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연구는 동일시기 關內의 여타 군벌과는 다른 특징을 지니고 있는 봉천파가 오랫동안 동북지역에서 독점적인 지배권을 행사할 수 있었던 사회경제적 기초는 무엇이었는지 살펴보는 것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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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Korean
한국연구재단(NR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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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동일시기 關內의 여타 군벌과는 다른 특징을 지니고 있는 봉천파가 오랫동안 동북지역에서 독점적인 지배권을 행사할 수 있었던 사회경제적 기초는 무엇이었는지 살펴보는 것으로 연구를 시작한다.
1918년 장작림이 동삼성순열사 겸 봉천독군으로 사실상 동북 전체를 통제하면서부터 봉천파가 오랫동안 반독립적인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동북의 특수한 지리 및 자원조건과 밀접한 관련이 있고, 여기에 동삼성을 둘러싼 복잡한 국제관계가 깊이 작용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봉천파의 동북지배에서 주목되는 사실은 전반적인 건설에 상당한 성과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지방행정의 추진, 사회경제의 건설, 심지어 일정한도의 대의정치 실험 등을 통해 군벌통치시기 동북은 중국대륙에서 가장 안정되고 번영을 구가한 지역이었다.
1910년 한일합병으로 한국인이 ‘일본국 臣民’으로 바뀌면서 동북 거주 韓人 문제는 중대 현안의 하나로 부각되었다. 한일합병 이전 동북거주 한인 문제에 대해 비교적 자유롭게 처리할 수 있었던 중국 지방관헌들은 이후 한인 관련사무 처리과정에서 일본의 간섭을 받게 되었다.
동북으로 이주하는 한인의 숫자가 늘어날수록 동북 지방당국의 우려도 커갔다. 동북당국은 이주 한인들이 일본 동북침략의 선봉이 되지 않을까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고 마침내 동북 거주 한인 축출문제가 봉천파 수뇌부 사이에 중요 현안으로 거론되기 시작했다. 일본에 의해 정책적으로 추진된 한인의 동북이주를 일본세력의 침략으로 인식한 봉천파는 사태의 확산을 막기 위해서는 기존 거주자를 축출하고 향후 한인의 동북이주를 철저하게 취체하기로 결정했다. 그 결과 각 지방정부에 일인과 한인의 거주와 토지임대를 강력히 단속하라는 일련의 명령을 하달하기에 이르렀다.
장학량 집정기에도 일인과 한인의 滿蒙 거주를 제한하고 금지하려는 의도에서 ‘關於管制韓人耕作土地之訓令’․‘取締移居韓人之訓令’․‘禁止盜賣國土暫行條例’ 등 위반자에 대해 엄중한 징벌 내용을 담은 많은 훈령과 포고가 발포되었다. 한인의 거주와 경작을 금지하려는 의도에서 집행된 여러 조치들은 장학량 집정기 오히려 이전에 비해 훨씬 강화된 모습이었다.
한인거주 문제에 보이듯 부친에 비해 한결 도전적이고 과격한 장학량의 排日 성향은 민간의 적극적인 지지와 옹호 속에서 가능했다. 당시 장학량이 주도한 동북의 배일정책에서 일정 부분 임무를 분담한 것이 遼寧省國民外交協會였다. 국민혁명군의 북벌을 방해하기 위해 일본군이 산동에 출병하자 봉천총상회가 중심이 되어 외교후원회를 조직했다. 동북 최초의 排日 시위운동을 주도했던 외교후원회의 활동을 이어 받아 장학량 집정기 동북 배일운동의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한 것이 1929년 조직된 요녕성국민외교협회이다.
旅大 및 滿鐵 회수, 영사재판권 회수 등 문제에 강경한 목소리를 내며 장학량의 배일정책을 지지하고 지원했던 요녕성국민외교협회의 활동 가운데 또 다른 중심 문제는 ‘동삼성 거주 한인문제’였다. 중앙정부 및 지방당국에 한인 대우방법의 확정을 요구하는 한편 한인문제연구위원회 설치를 주장했던 요녕성국민외교협회 역시 동북 한인을 일본침략의 선봉으로 인식하였다.
한인의 거주와 개간을 강력하게 단속하려 했던 조치는 동북당국과 동북인의 입장에서는 일본의 동북침략을 철저하게 봉쇄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국권수호의 한 수단이었다. 그 배경에는 한인이주자를 일본 침략세력의 선봉으로 간주한 인식이 가장 크게 작용하였다. 주지하다시피 동북당국의 이런 우려는 전혀 근거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이 문제에 대한 일부의 시각과 결론은 ‘재만한인’은 봉천파 배일정책 집행의 ‘피해자’라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한인 문제에 대한 봉천파의 결정과 행동을 일방적으로 우리의 관점에서 해석하여 무조건 비난할 수는 없는 것이다. 장작림 부자는 물론이고 당시 동북의 중국인들이 이런 결정을 내리고 지지하기까지 그들이 처했던 상황과 당시 동북의 현상에 대해 보다 객관적인 이해와 연구가 전제되어야만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