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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朝鮮前期 豆滿江流域에 나타나는 두 개의 ‘朝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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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kakao i 다국어 번역

    조선 건국 후 태조 이성계는 두만강유역까지 조선의 행정체제에 편입하려 노력하였다. 즉 두만강 이남 조선의 동북면에 거주하고 있는 여진족에 대한 동화정책을 실시하여 조선의 편호가 되도록 하였다. 그리고 건국 직후부터 두만강유역까지 성보와 군현의 명칭을 정하였다. 또한 이러한 노력의 결과 압록강과 두만강을 조선의 경계로 하였다는 인식을 하게 되었다. 이 때의 기록에는 두만강유역까지 다 조선의 '版籍'에 들어왔다고 했는데, 판적은 바로 토지와 호적을 기록한 대장을 뜻하며, 토지와 호적이 국가에 들어왔다는 것은 조선의 판도, 즉 관할지역에 속하였다는 의미이다. 태종대가 되어서는 명나라와 11처 여진 추장의 귀속 문제를 가지고 외교전이 벌어졌는데, 조선은 이들 11처 여진인들이 조선에 속한다고 주장하였다. 11처 지역을 분석하여 보면, 9개 지역은 두만강 이남이지만, 3개 지역은 두만강 바깥 지역이다. 지명만을 두고 살펴보면 조선의 영역인식은 두만강을 넘어 더욱 확대되었다. 그러나 태종이 조선의 蕃籬라 여겼던 여진 추장 동맹가첩목아의 명나라 귀순은 조선과 여진인과의 관계를 약화시켰고, 조선의 여진 정벌과 여진의 보복 침입을 불러일으켰다. 이에 따라 조선은 경원진을 폐지하면서 오히려 관할지역이 축소되기에 이르렀다. 결국 조선의 관할은 두만강유역까지 완전하게 미치지 못하였고, 두만강유역까지 조선의 관할지역이 된 것은 세종대에 6鎭이 설치되면서부터였다.
    따라서 두만강유역에 대한 6진 설치 이전, 두만강을 경계로 하였다는 인식은 엄밀히 말하면 두만강유역을 완벽한 관할지역으로서의 조선이 아닌, 영역으로서의 조선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인식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은 두만강유역 內外가 고려시대 尹瓘의 여진정벌과 9城 축조 및 李成桂와 그 先代의 출생지, 즉 원래 祖宗의 옛 땅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던 것에 기인하였다. 또한 두만강유역에 거주하던 여진인들이 고려말부터 이성계에게 從軍한 이래, 조선에 복속하고 있다고 생각한 것도 이러한 인식 형성에 기여하였다.
    이러한 인식의 바탕에서 明의 두만강유역 여진에 대한 招撫를 외교적 노력을 통해 막아내고, 두만강유역의 여진세력이 혼란해지자 6진을 설치하여 두만강까지 조선의 관할을 확대해 나갔다. 그리고 6진을 방어하기 위해 두만강 내외에 여진 ‘藩籬’를 구축하면서 두만강 밖까지 조선의 영역이라는 인식을 고착화하였다. 세종의 번리 인식은 조선 건국 전후의 여진관계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은 분명하지만 6진을 설치하면서 세종의 번리 인식은 보다 더 구체화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번리 인식은 두만강 바깥 지역까지 확대되었다. 비록 두만강 밖에 거주하는 여진 ‘번리’ 지역까지 조선의 행정 관원을 파견하지는 않았지만, 여진 ‘번리’들을 조선의 ‘編氓’이라 생각하여 조선의 法令이 미치는 지역으로 인식하던 것이다. 두만강 내외 지역의 조선의 번리라고 여기는 인식은 문종, 단종, 세조대까지 이어졌으며, 세조대에는 두만강 밖에 거주하는 여진 추장을 조선의 法令에 따라 처벌하면서 明과의 외교적 문제가 발생하기도 하였다. 즉 여진 추장 낭발아한은 두만강 바깥지역에 거주하면서 명나라와 조선 양쪽으로부터 관직을 받은 사람이었는데, 조선은 낭발아한을 조선의 번리라고 생각하였다. 조선에서 낭발아한의 반역죄를 물어 처벌하여 죽이자 명나라에서는 이것을 외교적 문제로 삼았던 것이다. 명나라와 조선의 사신 및 외교문서를 분석해 보면 명에서는 隣境, 즉 경계에 인접해 있는 사람을 조선에서 마음대로 죽였다고 주장하였지만, 조선은 낭발아한이 대대로 조선의 지면, 즉 영토 안에 거주한 사람이기 때문에 조선의 편맹이고 조선의 백성이라 주장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점을 볼때 조선에서는 두만강이 조선과 여진을 나누는 경계가 되어 두만강 남안은 조선의 '관할지역'이 되지만, 두만강 북안의 여진 '번리'지역까지 조선의 왕명과 법령이 미치기 때문에 조선의 지면이며, 조선의 '영역지역'이라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조선전기에는 두만강유역까지 조선의 실질적인 행정체제에 편입시킨 관할지역과 조선의 영향력 아래 있다고 인식되어지는 영역지역이 두만강을 넘어 미치면서 서로 다른 양상으로 존재하였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의 邊將과 首領이 파견되어 행정체제로 편입된 관할로서의 조선과 비록 관원이 파견되지는 않았지만 조선의 영토이기 때문에 조선의 法令과 王命이 미치는 영역으로서의 조선이 각각 중첩되어 보여지는 것이다. 이에 본 연구에서는 ‘영역으로서의 조선’과 ‘관할로서의 조선’의 모습을 각각 확인해 볼 수 있는 사례들을 찾아보고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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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건국 후 태조 이성계는 두만강유역까지 조선의 행정체제에 편입하려 노력하였다. 즉 두만강 이남 조선의 동북면에 거주하고 있는 여진족에 대한 동화정책을 실시하여 조선의 편호가 ...

    조선 건국 후 태조 이성계는 두만강유역까지 조선의 행정체제에 편입하려 노력하였다. 즉 두만강 이남 조선의 동북면에 거주하고 있는 여진족에 대한 동화정책을 실시하여 조선의 편호가 되도록 하였다. 그리고 건국 직후부터 두만강유역까지 성보와 군현의 명칭을 정하였다. 또한 이러한 노력의 결과 압록강과 두만강을 조선의 경계로 하였다는 인식을 하게 되었다. 이 때의 기록에는 두만강유역까지 다 조선의 '版籍'에 들어왔다고 했는데, 판적은 바로 토지와 호적을 기록한 대장을 뜻하며, 토지와 호적이 국가에 들어왔다는 것은 조선의 판도, 즉 관할지역에 속하였다는 의미이다. 태종대가 되어서는 명나라와 11처 여진 추장의 귀속 문제를 가지고 외교전이 벌어졌는데, 조선은 이들 11처 여진인들이 조선에 속한다고 주장하였다. 11처 지역을 분석하여 보면, 9개 지역은 두만강 이남이지만, 3개 지역은 두만강 바깥 지역이다. 지명만을 두고 살펴보면 조선의 영역인식은 두만강을 넘어 더욱 확대되었다. 그러나 태종이 조선의 蕃籬라 여겼던 여진 추장 동맹가첩목아의 명나라 귀순은 조선과 여진인과의 관계를 약화시켰고, 조선의 여진 정벌과 여진의 보복 침입을 불러일으켰다. 이에 따라 조선은 경원진을 폐지하면서 오히려 관할지역이 축소되기에 이르렀다. 결국 조선의 관할은 두만강유역까지 완전하게 미치지 못하였고, 두만강유역까지 조선의 관할지역이 된 것은 세종대에 6鎭이 설치되면서부터였다.
    따라서 두만강유역에 대한 6진 설치 이전, 두만강을 경계로 하였다는 인식은 엄밀히 말하면 두만강유역을 완벽한 관할지역으로서의 조선이 아닌, 영역으로서의 조선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인식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은 두만강유역 內外가 고려시대 尹瓘의 여진정벌과 9城 축조 및 李成桂와 그 先代의 출생지, 즉 원래 祖宗의 옛 땅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던 것에 기인하였다. 또한 두만강유역에 거주하던 여진인들이 고려말부터 이성계에게 從軍한 이래, 조선에 복속하고 있다고 생각한 것도 이러한 인식 형성에 기여하였다.
    이러한 인식의 바탕에서 明의 두만강유역 여진에 대한 招撫를 외교적 노력을 통해 막아내고, 두만강유역의 여진세력이 혼란해지자 6진을 설치하여 두만강까지 조선의 관할을 확대해 나갔다. 그리고 6진을 방어하기 위해 두만강 내외에 여진 ‘藩籬’를 구축하면서 두만강 밖까지 조선의 영역이라는 인식을 고착화하였다. 세종의 번리 인식은 조선 건국 전후의 여진관계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은 분명하지만 6진을 설치하면서 세종의 번리 인식은 보다 더 구체화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번리 인식은 두만강 바깥 지역까지 확대되었다. 비록 두만강 밖에 거주하는 여진 ‘번리’ 지역까지 조선의 행정 관원을 파견하지는 않았지만, 여진 ‘번리’들을 조선의 ‘編氓’이라 생각하여 조선의 法令이 미치는 지역으로 인식하던 것이다. 두만강 내외 지역의 조선의 번리라고 여기는 인식은 문종, 단종, 세조대까지 이어졌으며, 세조대에는 두만강 밖에 거주하는 여진 추장을 조선의 法令에 따라 처벌하면서 明과의 외교적 문제가 발생하기도 하였다. 즉 여진 추장 낭발아한은 두만강 바깥지역에 거주하면서 명나라와 조선 양쪽으로부터 관직을 받은 사람이었는데, 조선은 낭발아한을 조선의 번리라고 생각하였다. 조선에서 낭발아한의 반역죄를 물어 처벌하여 죽이자 명나라에서는 이것을 외교적 문제로 삼았던 것이다. 명나라와 조선의 사신 및 외교문서를 분석해 보면 명에서는 隣境, 즉 경계에 인접해 있는 사람을 조선에서 마음대로 죽였다고 주장하였지만, 조선은 낭발아한이 대대로 조선의 지면, 즉 영토 안에 거주한 사람이기 때문에 조선의 편맹이고 조선의 백성이라 주장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점을 볼때 조선에서는 두만강이 조선과 여진을 나누는 경계가 되어 두만강 남안은 조선의 '관할지역'이 되지만, 두만강 북안의 여진 '번리'지역까지 조선의 왕명과 법령이 미치기 때문에 조선의 지면이며, 조선의 '영역지역'이라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조선전기에는 두만강유역까지 조선의 실질적인 행정체제에 편입시킨 관할지역과 조선의 영향력 아래 있다고 인식되어지는 영역지역이 두만강을 넘어 미치면서 서로 다른 양상으로 존재하였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의 邊將과 首領이 파견되어 행정체제로 편입된 관할로서의 조선과 비록 관원이 파견되지는 않았지만 조선의 영토이기 때문에 조선의 法令과 王命이 미치는 영역으로서의 조선이 각각 중첩되어 보여지는 것이다. 이에 본 연구에서는 ‘영역으로서의 조선’과 ‘관할로서의 조선’의 모습을 각각 확인해 볼 수 있는 사례들을 찾아보고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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