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7년 중반부터 1950년 중반까지의 3년 동안 미국은 한반도에서 대소련 “뒷문봉쇄” 정책을 전개하였다. 소련과의 주전장이였던 유럽지역에 인적․물적 자원을 우선적으로 투입하고자 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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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
Korean
390.000
학술저널
161-180(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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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중반부터 1950년 중반까지의 3년 동안 미국은 한반도에서 대소련 “뒷문봉쇄” 정책을 전개하였다. 소련과의 주전장이였던 유럽지역에 인적․물적 자원을 우선적으로 투입하고자 했던...
1947년 중반부터 1950년 중반까지의 3년 동안 미국은 한반도에서 대소련 “뒷문봉쇄” 정책을 전개하였다. 소련과의 주전장이였던 유럽지역에 인적․물적 자원을 우선적으로 투입하고자 했던 미국은, 상대적으로 낮게 평가되었던 극동지역에서 제2차적인 봉쇄를 취하고자 하였다. 즉, 자원배분의 차원에서 뒷문지역인 한반도는 최소한의 경비로 소련을 봉쇄하도록 하고, 그렇게 해서 절약된 자원을 앞문지역인 유럽에 집중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미국무부와 군부 사이에는 이 문제를 놓고 격론이 벌어졌다. 국무부는 한반도에 봉쇄 정책이 정상적으로 적용되기를 원했던 반면에, 군부는 제2차세계대전의 종결 이후 군비축소가 대대적으로 시행된 결과 자원부족 상태를 겪고 있었으므로 한반도에까지 봉쇄정책을 전개하기는 무리라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격론 끝에 미국은 직접적이고 경비가 많이 드는 봉쇄가 아니라, 간접적이고 부담이 적은 봉쇄라는 타협안을 찾아내었다. 이 타협안이 곧 “뒷문봉쇄” 개념이었으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남한지역에 친미적인 토착정부를 국제적 승인 하에 수립한다. ②직접부담이 되는 미군은 철수시킨다. ③토착정부를 안정시키기 위하여 적당한(실제로는 최소한의)경제적, 군사적 원조를 제공한다. ④극동지역에서 미국의 안보 파트너로서 일본을 재건시킨다. 미국은 유엔의 승인을 받은 대한민국에 대해서 소련이 전면적인 침공을 하지는 못하리라고 보았으며, 또한 미국의 경제적 지원이 있을 경우 대한민국 정부가 전복활동 등 저강도 침략에 대해 독자적 대응능력을 갖출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사태는 미국이 기대했던 것과 달리, 소련의 사주를 받은 북한의 전면 남침으로 전개되었다. 결과적으로 미국의 “뒷문봉쇄”는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고, 직접적인 군사개입으로 공산주의자들을 막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