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의 정치이념과 『대학연의』-조남욱 조선조 태종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忠寧大君으로 있었던 세종은 22세 되던 해 6월 父王의 특별한 결심으로 말미암아 14년째 세자의 직위에 있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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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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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운로드세종의 정치이념과 『대학연의』-조남욱 조선조 태종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忠寧大君으로 있었던 세종은 22세 되던 해 6월 父王의 특별한 결심으로 말미암아 14년째 세자의 직위에 있던 ...
세종의 정치이념과 『대학연의』-조남욱
조선조 태종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忠寧大君으로 있었던 세종은 22세 되던 해 6월 父王의 특별한 결심으로 말미암아 14년째 세자의 직위에 있던 讓寧大君과 교체되고 또 그로부터 2개월째인 8월에는 직접 왕위에 오르게 된다.
이러한 급박한 상황은 手不釋卷의 好學人으로 칭송되는 세종에게 실로 긴장과 우려의 나날을 낳게 하였다. 비록 부군이 上王으로서 兵權을 소유한 채로 권력의 기반을 유지하고는 있었으나, 갑자기 嫡長子 세습의 관념을 무시함으로써 안으로는 그에 반대하던 黃喜 등의 일부 신하를 물리치는 상황이 벌어졌고, 밖으로는 군주의 稱病을 내세우면서까지 明나라에 禪位의 승인을 받아야 할 난제가 제기되었을 뿐만 아니라, 세종에 있어서 단 2개월의 세자 생활은 너무나 짧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심정적으로 준비된 군주의 입장이 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왕의 비호 속에 세종은 당당히 즉위의 절차를 밟으며 조심스럽게 국정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그가 지향하는 정치이념 또한 그 卽位敎書에서 천명되고 있었다. 즉 세종은 그 교서에서 일단 선왕의 제도를 그대로 지킬 것임을 다짐하면서 정치전개의 기본 정신을 다음과 같이 공표하고 있었다.
“생각하건대, 태조께서 큰일을 처음 여시고 부왕전하께서 그것을 이어 받으심에 삼가고 조심하여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사랑하며’ 충성이 천자에 이르며 효도하고 공경함이 신명에 통하여 나라 안팎이 다스려 평화롭고 나라의 창고가 넉넉하며 바다도적들이 복종하고 文治는 융성하고 武威는 떨치었다. 대체가 들리니 세목이 열리고 禮가 흥기되고 樂이 갖추어져 ‘깊은 사랑과 두터운 은택’이 민심에 흡족하도다. … 아아! 지위를 바르게 하고 시작에 삼가며 종묘의 소중함을 받들고, ‘어짐을 베풀어 정사를 펼치어’ 바야흐로 땀 흘려 이루신 은택을 추진해 가리라.”
祖宗과 先君의 뜻을 따르겠다는 사명감과 함께 뚜렷이 밝혔던 정치이념은 바로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사랑함(敬天愛民)’과 ‘깊은 사랑과 두터운 은택(深仁厚澤)’ 그리고 ‘어짐을 베풀어 정사를 펼침(施仁發政)’으로 표현되고 있었다. 이러한 기반에서 세종은 뒤에 ‘代天理物(하늘을 대신하여 만물을 다스림)’론과 ‘愛民爲心(백성 사랑할 것을 마음으로 삼음)’론이 피력되는 것이었다. 또한 당시에는 모두가 유교문화를 공유하고 있었던 것이니 만큼 그와 같은 정치이념 역시 정계의 모든 사람들에 공통적인 성격의 것이었다.
다만 문제가 되는 것은 그러한 기본 정신을 어떻게 심화시켜서 정치 행정의 현장에 실현해 나갈 수 있겠느냐 하는 점에 있었다. 즉 어질고 유능한 군주로서의 역량을 지금 당장 어떻게 발휘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과제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가장 중시되었던 학습 교재가 곧 『大學衍義』이었다. 그것은 太祖 李成桂로부터 父君 太宗에 이르기까지 연면히 계속되고 있었으니, 졸지에 왕위에 오른 세종으로서는 그 전통성과 효용성의 측면에서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이었다. 그러므로 세종은 즉위 두 달 째부터 시작하는 경연의 첫 교재로서 바로 그 『대학연의』를 택했다.
이 글에서는 바로 이런 부분을 주목해보려고 한다. 즉 세종이 천명하는 정치이념과 관련하여 『대학연의』는 과연 어떠한 역할을 하는 것이었는가 하는 문제이다. 그런데 사실 이에 대한 논의는 조심성이 요구된다. 왜냐하면 유교 經典과 중국 史書의 구절로 편찬된 『대학연의』의 각 원전들을 세종은 經筵에서도 또한 다 보고 있었던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특수성을 전제하면서 이 문제를 풀어가기 위해서는 우선 세종이 직접 『대학연의』를 거론한 기록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다. 그와 동시에 『대학연의』의 내용과 세종의 발언이 일치되는 경우에는 그 맨 처음의 원전과 함께 종합 고찰하는 태도가 요구되는 것이라 하겠다. 이 글에서는 이와 같은 점에 유의하여 서술상의 비약이 없도록 노력할 것이다. 이제 본 논의의 배경적 측면으로서 『대학연의』의 실상과 세종 직전의 모습부터 살펴가기로 한다.
세종시대의 정치와 종교문제- 부남철
여말선초에 불교계는 성리학을 배운 관료, 유생들로부터 이념적으로는 이단으로, 군사적으로는 병역을 회피하게 하는 곳으로, 경제적으로 국가 재정을 낭비하고 도덕적으로는 사회 윤리를 붕괴시키는 주범이라고 공격을 당하고 있었다. 이런 불교의 문제는 조선 건국의 한 명분으로 강조될 정도였다. 불교에 비판적인 여론에 따라 조선 건국 초기부터 부분적으로 사찰과 승려, 그리고 사찰 소유 토지와 노비의 규모를 축소 조정하는 조치가 진행되었고 승려의 종교 활동에 대한 규제가 강화되었다.
그렇지만 세종 시대의 불교계 상황을 보면, 지속된 억불 조치에도 불구하고 불교는 여전히 생활 속에서 종교 신앙으로 존속되고 있었다. 최고의 통치자인 군주와 그의 가족들 대부분이 불교 신앙을 갖고 있었으며 그들은 그런 마음을 공공연한 불교 행사를 통해 표현하였다. 성리학은 공부한 학자들 일부도 이론적으로는 불교를 이단이라고 비판했지만 실제 생활에 있어서는 불교를 멀리하지 않았다. 불교계에 대한 급격한 개혁은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군주에게 충고한 고위 공직자들이 있었고, 관료들 일부는 군주의 명령에 의해 불교 행사에 동원되곤 했다. 불교계의 인사들도 군주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 국가 행사의 차원에서벌이는 기우제에 승려가 동원되었고, 이전의 군주를 추모하는 불교식 행사가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일부 관료와 급진적인 유생들이 불교의 근절을 주장했지만 오랜 세월 생활 속에 자리 잡고 있었던 신앙이 정책적 조치에 의해 단번에 근절될 수는 없었다.
이렇게 세종시대는 유불이 혼재했었던 상황이었고, 그러는 가운데 유교, 성리학이 점차 불교를 대체해가는 추세였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시기에 재위했던 세종은 유학자들로부터 동방의 堯舜이지만 好佛의 흠이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세종실록』에는 그가 불교에 관심을 둔 적은 있었지만 신앙심 때문은 아니었다고 기록되어있다. 사관들은 세종은 불교에 대한 관심을 가능한 한 유교적 개념으로 정당화하려고 노력했고, 세종도 그렇게 했었다. 그렇지만 그의 불교 신앙을 짐작할 만한 기록들을 『세종실록』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학계에서도 불교를 정책적으로 억제하면서 한편으로 신앙심을 가졌던 세종의 이중적인 태도에 대해, 그것은 국가 재정을 확보하기 위한 정치적 경제적 목적 때문이었다고 파악하고 있다. 불교 사원이 보유하고 있었던 막대한 토지와 노비를 국가 재원으로 회수하는 것이 당시 세종의 억불정책의 목적이라는 것이다. 이제 다시 세종시대의 정치와 종교의 문제를 주목하는 이유는 태조, 태종, 그리고 세종으로 이어지는 조선 초기 억불 정책을 군주 개인의 종교적인 취향이나, 성리학적 이단배척의 관점, 아니면 국가 재정적인 이유와 같은 단층적인 차원보다는 이를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해보자는 것이다. 그리고 불교를 둘러싸고 존재하는 상충되는 주장과 필요가 존재하는 상황에서, 국가적 통합을 유지하면서 불교 개혁 문제에 접근해야 하는 국정 책임자의 정책 레벨에서 세종이 취한 조치의 의미를 파악해보자는 것이다.
여말에 불교는 유력한 종교로서 國師와 같은 정치 제도를 통해 국왕과 직접 접촉할 수 있었고, 사찰은 대토지와 노비를 소유한 경제력을 갖고 있었고 국가적인 행사와 대중 일반의 생활 의례를 담당했던 강력한 세력이었다. 당시 상류층 승려들 중에는 귀족의 자제들이었고 군주와 그 가족들은 불교에 대한 독실한 신앙심을 갖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국가 재정상의 필요가 있다고 해서 이런 불교계로부터 토지와 노비를 회수하는 일은 상당히 어려운 과제였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고려조에서도 승려의 정치적 영향력의 확대와 사찰의 난립과 막대한 토지와 노비 소유 문제를 우려하는 경향이 있었고 이에 대한 조치를 취했으나 실제로는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던 점을 감안하면, 불교계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영향력을 억제하면서 유교, 성리학의 정치를 펼치기 위한 기반을 구축했던 군주로서 세종의 유불에 대한 인식과 개혁 방법 및 역량을 보자는 것이다. 세종의 시대에도 불교 개혁의 수위에 관한 다양한 목소리가 존재했다. 성리학을 배운 급진적인 관료들은 그 이전과 그 이후에도 늘상 天理와 人慾을 말하면서 불교가 커지면 유교가 작아진다는,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이분법적 사고로 당시의 유불 문제에 접근했다.또 한편으로는 불교에 대한 종교적 수요가 존재했기 때문에 성리학을 공부한 일부 관료들도 불교 개혁을 실정에 맞게 점진적으로 해야 함을 건의하기도 했었다. 그러면서 여전히 국가 재정과 군역의 충실을 위한 방안으로 당시 사찰이 보유하고 있던 토지와 노비가 주목을 받고 있었던 때였다. 이런 시기에 불교계 정비에 명분을 제시한 집단은 강경한 관료들과 유생들이었다. 표면적으로는 好佛의 군주였던 태조와 전대의 호불 전통을 존중했던 태종, 그리고 역시 호불의 군주였던 세종이 불교 문제와 관련해서 관료, 유생들과 대립한 것처럼 보여지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조선 건국후 지속적으로 이어진 억불 정책의 정치적, 경제적 목적의 실현에 있어서는 동일한 입장이었다. 그렇지만 군주의 입장에서 이들의 주장대로 당장 조선의 불교를 유교, 성리학으로 대체할 순 없었다. 불교는 관습의 형태로 종교로서 일상 생활 속에 깊숙이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를 대체할 『朱子家禮』와 같은 유교 의례는 일부 선진적인 지식인들 사이에서 가능할 뿐 대중화된 단계는 아니었다. 그런 상황에서 세종은 유교 성리학의 이념적인 차원과 더불어 실질적인 국정 운영의 차원에서 불교 개혁 문제에 접근했던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세종은 斥佛을 주장하는 관료들로부터 불교 신앙을 가진 것이 아닌가라는 의심을 받았지만 그는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유교, 성리학을 학문적으로 진흥시키려고 노력했던 군주였다. 그가 불교계를 정비한 것에 대해 불교계에서도 비판적으로 평가했고 또 후대의 학자들은 불교에 대한 그의 관심을 이념적 흠결로 평가했다. 이렇게 양쪽으로부터 비판적인 평가를 받았지만 그를 갈등을 조절하고 통합해야 하는 국정 전반의 운영을 책임진 통치자의 관점에서 보면 달리 평가할 수 있다. 국가 재정을 충실하게 하고 기존의 불교 신앙에 대한 수요를 충족시키면서 그것을 대체하는 해가는 유교, 성리학의 세계를 실현하기 위한 이념적 기반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 그의 정책적 목표였다면, 그는 오히려 유불 교체 문제에 대해 현실적으로 유연하게 대응한 측면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런 관점에서 세종의 유불에 대한 개인적인 인식,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그가 전개한 불교계 정비 사업과 불교의 종교적 차원의 필요에 대한 대응 부분을 살펴보려고 한다.
훈민정음 창제의 정치적 의미- 유미림
정음 즉 이른바 ‘훈민정음’이 지닌 문자로서의 과학성과 독창성 그리고 정음을 지님으로 해서 풍부해지게 된 문화적 성취 등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용훼(容喙)를 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글에서는 세종대에 추진된 다른 언어·문화정책들과의 관련 속에서 정음의 창제가 지니는 정치적 의미를 고찰해보고자 한다.
지금까지 훈민정음에 관한 연구는 문자 체계와 관련된 언어적 연구를 제외하면, 주로 훈민정음을 창제하게 된 세종의 의도에 초점을 맞춰 그 애민·민본사상을 부각시킨 논의가 주를 이루어 왔다. 이에 훈민정음은 처음부터 백성을 지극히 생각하던 세종의 애민·위민 사상에서 만들어진 것이며, 그러한 정음이 창제됨으로 해서 가능해진 용비어천가나 율문의 언문화, 운서의 편찬 등이 결국에는 국가와 왕실의 권위를 선양하는 데 기여했다고 논의되어왔다. 그러나 세종의 정음 창제를 애민 내지 민본사상에 근거하여 설명하는 것만으로는 세종대에 정음을 비롯한 제 정책이 나오게 된 정치사상적 원인과 그 정치적 기능을 설명하기에는 미약한 감이 있다. 다른 한편에서 정음은 국가와 왕실의 권위 선양에 기여할 목적으로 나온 것이 아니며, 따라서 정음의 창제로 인한 제 효과들은 역사적 결과로서 나온 산물일 뿐 처음부터 그러한 가치를 창조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산출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는 반론도 제기되었다. 다시 말해 세종의 애민사상을 정음 창제의 배경으로 보는 시각은 당시의 정치적 조건을 배제한 이해방식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다시 건국 초기 제 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이러한 어문정책이 나오게 된 정치적 배경에 초점을 맞추게 된 연구가 나온 것은 이러한 한계를 보완하기 위한 작업이었다. 그러나 위에서 말한, 당시의 정치적 배경이 세종으로 하여금 어문 정책을 고안하지 않을 수 없게 하였다고 보는 연구도 정치적 배경에만 초점이 맞추어져 있기 때문에 이러한 작업을 이루어낸 세종이라는 군주의 개성이나 사상적 지향, 그 정책을 만들어낸 정치적 의도까지 총괄하여 파악하기는 어렵다. 세종대에 이루어진 언어·문화적 업적들을 보면, 우리는 이들이 정치적 고려나 필요에 압박당하여 나온 것이라고 보기만은 어려운, 정책들 사이의 일련의 상관성을 발견할 수가 있다. 이 때문에 정음의 창제는 단순한 어문정책의 실행이 아니라 통치자가 뚜렷한 목적 하에 나온 구상물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그것은 이들 정책이 태종대 이후 정치적으로 안정된 조건하에서 국가 경영자로서의 세종이 통치의 방략을 구상한 결과물로서 왕조의 정통성을 확립하고 왕권을 강화할 목적과도 연결되어 있었다고 추론하게 된다. 훈민정음은 그것이 실행되어야 다음 정책의 실행이 가능해졌다는 점에서 우선적이고 필수적으로 실행되어야 하는 사업이었다. 이렇듯 훈민정음을 비롯한 제 정책간에 상관성이 있다고 추론할 수 있는 근거는 세종 시대에 수행된 문화정책들을 보면 알 수 있다.
세종 16년 4월에는 『삼강행실도』가 편찬되었고, 25년 12월 30일에는 정음이 만들어졌으며, 26년 2월에는 『운회』를 번역하라는 명이 내려졌다. 그리고 27년 4월에는『용비어천가』 10권이 완성되었고 28년 9월에는 훈민정음에 관한 해례서가 반포되었으며 29년 9월에는『동국정운』이 완성되었다. 27년부터는 『홍무정운』번역 작업이 시작되고 있었고 31년에는 불경 언해본인 『석보상절』과『월인천강지곡』이 이루어졌다. 그런데 이들은 정음의 창제 및 활용과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연관되어 있어야만 나올 수 있는 작업들이라는 점이다. 이로써 본다면 정음의 창제가 단순히 세종의 애민사상에서 나온 것이라거나 아니면 운학(韻學)에 대한 세종의 관심에서 나왔다고 보는 것은 정음의 창제가 지니는 정치적 의미를 축소시킬 우려가 있다. 정음을 포함한 이들 사업들은 내용면에서 뿐만 아니라 인적 자원의 측면에서도 밀접히 연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종대에 이루어진 이들 정책은 각기 즉흥적이고 개별적으로 나온 것이라고 하기 보다는 치국을 위해 구상한 방략들을 단계적으로 실천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 글에서는 이러한 관점에서 치국을 위한 세종의 구상이 어떻게 이루어져 있으며 정음을 창제하게 된 동기와 그에 반대한 신하들의 논리, 그리고 정음을 창제함으로써 기대한 통치 효과 등은 어떠한지를 고찰해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