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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세기 후반 조선학계의 양명학 비판론과 문묘제도 개정 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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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www.riss.kr/link?id=A107932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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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kakao i 다국어 번역

      양명학이 전래되고 수용·비판되었던 명종(明宗) 말 선조(宣祖) 초는 사림세력의 집권에 따른 정치 질서의 재편이 요구·시도되던 시기였다. 그 결과 김세필(金世弼)·박상(朴祥)와 같이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경우, 홍인우(洪仁祐)·남언경(南彦經)·노수신(盧守愼)과 같이 양명학을 적극적으로 이해·수용하려는 경우, 이황(李滉)과 그 문하 및 그에 동조하는 학자들과 같이 이단(異端)으로 규정·배척하는 경우, 유성룡(柳成龍)·이정구(李廷龜)처럼 양명학을 우호적으로 인식했다가 비판적 입장을 취하는 경우, 선조(宣祖)처럼 양명학보다는 왕수인(王守仁) 개인의 공업에 주목하는 경우 등 자신의 정치적 성향과 학문적 입장에 따라 양명학에 대하여 다양한 반응을 보였다. 이런 다양한 반응이 가능했던 것은 양명학 문헌의 유포에 특별한 제약이 없었고, 심학(心學)에 대한 평가가 경직되지도 않았으며, 또한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강학과 토론 등 양명학에 대한 학문적 검토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이황의 양명학 변척이 이루어지면서부터 양명학에 대한 학계의 인식은 일변하였다. 주자학을 체계화하고 주자도통의 정립을 시도함으로써, 주자학적 정치질서를 확립시키는데 주력했던 이황은, 양명학이 주자학 정치이념을 확고하게 정립·확산시키는 데 큰 장애가 될 것으로 판단하였다. 이에 따라 양명학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배척하였다. 이황 문하들도 이황의 입장을 계승하여 양명학을 변척했다. 그 결과 주류 학계의 일반적 입장은 점차 양명학을 이단(異端)으로 규정하고 배척하는 경향을 띠게 되었다.
      이황과 그 문하의 변척 활동에 따라 양명학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일반적인 인식으로 자리잡아 갔으며, 양명학이 거론될 때마다 이황의 변척이 그 기준이 되고 있었다. 이를 잘 보여주는 사례가 명의 조선 문묘제도 개정 요구와 이에 대한 조선 조정의 대응 양상이었다.
      선조 34년(1601) 명의 요구로 시작된 문묘개정 논의의 초점이 되었던 것은 호거인(胡居仁) 진헌장(陳獻章), 왕수인(王守仁), 설선(薛宣) 등 중국의 유현(儒賢)을 문묘에 종사하는 문제였다. 퇴계 이황의 양명학 변척에 따라 양명학은 이단으로 규정되는 것이 학계의 공론(公論)이었고, 이는 주자의 성리학만이 정학(正學)이며, 그것과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이단(異端)이라는 주자도통의 관점이 그 기준이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육구연(陸九淵)·왕수인(王守仁)의 종사(從祀)는 절대 허용할 수 없는 문제였다. 명의 영향력이 이미 사라진 시점에서도 똑같은 논의가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은 이 논의가 단순한 제도 개정 문제가 아니라 이단에 대한 엄격한 비판을 통해 주자정통을 강화하려는 목적이 개입되어 있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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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명학이 전래되고 수용·비판되었던 명종(明宗) 말 선조(宣祖) 초는 사림세력의 집권에 따른 정치 질서의 재편이 요구·시도되던 시기였다. 그 결과 김세필(金世弼)·박상(朴祥)와 같이 비판�...

      양명학이 전래되고 수용·비판되었던 명종(明宗) 말 선조(宣祖) 초는 사림세력의 집권에 따른 정치 질서의 재편이 요구·시도되던 시기였다. 그 결과 김세필(金世弼)·박상(朴祥)와 같이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경우, 홍인우(洪仁祐)·남언경(南彦經)·노수신(盧守愼)과 같이 양명학을 적극적으로 이해·수용하려는 경우, 이황(李滉)과 그 문하 및 그에 동조하는 학자들과 같이 이단(異端)으로 규정·배척하는 경우, 유성룡(柳成龍)·이정구(李廷龜)처럼 양명학을 우호적으로 인식했다가 비판적 입장을 취하는 경우, 선조(宣祖)처럼 양명학보다는 왕수인(王守仁) 개인의 공업에 주목하는 경우 등 자신의 정치적 성향과 학문적 입장에 따라 양명학에 대하여 다양한 반응을 보였다. 이런 다양한 반응이 가능했던 것은 양명학 문헌의 유포에 특별한 제약이 없었고, 심학(心學)에 대한 평가가 경직되지도 않았으며, 또한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강학과 토론 등 양명학에 대한 학문적 검토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이황의 양명학 변척이 이루어지면서부터 양명학에 대한 학계의 인식은 일변하였다. 주자학을 체계화하고 주자도통의 정립을 시도함으로써, 주자학적 정치질서를 확립시키는데 주력했던 이황은, 양명학이 주자학 정치이념을 확고하게 정립·확산시키는 데 큰 장애가 될 것으로 판단하였다. 이에 따라 양명학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배척하였다. 이황 문하들도 이황의 입장을 계승하여 양명학을 변척했다. 그 결과 주류 학계의 일반적 입장은 점차 양명학을 이단(異端)으로 규정하고 배척하는 경향을 띠게 되었다.
      이황과 그 문하의 변척 활동에 따라 양명학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일반적인 인식으로 자리잡아 갔으며, 양명학이 거론될 때마다 이황의 변척이 그 기준이 되고 있었다. 이를 잘 보여주는 사례가 명의 조선 문묘제도 개정 요구와 이에 대한 조선 조정의 대응 양상이었다.
      선조 34년(1601) 명의 요구로 시작된 문묘개정 논의의 초점이 되었던 것은 호거인(胡居仁) 진헌장(陳獻章), 왕수인(王守仁), 설선(薛宣) 등 중국의 유현(儒賢)을 문묘에 종사하는 문제였다. 퇴계 이황의 양명학 변척에 따라 양명학은 이단으로 규정되는 것이 학계의 공론(公論)이었고, 이는 주자의 성리학만이 정학(正學)이며, 그것과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이단(異端)이라는 주자도통의 관점이 그 기준이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육구연(陸九淵)·왕수인(王守仁)의 종사(從祀)는 절대 허용할 수 없는 문제였다. 명의 영향력이 이미 사라진 시점에서도 똑같은 논의가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은 이 논의가 단순한 제도 개정 문제가 아니라 이단에 대한 엄격한 비판을 통해 주자정통을 강화하려는 목적이 개입되어 있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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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kakao i 다국어 번역

      At the end of King Myeongjong and King Seonjo, where Yang Myung-hak was introduced, accepted, and criticized, it was a time when the reorganization of the political order was demanded and attempted according to the power of the Sarim forces. As a result, in the case of critically reviewing such as Kim Se-pil and Park Sang, in the case of actively understanding and accepting Yang Myung-hak, such as Hong In-woo, Nam Eon-kyung, and Noh Su-sin, and in the case of rejecting the rules or the scholars who sympathize with him, Yuseong. These various reactions were possible because there were no special restrictions on the distribution of Yangmyeonghak literature, the evaluation of psychology was not rigid, and academic reviews of Yangmyeonghak such as lectures and discussions were conducted in this atmosphere.
      Since Yi Hwang"s rejection of Yangmyeonghak, the academic perception of Yangmyeonghak has changed. Yi Hwang, who focused on establishing a runner-up political order by systematizing runner-up and attempting to establish runner-up communication, judged that Yang Myung-hak would be a major obstacle to firmly establishing and spreading the runner-up political ideology. Accordingly, Yang Myung-hak was defined as heresy and rejected. Yi Hwang"s servants also succeeded Yi Hwang"s position and transformed Yang Myung-hak. As a result, the general position of the mainstream academia gradually tended to define and reject bimyunghak as a heresy.
      According to Yi Hwang and his subordinates" transformational activities, this perception of Yang Myung-hak became a general perception, and whenever Yang Myung-hak was mentioned, Yi Hwang"s exclusion was the standard. A good example of this was the demand for revision of the Joseon Munmyo system and the response of the Joseon adjustment to this.
      The focus of the discussion on the revision of the tomb, which began at the request of King Seonjo in the 34th year of King Seonjo (1601), was on the issue of Chinese Yu Hyeon, including Ho Geoin, Jinheonjang, Wang Suin, and Seolseon, engaged in the tomb. According to Toegye Yi Hwang"s rejection of Yang Myung-hak, Yang Myung-hak was defined as heresy in the academic world, and only the Neo-Confucianism of the runner was suspended, and if it deviated a little from it, the perspective of Ju Ja-Dotong was the standard. From this point of view, the work of Yuk Gu-yeon and Wang Su-in was absolutely unacceptable. The fact that the same discussion is repeated even at the time when the influence of the title has already disappeared shows that this discussion was not just a matter of institutional amendment, but the purpose of strengthening the self-government through strict criticism of heres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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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t the end of King Myeongjong and King Seonjo, where Yang Myung-hak was introduced, accepted, and criticized, it was a time when the reorganization of the political order was demanded and attempted according to the power of the Sarim forces. As a resu...

      At the end of King Myeongjong and King Seonjo, where Yang Myung-hak was introduced, accepted, and criticized, it was a time when the reorganization of the political order was demanded and attempted according to the power of the Sarim forces. As a result, in the case of critically reviewing such as Kim Se-pil and Park Sang, in the case of actively understanding and accepting Yang Myung-hak, such as Hong In-woo, Nam Eon-kyung, and Noh Su-sin, and in the case of rejecting the rules or the scholars who sympathize with him, Yuseong. These various reactions were possible because there were no special restrictions on the distribution of Yangmyeonghak literature, the evaluation of psychology was not rigid, and academic reviews of Yangmyeonghak such as lectures and discussions were conducted in this atmosphere.
      Since Yi Hwang"s rejection of Yangmyeonghak, the academic perception of Yangmyeonghak has changed. Yi Hwang, who focused on establishing a runner-up political order by systematizing runner-up and attempting to establish runner-up communication, judged that Yang Myung-hak would be a major obstacle to firmly establishing and spreading the runner-up political ideology. Accordingly, Yang Myung-hak was defined as heresy and rejected. Yi Hwang"s servants also succeeded Yi Hwang"s position and transformed Yang Myung-hak. As a result, the general position of the mainstream academia gradually tended to define and reject bimyunghak as a heresy.
      According to Yi Hwang and his subordinates" transformational activities, this perception of Yang Myung-hak became a general perception, and whenever Yang Myung-hak was mentioned, Yi Hwang"s exclusion was the standard. A good example of this was the demand for revision of the Joseon Munmyo system and the response of the Joseon adjustment to this.
      The focus of the discussion on the revision of the tomb, which began at the request of King Seonjo in the 34th year of King Seonjo (1601), was on the issue of Chinese Yu Hyeon, including Ho Geoin, Jinheonjang, Wang Suin, and Seolseon, engaged in the tomb. According to Toegye Yi Hwang"s rejection of Yang Myung-hak, Yang Myung-hak was defined as heresy in the academic world, and only the Neo-Confucianism of the runner was suspended, and if it deviated a little from it, the perspective of Ju Ja-Dotong was the standard. From this point of view, the work of Yuk Gu-yeon and Wang Su-in was absolutely unacceptable. The fact that the same discussion is repeated even at the time when the influence of the title has already disappeared shows that this discussion was not just a matter of institutional amendment, but the purpose of strengthening the self-government through strict criticism of heres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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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차 (Table of Contents)

      • 국문초록
      • Ⅰ. 머리말
      • Ⅱ. 이황(李滉)과 그 문하(門下)의 양명학(陽明學) 변척(辨斥)
      • Ⅲ. 명(明)의 왕수인(王守仁) 배향(配享) 요구와 변척론(辨斥論)의 대응
      • Ⅳ. 맺음말
      • 국문초록
      • Ⅰ. 머리말
      • Ⅱ. 이황(李滉)과 그 문하(門下)의 양명학(陽明學) 변척(辨斥)
      • Ⅲ. 명(明)의 왕수인(王守仁) 배향(配享) 요구와 변척론(辨斥論)의 대응
      • Ⅳ. 맺음말
      • 참고문헌
      • 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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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Reference)

      1 송창한, "李退溪의 斥邪論에 대하여" 24 : 1983

      2 尹南漢, "李朝 陽明學의 傳來와 受容의 問題" 중앙대학교 사학연구회 1 : 1972

      3 유준기, "한국 근대유교 개혁운동사" 아세아문화사 1999

      4 김용재, "퇴계의 양명학 이해에 관한 역사 철학적 고찰-명과 조선의 사상사" 3 : 1999

      5 금장태, "퇴계문하의 양명학 이해와 비판" 2 : 1998

      6 김정신, "조선전기 훈구·사림의 정치사상 비교" 연세대학교 대학원 2008

      7 김용재, "양명학의 형성과정에 관한 역사․철학적 고찰-명과 조선의 사상사를 중심으로" 한국철학사연구회 12 : 2003

      8 오종일, "양명학 수용과 전래에 관한 재검토" 3 : 1999

      9 鄭寅普, "삼성문화문고 11" 1972

      10 劉明鍾, "韓國의 陽明學" 동화출판공사 1983

      1 송창한, "李退溪의 斥邪論에 대하여" 24 : 1983

      2 尹南漢, "李朝 陽明學의 傳來와 受容의 問題" 중앙대학교 사학연구회 1 : 1972

      3 유준기, "한국 근대유교 개혁운동사" 아세아문화사 1999

      4 김용재, "퇴계의 양명학 이해에 관한 역사 철학적 고찰-명과 조선의 사상사" 3 : 1999

      5 금장태, "퇴계문하의 양명학 이해와 비판" 2 : 1998

      6 김정신, "조선전기 훈구·사림의 정치사상 비교" 연세대학교 대학원 2008

      7 김용재, "양명학의 형성과정에 관한 역사․철학적 고찰-명과 조선의 사상사를 중심으로" 한국철학사연구회 12 : 2003

      8 오종일, "양명학 수용과 전래에 관한 재검토" 3 : 1999

      9 鄭寅普, "삼성문화문고 11" 1972

      10 劉明鍾, "韓國의 陽明學" 동화출판공사 1983

      11 金吉煥, "韓國陽明學硏究" 일지사 1981

      12 吳鍾逸, "陽明傳習錄 傳來考" 고려대 철학과 4 : 1978

      13 "重峯集"

      14 劉明鍾, "退溪의 異學 批判" 12 : 1971

      15 "退溪全書"

      16 金吉洛, "象山學과 陽明學" 예문서원 1995

      17 金東珍, "許의 大明使行과 陽明學 變斥" 한국문화사학회 (21) : 825-854, 2004

      18 "訥齋集"

      19 "西厓集"

      20 宋兢燮, "西厓先生의 陽明學批判" 2 : 1979

      21 "蘇齋集"

      22 "花潭集"

      23 유명종, "白樂濬博士還甲記念國學論叢" 思想界社 1955

      24 "王陽明全集 (上․下)" 上海古籍出版社

      25 "澤堂集"

      26 尹南漢, "業績報告書 : 1961∼1962" 東亞文化硏究委員會 1963

      27 "朱子語類" 中華書局 1994

      28 金吉煥, "朝鮮朝儒學思想硏究" 일지사 1980

      29 남명진, "朝鮮朝 陽明學 受容展開에 있어서의 明齋學의 位相과 特性" 역사문화연구소 18 : 115-142, 2003

      30 尹南漢, "朝鮮時代의 陽明學硏究" 집문당 1982

      31 황갑연, "朝鮮性理學者의 陽明學 비판 논거에 대한비판적 고찰" 퇴계학연구원 (120) : 49-100, 2006

      32 吳性鍾, "朝鮮中期 陽明學의 辨斥과 受容" 46 : 1989

      33 민혜진, "朝鮮 前期의 異端觀과 陽明學 비판 연구" 한국민족문화연구소 (21) : 21-53, 2003

      34 "月沙集"

      35 "明宗實錄"

      36 "明儒學案"

      37 "慕齋集"

      38 "恥齋遺稿"

      39 劉明鍾, "性理學과 陽明學" 연세대출판부 1994

      40 "宣祖實錄"

      41 "宣祖修正實錄"

      42 금장태, "宋明理學의 두 조류와 퇴계의 양명학 비판" 10 : 1980

      43 "國朝寶鑑"

      44 "十淸軒集"

      45 "中宗實錄"

      46 김태년, "16世紀 朝鮮 性理學者 들의 陽明學 批判 硏究" 한국사상사학회 19 : 2002

      47 신향림, "16C 전반 陽明學의 전래와 수용에 관한 고찰" 퇴계학연구원 (118) : 181-228,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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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재인증) KCI등재
      2018-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15-01-01 평가 등재학술지 선정 (계속평가) KCI등재
      2013-01-01 평가 등재후보학술지 유지 (기타) KCI등재후보
      2012-01-01 평가 등재후보 1차 FAIL (기타) KCI등재후보
      2011-01-01 평가 등재후보학술지 유지 (등재후보1차) KCI등재후보
      2010-01-01 평가 등재후보학술지 유지 (등재후보2차) KCI등재후보
      2009-01-01 평가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KCI등재후보
      2007-06-22 학회명변경 한글명 : 무악실학회 -> 역사실학회
      영문명 : Mooak Silhakhoe : The Historical Society Of Mooak Silhak -> Yeoksa Silhakhoe: The Historical Society of Yeoksa Silhak
      KCI등재후보
      2007-01-01 평가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KCI등재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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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준연도 WOS-KCI 통합IF(2년) KCIF(2년) KCIF(3년)
      2016 0.65 0.65 0.74
      KCIF(4년) KCIF(5년) 중심성지수(3년) 즉시성지수
      0.74 0.69 1.438 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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