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의 정치이념과 그 실천: 수령구임책을 중심으로 - 배병삼 조선의 세종(世宗)에게 정치란 시인발정(施仁發政)이라는 개념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시인발정’이란 “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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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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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의 정치이념과 그 실천: 수령구임책을 중심으로 - 배병삼
조선의 세종(世宗)에게 정치란 시인발정(施仁發政)이라는 개념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시인발정’이란 “유교적 이념(仁)에 기초하여 제도(政)를 형성하고,
이를 통해 백성들에게 이익이 돌아가도록 만드는 것”이다.
‘시인발정’은 원래 맹자의 개념인 발정시인(發政施仁)에서 근거한다. 세종의 정치
철학은 시종일관 발정(發政)과 시인(施仁)이라는 두 개념의 새끼 꼬기, 또는 융합
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 시인(施仁)은 그의 정치이념을, 발정(發政)은 그 이념의
실천과정을 지칭하는 것으로 나눠 볼 수 있다. 그는 무엇보다 이념의 실천과정을
‘제도의 형성’으로 인식하였으니 그가 제작한 각종 예악과 제도들을 확인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시인발정을 현실 속에 실천하는 데 있어서는 이른바 “백성들과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는”(近民之職. 태조실록) 수령들의 역할이 중요하게 된다. 수령은
군주와 백성들 사이에서 군주의 정치이념을 베풀면서 동시에 백성들의 욕망을 전
달하는 소통의 매개체, 이를테면 관절(關節)과 같은 기능을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세종이 제시한 ‘수령구임책’과 그 경과를 통해 시인발정의 한 예를 살펴
보고자 한다.
세종은 지방수령의 장악과 통제에 깊이 주의하였다. 그는 수령은 군주와 한
몸으로서 공공의식을 가지고 투신(投身)해야 하는 존재임을 놓치지 않는다. 그는
수령 개개인의 인정(人情)과 사정(事情)이 수령직의 공공성을 훼손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을 고수한다. 수령의 기강확립과 지방민 대책으로 그가 채택한 것은 수령이 임소에 오래 머무르는 구임책(久任策)인데 구체적으로 ‘6년 임기제’를 뜻하는 수령육기제(守令六期制)의 실시였다.
세종이 육기제를 시행하게 된 까닭은 다음과 같다.
(1) 3년제로 하면 수령의 영송(迎送)의 번다함으로 민폐가 많다.
(2) 통치 영속성을 확보하여야 지역민정을 안정시킬 수 있다.
(3) 수령의 책임성을 제고하여야 한다.
(4) 수령의 전문성을 확보할 수 있다.
(5) 경전적 사례가 있는 9년제와 현행 3년제를 절충하여, 그 중간을 잡았다.
신하들은 이 제도에 대해 다양한 측면에서 비판한다. 예컨대 (1) 무능한 관리가
오래 있게 되면 도리어 백성에게 해악이 더욱 커질 뿐이며, (2)유능한 관리라도
오래 머물면 나태해져서 국가에 손실이 되는 결과를 낳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세종은 신하들의 육기제 비판을 ‘의리 대 이익’(* 맹자적 義利論)의 대결구도로 압
축하여 이해한다. 즉 신하들의 자기편리 때문에 수령육기제의 많은 장점을 무시하
고, 이를 비판하고 있다는 것이다.
세종22년에 있은 신하 ‘고약해’와의 일전을 통해 수령육기제 문제는 의리(公共)
대 이기(私益)의 문제로 전환되고 결국 세종은 승리한다. 그 결과 수령육기제는
정착하게 된다. 수령육기제의 정착과정에서 나타난 특징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이 제도는 세종의 독단적인 결정에 의해 추진된 것이다.
둘째, 이런 정책의 독단적 결정과 추진, 그리고 정착은 그의 학문연구, 즉 ‘경학과
역사’(經史)에 대한 연구와 심득(心得)에서 비롯된 것이다.
셋째, 신하들이 제기한 수령육기제에 대한 비판은 (1) 선왕지제(先王之制)라는 이
름의 전통과 관습이 가진 정당성(*막스 베버)을 근거로 비판한다.(*이 때의 전통은 곧 수령삼기제이다.) (2) 새 정책이 당시의 공론(公論)에 위배된다는 것 그리고 (3) 실제 경험을 토대로 육기제가 시의성(時宜性)에 부합하지 못한다.
이에 대해 세종은 우선 ‘전통은 시의에 맞춰 개혁되어야 한’다는 시중론(時中論)
을 통해 논박하고, 둘째 삼기제가 갖는 기술적 문제점, 예컨대 영송(迎送)의 번다
함과 같은 것들을 해소하기 위한 개선책이라는 점을 들어 설득하고자 한다. 셋째
자신이 갖춘 경사(經史)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토대로 전통의 의의를 해체한다.
넷째 공론이라는 말의 뿌리에 감춰진 욕망을 드러내어 실은 그것이 사사로운 이기심의 집합임을 폭로함으로써 공론의 의의를 해체한다.
세종이 보는 수령관을 요약하자면 첫째 수령은 국가정책을 수행하는 수족(手足)과 같은 도구이다. 둘째, 현실적으로 그들은 사사로운 이익을 공익에 앞세우는 경향이 있다. 셋째 이들을 장악하기 위해서는 통치자가 국가 이념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즉 경사(經史)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갖추어야 한다. 넷째,
수령들이 직무를 안정적으로 집행하도록 구임제도가 필요하다. 그러나 다섯째, 수
령들이 공적 활동 속에 사익을 부식하지 못하도록 감찰제도를 강화해야 한다.
세종의 공론정치와 국가개혁: 稅制개혁과정을 중심으로- 박현모
세종의 중요한 치적의 하나로 거론되는 세제개혁은 그 ‘내용’ 못지 않게 개혁안을 입법·시행하는 ‘과정’에 있어서 독특했다. 그 개혁은 한마디로, 중앙에서 파견된 조사관이 풍흉의 정도를 보고 세액을 매기는 ‘손실답험법’ 대신, 토지의 비옥도와 지역별 수확량에 따라 국가에서 정한 일정액을 내도록 하는 ‘공법’으로의 전환을 말한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공법을 제정·시행하는 ‘과정’인데, 놀랍게도 세종은 무려 ‘17년간의 긴 토론’을 거치면서 반대자들까지도 그 제도의 필요성을 인정한 상태에서 시행에 들어갔다. 당시의 용어로 “숙의(熟議)”의 정책결정 내지 “공론(公論)”을 중시하는 정치로 표현된 그의 정치운영방식을 고찰하여, 체제안정기[守成期]에 요청되는 국가개혁의 조건을 살폈다. 즉 세종의 세제개혁이 성공할 수 있었던 요인으로는 ① 새로운 제도의 비전에 대한 분명하면서도 구체적인 제시 ② 개혁 대상자들의 ‘말을 충분히 듣는 과정’ ③ 개혁의 목표이자 조건으로서 민생(民生)과 민의(民意)를 우선하는 태도 등을 들 수 있다.
세종의 공세적 안보정책: 대마도 정벌을 중심으로- 이지경
본 연구는 세종의 국가경영 이라는 관점에서 대외관계 및 대마도 정벌의 국방정책을 연구하고자 한다. 특히 본 연구는 세종의 대외관계 및 국방정책이 “ 어떠한 문제의식 하에서 대마도를 정벌하였고, 어떠한 목적 하에 대마도 정벌을 추진했으며 ” , 명나라의 사대교린 정책을 위해 “ 어떤 외교정책의 방법을 사용하였고 ” , “ 그러한 정책이 왜 세종조에 필요했으며, 그것은 과연 성공적이라고 평가할 수 있는가 ” 라는 문제에 논의의 초점을 모으게 될 것이다. 물론 이러한 인식 관심은 “ 세종의 국방정책이 현대의 한국정치에 어떠한 시사점을 줄 수 있는가? ” 라는 단일의 문제에 답하기 위해 구체적으로
파고들어야 할 소재들이다. 그러나 본 연구에서 시도하고자 하는 고전분석의 연구는 정책형성과정 중심의 논의에서 성과위주로 전개되어온 세종연구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선결조건이자 반성적 성찰의 토대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구체적인 전략의 차원에서, 본 연구자는 세종의 성과 위주 단편적 선행연구에서 미흡한 부분을 보완하기 위해서 세종의 대외관계와 국방정책의 대마도 정벌의 원인, 조정에서 논의 및 정책결정과정, 정벌 후 달라진 현황, 왜구의 주체(일본인 주장=일본인+고려인+조선인의 연합),항왜(일본인으로 조선에 투항 사람) 부분 중심의 종합적 연구를 하고자 한다. 따라서 본 연구자는 1392년 조선조 건국 후 세종조에 이르기까지 대외관계 및 국방정책에서 전개된 기본적 문제의식에 천착하여 다음과 같은 절차에 따라 논의하려고 한다.
지금까지 정치학에서 조선 초기 세종시대의 대일관계에 초점을 맞춘 논의는 거의 전무한 상태이며, 고전문헌 분석을 통하여 세종의 대외관계 및 국방정책을 연구하고자 한다. 고전문헌 분석을 통해 조선전기 대마도 인식의 논의 과정과 정책결정과정을 구체적으로 분석한 연구도 찾아보기 힘들며, 한국전쟁사상사와 관련된 연구내용도 거의 밝혀지지 않았다. 따라서 본 연구자는 대마도 정벌(1419년)의 수군전쟁사에서 나타난 왜구발생의 원인, 과정, 정벌이후 왜구활동 변화를 중심으로 연구를 진행시키고자 한다. 이 논의과정에서 세종의 대마도 정벌이후 대외관계에서 다원적 교섭, 일본의 외교사절 증가, 왜구의 평화적 내왕자로서의 변화, 통교감소 등 조선의
평화의 정착 내용이 함께 구명될 것이다. 또한 왜구의 침입 시 해전 승리의 원인 중 하나인 교린정책에서 성공한 일본인 항거왜인(도주, 귀순 또는 귀화, 평화의 내왕자) 부분과 역할도 새롭게 연구 될 것으로 본다. 왜구의 침입은 그 당시 국가경영자의 국내 정치불안의 부정적 요인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보아 왜구 침입은 조선의 부국강병의 계기를 제공해 주기도 하였으며, 무기제작 및 과학기술 발달의 촉진은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본 논문은 세종의 대마도 정벌 전후의 대외관계와 국방정책 연구의 한 부분인 조선 초기 세종조의 첫째, 대마도 정벌은 조선과 대마도에 국한 된 문제가 아니라 조선, 명,일본의 왜구정책에 대한 삼국의 대외관계와 깊은 관련성을 갖고 있다. 위로는 명나라의 대왜정벌론, 대북정론에 대한 조선의 대마도 정벌, 일본의 안보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 대마도 정벌의 원인을 조선의 인식과 일본의 왜구 침입원인을 비교분석하여 그 차이점을 발견하고 둘째, 정벌과정의 조정의 논의 과정과 정치, 군사적 대응 조치와 조선군과 수군조직 및 전투력을 평가 해보고, 셋째, 정벌 후 대마도 지배권을 놓고 조선과 일본의 무엇이며 왜 대마도가 조선의 영토에 편입되지 못 하였는가에 관한 문제점을 비판하고 한반도 영토분쟁이 있을 때 마다 일원적 처리방법 보다 다차원의 탄력성 있는 정책 결정권자들이 올바른 판단과 현명한 조치로 국가이익 증대와 국가
안보의 능력을 길러 보자는 국방정책의 의의를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세종의 즉위년에 태종과 함께한 국방정책 및 대외관계는 당시 명나라, 조선, 일본의 국제질서의 현실을 파악하고, 왜구문제에 관한 대외관계에서 명의 대왜정벌론을 차단하였다. 명과의 사대관계를 유지하면서 조선의 수군력 증가와 왜구 침입이 잦은 소재지별 집중 수군 군함의 해안배치 현황은 해양력(Sea Power)과 해양지배(制海權)의 전략의 중요성을 인식한 국가경영자였다. 또한 세종시대에 거제를 출발하여 아소만으로 6월,7월 횡단하는 대한해협 항해는 조류가 빠르므로 횡단의 많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대마도 정벌의 성공에 대한 결과는 높이 평가 되어야 할 것이다. 즉, “바다의 자연적 환경을 아는 군사적 지식”, “바다의 수군력을 경영하는 능력”, “바다의 지배권을 통제 하는 힘”, “대마도 정벌은 방어적 전쟁이 아닌 공격적 전쟁능력” 이 세종에게 있었다. 인류역사를 통해서 볼 때 바다를 통제하고 이용할 줄 아는 나라와 그 민족은 번영의 길을 밟아 왔으며 반면에 바다를 거부하고 이용할 줄 모르는 나라와 그 민족은 빈곤의 길에서 벗어나지 못 하였다. 본 논문에서 세종의 대외관계 및 국방정책에서 대마도 정벌의 대외관계를 중심으로 밝히지 못한 명나라, 조선, 일본 각국의 해전상에 투입된 수군 전투력의 현황의 비교분석과 대마정벌 전쟁경로에 투입된 실제 군사력과 일본의 군사력 비교와 구체적 전쟁과정, 세종의 명나라에 대한 사대관계인가 식민지배인가의 성격문제, 대마도 정벌의 태종과 세종의 병권의 범위 등은 자료 한계와 짧은 연구기간으로 인해 더 깊은 성찰과 비판은 밝히지 못하였다.
제1부 기조강연 제1강연 : 정치사상과 국가경영 - 구범모 제2부 연구발표 세종의 정치이념과 그 실천: 수령구임책을 중심으로 - 배병삼 세종의 공론정치와 국...
제1부 기조강연
제1강연 : 정치사상과 국가경영 - 구범모
제2부 연구발표
세종의 정치이념과 그 실천: 수령구임책을 중심으로 - 배병삼
세종의 공론정치와 국가개혁: 稅制개혁과정을 중심으로- 박현모
세종의 공세적 안보정책: 대마도 정벌을 중심으로- 이지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