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내 존재로서 주체는 당대의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와 타협하고 절충하거나 아니면 거부하고 저항하면서 주체성 형성의 길을 걷게 마련인데, 이러한 과정에서 식민주의자는 싸르트르(J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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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내 존재로서 주체는 당대의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와 타협하고 절충하거나 아니면 거부하고 저항하면서 주체성 형성의 길을 걷게 마련인데, 이러한 과정에서 식민주의자는 싸르트르(Jean...
세계 내 존재로서 주체는 당대의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와 타협하고 절충하거나 아니면 거부하고 저항하면서 주체성 형성의 길을 걷게 마련인데, 이러한 과정에서 식민주의자는 싸르트르(Jean-Paul Sartre)적인 의미에서 허위의식에, 그리고 피식민주의자는 뒤 보아(Du Bois)적인 의미에서 이중의식에 사로잡히게 된다. 탈식민주의적 이론가들이 주장하듯이 식민주의적 이데올로기가 비유럽인들을 대상화시키는 대가로 유럽인들에게 주체의 우월한 위치를 선사하였다면, 그들의 주체성을 심문하는 타자가 부재하는 가운데 유럽인들은 주체의 자기동일성이라는 허위의식에 빠지게 된다. 유럽인 자신이 정작 식민주의적 이데올로기의 수동적 구성물이면서도 자신이 의식과 사유의 주인인 듯이 착각하는 것이다. 이때 비유럽인 원주민들은 자신을 대상이나 타자로서 경험을 하면서도 또한 자기의 주체성(혹은 부정된 주체성)을 의식할 수밖에 없는데, 이것은 주체와 타자로 분열된 의식, 즉 이중의식(both A and B)의 형태를 띄게 된다. 허위의식이 무반성적으로 자신의 권력을 향유하는 지배층의 배타적 특권에 뿌리를 두고 있다면, 이중의식은 억압받는 피지배층의 자의식이라할 수가 있다. 때문에 이중의식의 소유자는 당시의 지배적 이데올로기의 지배를 받으면서도 동시에 그러한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 그것의 허구성을 의식할 수밖에 없는 타자인 것이다.
토니 모리슨의 <타르베이비>에서 자본가인 발레리언(Valerian Street)은 카리브해의 섬 하나를 매입해서 자신의 왕국을 건설하고 흑인 하인들을 거느리며 정원 가꾸기와 음악을 벗삼아 여생을 향유하는 특권적 주체인데, 그의 허위의식은 경제적 사회적 이데올로기적 후광을 등에 업고 있다는 점에서 일견 객관적인 듯이 보인다.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을 방불케 하는 생활 세계의 상황 자체가 그로 하여금 타자를 대상화하면서 일방적으로 바라보도록 허용하지만, 자신에게는 타자에 의해 보여지지 않는 패놉티콘적 특권을 부여하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발레리언이 전지전능한 주체인 듯이 보이지만--섬 생활의 어느 작은 하나도 그의 통제에서 벗어나는 일이 없다--실상 아무 것도 보지를 못한다는 사실이다. 진정한 의미에서 타자가 부재한 가운데 그는 다만 나르시즘적으로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을 볼 따름이다. 이 평온했던 섬에 낯선 흑인 썬이 등장하면서, 이 시각의 맹점이 결국은 발레리언 자신에 대한, 아내와 아들에 대한 치명적인 무지라는 사실이 밝혀진다. 스스로를 타자로서 의식하지 못하면, 혹은 스스로가 주체이지만 동시에 객체라는 자의식이 결여된 주체는 자기 기만에 빠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여기서 발레리언의 허위의식과 흑인 하인의 이중의식이 가학피학적인 공의존(codependence)의 악순환의 관계에 접어들 수 있다는 사실이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 시드니(Sidney)나 제이드(Jade)가 그러했듯이 자신의 주체성을 철저하게 은폐시킴으로써 흑인 하인은 발레리언의 허위의식을 더욱 조장하는 것이다. 흑인 하인은 주인의 허위의식을 의식하지만 그러한 자의식이 없는 듯이 행동을 함으로써 이데올로기적 지배와 결속에 더욱 기여할 수 있다. 이때 이중의식의 소유자는 주체/타자로 분열된 주체이면서 동시에 행동/의식으로 분열된 주체가 된다. 이 점에서 허위의식과 마찬가지로 이중의식도 자기기만이라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을 것이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Toni Morrison's Tar Baby is a story of consciousness experiencing itself either inauthentically as Sartrian bad faith or authentically as Du Boisian double consciousness. Human consciousness is radically divided from itself and experiences itself as t...
Toni Morrison's Tar Baby is a story of consciousness experiencing itself either inauthentically as Sartrian bad faith or authentically as Du Boisian double consciousness. Human consciousness is radically divided from itself and experiences itself as the other, since it is consciousness of something other than itself. Or to put it another way, human consciousness is necessarily embodied, never being pure transcendental one, and is thus seen by the other as the body. We see others because we are seen by them, and vice versa. Human mode of being is double, both body and consciousness. The paper argues that Du Bosian double consciousness names this ontological double structure of human being. But as in the case of bad faith embodied through Valerian in Tar Baby, we are tempted to evade this human burden of doubleness, by identifying ourselves exclusively either with pure consciousness or pure body. Politically speaking, human beings are polarized into master and slave. If Valerian represents bad faith, Sydney and Ondine are those who live the life of double consciousness. They have to hide their consciousness (or humanity) under the guise of domestic bodily function. They pretend not seeing Valerian, while voluntarily exposing themselves to his pure seeing eyes. And there develops a reversal in their dialectical relationship. Valerian thinks he knows everything but does not know anything at all, since he as pure consciousness does not belong to the enbodied world, the source of human knowledge. He is too transcendental to know human reality. On the other hand, Sydney's and Ondine's double consciousness allows them to be aware of his transcendental blindness and to manipulate such a knowledge in order to exert their humanity. Thus double consciousness becomes politically revolutiona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