = 1
    • 1. 연구의 목적 = 1
    • 2. 연구의 방법과 범위 = 2
    • 3. 연구의 성과 = 3
    • 목차
    • Ⅰ. 서론 = 1
    • 1. 연구의 목적 = 1
    • 2. 연구의 방법과 범위 = 2
    • 3. 연구의 성과 = 3
    • Ⅱ. 일제 식민지 말기의 기독교 정책 = 4
    • 1. 일제의 기독교 정책의 변화와 한국 교회의 상황 = 5
    • 1) 일제의 기독교 정책의 변화 = 5
    • 2) 선교사들에 대한 정책의 변화 = 13
    • 3) 조선교회의 상황 = 16
    • 2. 신사참배 강요 = 18
    • 1) 시대적 배경 = 18
    • 2) 신사참배의 배경 = 19
    • 3) 신사참배의 강요 = 21
    • 3. 종교단체법 추진 = 24
    • 1) 종교단체법의 배경 = 24
    • 2) 종교단체법의 강요 = 25
    • Ⅲ. 한국교회의 상황과 대응 = 27
    • 1. 신사참배 문제에 대한 기독교계의 대응 = 27
    • 1) 기독교계 선교사들의 대응 = 27
    • (1) 미션학교의 반발과 순응 = 28
    • (2) 각국 선교부의 대응 = 34
    • 가) 북장로교 선교부의 대응 = 34
    • 나) 남장로교 및 호주 장로교 선교부의 대응 = 37
    • 다) 가톨릭 선교부의 대응 = 38
    • 라) 기타선교부의 입장 = 40
    • 2) 기독교계 교회의 대응 = 41
    • (1) 기독교 수용세력의 태도 = 41
    • (2) 기독교 저항세력의 대응 = 47
    • 2. 종교단체법과 교회의 수난 = 52
    • 1) 신사참배 이후 교회 변질의 과정 = 52
    • 2) 교회의 통합 과정 = 57
    • 3) 일본기독교 조선교단의 성립 = 59
    • 3. 일제하 대한성공회의 수난과 대응 = 61
    • 1) 대한 성공회 선교사들의 대응 및 수난 = 62
    • 2) 대한성공회 교회의 수난 = 69
    • Ⅳ. 요약 및 결론 = 74
    • <참고문헌> = 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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