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2차년도 연구 주제 : ① 豊臣정권의 특질과 무가지배원리 ② 豊臣정권과 儀禮-聚樂第 行幸을 중심으로- 2. 豊臣정권과 天皇 儀禮-聚樂第 行幸을 중심으로- : 히데요시와 천황가의 의례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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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Korean
豊臣정권 ; 聚樂第 ; Toyotomi Government ; Shinkoku-shiso ; Ideas and Rituals ; Tenno ; Sovereignty ; Toyotomi Hideyoshi ; ‘功名’
한국연구재단(NR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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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차년도 연구 주제 : ① 豊臣정권의 특질과 무가지배원리 ② 豊臣정권과 儀禮-聚樂第 行幸을 중심으로-
2. 豊臣정권과 天皇 儀禮-聚樂第 行幸을 중심으로- : 히데요시와 천황가의 의례관계는 관백 취임을 계기로 크게 변화하였다. 1588년 後陽成 천황의 聚樂第 방문은 이른바 豊臣秀吉과 천황의 관계가 돈독해졌음을 상징하는 사건이다. 기존 연구에서는 後陽成 천황의 聚樂第 방문을 秀吉의 천황권위 이용의 전형적인 사례로 지적되어 왔다. 朝尾直弘은 특히 大名통제에 주목하고 천황권위를 배경으로 秀吉에게 복종을 서약시킨 것으로 위치지운다. (同, 『天下統一』(大系日本の歷史)8, 小學館, 1988). 또 秀吉의 행렬에 주목한 연구도 있다. 中川和明는 행렬의 특징을 분석하여 "풍신정권이 설정한 취락제행행의 행렬 구성은 전통적인 국가질서를 중시한 것이며, 천황 및 조정에 대한 존중 포즈를 보인 것"으로 해석한다.(同, 「聚樂第行幸の行列について」, (弘前大學『國史硏究』90, 1991) 최근 池享도 秀吉의 행렬에 주목하면서 이를 秀吉이 전통에 의거하는 형태를 취하면서 새로운 지배의 정당성을 표현한 것으로 보았다. 특히 池享은 수길의 독자성을 강조하는 입장이다. 즉 義滿·義敎의 경우 독자적인 무가 집단을 구성하고 있었지만 그 규모는 적었고 더욱이 천황의 바로 앞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천황의 중심으로 하는 행렬에 포취되었다. 반면 秀吉의 경우는 행렬의 태반이 관백의 행렬로 그 위치가 갖는 독자적인 효과가 있었다. "천황과 수길이란 두 중심을 가진 이극적 구조를 갖고 있었"고 "‘전통’의 답습은 형식에 불과할 뿐이며 천황을 폄훼하고 秀吉이 사실상 국왕이란 입장을 과시하는 수단"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關白 취임 직후에 수길이 "사실상 국왕이란 입장을 과시"한 것으로 보는 것에는 찬성할 수 없다. 이 시기는 황윤설을 바탕으로 천황 권력과 일체화를 도모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실제 행렬의 진행과 관련하여 秀吉은 전통적으로 關白이 행하고 있던 천황의 옷자락(裾)을 잡는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 秀吉이 천황 권위를 벗어나 독자성을 확보하려 한 것은 ‘태양의 아들(日輪의 子)’론의 등장이후로 보아야 할 것이다.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豊臣政権と天皇の関係について、今までは‘依存論’と‘利用論’が対立しきた。このような先行研究の問題点を解決するため、本稿では豊臣政権の時期別の変化...
豊臣政権と天皇の関係について、今までは‘依存論’と‘利用論’が対立しきた。このような先行研究の問題点を解決するため、本稿では豊臣政権の時期別の変化の様子に注目しながら考察を進めた。1580年代の初め豊臣秀吉が織田信長の後継者となり他の大名らと角逐していた時期と、1590年北条氏や伊達氏を最後に日本を統一した後の政権の性格は大きく変わるが、今まではその点が考慮されてこなかった。本稿では今までの研究とは異なり、‘依存か、利用か’は本質的な問題ではないという立場に立って、秀吉が天皇の権威を一貫して‘依存或は利用’したわけではなく各時期によって天皇観が変わっていたと把握した。
1580年代の初め、秀吉が信長の後継者の座を争っていた時期にはもっぱら‘武篇’、つまり‘武威’だけに依存していた。しかし徳川家康のようなライバルを武力だけで服属させるのが困難になると、徐々に‘叡慮’(天皇)を利用したり、時には依存する方向へと政策を転換していった。この時期秀吉は自分が天皇の落胤であったという‘後胤説’を広く流布させ天皇権力との一体化を図り、これを通じて政権の正当性を確保しようとした。しかし1590年北条氏を降伏させ、徳川家康を関東八州へと移転させてからは豊臣政権は確固たる支配体制を備えることとなり、自然と天皇の権威を利用したり依存したりする必要が減少した。もちろん家康のような潜在的危険が存在する限りは内部の大名の統制のためにも天皇の権威が依然として必要ではあった。よって秀吉は権力末期まで天皇の権威を否定したことは一度もなかったが、1580年代ほど切実ではなかったといえよう。特に秀吉が天皇の権威が通用しない東北アジアへと‘武威’を拡張させようとした時はこれを正当化するべく新しい論理が必要となった。これがまさに‘日輪の子’=秀吉という主張であり、秀吉が武家=神格化へと進む第一歩となった。ここに天皇の権威は更に相対化され、これは対外的には‘良将の威(武威)’として表明されたのである。天皇の権威が内部の大名統制の役割などに制限されるにつれ、伝統的な‘国制的’秩序に基づいた国家統治権も弱まっていった。すると‘置目’や‘御掟’のような法の支配が強化され、豊臣政権は国家権力としてより一層客観化された支配を図るようになった。しかしこれは八幡神=秀吉という恣意的な法の執行と解釈を前提としており、この点から豊臣政権の支配は近世初頭の人的支配から制度的支配へと転換する日本中・近世移行期の過渡期的な様子を見せていると評価出来よ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