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음 즉 이른바 ‘훈민정음’이 지닌 문자로서의 과학성과 독창성 그리고 정음을 지님으로 해서 풍부해지게 된 문화적 성취 등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용훼(容喙)를 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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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Korean
한국연구재단(NR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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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운로드정음 즉 이른바 ‘훈민정음’이 지닌 문자로서의 과학성과 독창성 그리고 정음을 지님으로 해서 풍부해지게 된 문화적 성취 등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용훼(容喙)를 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
정음 즉 이른바 ‘훈민정음’이 지닌 문자로서의 과학성과 독창성 그리고 정음을 지님으로 해서 풍부해지게 된 문화적 성취 등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용훼(容喙)를 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글에서는 세종대에 추진된 다른 언어·문화정책들과의 관련 속에서 정음의 창제가 지니는 정치적 의미를 고찰해보고자 한다.
지금까지 훈민정음에 관한 연구는 문자 체계와 관련된 언어적 연구를 제외하면, 주로 훈민정음을 창제하게 된 세종의 의도에 초점을 맞춰 그 애민·민본사상을 부각시킨 논의가 주를 이루어 왔다. 이에 훈민정음은 처음부터 백성을 지극히 생각하던 세종의 애민·위민 사상에서 만들어진 것이며, 그러한 정음이 창제됨으로 해서 가능해진 용비어천가나 율문의 언문화, 운서의 편찬 등이 결국에는 국가와 왕실의 권위를 선양하는 데 기여했다고 논의되어왔다. 그러나 세종의 정음 창제를 애민 내지 민본사상에 근거하여 대부분의 세종시대 연구자들은 세종의 정치사상과 훈민정음의 창제를 애민사상, 위민, 민본사상에 의거하여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천인합일적 사고에 근거하여 펼쳐지고 있는 유교의 통치론은 ‘민본’이 그 사상적 전제가 되어 있기 때문에 세종의 사상과 정책이 애민사상에 근거하여 이루어졌다고 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오히려 세종과 그의 시대에 관한 연구에서 중요한 것은 세종이 실행한 여러 과제가 어떠한 사상적 맥락에서 이루어졌는가 하는 점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설명하는 것만으로는 세종대에 정음을 비롯한 제 정책이 나오게 된 정치사상적 원인과 그 정치적 기능을 설명하기에는 미약한 감이 있다. 다른 한편에서 정음은 국가와 왕실의 권위 선양에 기여할 목적으로 나온 것이 아니며, 따라서 정음의 창제로 인한 제 효과들은 역사적 결과로서 나온 산물일 뿐 처음부터 그러한 가치를 창조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산출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는 반론도 제기되었다. 다시 말해 세종의 애민사상을 정음 창제의 배경으로 보는 시각은 당시의 정치적 조건을 배제한 이해방식 이근수, 「훈민정음 창제와 조선 왕조」『인문과학』(홍대 인문과학연구소, 1996), p.17. 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다시 건국 초기 제 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이러한 어문정책이 나오게 된 정치적 배경에 초점을 맞추게 된 연구가 나온 것은 이러한 한계를 보완하기 위한 작업이었다.
그러나 위에서 말한, 당시의 정치적 배경이 세종으로 하여금 어문 정책을 고안하지 않을 수 없게 하였다고 보는 연구도 정치적 배경에만 초점이 맞추어져 있기 때문에 이러한 작업을 이루어낸 세종이라는 군주의 개성이나 사상적 지향, 그 정책을 만들어낸 정치적 의도까지 총괄하여 파악하기는 어렵다. 세종대에 이루어진 언어·문화적 업적들을 보면, 우리는 이들이 정치적 고려나 필요에 압박당하여 나온 것이라고 보기만은 어려운, 정책들 사이의 일련의 상관성을 발견할 수가 있다. 이 때문에 정음의 창제는 단순한 어문정책의 실행이 아니라 통치자가 뚜렷한 목적 하에 나온 구상물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그것은 이들 정책이 태종대 이후 정치적으로 안정된 조건하에서 국가 경영자로서의 세종이 통치의 방략을 구상한 결과물로서 왕조의 정통성을 확립하고 왕권을 강화할 목적과도 연결되어 있었다고 추론하게 된다. 훈민정음은 그것이 실행되어야 다음 정책의 실행이 가능해졌다는 점에서 우선적이고 필수적으로 실행되어야 하는 사업이었다. 이렇듯 훈민정음을 비롯한 제 정책간에 상관성이 있다고 추론할 수 있는 근거는 세종 시대에 수행된 문화정책들을 보면 알 수 있다.
세종 16년 4월에는 『삼강행실도』가 편찬되었고, 25년 12월 30일에는 정음이 만들어졌으며, 26년 2월에는 『운회』를 번역하라는 명이 내려졌다. 그리고 27년 4월에는『용비어천가』 10권이 완성되었고 28년 9월에는 훈민정음에 관한 해례서가 반포되었으며 29년 9월에는『동국정운』이 완성되었다. 27년부터는 『홍무정운』번역 작업이 시작되고 있었고 31년에는 불경 언해본인 『석보상절』과『월인천강지곡』이 이루어졌다. 그런데 이들은 정음의 창제 및 활용과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연관되어 있어야만 나올 수 있는 작업들이라는 점이다. 이로써 본다면 정음의 창제가 단순히 세종의 애민사상에서 나온 것이라거나 아니면 운학(韻學)에 대한 세종의 관심에서 나왔다고 보는 것은 정음의 창제가 지니는 정치적 의미를 축소시킬 우려가 있다. 정음을 포함한 이들 사업들은 내용면에서 뿐만 아니라 인적 자원의 측면에서도 밀접히 연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종대에 이루어진 이들 정책은 각기 즉흥적이고 개별적으로 나온 것이라고 하기 보다는 치국을 위해 구상한 방략들을 단계적으로 실천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 글에서는 이러한 관점에서 치국을 위한 세종의 구상이 어떻게 이루어져 있으며 정음을 창제하게 된 동기와 그에 반대한 신하들의 논리, 그리고 정음을 창제함으로써 기대한 통치 효과 등은 어떠한지를 고찰해보고자 한다.
Ⅰ. 서론 Ⅱ. 세종의 통치구상 1. 유교국가 2. 외교적 사대와 국가 정체성 3. 왕조의 영속화 Ⅲ. 훈민정음의 창제 과정 1. 창제의 동기와 목적 2. 창제 반대자의 ...
Ⅰ. 서론
Ⅱ. 세종의 통치구상
1. 유교국가
2. 외교적 사대와 국가 정체성
3. 왕조의 영속화
Ⅲ. 훈민정음의 창제 과정
1. 창제의 동기와 목적
2. 창제 반대자의 논리
Ⅳ. 결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