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연구는 고종대에 47개만 남겨졌던 서원과 사우가 근현대 시기에 무슨 이유로, 어떠한 과정을 거쳐 복설되고 신설되었으며, 그 위치와 역할은 무엇이었는가를 추적하는데 목적이 있다.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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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Korean
한국연구재단(NR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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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고종대에 47개만 남겨졌던 서원과 사우가 근현대 시기에 무슨 이유로, 어떠한 과정을 거쳐 복설되고 신설되었으며, 그 위치와 역할은 무엇이었는가를 추적하는데 목적이 있다. 서원 본래의 뜻은 先賢을 배향하고 그 분들의 학문과 덕행을 흠모하며 교육을 담당하는 학교 역할을 하는 곳이었다. 관학인 향교를 대신하여 지방의 사학으로 크게 번성하였던 서원은 대개 사적으로 관리․운영되었다. 서원은 1543년(중종 38) 백운동서원이 설립된 이후 계속 증가하여 조선후기에는 1,500여 개를 헤아렸다. 그러나 조선후기에 이르러 점차 부정적인 측면이 노출되면서 숙종대를 고비로 하여 국가의 설립억제책이 적극 시도되어 증가율이 현저히 감소하였고 이후 예외적으로 서워의 설립이 허가되기도 하였으나 지속적으로 서원증설을 억제하였으며 고종 2년의 만동표 철훼, 고종 5년의 미사액서원의 철훼를 이어 고종 8년 3월에는 전국에 47개(서원 27, 祠宇 20)만 남겨 놓고 사액서원도 모두 철폐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철폐의 빌미는 서원의 사무를 本孫들이 주관하여 백성들에게 피해를 끼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후 유생들은 서원 복설을 계속 요청하였지만 대원군은 완강히 반대하였고, 고종도 서원 복설 요청에 처음부터 단호한 태도를 취하였다. 따라서 유림들은 서원을 복설하는 대신 壇을 쌓고 선현에의 제례를 이어 가고자 하였다. 단 외에도 서당․정자․영당 등을 세웠고, 그것이 형편이 안 된다면 서원터에 遺墟碑를 세우는 것으로 대신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문헌자료나 현지방문조사를 해보면, 고종 대에 훼철된 서원들의 상당수가 일제식민지시기에 그리고 해방 이후에도 복설되었을 뿐 아니라 새로운 서원들도 많이 설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일제는 관학을 규제하고 통제하면서도 사학인 서원에 대하여는 어떤 조치를 취한 사실을 발견할 수 없다. 그 이유는 아마도 그들의 식민통치에 방해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3․1운동 이후에는 한민족분열정책을 취하였던 그들의 통치정책에 도움이 된다고 여긴 때문일 것이다. 그 지역의 교육과 학문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는 서원은 식자들이 모이는 공간이었고 그들의 이익을 이끌어내기 위한 案들이 만들어지는 장소였다. 그러나 일제하 서원은 이러한 교육의 기능보다는 제사의 기능으로 경도되었다. 따라서 서원은 한국인 식자층과 일반민들을 분리하는 기능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한편 한국인 유학자들 측면에서 보면, 고종대의 철훼로 손상당한 그들의 이익들을 다시 생성해 내고자 하는 이유에서 서원 복설과 서원 신설이 추진되었다고 여겨진다. 서원은 지역사회에서 양반으로서 그리고 유학자로서 누리는 혜택들을 보장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한편 배향인물 중에는 일제의 통치 이데올로기와 배치되는 인물들도 적지 않았고, 또한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였다고는 하지만, 어떻든 일제식민통치하에서 한국의 정서와 문화를 보존, 계승하는 측면도 있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