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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암(鏡巖) 선사의 사대부와의 교유시(交遊詩) 고찰 -두류산회화기(頭流山會話記)를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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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경암집에 나타난 유불교류관의 특징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우선 저자인 경암의 생애를 살펴보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이를 통해서 경암의 당시 일반적인 유불교류 양상과 다른 점을 발견...

      경암집에 나타난 유불교류관의 특징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우선 저자인 경암의 생애를 살펴보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이를 통해서 경암의 당시 일반적인 유불교류 양상과 다른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즉 경암의 생애는 그의 제자인 팔관이 쓴 「행장」과 목만중과 유숙지의 <序> 및 이재기의 <跋>을 통해서도 그의 생애와 성격 등을 파악할 수 있다. 그 중 목만중의 <序>는 그가 얼마나 스승인 추파를 성실히 섬겼으며, 이를 통해 儒家에게 큰 감흥을 주었는지를 알 수 있다. 이는 당시 孝에 근거한 유불교류관과는 다른 양상이다.
      목만중의 <서>는 경암이 죽기 직전에 목만중에게 보낸 편지로부터 시작된다. 공교롭게도 목만중은 경암의 스승인 추파의 문집인 추파집의 <서>도 썼다. 그러므로 목만중은 추파와 경암을 모두 잘 알고 있었는데, 경암이 혼신의 힘을 다해 추파를 모신 것을 알고 있었다. 게다가 경암 자신이 열반에 들면, 자신이 그의 스승 추파에게 했던 것처럼 자신의 제자 팔관이 뛰어다닐 것을 짐작하고 있었다. 이러한 과정을 지속적으로 지켜본 목만중은 경암이 추파에 대한 경모에 찬탄한다. 이와 같이 경암과 추파의 돈독한 관계는 이재기의 <발문>에서도 잘 드러난다. “스님은 추파를 잘 배운 사람이니, 스님과 추파는 마음과 마음으로 서로 전한 것이다(師其善學秋波者也, 師與秋波心心相傳).”
      게다가 이는 유가의 최고 덕목임에도 당시 유자들이 하지 못하는 일을 경암이 실천하는 것에 대한 놀라움이기도 하다.
      이러한 형상은 당시 유불교류가 孝悌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것과는 다소 다른 면모이다. 영·정조 시절 특히 정조가 부모은중경을 중시하였고, 이에 승려들이 효행을 중심으로 유불교류가 이루어지던 것에 비하면, 경암의 이러한 행동은 독자적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목만중은 경암과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지만, 방외에서 계합할만하다고 인정하였다.
      즉 그들은 문자를 통해 서로를 만났을 뿐, 수십 년 동안 일면식도 없었던 것이다. 당시 많은 승려들이 유자와 직접 만나 교류하거나, 또는 심지어 학문을 전수받는 일도 다반사였음을 반추해본다면 경암과 목만중의 경우는 매우 특이하다고 할 수 있다. 진정 세간의 명리에서 벗어나 방외에서 서로 계합한 것이라 할만하다. 이는 당시 억불의 상황에서 유가에게 경도되어 의존적이 되어가던 유불교섭 상황에서 불가의 근본을 세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아래에서도 잘 드러난다.
      한편 <두류산회화기>에서는 경암의 유불교류가 직접적으로 드러나는데, 이에는 경암과 함양 군수, 옥천 군수 간의 수창시가 19수가 있기 때문이다. 이는 김종직의 <遊頭流錄>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하지만 김종직의 <유두류록>은 지리산의 곳곳의 불교 유적을 답사한 기록이 있지만, 전체적으로 유가 우위의 입장에서 서술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을 꼽자면 다음과 같다. “이것을 가지고 황괴(荒怪)한 말로 어리석은 백성을 속여서, 내세(來世)의 이익(利益)을 추구하는 자들로 하여금 서로 다투어 전포(錢布)를 보시(布施)하게 하고 있으니, 참으로 가증스러운 일이다. …중략… 가섭전(迦葉殿)의 북쪽 봉우리에는 두 바위가 우뚝 솟아 있는데, 이른바 좌고대(坐高臺)라는 것이다. 그 중 하나는 밑은 둥글게 서리었고 위는 뾰족한 데다 꼭대기에 방석(方石)이 얹혀서 그 넓이가 겨우 한 자[尺] 정도였는데, 중의 말에 의하면, 그 위에 올라가서 예불(禮佛)을 하는 자가 있으면 증과(證果)를 얻는다고 한다. 이 때 종자(從者)인 옥곤(玉崑)과 염정(廉丁)은 능란히 올라가 예배를 하므로, 내가 절에서 그들을 바라보고는 급히 사람을 보내서 꾸짖어 중지하게 하였다. 이 무리들은 매우 어리석어서 거의 숙맥(菽麥)도 구분하지 못하는데도 능히 스스로 이와 같이 목숨을 내거니, 부도(浮屠)가 백성을 잘 속일 수 있음을 여기에서 알 수 있겠다.”
      그러나 경암의 <두류산회화기>에서는 줄곧 경암은 자신이 승려의 신분임을 강조하며 불가적 계율을 지키고자 한다. 그리고 이러한 경암을 함양과 옥천 군수는 존중한다. 예를 들면 태수들이 가져온 기름진 음식에 경암은 松茶를 올리며 이것도 또한 진미라고 하며, 산승의 소탈하고 탈속적인 맛을 더한다. 즉 자신이 승려임을 분명히 제시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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